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 마들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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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공 언어 한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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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91172131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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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분 47.00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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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분 37.00MB
51분 46.00MB
46분 42.00MB
53분 48.00MB
1분 1.00MB
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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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소설집 《나, 나, 마들렌》은 박서련이 확보해가고 있는 문학적 영토의 정수라 할 만하다. 좀비 아포칼립스, 극중극 판타지를 통해 보여주는 장르적 쾌감뿐만 아니라 모성 이데올로기, 여성의 몸과 노화, 상실과 애도 같은 더 깊고 넓어진 연대의 서사까지, 박서련표 소설 세계에서도 하이 스토리와 로우 스토리를 두루 포함하여 그 기세가 위풍당당한 7편의 단편을 엮었다. 2018년부터 2022년까지 발표한 이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 절망과 희망, 탄생과 죽음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절묘한 소설 미학을 선보인다.
책장을 넘기며 연신 놀랐다. 와, 이게 어떻게 전부 한 작가가 쓴 이야기지? 박서련은 한 사람의 내면을 정말 그 사람으로 한참 살아본 것처럼 그려내는데, 신기하게도 다음 편으로 넘어가면 한순간에 또 다른 사람의 내면이 펼쳐져 있다. 무수한 마음들을 엮어 독자를 향해 쏘는 단 한 발의 화살. 《나, 나, 마들렌》은 그런 위력을 지닌 책이다._김초엽(소설가)
젤로의 변성기
한나와 클레어
세네갈식 부고
김수진의 경우
나, 나, 마들렌
마치 당신 같은 신
작가의 말
어떤 인간이 죽지 않고 살아 뭔가를 하고 있다. 아무 접점이 없어 얼굴을 상상할 수도 없는 인간이, 인간들이…… 살아 있다._〈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11쪽
이런 세상이지만 사람을 죽인 적은 없었다. 아직까지는._〈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19쪽
도로 곳곳을 마비시킨 사고 차량들의 운전자들은 대개 보균 상태였을 것이다. 1기에서 2기로 넘어가는 바로 그 순간에 사고를 겪었을 터다. 의식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운전대를 쥐었으니 음주 운전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그렇게 되면서까지, 목숨을 앗아갈 만큼 심한 1기의 통증과 고열을 견디면서까지 다들 어디로 가려 했을까. 곧 인간성이 만료된다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끝내 가야 했던 곳은 대체 어디였을까. 뭘 하고 싶었을까. 누구를 만나려는 거였을까._〈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36쪽
이런 세상이어도 밤에는 자고 낮에는 움직여야 한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소화가 되면 일을 봐야 한다. 자연스럽게 죽지 못해서 부자연스러운 일을 자꾸 해야 한다. 그런 식으로 하루하루를 막는 것은 어렵지 않다. 차만 있다면. 살기 위해서는 좀 더 먼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내게는 그게 남편을 면회하는 일인 거다._〈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37~38쪽
노안이라는 낱말의 질감은 오래 도망치다 마침내 붙잡힌 사람이 느낄 법한 무력감과 이상한 안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가 늙었구나. 모르지 않았으나 남의 입으로 듣고 싶지는 않은 말이었다._〈젤로의 변성기〉 69쪽
“꼭 선배님처럼 되고 싶어요.”
그 말은 엄마 같다는 말보다 훨씬 슬펐다. 나처럼은 안 돼, 라는 말이 울음이 터질 듯 부풀어 좁아진 목 안을 자꾸 더듬어 나오려 했다. 왜요, 라고 묻겠지. 나처럼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 나처럼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겠지. 저주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 애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꼭 나처럼 되렴 하고 별 마음 없는 덕담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저주라는 사실을 내가 아니까. 거의 평생을 소년의 목소리로 살고, 그걸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까지 쳐야 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_〈젤로의 변성기〉 74~75쪽
다시 한번 깨어날 수 있는 다음, 다음 순간이 더 이상 없다는 것. 낡아버린 몸에 소년의 음성을 지닌 여자 오선재의 몸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_〈젤로의 변성기〉 77쪽
네가 사랑하는 젤로는 너를 사랑해서 어른이 되어버렸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이 말을 소리 내어 발음하지 않겠지만 언제가 되었든 어떤 계기로든 네가 이 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너의 젤로에게도 변성기가 올까._〈젤로의 변성기〉 87~88쪽
그도 그럴 것이 한나와 클레어는 사실 옷만 바꿔 입는다면 누가 한나고 누가 클레어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닮았다. 그런 경우는 뜻밖이랄 것도 없이 흔하다._〈한나와 클레어〉 117쪽
그렇지만 모처럼 푹 자고 개운하게 일어난, 마침 날씨도 좋은 날에, 내가 가지 못했던 장례식과 장례식이 있기 몇 주 전 장례식의 주인공하고 나눈 대화를 연속으로 떠올린 이상은 도서관에 갈 수밖에 없게 되었고, 도서관에 가면…… 불을 지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_〈세네갈식 부고〉 122쪽
얼핏 만드는 일과 지키는 일 중 전자가 더 중요하고 어렵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경우 그건 착시다. 인간을 만드는 것까지야 뭐 대충 아무나 최소한 두 사람만 모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만 기껏 만들어놓은 한 인간이 죽지 않게 돌보아 주는 일은 누구한테나 어려운 것처럼……._〈세네갈식 부고〉 125~126쪽
그리고 드바와 나는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세네갈식 부고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산 사람이 먼저 죽은 사람의 도서관에 불을 질러주기로. 그때는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드바와 자주 주고받던 농담의 일종 또는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조금 고상하고 많이 상스럽고 쓸데없이 비장하며 매우 구체적으로 실없는 농담, 애서가들만의._〈세네갈식 부고〉 128쪽
나는 그냥…… 보고 싶지 않았던 거다. 드바의 영정 사진 같은 것은.
나는 드바를 진심으로 좋아했지만 드바를 생각하면 피곤하기도 했다. 드바는 늘 싸우고 있었고 그건 생활 도서관관장으로서 드바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으며 나 또한 항상 물러서지 않는 드바를 좋아했다. 그러니까 총체적으로 엉망이었던 거다, 내가 드바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드바와 함께하는 동안에 느낀 피로감과 분리되지 않기 때문에._〈세네갈식 부고〉 145쪽
말은 그렇게 했지만 수진은 엄마가 되고 싶었다. 여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태어날 때부터 여자였는데 어째서 여자가 되고 싶어야 하는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아주 어릴 때부터 해왔다. 그런 자신이 주변 트랜스여성 커뮤니티에서 유별난 케이스라는 것은 진작부터 알았으나 어딘가에 자기 같은 사람이 또 없으리라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혹시 안 되면 배 아파서 어떡하지? 해외에도 아직 사례가 별로 없는 수술이어서 어마어마하게 비싼지라 원정 수술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는데 국내 상용화가 언제 이루어질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것도 나 같은 그러나 나 아닌 누군가는 그 수술을 받아서 엄마가 되는 꿈을 이룰 텐데, 그럼 얼마나 부럽고 분할까._〈김수진의 경우〉 159~160쪽
있잖아, 보통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둘이서 만드는데 말이지. 너를 만드는 데에는 수 세기에 달하는 시간에 걸쳐 누적된 의료 지식과 수백 수천억대의 자본과 엄마와 엄마의 엄마와 엄마 친구들의 노력이 들어갔어. 너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아이야._〈김수진의 경우〉 190쪽
나는 목이 잘려 죽는다. 언젠가. 오늘은 아닌 미래에. 멀거나 머지않은 미래에. 그렇게 믿는다는 말은 언제나 부족한 느낌이 든다. 나는 이 사실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감각한다. 마치 이미 나 자신이 목 잘려 죽는 걸 목격한 적 있는 것처럼. 다른 방법으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_〈나, 나, 마들렌〉 197쪽
차츰 머리가 맑아지면서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지금, 내 팔에 닿아 있는 이 미지근한 건, 누구 살이지……._〈나, 나, 마들렌〉 198쪽
내 곁에 누워 있는 낯선 사람은 다름 아닌 나였다.
나와 똑같이 생긴 얼굴을 나와 똑같은 손으로 후려친 다음 아파하면서, 동시에 나처럼 놀라고 불안해하면서 나를 보고 있는 나의 존재가 꿈이 아니었다._〈나, 나, 마들렌〉 199쪽
내가 둘로 쪼개지는 듯한 느낌은 이때 이미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감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_〈나, 나, 마들렌〉 218쪽
그 순간 무겁고 날 선 도끼가 정수리 한가운데를 빡 하고 내리치는 듯한 격통이 있었고 나는 따뜻한 피자가 치즈를 늘어뜨리며 갈라지듯 찌익, 쩌억 하고 둘로 나뉘었다. 마들렌의 눈앞에서. 아, 이런 식이었군. 의식이 있는 채로 갈라진 건 또 처음이라 나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먼저 했다._〈나, 나, 마들렌〉 225쪽
물론 한동희가 믿는 것처럼 내가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의 의미를 알 듯싶었다. 나를 신이라 생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면, 언젠가 자기에게 죽으라 했던 이에게 그렇게 말했다면 그건 신에게 저항하겠다는 의미였다.
당신은 나한테 죽으라고 했지만 그렇게 순순히 죽지는 않겠다는 말._〈마치 당신 같은 신〉 262~263쪽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체공녀 강주룡》이후 5년, 반전과 전복의 서사
《나, 나, 마들렌》에는 기이한 환상의 세계를 형상화한 단편들이 포진해 있다. 표제작이자 2023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나, 나, 마들렌〉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나’의 과자(여자) 친구인 마들렌은 지금 집에 없다. 그렇다면 나의 팔에 닿는 미지근한 건 대체 누구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내 곁에 누워 있는 낯선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언젠가부터 나는 ‘복수의 일인칭’으로 분열되고 한 명의 나는 출판사로 출근을 하고 또 다른 나는 과자 친구 마들렌을 위해 법정으로 향한다. 진정 나는 마들렌을 사랑할까, 사랑한다고 생각할까. 마들렌과 마들렌을 성추행한 소설가 사이에서 나의 진심은 무엇일까. 결국 증언을 해달라는 마들렌의 부탁을 거절하는 ‘나’는 또 다른 ‘나’로 분열되고 겁을 먹고 놀란 마들렌은 집을 나간다. 더 이상 쪼개지면 안 돼. 복수의 일인칭인 나는 식칼을 놓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또한 한계 없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 전파로 쑥대밭이 된 서울에서 탈출해 강원도로 향하는 여자. 오직 전진만을 반복하고 방해당할 경우 폭주하는 감염자들을 피해 식량과 잠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하루하루가 버겁지만 어쨌든 차가 있어 지금껏 살아남았다. 어느 날 밤 낯선 노크 소리 뒤에 나타난 남자애는 자기를 제발 데려가달라고 한다. 기묘한 동행에서 이들이 만난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
〈김수진의 경우〉의 ‘김수진’은 성별 정정까지 완료한 트랜스젠더다. 엄마가 되고 싶은 수진은 이른바 ‘인공 임신 프로젝트’에 뽑혀 인공 자궁 이식 수술 실험에 참여한다. “자연 자궁이 없었던 나에게 인공 자궁을 이식하는 수술이 성공한다면 더 많은 김수진들이 엄마가 될 기회가 생기겠지”(161쪽) 어렴풋한 사명감까지 짊어진다. 수술 성공 후 정자와 난자를 공여받아 임신 단계에 들어가려 하지만 그 길은 순탄치 않다. 결국 심리적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트랜지션 전 자신이 얼려두었던 정자와 공여받은 난자로 자궁 내 착상을 유도하고 몇 번 시도 후 임신에 성공한다. 늘 수진을 지지했던 엄마와 이 험난한 출산 과정을 함께한다. 여성이 된다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고정된 성 역할과 ‘정상 가정’ 개념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인다.
〈김수진의 경우〉가 특별한 상상력을 통해 탄생의 숭고함과 고난을 말한다면 〈세네갈식 부고〉와 〈마치 당신 같은 신〉은 애도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세네갈식 부고〉 속 ‘나’는 대학 시절을 함께한 독특한 친구 ‘드바’의 장례식에 불참했고, 그를 애도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가 청춘을 보냈던 도서관에 방화하러 나선 참이다. 아프리카에서는 한 사람이 죽으면 그의 도서관이 불탄 것과 마찬가지라는 농담을 나눈 바 있어서다. 결기와 고집으로 생활 도서관 관장을 유지한 그의 존재는 내게 피곤함을 안겼다. 자본주의가 급습한 대학 캠퍼스 내에서 효용성을 늘 증명해야 하는 생활 도서관의 위상이란 위태롭기 그지없어 그는 늘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 이데올로기가 휩쓸고 간 뒤 지성의 성전을 지키는 패잔병과도 같았던 드바의 “총체적으로 엉망”인 사명이란 무엇이었나? 나는 방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
〈마치 당신 같은 신〉 속 휴먼 다큐 제작사의 조연출 담당인 ‘나’는 희귀병 환자를 찍으러 내려간 고향의 병원에서 후배와 마주한다. 고향을 떠났던 사람과 고향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만난 셈.‘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걸던 드센 그 초등학생 ‘한동희’는 불치병으로 하루하루 악전고투 중이고, 급기야 어릴 적 내가 내뱉은 죽으라는 말 때문에 자기가 진짜 죽을병에 걸린 것 같다니? 내가 “신일지도 모른다는 거”(263쪽) 다. 아픈 것도 낫게 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만약 내가 신이라면 나야말로 가장 잘되어 있을 테고 방송국에 납품할 최루성 다큐나 찍으러 다니지는 않을 거라는 말은 하지 못한 채,“그래” 대답하고 만다.
망해가는 세계 속 분투하는 개인들의 연대와 사랑
한국문학의 위풍당당한 미래, 박서련 소설이 열어갈 지평
〈한나와 클레어〉 와 〈젤로의 변성기〉는 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분투하는 여성들의 미묘한 감정과 연대, 사랑을 담았다. 〈한나와 클레어〉는 친구가 양도해준 미스터리 쇼퍼 바우처를 쓰고자 호텔에 투숙한 한나와 그를 응대한 룸메이드 클레어와의 신경전이 이야기의 주축이다. 질투와 선망의 애매한 경계에서 손님과 직원이라는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고 “그도 그럴 것이 한나와 클레어는 사실 옷만 바꿔 입는다면 누가 한나고 누가 클레어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닮았다”(119쪽)는 사실은 기이한 아이러니를 낳는다. 계층간 심리, 사회적 가면으로 무장한 다양한 인물형 등을 꼬집는다.
〈젤로의 변성기〉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소년 주인공 목소리를 장기간 맡아온 50대 여성 성우와 실력은 별로지만 순정 만화 같은 외모에 팬덤이 막강한 20대 여성 신예 성우의 감정 교류를 극중극 형식으로 교차하며 묘파한다. 거의 평생을 소년 목소리로 살고 그걸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나’에게 청춘의 후배는 눈부시고 사랑스럽다. “다시 한번 깨어날 수 있는 다음, 다음 순간이 더 이상 없다는 것. 낡아버린 몸에 소년의 음성을 지닌 여자 오선재의 몸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77쪽). 여성의 몸과 노화, 욕망을 섬세하게 파고드는 심리 묘사가 빛난다.
“꼭 선배님처럼 되고 싶어요.”그 말은 엄마 같다는 말보다 훨씬 슬펐다. 나처럼은 안 돼, 라는 말이 울음이 터질 듯 부풀어 좁아진 목 안을 자꾸 더듬어 나오려 했다. 왜요, 라고 묻겠지. 나처럼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 나처럼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겠지. 저주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 애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꼭 나처럼 되렴 하고 별 마음 없는 덕담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저주라는 사실을 내가 아니까._〈젤로의 변성기〉(74~75쪽)
박서련은 2023년 4월 한 인터뷰에서 여러 장르의 인물을 차용하는 것에 답했다. “기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되 이전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고. 장르와 소재, 형식 등의 유연함과 새로움은 이러한 각오에서 나오는 듯하다. 작가는 강력한 소설적 재미를 제공하면서도 매번 자신의 세계를 갱신해나가고 있다. 문학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좀더 자주, 좀더 멀리 도약할 수 있는 건 이렇듯 부단한 갱신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다채로운 서사, 흡인력 넘치는 전개, 밀도 높은 주제의식으로 무장한 진짜 이야기꾼 박서련의 다음 행보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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