부끄러움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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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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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촘촘하게 자아낸 고요한 세계관 속에 현실의 이면을 깊이 있게 녹여내는 장은진의 소설이 가지는 매력이 극대화된 작품이다. 장은진은 이 소설을 통해 삶이 희미한 줄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의미 없는 삶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담담하지만 힘 있는 문체로 풀어나간다.
우리는 모두 인간에게 있어 ‘의미 없는 삶’ ‘부끄러운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이 던지는 모진 바람을 맞느라 그 사실을 잊은 채 괴로운 나날을 보내곤 한다. 『부끄러움의 시대』는 그런 우리에게 그 사실이 무엇보다 당연해야 함에도 당연하지 않은 부당한 현실을 인지하게 하고, 단순한 인지를 넘어 앞으로 어떤 시선을 가지고 우리 앞에 펼쳐진 길을 걸어야 할지 고민하게 한다.
이혼
푯말
독립
소리
구멍
수리
문자
양산
화재
지옥
소문
구원
다시
기억
같이
반복
우산
이브
유령
작가의 말
나의 아버지는 유령이다.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언젠가 죽으면 틀림없이 유령이 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버지한테 “유령이 돼라”라고 한 사람은 호텔에서 청소 노동자로 사십 년 동안 근속한 J 씨였다. 그는 은퇴를 일주일 앞두고 막 입사한 스무 살 청년이었던 아버지에게 청소를 가르쳤다. (7쪽)
완성한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며 제대로 작동하는지 꼼꼼하게 검수했다. 단풍나무를 깎아 만든 손잡이와 꼭지, 살 끝, 자개 도트도 살폈다. 바느질이 잘됐는지도. 불량인 곳은 없었다. 우산을 펼 때마다 원단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완성되는 곡선은 내가 아는 가장 견고하고 아름다운 선이다. 빗방울도 그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을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설레어 계속 닿고 싶을 것이다.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서 나도 가끔 빗방울이 되어 우산 위를 흘러보고 싶다. (43쪽)
근무 연차가 늘어날수록 어머니의 파워는 더욱 견고해졌다. 직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한 비상설 조직의 위원장 자리를 어머니가 맡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사실 호텔 내에 어머니만큼 탁월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갖춘 인물도 없었다. 심지어 어머니는 막강한 회사를 상대하기 위한 무기의 하나로 법 지식까지 꾸준히 섭렵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사측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건 자신을 믿고 따르는 수많은 동료가 뒤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한테는 그녀들이 가장 큰 힘이었고 빽이었다. 그들과 손을 잡으면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은, 딱 하나 있긴 했다. (88~89쪽)
언제부턴가 우산을 만지고 바라볼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가슴 한복판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면 어김없이, 살기 위해 우산을 펼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렸던 사람이 떠올랐다. 우산이 낙하산이 되어줄 거라 믿었던 한 사람이. 요즘 들어 잠을 자면 그 믿음이 현실이 되는 꿈을 자주 꾼다. 잠이 오지 않을 때는 그 사람이 우산을 쓰고 안전하게 바닥으로 착지하는 장면을 자주 상상했다. 우산이 단순히 비를 막아주는 게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131쪽)
“지금 하는 일은 좋은가요?”
그가 아버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선생님이…… 되찾아주셨어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대답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인생 별거 없어요. 견디고 버티는 거예요. 그거면 돼요.”
레코드판이 다 돌아갔는지 음악이 끊겼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판을 뒤집고 핀을 살며시 내려놓자 잔잔한 음악이 다시 아버지의 귀를 평화롭게 감쌌다. (155쪽)
“어머니는 어떤 분이었어요?”
깊이 몰아쉰 숨이 하얀 안개로 퍼지며 사라졌다.
“유령이요.”
(……)
“아버지도 같은 호텔 유령이세요.”
“두 분 다 멋진 직업을 가지셨네요.”
“뭐가 멋져요?”
내가 걸음을 늦추며 묻자 봐요 씨도 걸음을 늦추었다.
“없어선 안 되는 직업이잖아요. 그 직업이 없다고 생각해봐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겠어요. 없는 세상에서 살아보면 귀하지 않은 직업은 하나도 없어요. 의사만큼 중요하죠. 그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청소부 아닌가요?”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을 봐요 씨가 하고 있었다. (182~183쪽)
문자에 망설임 없는 답장을 보내고 나자 아버지의 생존 방식이었던 부끄러움의 시간이 나의 시간으로 이어져 봐요 씨에게까지 닿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령이라서 아버지는 삶이 누구와도 닿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나름대로 그 속에서도 희미한 줄을 엮어 운명을 이어갔다고. 의미 없는 삶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비록 그 삶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떻게든 살아낸 삶은 어떻게든 또 다른 삶으로 이어진다. (214쪽)
아버지가 이제는 부끄러움 없이, 들킬 염려도 없이, 누구의 방해도 없이 편한 마음으로 호텔 청소를 하며 지냈으면 좋겠다. 어떤 시대든 시대는 견디고 버티는 것이고, 견디고 버티는 자가 시대의 승자이다. 호텔 최고의 청소부였던 아버지는 자신의 시대를 잘 견디고 버텨냈다. (220쪽)
개인의 부끄러움이라는 비를 가리던 우산이
현실 앞에 나약해진 사람들을 위한
낙하산으로 재탄생하는 과정
이효석문학상, 문학동네작가상 수상 작가 장은진의 장편소설 『부끄러움의 시대』가 자음과모음 ‘새소설 시리즈’ 열일곱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장은진은 “이상한 슬픔, 이상한 따뜻함, 이상한 고독”(신형철 문학평론가)을 누구보다 세심하게 표현해내며, “잘 짜인 구성과 차분한 이야기의 요철”(한강 소설가)이라는 평처럼 촘촘하게 자아낸 고요한 세계관 속에 현실의 이면을 깊이 있게 녹여내는 작가다. 이러한 장은진의 소설이 가진 특유의 매력은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에게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가닿고 있다.
이번 신작 장편소설은 “외로움, 추억, 사랑 같은 추상적 소재를 손에 잡힐 듯 생생히 펼쳐 보이는 마술을 부”(제44회 이상문학상 심사평)리는 장은진의 문학 세계를 극대화하여 보여주는 작품이다. 먼저 장은진은 온 지구가 바이러스로 인해 팬데믹에 돌입한 차갑고 쓸쓸한 가을을 배경으로 삼아 계절에서 느껴지는 다층적인 층위의 감각을 면밀하게 표현한다. 그 속에서 수공예로 명품 우산을 만드는 우산 마이스터 ‘강한해’와 그의 누나 ‘강노라’, 죽은 언니의 우산을 소중히 보관하고 있던 ‘봐요 씨’의 이야기가 얽히고설킨다. 그와 동시에 강한해와 강노라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과거가 조금씩 풀려나간다.
그리고 이 모든 이의 이야기는 실제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서 ‘유령’처럼 살고 있는 약자들의 모습으로, 그들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아버지는 무능하지 않다. 부끄러움의 양이 좀 과할 뿐, 불쌍하다 싶을 만큼 성실하기만 하다. 제일 중요한 사실은 아버지가 호텔 청소부이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산 손잡이에 음각된 현실의 부끄러움을
나무보다 단단한 믿음으로 지워가는 사람들
주인공 강한해는 대인기피증에 가까울 정도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아버지와 결혼 3년 만에 이혼해 집으로 돌아온 누나 강노라와 함께 산다. 아버지는 자신을 숨기면서, 아니, 숨겨야만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유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호텔 청소부 일을 고등학교 졸업 후 쭉 하고 있다.
남들이 남긴 얼룩, 즉 ‘부끄러운 무언가’를 지우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처음에는 그 과도함을 의아하게 느끼지만, 결국에는 진정한 ‘부끄러움’이란 무엇인지, 남들이 부끄럽게 생각하는 무언가들이 과연 정말로 ‘부끄러워해야만 하는’ 것들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소설 속 아버지는 스스로 “부끄러움의 시대를 살았노라”고 정의하는 극한의 부끄럼쟁이지만, 그의 삶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누구보다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저 조용하고, 사회의 체제에 순응하다가도 견디고 버티며 키운 힘으로 자신에게 가해지는 불합리와 부당에서 벗어나고, 누구보다 자신의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 그는 거친 세상을 견디며 살아내는 우리의 매일 매일과 다르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
아버지가 청소부란 직업을 훌륭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청소는 못 배우고 가진 게 없어도 할 수 있다. 까다로운 지식이나 어려운 기술을 요하지도 않는다. (……) 그러나 아무도 청소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인생의 첫 번째 직업이나 꿈으로는 더더군다나 생각하지 않는다. 청소 일을 하기엔 많이 배우고 많이 가져서다. 하지만 어딘가에 낮은 직업이 있다는 건 누군가에겐 구원이었다.
아버지와 반대로, 강한해와 강노라의 죽은 어머니는 호탕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자신을 비난하는 수학 교사에게 “천하의 개새끼!”라는 일침을 가하고 학교를 자퇴한 후, 모텔에서 청소 일을 시작한 그는 남들의 수근거림과 손가락질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살려 호텔로 이직한 후,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낮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약자의 희망으로서 살아가다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어머니는 불공정하거나 불합리한 일에 맞닥뜨리면 피하지 않고 앞장서서 싸우는 사람이었다. 옳지 않다고 판단한 문제는 따져서 원칙대로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렸다. 학생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대변해주고 행동으로도 보여주는 어머니를 경애했다. 하지만 학교 입장에서 어머니는 눈엣가시처럼 거슬리고 성가신 존재였다.
“의미 없는 삶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비록 그 삶이 희미한 줄처럼
잘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부끄러움 유전자’를 물려받지 않은 강한해와 강노라 또한 각자의 삶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꿰매고, 덧대고, 수놓으며 살아간다. 강한해는 천성적으로 무덤덤한 자신의 기질을 아버지의 “생명의 은인”인 스승에게 ‘능력’으로써 인정받고, 우직하게 우산 장인이라는 한길만을 걷는다. 강노라는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라는 옷을 껴입으려 애쓰다가 “고춧가루, 털 한 가닥”을 보고 이혼이라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해방시킨다. 그 후 휴식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정돈하면서 이전에 놓아버렸던 꿈, 우산 장인의 꿈을 다시 키워나간다.
예전의 나를 잃어가도 상관없을 만큼 우산에 빠져든 삶은 후회스럽지 않았다. 그것의 가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사라지지 않도록 전통을 잇는다는 데 있었다. 한 사람의 탄생은 다른 사람의 삶을 이어받기 위한 거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했다.
“있지, 한해야.”
먼젓번보다 묵직하고 진지해서 무서울 지경이었다.
“뭔데. 뜸 좀 그만 들이지?”
누나가 침대에서 일어나 자세를 바로잡고 앉는 소리가 들렸다.
“나, 우산 다시 해볼까?”
강한해의 가족이 자신들이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기 앞에 놓인 길의 돌을 고르고, 땅을 다듬으며 미래를 만들어가듯, 또다른 등장인물인 봐요 씨도 참사 피해자의 유가족이라는 틀에만 얽매여 있지 않는다. 그는 화재 참사에 휘말려 죽은 언니의 유지를 이어 주중에는 기계설계자, 주말에는 도슨트로 일한다. 그리고 강한해에게 언니의 우산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면서 강한해와 함께 마치 유령 같지만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의 따스한 삶을 빌고, 그들의 삶을 지원하는 미래를 꿈꾼다.
“공장 기계를 설계하다 보면 내가 만든 기계에 노동자가 끼어서 다치거나 죽었다는 소식을 자주 듣게 돼요. 그럴 때면 회의감이 들어서 생각이 복잡해져요. 기계는 사람을 살리는 도구일까, 죽이는 무기일까. 그래서 전에는 놀이공원 놀이기구를 설계하는 게 꿈이었는데, 이제는 사고나 재난이 일어났을 때 사람을 구하러 달려가는 태권브이처럼 커다란 기계를 만드는 게 꿈이에요.”
어떤 시대든, 시대란 견디고 버텨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견디고 버티는 자가 그 시대의 승자다. 강한해의 아버지는 유령임과 동시에 호텔 최고의 청소부였고, 누구보다 자신의 시대를 잘 견디고 버텨낸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승자다. 강한해의 어머니도, 강한해도, 강노라도, 봐요 씨도 마찬가지로, 승자다.
험난한 시대를 살며 비로소 승리를 거머쥔 그가, 그들이 보통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고군분투하는 자들,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 ‘약자’로 보이거나 ‘불쌍한 사람’ ‘의미 없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이는 자들이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다. 매년 돌아오는 가을과 우리 모두가 지나온 팬데믹이라는 배경은 그러한 소설의 목소리를 더 크게, 더 또렷하게 증폭시킨다.
『부끄러움의 시대』는 소설이라는 작은 사각형의 지면을 빌려 눈에 잘 띄지 않았던 이들에게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조용히) 말을 건네고, 직업에 가려져 있던 진짜 이름을 불러주고, 작고 연약하게만 보였던 이들이 ‘세상’과 ‘시대’라는 거대한 세계의 중심에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이 담담하지만 심장처럼 따스한 이야기와의 만남을 통해, 현실의 차가운 바람을 참고 견뎌내는 모든 이가 힘을 모아 그 바람을 “얍!” 하고 무찌를 수 있기를. 시대의 진정한 승자가 될 수 있기를.
“인생 별거 없어요. 견디고 버티는 거예요. 그거면 돼요.”
‘새소설’은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 참신하고 첨예한
작가들의 시선을 담는 소설 시리즈입니다.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젊고 새로운 작품을 소개합니다.
작가정보
작가의 말
견디고 버텨줘서 고맙다고 말해줄 누군가를 떠올리며 끝까지 이어가기를. 삶을.
그리하여 마침내 도달하기를. 꿈과 사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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