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2024년 11월 08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0월 26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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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91157069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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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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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재규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유신의 세계에서 성장했다. 5.16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쿠데타들과 달랐다. 메이지 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 군부가 앞장선 혁명을 선동한 기타 잇키와 황도파 청년 장교들을 잇는 한국판 유신이었다. 일본에서 실패한 쇼와 유신이 한국에서 성공했다.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수천만 명을 희생시켰듯, 박정희의 유신도 폭주해 국민 대학살 직전에 이르렀다. 부마항쟁 당시 몇백만 명을 죽여도 괜찮다는 박정희를 가까스로 막아낸 것은 마지막 ‘유신 지사’ 김재규였다.
유신의 사건들
들어가는 말: 어떤 죽음에 붙이는 조사(弔詞)
1장 씨앗: 바람이여, 흉포해져라
모든 것의 시작 / 전쟁은 어떻게 제사가 되는가 / 무쿠리고쿠리, 괴수의 이름 / 관념이 낳은 관념, 한반도 침탈
2장 잉태: 초대받지 않은 손님
에도시대, 태평성대의 사무라이 / 공장이 장인의 기술을 압도하다 / 무쿠리고쿠리의 재림, 미국 / 조슈와 사쓰마의 등장 / 만들어진 영웅들
3장 탄생: 신성한 타락
적을 이기기 위해 적을 배운다 / 사쓰마: 전쟁은 총력전이다 / 조슈: 끝까지 간다 / 승리와 멸망 사이 / 통치권의 행방 / 무사와 지사 / 지사, 탐미적인 사대부 / 벼락치기 근대국가 / 자기 파괴적 동력으로서의 유신
4장 팽창: 전쟁중독
조선의 유신 지사 김옥균 / 유신, 양무운동에 승리하다 / 그레이트 게임과 일본 / 뤼순의 떼죽음 / 피의 일요일과 인신공양의 승리 / 전쟁의 승패를 가른 등불 / 환영받지 못한 승전
5장 폭주: 정결한 세계를 지키는 야만
광무개혁과 대한제국의 죽음 / 한반도의 쌀을 탐낸 일본 / 이중수탈, 일본인 수탈을 위한 조선인 수탈 / 국가의 소유권자 / 다이쇼 데모크라시 / 민주주의와 민폰슈기 / 일본의 기사회생 / 중심 세계 일본의 원죄와 야만 / 국민을 삼킨 유신
6장 광기: 순수의 시대
만주를 뒤흔든 폭발 / ‘지사’를 갈망하는 폭력 / 가해자의 자리에 선 국민들 / 기타 잇키와 2·26사건 / 광기를 밀어낸 광기
7장 임종: 덴노 헤이카 반자이
난징학살과 전쟁 스포츠 ‘백 명 목 베기’ / 일본의 늪이 된 중국 / 전쟁을 위한 전쟁 / 일본은 반드시 패배한다 / 해방자에서 침략군으로 / 천황폐하, 이제 죽으러 갑니다 / 순수성 투쟁의 말로 / 가미카제와 1억 옥쇄, 죽음에 죽음을 더하기 / 전쟁 잔여물과 ‘최후의 사무라이’
8장 부활: 윤리적 세계와 미학적 세계
축복받지 못한 탄생 / 형의 그림자 / 피로 쓴 멸사봉공 / 붉은 유신의 마음 / 실패한 공산주의자 / 올 것이 왔다
9장 절정: 최고의 사랑, 완전한 사육
민족국가의식 없는 민족의식 / 만찬장에 울려 퍼진 기립박수 / 모시는 존재와 부리는 존재의 시대감각 / 한반도에서 태어난 유신 지사 / 사용과 사육
10장 완성: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조선의 노기 대장 / 이상한 민주주의자들 / 그 남자의 군사부일체 / 사(死)의 찬미 / 최후의 지사, 유신을 완성하다 /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후기: 유신의 제단
참고문헌
이 책 《유신 사무라이 박정희: 낭만과 폭력의 한일 유신사》의 주인공은 ‘유신’이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한국의 ‘10월 유신’에 붙는 바로 그 유신이다. 기원을 거슬러 몽골-고려 연합군의 일본 침공에서부터 시작하는 이 장대한 이야기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한 10.26 사건으로 끝난다. 총탄을 쏜 자와 맞은 자, 누구보다도 뜨거운 군주와 신하 사이였던 두 사람이 각자의 죽음으로 종결지은 기이한 사연을 이해하려고 작업을 시작했다.
_10쪽, 들어가는 말: 어떤 죽음에 붙이는 조사(弔詞) 중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생각에 따라 박정희를 지지하거나 비난할 수 있다. 다만 어떤 선택을 하든, 우리는 먼저 그를 총체적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영웅과 악마 사이에 놓인 하나의 복잡한 인간을 바라보아야 한다. 나는 10.26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김재규를 이해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가 권총을 쏜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다시 박정희를 이해해야 했다. 그러면서 박정희라는 산을 넘지 않고서는 우리 현대사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박정희를 따라가면 무엇이 있는가. 거기에 ‘유신’이라는 이름의 괴수가 도사리고 있다. (…) 일본이 벌인 여러 전쟁과 침략은 그 벼락부자 같은 일본의 번영과 함께 모두 ‘유신’의 결과물이다. 유신은 두 방의 핵폭탄과 함께 죽은 듯 보였으나,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박정희와 청년 장교들과 함께 부활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유신 지사 김재규에 의해 사멸한다. 자기 파괴적 운명을 갖고 태어난 유신에게 사멸은 곧 완성이었다. 이 모든 사연을 하나의 이야기로 품기 위해, 나는 유신이라는 맹목적인 괴수의 일생을 연대기로 풀며 한국과 일본의 근현대사를 넘나들어야 했다. 그것은 죽음을 탐미한 낭만과 폭력의 역사였다.
_11-12쪽, 들어가는 말: 어떤 죽음에 붙이는 조사(弔詞) 중
여몽연합 침공군의 규모와 실력은 일본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여몽연합군에 맞선 일본 무사들은 용감했지만 죽기 위해 싸우는 수준이었다. 용맹은 비극이 되었고, 다시 이 비극은 가미카제에 의해 낭만이 되었다. 열심히 싸우고 열심히 죽은 결과 하늘이 도와주었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라 제사의 구조다. 세상에서 가장 탐미적인 인신공양이다. 두 번의 태풍은 일본인들에게, 다른 세계에서 온 침략자와의 전쟁을 인간이 아닌 하늘의 일로 만들었다. 선조들은 진심을 다해 싸우다 죽기를 반복하며 인신공양의 기우제를 지냈고, 인간들의 낭만적 죽음에 하늘은 가미카제로 응답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끝없이 자살적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전쟁수행력을 완전히 상실한 채 온 국민이 미군에 저항하다 죽겠다는 일명 ‘1억 옥쇄’는 전술이 아니라 거대한 제사 계획이었다. 인간의 상식으로는 멸망을 향해 가는 행위였지만 결과는 이미 인간이 아닌 하늘의 일이었던 것이다.
_24쪽, 1장 씨앗: 바람이여, 흉포해져라 중
요시다 쇼인은 그다지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분량도 지나치게 짧고 비논리적이며 근거도 없다. 그 정도 수준의 학문을 가진 이는 어느 시대나 흔하디흔하다. 나는 요시다 쇼인을 무시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가 어째서 지금처럼 중요하게 취급되는지 되묻는 것이다. 한 인물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은 후대인의 취향이 결정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원래 ‘성지’를 만들어 찾아가기를 좋아한다.
일본을 일으켜 세운 유신→유신의 중심이 된 조슈 번→조슈 번 사무라이들의 사상과 패기→그들의 스승인 요시다 쇼인
이렇게 순서를 거꾸로 되짚어 송하촌숙을 성지로 받들겠다면 그건 그들의 자유다. 같은 원리로 큰 강의 근원지가 되는 작은 샘물은 특별한 대접을 받는다. 다만 진실은 수많은 물줄기와 지하수, 빗물이 모여 비로소 큰 강을 이룬다는 것이다.
_58쪽, 2장 잉태: 초대받지 않은 손님 중
‘결과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일본을 통치하게 되었을 때, 결과가 과정을 정당화했다. 그들은 미토 번사들의 최후 대신 자신들의 성공신화를 음미했다. 그 모든 무모함과 과격함은 결국 옳았다. 일본은 옳은 나라이므로 이제 밖/세계를 상대로, 즉 청나라와 러시아, 미국에 싸움을 걸어야 한다. ‘상대가 강대한데도 불구하고 / 옳은’ 전쟁이므로 싸운다는 뜻이 아니다. 여기에는 ‘상대가 강대한 만큼 무모한 전쟁이므로 / 옳다’는 무서운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살아남지 못해 지워진 미토 번 대신 어쨌든 살아남아 역사에 길이 남은 죠슈와 사쓰마의 운명은 이후 일본이 겪은 폭주의 경로와 그 결과를 예고하는 불길한 징후로 남았다.
_75쪽, 3장 탄생: 신성한 타락 중
청일전쟁의 기적 같은 승리는 제사에 하늘이 응답한 결과였지 않은가. 일본은 언제나처럼 또 다른 제사를 준비했다.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국가로 진화한다. 역사 속에 출현한 전쟁국가는 전쟁기업의 형태를 띤다. 일례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은 전쟁을 지속함으로써 성장동력을 유지했다. 전쟁 국가에 있어 전쟁은 어디까지나 도구다. 그러나 일본은 달랐다. 일본의 전쟁국가화는 전쟁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모든 것을 제사에 쏟아붓고 결과를 하늘에 맡기는 관념적 의식이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에 소요된 일본의 전비는 17억 3000만 엔으로 집계된다. 청일전쟁 전비의 8배 이상이며, 당시 일본의 한 해 국민총생산액의 6배가 넘는 규모였다.
_118쪽, 4장 팽창: 전쟁중독 중
일본 군부에 있어 재일 조선인은, 히틀러에게 있어 독일에 사는 유대인과 같은 의미의 땔감이었다. 일제 군부는 자신들이 도취한 유신의 정념에 일반 국민을 포섭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폭력의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다. 설득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며, 반박에 재반박을 반복해야 한다. 공범끼리는 토론할 필요가 없다. 외부의 더러움으로부터 신토를 지켜야만 하는 유신의 관념 안에서 학살은 성전(聖戰)이 되었다. 일본 군국주의는 조선인들의 시체 위에서 완성되었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처럼, 다음에 차릴 제사상을 일본인들의 시체로 채우게 된다. 관동대지진 2년 후 1925년, 유신은 군국주의 일본의 틀을 완성한다. 치안유지법을 통해서다. 치안유지법은 한국의 악명 높은 국가보안법의 아버지다. 대지진으로 인한 사회 혼란을 수습한다는 핑계로 실행된 치안유지법의 핵심은 두 가지다. 감히 천황제의 신성함을 의심하지 말 것 그리고 사유재산 제도를 부정하지 말 것이다.
_169쪽, 5장 폭주: 정결한 세계를 지키는 야만 중
쇼와 천황은 군부대신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째서 자신이 모르는 전쟁이 발발했는지. 스기야마 하지메는 천황 앞에서 이미 시작된 전쟁을 물릴 수는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한 달이면 중국 전토를 정복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며 천황을 위로했다. 일본 군부는 스기야마 하지메가 너무 낙관적이라며 냉정하게 분석하면 3개월은 걸릴 거라고 천황 앞에서 그를 나무랐다.
그로부터 4년 후, 스기야마 하지메는 쇼와 천황에게 어째서 아직도 중국이 정복되지 않았느냐는 질책을 들었다. 그렇게 유신은 중일전쟁, 아니 죽음의 길로 홀린 듯 빠져들었다. 태생부터 자살적인 유신의 숙명이었다. 중국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돈과 자원이 필요했다.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 그리고 태평양을 점령해야 했다. 마지막으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태평양 지배권을 놓고 미국과 싸워야 했다. 일본은 전쟁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전쟁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유지’하거나 ‘확대’하기 위해 또 전쟁을 시작했다. 그 종착역은 필연적 죽음이었으므로, 이제 유신 자체가 된 일본은 죽음을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옥쇄, 반자이 돌격, 가미카제는 모두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_203-204쪽, 6장 광기: 순수의 시대 중
유신은 어째서 도조 히데키,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 도미나가 교지와 같은 저질 인간들에게 운명을 맡기게 되었는가. 수십 년 전으로 되돌아가면 유신 지사들은 적어도 비겁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한다는 믿음에 따라 한뎃잠을 잤고, 방랑했고, 전투와 암살에 뛰어들었으며, 목숨을 내던졌다. 나는 이 죽음의 정념이 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아무리 유신 지사들을 비판해도 ‘남을 위해’ 죽기로 작정했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1940년대의 일본제국은 자신을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인물들이 움직였다. 이는 사실 유신의 정해진 운명이다. 순수한 사람들의 투쟁과 순수성 투쟁은 다르다. 그러나 순수한 사람들의 투쟁은 순수성 투쟁을 불러온다. 순수성 투쟁의 시대엔 순수한 사람들이 승리하지 않는다. ‘순수하다고 주장하고 연기하는 자들’이 내부투쟁에서 승리한다. 그들이 정말로 순수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순수한 투쟁가는 행동하기 바빠서 말에 시간을 쓸 틈이 없기 때문이다.
_241-242쪽, 7장 임종: 덴노 헤이카 반자이 중
빈농의 자식이 아니었다면, 박정희는 기타 잇키를 사상적 스승으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2·26사건에서 결기부대가 구원하고자 했던 이들은 일본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골의 비참한 농민이었다. 물론 구원의 방식은 자의적이고, 폭력적이며, 강압적이다. 그리고 자기 파멸적이었다. 그래서 박정희는 사회주의자인가, 군국주의자인가? 욕망의 화신인가? 모두 아니다. 박정희의 복합성을 설명하는 하나의 단어, 그것은 ‘유신’이다.
_274-275쪽, 8장 부활: 윤리적 세계와 미학적 세계 중
국민은 박정희가 ‘빨갱이’였고 ‘만주군’이었어도 1960년대에는 그가 유용하다고 생각했기에 그를 선택했다. 국민은 박정희를 충분히 사용했다고 판단하고 민주주의에 눈을 돌렸다. 이제 국민의 눈에는 민주주의와 미국식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기능이 추가된, 김대중이라는 신상품의 성능이 더 좋아 보였다. 박정희는 천황에 대한 사랑으로 천황을 납치하려고 한 조슈 번사들처럼, 국민을 위해 국민을 납치하려고 했다. 자신의 통치가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만 국민은 모른다. 그렇다면 국민을 사육해야 한다. 그저 그런 사육은 억압일 뿐이다. 하지만 박정희에게 ‘완전한 사육’은 ‘사랑’이었다.
_313-314쪽, 9장 절정: 최고의 사랑, 완전한 사육 중
대한민국 국민은 박정희만큼 전두환을 인정하지 않았다. 집권 7년 내내 전두환과 그의 아내 이순자는 조롱과 욕설의 대상이었다. 김재규가 민주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한다면, 그건 너무 멀리 엇나간 발언이다. 한국의 민주화는 어디까지나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1987년 6월항쟁에서 국민이 전두환을 상대로 승리하게 된 요인에 김재규의 총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시간이 흐르고 한국인들이 과거를 침착하게 복기할 수 있게 된 현재 김재규가 재평가의 대상이 된 일은 당연하다. 이 책을 쓰는 지금, 김재규는 반역자로도 불리지만 동시에 의사(義士)로도 불린다. 그러나 나는 확언한다. 그는 의사가 아니라 지사이며, 최후의 유신 지사다.
_346-347쪽, 10장 완성: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다 중
박정희의 죽음은 일종의 유산이었다. 한국인은 박정희와 이별할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그를 잃었다. 역사는 ‘시대정신’에 따라 움직이지만, ‘시대감정’이 남긴 잔여물을 이자까지 쳐서 되돌려준다. 대한민국 17대 대통령 이명박은 평사원에서 현대건설 사장에까지 오른 ‘샐러리맨의 신화’였다. 그의 존재는 산업화시대의 추억을 상기시켰다. 이명박은 대통령 선거에서 노골적으로 박정희의 이미지를 마케팅 요소로 삼았다. 국민은 ‘유사 박정희’로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서 18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예 박정희의 유전자를 선택했다. 그 결과 확인한 것은 유신의 망령뿐이었다. 유신의 무덤가인 오래된 정원은 그저 폐허에 불과했다. 무덤은 무덤일 뿐이다.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부활하지 못한다.
_349쪽, 후기: 유신의 제단 중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는 권력욕을 가리는 빈말이었을까?
일본의 유신 지사들도, 박정희와 김재규도 ‘유신’에 중독된 사무라이들이었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일본 유신의 관념은
번영과 전쟁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 세계대전으로 그리고 파멸로 일본을 이끌었다.
유신 지사 박정희 역시 국가를 탈취하고 번영시키고 마침내 파멸 직전에 이르렀다.
한일 역사의 문제적 인물들을 움직인 동력, 그것이 ‘유신’이다!
#1. 10월 유신은 ‘쇼와 유신’의 후계자다: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1936년 2월 29일, 며칠 전 시작한 청년 장교들의 2.26쿠데타가 이제 막 끝나려 하고 있었다. 일본국 육군 1사단 보병3연대 6중대장 안도 데루조 대위는 황도파 청년 장교의 한 명으로서 군부 내 라이벌인 통제파로부터도 인정을 받을 정도로 신망이 두터웠다. 안도는 쿠데타를 말렸으나, 결국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 누구보다 열심히 현장을 지휘하고 성공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상부의 비겁함과 배신으로 고립되고, 거기에 더해 무력의 차이가 엄청났다. 처음부터 역부족인 싸움이었다. 토벌군의 투항 권유 방송이 계속되자 안도는 부하들에게 투항을 명령한 뒤 자신의 목에 대고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총기 불량으로 즉사하는 데 실패하고 후에 사형당했다).
당시 청년 장교들은 무엇을 위해 떨쳐 일어났던 것일까? 2.26쿠데타는 메이지 유신으로 겉모습만 바뀐 일본을 다시 한번 철저히 바꾸고자 한 ‘쇼와 유신’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자제들과 만나 일본의 지옥 같은 현실에 눈뜬 청년 장교들은 새로운 일본을 꿈꾸었다. 안도 데루조는 자결을 말리는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전에 이 중대장을 혼낸 적이 있지. 중대장님, 언제 궐기하는 거냐고 말이야. 이대로 두면 농촌은 구할 수 없다면서. 결국 농민들은 구하지 못하고 말았네.” 이어 안도 데루조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들은 ‘유신’을 계속하라.”
‘쇼와 유신’을 내걸고 궐기한 청년 장교들과 그들의 사상적 지도자 기타 잇키는 이후 재판에서 사형과 투옥 등의 처벌을 받으며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당했다. 안도는 살아남은 부하들이 ‘유신’을 계속하기를 바랬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도 데루조의 유언과도 같은 말에서 ‘유신’은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과 타인)을 희생해도 좋다는 하나의 강력한 운동이자 관념임을 알 수 있다.
#2.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제 목숨이 먼저인, 유신 지사를 흉내낸 사이비들
유신은 선언이 아니다. “이제 일본이 재통일되었으니 ‘유신’을 선포한다.”는 거창한 의식 같은 건 없었다. 지금은 메이지 유신 원년으로 불리지만, 1868년 당시는 한쪽에서는 신정부가 수립되고 다른 쪽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난세의 시기였다. 유신(維新)이라는 말은 사서삼경(四書三經) 중 《서경(書經)》에 기록된 표현이다. 고대 중국의 주나라가 체제를 완전히 새롭게 정비해 멸망의 위기를 극복하고 되살아난 사건을 유신이라고 한다. 막부를 뒤집어엎은 신정부세력은 자신들의 성공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서경》에서 ‘유신’이라는 표현을 찾아 사용했다.
메이지 유신의 성공은 여러 유신 지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투쟁한 결과 주어진 선물이었다. 수십 년이 지나 청년 장교들의 2.26 쿠데타가 ‘쇼와 유신’을 내걸었던 것처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유신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목숨을 걸고 행동에 나서는 이들의 대의명분이 되었다. 하지만 성공 신화는 어느새 연속된 실패담과 괴담으로 이어졌다. 대의명분을 내걸고 일본제국의 번영과 성공을 부르짖으며 사실은 자기 앞가림에만 열중하거나, 자기 생각에 현실을 뜯어 맞추며 부하와 동료, 국민을 태연히 위험에 빠트리는 자들이 일본을 이끌었다. 이상하고 기묘한 우연이 모여 일본의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것은 언제라도 허물어질 수 있는 위험한 질주였다. 일본 근현대사에 흔적을 남긴 문제적 인물들은 과감하게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역사 진행을 앞당기거나 궤도를 이탈하곤 했다. 만주침략, 중일전쟁, 동남아시아 침략과 태평양전쟁… 거침없던 일본의 질주는 결국 가미카제와 ‘1억 옥쇄’ 그리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으로 종결되었다. ‘유신’의 종말은 그만큼 파괴적이었다.
대한민국 독립에 공헌한(?) 비밀 독립지사로까지 불리는 무타구치 렌야는 버마와 인도의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임팔전투에서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군은 먹을 것이 없어도 싸워야 한다. 무기가 없다, 탄약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등은 퇴각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탄약이 없다면 칼로, 칼이 없다면 맨손으로, 맨손도 안 되면 다리로 걷어차라, 다리도 당하면 이빨로 싸워라. 일본 남아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었는가? 일본은 신이 지켜주는 나라다.” 자기 파괴적인 유신-관으로 무장한 일본은 이처럼 파괴적인 생각을 앞세워 미국, 중국, 소련 등과 전쟁을 시작했으나 세 방향 모두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유신이 마침내 당도한 초라한 결말이었다.
#3. 성공한 ‘쇼와 유신’ 5.16과 한국의 유신 지사들: 박정희와 김재규
일본에서 파멸을 맞은 유신은 바다 건너 한반도에서 조용히 부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마침내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역사에서 해방되었다. 공과에 대한 평가는 각각 다를지라도, 해방 이후 지금 대한민국의 모습을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것은 역시 박정희일 것이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시기를 경험한 이들과 달리, 박정희를 비롯해 박정희의 마지막 폭주를 막은 김재규 등은 ‘일제’가 주인 행세를 하는 땅에 태어나 자란 세대들로 이들은 ‘유신’의 세례를 받고 ‘유신’의 공기 속에서 성장했다. 그들에게 ‘유신’은 반짝이고 매력적인, 마땅히 남자라면 따라야 할 강력한 힘의 상징이었다.
한국은 1972년의 ‘10월 유신’ 이전에 이미 ‘유신’과 만났다.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청년 장교들의 ‘5.16’은 당시 제3세계에 흔했던 여느 군인들의 쿠데타와 달랐다. 메이지 유신 전후의 사무라이들, 군국주의로 치닫던 시기의 황도파 청년장교들, 세계전쟁을 꿈꾼 이시와라 간지와 군부가 앞장선 혁명을 주창한 기타 잇키 등을 잇는 한국의 유신,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해 일본에서 실패한 ‘쇼와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가난한 농민의 자제들인 사병들로부터 일본의 진짜 현실을 전해 듣고 새로운 일본의 장래를 추궁(당)했던 안도 데루조와 황도파 청년 장교들처럼, 박정희는 스스로 체험하고 발견한 가난한 대한민국의 농촌을 구원하고, 산업화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싶어 했다. 5.16 이후 전투적으로 진행된 산업 발전은 가까이는 만주국의 경험, 더 거슬러서는 전쟁과 국가총동원체제로 성장한 일본 유신의 한국판이었다.
하지만 일본의 유신이 폭주해 일본 국민 전체를 인질로 삼아 위기에 이르렀듯(이들은 1억 전 국민이 죽어서라도 천황과 일본 국토를 지킨다는 ‘1억 옥쇄’를 진심으로 실행하려고 했고, 그 1억 명에는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정희의 유신 역시 폭주해 국민 살해의 임계점에 도달했었다. 부마항쟁 당시 몇백만 명을 죽여서라도 나라와 정권을 지키겠다는 박정희의 뜻을 막아낸 것은, 한때 그가 사랑하고 믿었던 김재규였다. 일본 유신 지사들과 영웅적 군인들에 매혹되었던 김재규는 국민을 지키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가져오기 위해 최후 결단을 내렸다. 주군 박정희를 버리고 그에게 몇 발의 총알을 선사함으로써 유신 지사로서 충정을 다했다. 김재규는 마지막 유신 지사였고, 박정희의 죽음으로 유신은 마침내 긴 폭주의 역사를 끝낼 수 있었다.
작가정보
작가, 묻고 글을 쓰는 사람. 한국인은 누구이고, 어떻게 현재의 한국인이 되었는지를 탐구하며 답을 찾고 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다. 문학과 칼럼, 시나리오 등 다양한 글쓰기를 해왔다. 국내 최초 인터넷 신문인 《딴지일보》에서 일하며 쓴 <테무진 to the 칸>은 역대 최고 조회수를 기록했다. 인문교양 팟캐스트 〈안 물어봐도 알려주는 남 얘기〉 등의 진행자로도 활동했다.
지은 책으로 《한국인의 탄생》, 《행복이 이글이글》, 《유신 그리고 유신》, 《1미터 개인의 간격》,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테무진 to the 칸》, 《축구는 문화다》, 《태양의 해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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