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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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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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우어』는 『노랜드』 이후 2년 만에 묶는 소설집으로 미발표작 두 편을 포함해 2020년부터 2024년까지 쓴 단편 여덟 편이 수록되어 있다. 외계 존재 진압에 투입된 어린아이들부터 비범한 능력이 있는 십대 청소년, 장의사 안드로이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살아가는 인간과 비인간동물까지 다양한 존재가 조명되는 이번 소설집에는, 사라진 존재를 구하고자 분투하는 이들의 쓸쓸하면서도 아련한, 그러면서도 뜨거운 내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극한의 상황에 직면한 천선란의 인물들은 슬픔과 상실감을 안고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는데, 그 용기는 어떻게 생기고 또 발휘되는지, 이번 소설집 편편에 담긴 간절함이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리라 믿는다.
모우어
너머의 아이들
뼈의 기록
서프비트
사과가 말했어
입술과 이름의 낙차
쿠쉬룩
작가의 말
그녀도 자신의 심장을 꺼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던 아이의 귓불을 씹은 적 있었다. 그녀가 씹을 수 있는 게 고작 귓불 하나였다. 손은 너무 많이 맞잡았으며, 등과 어깨에는 숱하게 입을 맞췄고, 발가락은 그 사이사이를 씻겨주었던 기억 때문에. 힘겹게 삼킨 귓불은 오래도록 속에 얹혀 있다가 그녀가 이곳의 파수꾼이 되겠다고 다짐했을 때 비로소 소화되었다.
_「얼지 않는 호수」에서
다정하다는 것이 이토록 짙은 화상을 남길 줄 알았더라면 함부로 끌어안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끌어안고 간 모든 곳이 저온 화상 상태다. 낮은 온도에서 오래도록 익은 살은 회복도, 재생도 되지 않는다. 이 빙하 속에서 유일하게 치유되지 않는 화상인 셈이다. 한 사람의 다정함에 덴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설산에서 화상 입은 몸을 끌어안고 사는 것.
_「얼지 않는 호수」에서
인간은 이제 신체가 아닌 정신으로 유약기와 성인기를 구분했다.
유약기를 지나 성인기에 접어들 때 인간의 정신은 약하고 어린 존재를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그 감정이 성인기의 신호이다.
_「모우어」에서
느껴. 언어가 되는 순간 감정은 단순하고 납작해져. 자연과 우리는 분리되고, 우리는 또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고, 규정하고, 구분하려 들겠지. 우리는 한계에 부딪힐 거야.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돼. 언어는 쉽게 왜곡되고 무너져.
_「모우어」에서
-누군가 아름다움을 이렇게 말했지.
모미는 로비스가 만든 나비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그림자로는 모든 나비가 똑같아 보이는 동일성.
그리고 로비스의 손을 가리켰다.
-하지만 결국 같은 나비가 아니라는 차별성.
마지막으로 로비스의 손을 붙잡아 내렸다.
-그리고 이 나비는 결코 진짜가 될 수 없다는 불가능성. 그것이 아름다움이지. 같고, 다르고, 불가능을 이야기하는.
_「뼈의 기록」에서
말을 해볼까. 입을 열어볼까.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다정하게 당신을 불러볼까. 대뜸 사랑한다고 말해볼까. 하지만 아무리 생생해도 꿈이다. 꿈이 아니면 말해주었을 텐데. 이 세상의 다음 장을, 우리의 결말을, 우리가 다시 만날 방법을, 당신이 울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_「너머의 아이들」에서
끝내 출구를 찾지 못하는 기억은 미로에 갇힌 채 굶주려 있다가 새로운 기억이 들어오면 그것을 공격한다. 그리고 먹거나 먹힌다. 먹힌 기억은 신체의 일부분으로 자라고, 기억은 그렇게 미로 안에서 괴물이 되어간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을 구분 없이 먹어치우며 미로를 헤매다 이따금 길을 파괴하겠고 그럴 때면 인간은 끔찍하게 변해버린 기억에 몸서리치며, 본래의 형태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억에 잠식된다.
_「입술과 이름의 낙차」에서
“언니와 만나기로 했어.”
“어디서?”
발락이 되물었다.
“……두려움이 없는 곳.”
_「쿠쉬룩」에서
바깥에서 볼 수 없는 별들이 빛나고 정육면체는 은은하게 빛났다. 엔릴은 표면에 새겨진 형상을 주시했다. 낱개로 보자면 그림이었지만 그것은 의미를 품고 있는 쐐기문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비슷한 모양이 조금씩 변주되고, 반복적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머리 달린 생선 가시 같은 것, 별자리 같은 것, 표시와 기호, 그리스어와 유사한 것들이 보였다. 낯설어도 규칙이 있다. 모든 글자에는 반드시 규칙이 있다. 그 규칙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상상하고 또 상상해야만 한다.
엄마의 마음을 상상하는 거야. 미간을 찌푸리면, 어디가 불편하겠다고 추측하는 거지.
_「쿠쉬룩」에서
“거부할 수가 없어서.
몸은, 거부할 수가 없으니까.
마음이 시키면.”
소설집의 앞자리에 놓인 「얼지 않는 호수」는 세계가 꽁꽁 얼어버린 이후를 그린다. 삶에 아무런 기대도 없던 ‘그녀’의 적막한 일상에, 소중했던 친구의 말라붙은 심장을 품에 안은 아이 ‘야자’가 나타난다. ‘야자’는 친구의 심장을 그 영혼에게라도 쥐여주고자 ‘얼지 않는 호수’를 향해 먼길을 간다.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나요?”라는 천진한 듯 애틋한 듯한 ‘야자’의 질문은 ‘그녀’로 하여금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둘 꺼내보게 하는데… 모든 것이 얼어붙은 지구 위에 끝끝내 ‘얼지 않는’ 호수가 있을까? 그런 호수가 있다는 믿음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까?
뒤이은 단편이자 표제작인 「모우어」는 언어가 사라진 세계를 그린다. 인류의 탐욕과 불신과 혐오가 모두 언어가 만든 질서/무질서 때문이라 여긴 어느 먼 미래의 인류는 언어를 포기하도록 진화했다. “인간의 언어가, 언어를 가진 인간이,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영원히 이 생태계의 이방인이” 되었다. 그후 인간은 ‘의음意音’으로, 요컨대 머릿속에서 떠올린 말로 소통하게 되었고, 입말로는 어떠한 규칙도 없는 음절들을 소리낼 뿐이다. 언어로 시간 역시 규정짓지 않게 된 인간들은 노화하지 않는데, 그런 세계를 살던 ‘초우’는 어느 날 버려진 아기를 구조해 ‘모우’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우’는 ‘의음’보다 ‘말소리’에 반응했고 그것은 이 세계와 맞지 않는 일일 터, ‘소리’와 ‘의미’가 합쳐진 ‘언어’라는 게 무엇인지 궁금했던 모우는 결국 이단으로 몰리고 만다.
엄마, 나는 죽은 게 아니라 흐르기 시작한 거야. 내 몸의 시간이 흐르고 있어. 엄마, 나는 이 시간이 느껴져. 아주 얇아. 거미줄보다 더. 내게는 주름이 생길 거야. 시간이 스치며 생기는 자국이야. (…) 나 언어의 소리를 들었어. 언어가 만든 시간이 느껴져.
_「모우어」에서
언어를 버리고 감각만으로 앞선 인류의 그 모든 죄를 느끼며 살아가게 된 신인류와, 그 사이에 등장한 ‘모우’. 언어는 정말 인류를 자멸로 이끈 도구이자 악습이었을까? ‘모우’가 새로이 들은 ‘언어의 소리’는 무엇일까. 애초에 ‘초우’는 ‘모우’라는 이름에 아무 의미도 담지 않을 수 있었을까?
한편 이 소설집에서는 가까웠던 사람을 잃은 인물들이 유독 눈에 띈다. 「얼지 않는 호수」는 물론이고, 마인드 업로딩 시스템을 주요하게 다룬 「쿠쉬룩」에서도 신경 네트워크에서 증발한 언니를 둔 ‘엔릴’이 화자이다. “각자가 만든 세계”, 요컨대 “불확실성이 없”는 세계로 기꺼이 증발한 사람들은 “진짜가 아니라고 가짜가 되는 건 아니”라는 소설 속 문장을 의미심장하게 만든다. ‘엔릴’이 언니를 상상하고 또 상상하는 과정 끝에 ‘쿠쉬룩(상자)’의 존재를 발견하고, 거기 새겨진 “우리만의 규칙”은 가상의 세계에서 언니를 만나게 한다. 현실의 삶에서 고고학자였던 ‘엔릴’의 언니는, 과거를 파헤치는 사람이자, 유적처럼 메마른 엄마를 돌보는 사람이자, 어린 ‘엔릴’을 보호하는 사람이었다. 겹겹으로 부과된 의무 속에서 과거에 머무른 채 현실을 살 수밖에 없던 언니를 ‘엔릴’은 “끊임없이 상상하고 상상”한다. ‘엔릴’에게는 그것이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방식이었으리라. 엉망이던 “시침과 분침이 모두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두려운 것이 없는 완전한 세계”. 그곳에서 드디어 언니의 뒷모습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납득하게 된다. “진짜가 아니라고 가짜인 건 아니야.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가 중요한 거지”라는 말을.
「입술과 이름의 낙차」 속 두 여성, ‘나’와 ‘주미’ 역시 오래전 가까운 이를 잃었다. ‘나’는 ‘의식 전이’까지 당해 원치 않는 범죄에 행위자로서 가담한 채 살고 있다. 적의 공격을 받고 쓰러져 있던 ‘나’를 의학도인 ‘주미’가 구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저 가해자가, 저 피해자가 어쩌면 언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 몰입하고 고민해요. 어느 곳에 언니를 세워두느냐에 따라서 내 선택도 달라져요”라고 말하는 ‘주미’는 평생을 따라다닌, 기억 속 비참한 언니의 모습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나’는 단 하나 남은 소중한 기억마저 지울 의식 전이 칩 제거술을 끝내 받게 될까. 어떤 기억을 가지고 있어야, 혹은 놓아주어야 하는 걸까.
한편 「너머의 아이들」과 「뼈의 기록」에는 지구 밖으로 보내진 인물들이 등장한다. 「너머의 아이들」의 경우 외계 존재를 진압하기 위해 몸집이 작은 아이들이 필요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며, 전쟁에서 이기고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이들을 외계 존재의 우주선에 태운다. 그 아이들은 현실에선 죽음을 맞이했지만 ‘너머’에서는 깨어나고, “어린이일 때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해 프로그램에서 깨어났으므로. 어른이 될 기회를 박탈당한 채 현실로 돌아왔으므로” 시간이 흘러도 어린이인 채이다. 어린이뿐인 ‘너머’의 세계.
“단 한 명의 어른이 오면 우린 그 어른을 신처럼 모셔야 할 거야. 두 명의 어른이 오면 우린 두 사람의 비위를 맞추느라 눈치를 볼 거야. 세 명의 어른이 오면 우린 노동을 해야 할 거야. 더 많은 어른이 오면 불행이 반복될 거야.”
_「너머의 아이들」에서
「뼈의 기록」은 장의사 안드로이드 ‘로비스’와 병원의 미화원 ‘모미’의 특별한 우정이 인상적이다. 죽은 몸을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을 헤아리는 안드로이드, 라는 상상력은 그간 천선란 작품 속 사려 깊은 존재들과 맞닿아 있다.
잊고 싶지 않은 것들이, 몸에 새길 정도로 좋아했던 것들이 가장 오래도록 몸에 남아 인간의 육체를 삶에 붙들어놓고 있는 것일까. 로비스는 노인의 몸에 남은 선연한 문신의 형태를 보며 생각했다. 로비스의 회로는 그런 의문을 만들게끔 만들어졌다. 그래서 로비스는 모든 것에 질문을 던진다. 모든 의문의 종착지는 헤아림이다. 그리고 그것은 염을 행하는 안드로이드가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였다. 망자를 헤아리고, 남은 이들을 헤아리는 것.
_「뼈의 기록」에서
생의 끝자락에 있던 ‘모미’가 죽음을 맞자 ‘로비스’는 연고 없는 ‘모미’의 염습을 직접 하게 된다. “언젠가 우주를 알고, 우주에서 자유로우며, 우주를 누빌 수 있다고 말이야. 하지만 그건 아직 이뤄내지 못했고 오히려 우주를 정복하려 하고, 여전히 우주에서 손짓 한번 제대로 할 수 없지. 하지만 나는 아직 믿어. 인간은 언젠가 우주를 유영할 거야. 이 나비처럼”이라고 말하던 ‘모미’, 어린 시절 화상의 흉터가 사는 내내 그를 괴롭혔단 것을 기억하는 ‘로비스’는 ‘모미’를 화장터로 보낼 수 없다고 판단, 그의 시신을 우주로 보내고자 처음으로 병원 밖으로 나가 달리기 시작한다. “로비스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이것을 충동이라 불렀으리라.”
「서프비트」와 「사과가 말했어」의 환상성은 그 기세가 남다르다. 「서프비트」는 물속에서 숨쉴 수 있는 능력, 어둠 속에서도 환히 볼 수 있는 능력, 벽을 통과하는 능력 등을 가진 십대 ‘미다스’들의 정체성 탐구와 성장 스토리를 담고 있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기 위해 했던 선택들이 엇나가면서 소중한 이를 잃은 후, 어른들에 의해 비윤리적으로 쓰였던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쓰고자 마음먹는지 흡인력 좋게 전개된다. 「사과가 말했어」는 이 작품집에서 가장 어두운 작품으로, 범죄 피해의 트라우마를 겪는 ‘나’와 태국인 친구 ‘촘푸’가 둘만의 언어로 현실의 알 수 없음을 풀어간다. 사과밭의 사과들이 독특한 무늬를 품고 두 사람에게 말을 거는 듯한 기현상은 ‘촘푸’가 ‘나’에게 가르쳐준 태국어 단어, ‘스며든다, 빨려들어간다, 하나가 된다’라는 뜻의 단어와 맞물리며 대지의 진동이 느껴지는 결말을 향해 뻗어간다.
우리가 서로의 구원이 될 수 있기를,
끝이 없을 이 마음으로
위태로운 세계의 파수꾼이 될 수 있기를
천선란의 세계는 거대 우주를 배경으로 탁월한 개인이 숭고한 도전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의해 뒤틀린 세계를, 폭력과 아름다움이 뒤섞인 세계를, 어떻게 견디고 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애쓰는 것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다는 것.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잃지 않으려 절박하게 매달리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 마음들은 스스로도 몰랐던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천선란의 거창하지 않은 인물들은 그 용기를 소중히 쥔 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해나간다. 씁쓸한 현실을 극복하는 서사가 아닌, 서로를 이해하고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이 있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천선란은 이 위태로운 세계에 기꺼이 파수꾼이 되고자 하는 인물들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이 인물들을 알고 있다는 것이 “홀로 버텨야 하는 그 경계에서 조금은 덜 외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누군가는 영웅이 되고, 누군가는 숨고, 누군가는 지키고, 누군가는 이름만 남겨놓고 홀연히 사라지는 세상에서.”(‘작가의 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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