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의 시간
2024년 10월 29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9월 23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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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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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완성한, 잊어버린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
“어쩌면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르겠네, 인간으로서의 자존심.”
노란 택시를 타고 온 손님들
새우 양식장
영석이네
흔들리는 것들
화투점
다시 길 위로
산12번지 시민아파트
해방촌
지우
사회안전법
유령의 시간
에필로그
개정판 작가의 말 | 초판 작가의 말
고무보트는커녕 낯선 판자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설혹 누군가 모래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꼭꼭 숨어 있다고 해도 온몸에 곤두선 이섭의 촉수로 금세 알아차릴 것만 같은 그 기척은 끝내 어디서도 감지되지 않았다. 집을 나올 때부터 팽팽히 부풀어올랐던 기대가 일시에 무너져버렸다.
이섭은 매일 아침 모래기둥처럼 허물어지면서도 끈질기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_「새우 양식장」에서
단단한 투구와 갑옷까지 거창하게 차려입은 채 온몸을 굽히고 손을 모은 자의 비굴함을 보는 것 같아 잡힌 새우를 볼 때마다 기분이 언짢아지곤 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보면서도 언짢음이 쉽게 가시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허약한 것들의 비루함이라니. 생각해보면 허약한 자신에 대한 이섭의 적의는 제법 뿌리가 깊었다
_「새우 양식장」에서
“그럼 저 녀석이 뭘 할 수 있겠어? 공무원이나 선생을 할 수 있겠어, 그럴듯한 회사에 들어갈 수가 있겠어? 취직은 꿈도 못 꿀 일인데 장사나 해야지. 저 녀석이 내 아들인 이상 남들처럼 평범한 삶은 어림도 없어.”
_「화투점」에서
특별히 신원 조회까지 할 것 같지 않은, 작은 규모의 무역회사였다. 애초에 학교나 공무원, 또는 그럴듯한 회사 따위에 발 들여놓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지만 소규모 회사에서까지 신원 조회를 당하고 나니 이 땅 어디에도서 있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철저히 봉쇄당한 기분이었다. 오직 몸뚱어리 하나만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에서 영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은 공포감이 몰려왔다. 아니 몸뚱어리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사지를 결박한 채 조금씩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_「다시 길 위로」에서
당연히 자기 몫인 줄 알았던 산의 나무가 가난한 운식의 몫을 빼앗은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이섭은 당장 운식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야 자신의 몫도 정당해질 것 같았다. 꿈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꿈은 결국 꿈일 뿐이었고, 그조차 한쪽 땅에선 범죄이자 절대악이었다.
_「해방촌」에서
“일제로부터 해방뿐 아니라 사람 해방도 반드시 이뤄내야 할 일이니라. 무릇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평등하거늘 누구는 상전으로 누구는 아랫것이 돼 평생을 그리 살아야 한다는 건 그 단맛을 놓지 않으려는 자들이 만들어낸 구실일 뿐이야.”
_「해방촌」에서
저쪽과 다르다는 것이 안심이 됐지만 이쪽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가 지형은 불안했다. 결국 아버지는 이쪽과 저쪽 모두가 싫어하는 존재가 돼버린 걸까. 지형은 팔딱거리는 가슴을 옆자리 노미에게 들키지 않으려 가만히 팔짱을 끼었다.
_「지우」에서
세상 모든 게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았다. 지금껏 뜨겁게 품고 있다고 믿었던 것들은 실상 형편없이 허약하고 믿을 수 없는 것들에 불과했다. 한순간에 폭삭 내려앉을 수 있는, 재 같은 것들이었다.
_「사회안전법」에서
한때 목숨을 걸었던 신념과 열정에 보기 좋게 배반당한 후, 이섭은 적어도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길이라 믿고 다시 이룬 가족과 아이들을 위해서 발바닥에 피가 나도록 걸었다. 그러나 길은 느닷없이 끊기고 사라져버렸다. 이섭은 다시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억지로 버티고 있던 마음의 철심이 툭,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_「사회안전법」에서
파출소장은 러닝셔츠 차림으로 평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이섭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이섭을 보기나 한 것인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여전히 부채질을 계속했다. 저토록 무심한 그의 얼굴이 언젠가 감시와 의혹의 눈길로 이섭을 쳐다보게 될지도 모른다. 이섭은 식은땀을 흘리며 그의 곁을 조심스럽게 지나쳤다.
_「사회안전법」에서
“그곳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아니 그것이 무엇이든, 뭐라도 있기나 한 걸까. 그저 텅 빈 공간에 불과한 건 아닐까. 인간의 생이여, 헛되고 헛되도다. 하물며 이념과 꿈이라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꾸지 않는 생은 또 얼마나 헛될 것인가.”
_「유령의 시간」에서
아버지와 큰아버지 그리고 그들의 숱한 동지들이 몸을 던져 이루려 했던 아름다운 세상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욕망이 철저히 통제된 세계와 욕망이 지나치게 과잉된 세계, 지형은 그 어느 쪽에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_「에필로그」에서
“작가의 아버지가 투영된 인물이자 해방 전후 10년 만에 삶이 무너진 주인공 ‘이섭’의 역사를 복원하며, 국가와 사회의 역사가 어떻게 개인의 역사를 망가뜨렸는지를 기록하기 위해 노력한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이 서둘러 달려온 한국 현대사가 흘린 남겨진 진실, 진정성 등을 수습하는 문학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였기에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_제24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선정 사유
“거창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가 되었다. 중학교 3학년, 갑작스러운 그의 죽음 앞에서 나는 비로소 그의 인생에 강력한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는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내겐 한없이 다정했던 그에 대해 갑작스러운 의문들이 생겼다. 아니 인간의 삶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는 왜 갑자기 죽어야 했을까?”
_「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분단 79년, 한국 현대사의 증언이자
망각과 무감으로 분절될 수 없는 ‘사람의 이야기’
김이정 자전적 장편소설
2015년 발표되어 2016년 제24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 김이정의 『유령의 시간』이 새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작가 부친의 이야기이자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유령의 시간』은 인간성을 짓밟는 전쟁과 분단이라는 폭압의 시간 속에서 사회주의를 택했던 한 남자의 발자국마다 피가 고인 삶을 핍진감 있게 그려내 “한국 현대사가 흘린 남겨진 진실, 진정성 등을 수습하는 문학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전쟁과 분단이 낳은 이념의 대립은 분단 79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 갈등의 큰 축을 차지하고 있고 9년 전 발표한 작품 속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달라진 것이라면 이를 망각하고 무감하게 만드는 희미해진 역사의식이지 않을까.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았고 직접 체험자들이 사회구성원으로 함께 공존하는 오래지 않은 역사, 현존하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급변하는 사회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 혼자 울고 있는 네다섯 된 아이의 흑백 영상이 지구의 탄생신화만큼 먼 이야기로 만들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의 이야기는 분절되지 않는 진행형이기에 망각과 무감의 시대에 그들의 증언과 기록은 유의미하다. 한국 현대사의 증언이라고 할 수 있는『유령의 시간』을 통한 전쟁과 분단의 폭압적인 인간성 말살의 추체험은 국가와 국민, 공동체와 개인에 대해 입체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줄 것이다.
“반복해서 벌어지고 있는 생의 함정들이 문득 저승인 듯 캄캄했다.
이 땅에선 영원한 죄인일 수밖에 없는가.”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을 다녀온 이섭은 독립운동을 하던 숙부의 영향으로 사회주의를 선택하고 아내와 세 아이를 남한에 둔 채 월북한다. 북한의 피폐한 현실을 목도한 이섭은 다시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내려오지만 사라진 ‘빨갱이’ 남편 대신 젖먹이를 품에 안고 끌려갔다는 아내와 형에게 맡겨진 두 아들이 그를 찾아 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내와 세 아이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일상마저 침탈하는 국가권력의 공포 속에서도 이섭은 다시 꾸린 가정만은 잃지 않겠다 다짐한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가구와 책 카탈로그를 봉투 가득 들고 구두 밑창이 다 닳도록” 돌아다니는 그는 책임감 강하고 성실한 보통의 가장이었다. 하지만 ‘사회안전법’이라는 빠져나갈 수 없는 올가미 앞에서 되살아나는 공포감에 그의 생은 무너지고 만다.
이섭과 새 가정을 꾸린 미자는 이섭을 만나기 전 허망하게 남편을 잃었다. 피란을 떠나기 전날 밤 남편이 탄피인 줄 알고 장난삼아 만지던 수류탄이 폭발하였고 남편은 새색시 눈앞에서 신혼방 바닥에 주검으로 내팽개쳐졌다. 죽은 남편의 시신을 체온이 식기도 전에 땅에 묻고 피란을 떠나야 했던 미자는 시부모의 간곡한 청에 못 이겨 친정으로 돌아온다. 미자의 계모는 팔자 사나운 의붓딸을 폐기하듯 열일곱 살이나 차이 나는 이섭에게 보낸다. 이섭에게는 그리움과 죄책감으로 간첩이 되어서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었기에 미자는 그의 처로 호적등본에 오르지 못한 채 네 아이를 낳아 기른다.
이섭이 새우양식장을 운영할 때 한동네에 살며 일을 도왔던 영석이네, 서순희는 정신병동에 입원한 남편 몫까지 혼자 짊어지고 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간다. 월남전에 돈 벌러 갔던 영석의 아버지는 제대 날짜를 6개월 앞두고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고 귀국했다. 남편은 갓난아기들까지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작전 이후 정신이 “잘못 끼워진 나무토막처럼 틀어지기” 시작했다. 영석의 엄마만 알아본 채 부모도 몰라보고 신음과 헛소리에 발작 증세까지 보이던 남편은 끝내 영석이네에게 시퍼런 낫을 들이대던 날 국군병원 폐쇄병동에 갇힌다.
채찍을 든 사내를 보며 이섭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온몸에 경련을 일으켰다. 도대체 인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무한한 애정과 신뢰를 가졌던 인간과 저 채찍을 든 인간은 같은 종이란 말인가? 그들을 ‘인간’이라는 같은 이름으로 불러야 한단 말인가.
이섭은 인간에 대한 환상이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극도의 공포가 몰려왔다. 채찍을 든 남자가 담뱃불을 붙였다. 거의 동시에 정수리로 채찍이 내리꽂혔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오줌보가 터져버렸다. 이섭은 바지가 젖어가는 것도 모른 채 사내의 다음 채찍이 날아올 동안의 정적에 질려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봉인된 기억들은 무덤을 파헤치기라도 한 듯 튀어나왔다. 그것들이 이 생에 다시 되풀이될 수도 있다는 것인가. 사회안전법은 5년 동안 인간이 될 수 없었던 이섭에게 어느 날 그곳으로 다시 처박힐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_「사회안전법」에서
직장을 구할 때마다 신원 조회에서 탈락하고 “철저히 봉쇄당한” “사지를 결박한 채 조금씩 숨통을” 조여오는 것 같은 공포감으로 일상조차 억압당한 이섭, 하늘의 시샘을 살 정도로 정이 좋았던 신혼의 남편을 잃고 “체온이 식지도 않은 사람 위로 흙을 덮을 땐” “같이 그 속으로 들어가고만 싶었”던 미자, 파월 장병들은 이미 베트남에서 철수를 하고 돌아왔는데도 의식의 동굴에 갇혀 “총을 들고 포탄에 살점이 튀는 밀림을 혼자 뛰어다니며 비명을” 지르는 영석의 아버지, “그건 꿈같은 얘기네. 자네는 인간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하나? 나는 인간은 아주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하네”라며 참혹한 현실을 절망도 희망도 꿈꾸지 않고 냉소로 견뎌낸 이섭의 친구 최. 그들이 “창자의 내벽에 굵은소금을 박박 문질러대는 것도 같고 칼로 자근자근 저미는 것도 같은 통증”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내는 동안 그들의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했던 것일까.
“우리 시대 소중한 문학적 성취이다. (…) ‘인간의 시간’을 위한 새로운 공동성을 생산하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 한 인물을 통해 충분함의 윤리를 기반으로 하는 삶의 기쁨의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상상하게 될 것이다.”
_고영직, 〈계간 자음과모음〉 2016년 봄호
망각과 무감의 시대에 다시 꺼내는 ‘분단문학’
문학평론가 고영직은 공위기(空位期)의 분단체제 속에서 “국민이라는 이름의 노예적 삶”을 산 “김이섭이라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냉전시대 분단체제에서 자신만의 리듬과 진동(振動)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음을 증언하는 ‘증언자’”라고 말했다. 나아가 김이정의 소설 『유령의 시간』을 읽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른 실재의 차원을 기도하는 데 있어서 문학이 맡아야 하는 책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국민국가의 존재와 상태에 대해 문학적 ‘증언’을 하는 것이 갖는 의미를 더 자주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평한 바 있다.
우리 사회에서 ‘북한’은 누군가에게는 단장(斷腸)의 슬픔으로, 누군가에게는 붉은 돼지로, 누군가에게는 그저 못사는 나라로, 또 매카시스트의 정당성을 위한 도구로 존재한다. 혐오든 그리움이든 통일이 되기 전까지 철조망 저쪽의 북한은 꾸준히 우리의 일상을 흔들 것이다. 38선에 철조망이 놓이는 순간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도 들어앉은 철조망은, 79년 동안 그랬듯이, 이쪽과 저쪽을 가를 것이다. 그렇기에 철조망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한 묶음으로 얽히지 못하고 “폐가에 버려진 항아리처럼” 고독했던 이섭을 통한 ‘증언’은 오늘도 유의미한 것이 아닐까.
작가 김이정은 2016년 대산문학상 수상 당시 “제 소설은 1970년대가 배경인데,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그때의 역사가 되풀이되는 거 아닌가 하는 기시감에 시달린다”고 말한 바 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희생된 사회주의자가 주인공인 내 소설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민했는데 불행히도 분단과 역사의 폭력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분단을 다룬 여러 작품이 이어져서 분단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랐던 8년 전 작가의 기대는 그래서 오늘도 유효한 듯하다.
현재적 가치만 중요시하는 정보의 시대에 흐려진 역사의식의 자리에는 망각과 무감이 어떠한 불편함도 없이 들어앉았다. 그렇지만 반복되어서는 안 될 전쟁과 분단 76년이라는 유일의 역사를 가진 우리에게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위해 기억해야 하는 시간들이 있다. 이것이 전쟁과 분단의 실체를 ‘증언’해줄 ‘김이섭’이 다시 우리 곁에 놓인 이유이다.
· 이 책은 2015년에 출간된 『유령의 시간』(실천문학사 刊) 개정판입니다.
· 〈교유서가 다시, 소설〉 시리즈는 비록 시장에서 외면받아 사라졌지만 눈 밝은 소수 독자 사이에서 회자되는 작품을 발굴하여 출간합니다. 오로지 눈앞을 향해 달리는 광속의 시대에, 어제의 향수와 오늘의 가치를 환기하는 밤하늘의 별과 같은 이야기의 시대를 복원하면서, 내일을 위해 숨을 고르는 여유를 되찾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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