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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최이아 지음
허블

2024년 10월 23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10월 23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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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15.39MB)
ISBN 9791193078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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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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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과 활동가의 심장을 가진 소설가, 최이아의 첫 소설집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가 허블에서 출간되었다. 8년간 경제지 기자로 일하면서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혐오를 고스란히 목격한 최이아는 사회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비정규직 문제 속으로 직접 뛰어들기로 했다. 활동가로서 만난 성별과 나이를 초월한 다양한 사람들의 연대가 최이아에게 영감을 주었다. 대학교에서 화학을 전공한 작가는 과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미래 한국 농촌 SF 「제니의 역」으로 2023년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우수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는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 「제니의 역」을 포함해 총 6편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최이아는 기자 생활을 통해 목격한 ‘자신이 뱉는 말의 영향력을 숙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언어를 빼앗고 싶었다는 은밀한 반항을 이 작품집에서 폭발시켰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는 무분별하게 언어를 사용할 때 사회가 어떤 식으로 일그러지는지를 차근차근 짚는다. 언어에 틀에 갇힌 편견이 얼마나 잔인한지, 신념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학살이 얼마나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지 들춘다. 최이아의 이 은밀한 욕망으로 탄생한 ‘언어가 사라진 세계’는 재앙과도 같다. 사회는 기능하지 않게 되고 인간들은 스스로 고립을 택한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는 언어의 소멸로 인해 언어의 순기능마저 사라진 역설을 부각시키며,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갈지 함께 고민하고자 하는 소설집이다.
추천의 말
갈아드려요
인구감소정책 추진에 대해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랩에서 생긴 일
푸리앙
제니의 역
작가의 말

돌기에 광을 내기 위해 지구에 오는 행성인은 인상이 말간 상담사를 선호했다. 그들은 막대한 비용을 내고 지구로 왔다. 그러니 신뢰가 가는 얼굴을 가진 상담사와 대화하고 싶을 것이다. 수진은 이 점을 십분 이해했다. 다만 이해한다고 해서 우울해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효과가 나오려면 하루 이틀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닐까.’
고개를 푹 숙인 수진은 걷다 말고 우뚝 선 채 중얼거렸다.
“부족했어. 피가.”
_16쪽, 「갈아드려요」

LM-1 행성에서는 말하는 자의 얼굴을 고루고루 살피는 게 대화 예절이다. 행성인 대부분은 지구에서도 이 예절을 잊지 않았다. 수진은 행성인 손님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입 주변을 손으로 가렸다. (…) 수진은 웃을 때 선명해지는 주름이 신경 쓰였지만 그래도 미소 지었다. 리엔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구석구석 살피며 돌기를 매만졌다.
_14~15쪽, 「갈아드려요」

수진이 눈을 떴을 때, 눈에서 피를 흘리는 여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여자의 눈에서 나온 피는 두꺼운 안경테에 잠시 고였다가 턱까지 주르륵 흘렀다. 턱에는 핏덩이가 맺혔다. 코퍼슬 매장에서 본 시위하는 여자였다. 눈에서 피를 흘리는 여자는 수진의 코앞까지 순식간에 다가오더니 입을 뻐끔거렸다.
“내 딸 피 내놔.”
_38쪽, 「갈아드려요」

‘인구감소정책’을 추진하는 배경은 단순하다.
지구 인구가 80억 명을 넘겼기 때문이다. (…) 너무 빨리 변하는 기후는 지구 생명체 모두가 견디기 힘든 수준에 이르렀다. 우린 치밀한 분석과 연구를 진행했다. 그리고 기후 변화를 늦추기 위해서는 인구를 현 수준의 100분의 1로 줄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_43쪽, 「인구감소정책 추진에 대해」

인구가 1억 명 이하로 줄었을 때는 우리가 전면에 나서서 세계를 통솔해야 한다. 내키지는 않지만 어쩌겠나. 인류가 존속하려면 이 방법뿐인 것을. (…)
인구를 대폭 줄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는 믿음. 인간을 이 지구에 존속시키기 위해 품은 무한에 가까운 인류애. 이것이 내가 여기에 충성하는 이유이자 가슴속에 박애를 심은 계기다.
_45~46쪽, 「인구감소정책 추진에 대해」

중환자실 환자들은 꺼져가는 생명을 붙잡고 침대에 누운 채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회한, 후회, 원망, 증오, 분노, 한탄, 저주가 말 속에 깊이 배어 있었다. 이들의 양쪽 동공은 따로 움직였다.
닫힌 수술실 문틈에는 진한 핏물이 고였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보지 않아도 알 거 같았다. 아진은 수술실 문을 밀었다. 잠시 안을 들여다본 뒤 천천히 문을 닫았다.
아진은 간혹 멀쩡해 보이는 사람과 마주쳤다. 그러나 그들은 어떠한 정보도 교류하지 않았다. 대신 입과 귀를 가린 채 아진을 피해 달아나기 바빴다. 아진은 그들을 쫓지 않았다.
_92쪽,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진실이란 단어가 우스워진 세상, 말의 재현이 불가능해진 사회, 기획된 비문과 혐오의 일상화, 뭐든 안 듣고 사는 게 속 편한 세상, 쓰레기 같은 말….
아진이 제시한 개념은 이런 현상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닐까. 선린에게는 여전히 어려웠지만, 선린은 아진의 통찰이 인간의 내면을 향해 있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
주변의 반응도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아진의 주장을 접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언어학술원 동료도 없지 않았지만, 상당수는 “그래서 뭐라는 거야”라는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
“무서워서 말도 못 하겠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하며 킬킬댔다.
_68~69쪽,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잠시 뒤 아진이 선린을 불렀다. 선린은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욕조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진이 서 있었다. 둘은 부둥켜안았다. 감정이 알갱이를 타고 서로에게 전달되었다. 눈물이 서로의 살을 적셨다. 살은 따듯하고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언어가 사라졌다.
이윽고, 평온이 찾아왔다.
_160쪽,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에탄올 표면에서 아지랑이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휘발성 물질인 에탄올이 기체로 변해 공중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다. 귀를 비커에 바짝 붙였다.
팡팡.
액체는 기체로 변하면서 폭죽처럼 날아올랐다.
“본 물질은 랩을 벗어나 어디든 갈 수 있다오. 하하.”
흐느적거리는 에탄올 아지랑이는 아주 거민하게 말했다.
나는 상체를 번쩍 일으켜 세우고는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교수 대리 기사 노릇을 하는 대학원생을 남겨두고 어딜 가겠다는 것인가! 랩에 갇혀 불가능한 과제를 수행하는 나를 버려두고 감히 에탄올 따위가 어디로 날아가겠다는 건가!
_163쪽, 「랩에서 생긴 일」

“진형아, 지금처럼 20년 정도만 더 하자. 그러면 여기서 어쩌면 나갈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만 참자.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20년….”
“내가 저 좁은 랩에서 지냈던 시간에 비하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야.” (…)
서슬 퍼런 모린의 목소리에 실험 기구들이 동조하듯 덜그럭거렸다.
_188쪽, 「랩에서 생긴 일」

장대 끝에는 구불구불한 머릿결이 휘날렸다.
남자는 푸리앙 과즙을 몰래 맛보다가 장대에 머리가 걸렸다. 그는 과즙인 걸 알고서 팔뚝을 핥은 게 아니라고, 나무 수액이 묻은 줄로만 알았다고 울면서 소리쳤지만, 흑건을 쓴 감독관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도끼로 남자의 목을 내리쳤다. 남자의 얼굴은 몸에서 떨어진 직후에도 비명을 멈추지 않았다. 감독관의 도끼를 들지 않은 쪽 손에는 남자가 숨긴 씨앗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씨앗을 가지고 뭍으로 가려 한 것이다.
_195쪽, 「푸리앙」

“외로우니 제주도여, 외로우니 제주도여….” (…)
이를 한동안 감상하던 감독관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_206쪽, 「푸리앙」

엄마는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부터 어려운 단어의 뜻을 알려달라고 했다. 처음에는 사전을 찾아 단어의 뜻과 용례를 알려줬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나중에’라고 말하며 엄마의 요청을 외면했다. 그때의 내 행동이 후회되기는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다른 선택을 할 거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엄마에게 내 삶에 대한 화살을 돌릴 만큼 못돼먹게 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가슴에 응어리가 없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그저 다른 공간에 있어야 할 삶이 어쩌다 같은 공간에 놓였을 뿐이라고 누르며 살아왔을 뿐이었다.
_237쪽, 「제니의 역」

엄마는 한국에 온 지 가장 오래된 마을 이주민으로 이들 중에서 한국말을 제일 잘했다. 이주 여성들이 엄마를 친언니처럼 따랐기에 체류 자격 변경 같은 행정 업무에 내 잔손이 가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는 여전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엄마.”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는 엄마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엄마는 말이 없었다.
“그러니깐 딴생각하지 마.”
나는 엄마가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아빠와 싸우지 않기를 바랐다.
_241-242쪽, 「제니의 역」

제니는 엄마가 태어난 나라의 언어를 그 옆의 여자가 자란 나라의 언어로, 또 이를 한국어로, 다시 각 나라의 언어로 연결했다. 여자들의 말소리는 모두 달랐지만, 이들의 대화는 한순간도 끊어지지 않았다. 엄마가 자신의 언어로 말하면 찰나의 지연 없이 그 의미가 정확히 다른 여자들에게 전달되었다. 이주 여성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신 있게 말하지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럼, 제니가 마인드베이스 기능을 통해 이들의 언어를 잇고 또 이었다.
_247쪽, 「제니의 역」

★★★★★
기자의 펜을 꺾고 소설가의 펜을 쥘 결심
최이아의 블랙 코미디 SF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우수상 수상작 「제니의 역」 수록

“첫 작품부터 무섭기 시작해서 끝까지 정말 현실적으로 너무 무서웠다. (…) 이런 글쓰기가 가능하려면 사회구조에 내재된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날카로운 인식이 있어야만 한다. 그 인식이 작품마다 스며 있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욱 무시무시하게 빛나는 것이다.”
_정보라(소설가) 추천사 중에서

날카롭고도 근본적인 통찰로 빚은 세계
공포와 해학을 갈아 넣은 이야기들

혐오와 멸시와 불평등이 일상에 만연한 이 땅의 우리에게는, 이토록 작의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소설이 아직은 필요하다고 여겼다.
_구병모(소설가, 「제니의 역」 심사평 중에서)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작은 욕망에서부터 스스로의 세계를 무너뜨린다. 이는 젊어지고 싶은 마음, 성공하고 싶은 마음, 심지어 지구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에서부터도 시작된다. 작은 소망에 불과했던 욕망에 집착할수록 그것은 커다란 파도로 변해 등장인물들의 세계를 쓸어버린다. 최이아의 소설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욕망의 그림자에 가려진 사람들을 주목한다. 수상한 시술을 받고 실종된 딸의 행방을 알고자 하는 어머니(「갈아드려요」), 두 손이 불타고 있어도 성공을 위해 평생 노예 계약서에 서명하는 청년(「랩에서 생긴 일」)….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에는 자신의 욕망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결국 좌절하는 모습과 욕망의 위험성을 인지한 사람들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뒤섞여 있다. 작가는 그 모든 행동에 가치판단을 하지 않고 독자에게 보여준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자비 없는 전개와 말초적인 카타르시스를 주는 반전에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문득, 욕망이라는 것이 어떻게 스스로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것이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의 시작을 여는 「갈아드려요」는 젊음을 추구하는 욕망의 부작용을 말한다. 수진은 K-뷰티를 다른 행성으로 전파한 1세대 뷰티 코디네이터다. ‘눈에 띄는 것은 가꿔야 한다’라는 말로 행성인을 설득해서 미의 저변을 넓힌 수진은 팔자주름이 생긴 자신의 얼굴 때문에 실적이 줄어드는 것이 불만이다. 그래서 신체 나이를 줄이는 인공 혈액 시술에 집착한다. 5리터의 피를 교체하기 위해 수진은 발버둥 친다. 빚이 아무리 불어나도, 인공 혈액의 제조 과정이 아무리 수상해도 수진은 피를 고집한다. 최이아의 과학적 상상력이 곁들여진 “불로장생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상품이 된”(정보라, 소설가) 세계관은 사회적으로 강요되는 미를 향한 욕망이 어떤 모양으로 개인을 갉아먹는지를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얼굴을 뜯어보는 시선이 어떻게 개인을 몰아세울 수 있는지를 말이다. 인공 혈액이 무엇으로 만들어지는지 밝혀지는 마지막 순간, 「갈아드려요」라는 제목에 숨겨진 두 가지 의미를 알아챌 것이다. 그리고 수진 또한 오늘날의 우리처럼 노화와 시선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 명의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소설 「인류감소정책 추진에 대해」는 블랙 유머를 통해 권력과 과학기술이 결합되면 어떤 괴물이 탄생하는지를 해학적으로 보여준다. 비밀 조직에 소속된 ‘나’는 첫 문단부터 “기후 변화를 늦추기 위해서는 인류를 현 수준의 100분의 1로 죽여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43쪽)라고 자랑스럽게 외친다. 물론 ‘나’가 주장하는 논리는 얼토당토않지만 그 안에는 인류에 대한 사명감이 가득하다. 지구의 가장 큰 가해자라는 냉소 섞인 농담을 ‘나’는 진심으로 믿고 시행한다. 버튼을 누르듯 간단하게 시행된 인류 학살은 마지막의 아찔한 반전을 통해 사회의 권력 피라미드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최이아는 “내 안에 깊이 녹아 있는 비열한 면모를 마주한” 것이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의 토대가 되었다고 작가의 말에서 말했다. 이 토대가 SF라는 장르와 버무려져 나온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는 자신이 선량하다고 착각하는 개인들에게도 비열한 면모가 있을 거라는 메시지를 반복해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상처 입히지 않기 위해,
우리에겐 무엇이 필요할까?

“부디 다음번에는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길 바라. 우리가 어디에 있든 함께할 수 있는, 언어의 모든 틀을 초월한 방식으로.” _「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중에서

언어에 대한 최이아의 예리한 통찰은 표제작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를 통해 빛을 발한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경구를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네”(69쪽)라고 비웃는 사람들 앞에 말을 함부로 하면 ‘큰일’이 나는 세상이 펼쳐진다.
로지먼트종합병원 로비에서 원인 모를 바이러스가 퍼진다. 타인에게 공격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이 괴이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몸의 통제를 잃고 질주하다 벽에 머리를 박거나, 차도에 뛰어들어 죽음을 맞는다. 사람들이 당황하는 사이 이 증상은 순식간에 퍼져 세계적인 재난이 된다.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병원은 폐쇄되는데, 이 사태를 예견했던 언어학자 아진과 그의 이론을 폄하했던 아진의 전 연인 레지던트 선린이 병원에 갇히게 된다. 언어의 틀에서 말하거나 생각하면 감염되는 피할 수 없는 미지의 바이러스. 이 바이러스의 정체에 도달하기 위해 선린은 아진의 이론을 인정한다. 아진은 선린의 의견에 맞춰 자신의 가설을 수정한다. 선린과 아진은 언어가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지 깨닫는다. 사실 중요했던 것은 소통 도구에 불과한 언어가 아니라, 이어지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쌓아온 시간이었다. “서운하고 짜증 나고 화도 났지만 그럼에도 소중한 관계의 흔적들”(150쪽). 어쩌면 연대란 무거운 결의도, 필사의 각오도 아닌 훨씬 부드럽고 따뜻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걸지도 모른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에는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연대하는 인물들이 있다. “어디에 있든 함께할 수 있는”(141쪽) 소통 방법을 고민한 아진과(「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옆집에 시집온 이주 여성의 누명을 풀기 위해 “이주 여성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신 있게 말하기만”(247쪽) 하면 된다고 독려한 다은의 엄마처럼(「제니의 역」) 최이아는 타인과 스스로를 상처 입힐 수 있는 ‘욕망’을 삭제한 세상을 잔인하게 그리면서도, 사람은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놓지 않는다. 『이윽고 언어가 사라졌다』 욕망이 파괴된 세상 속에 무엇이 스며들어 그것을 재구성하는지 지켜볼 수 있는 소설집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최이아

기자의 눈과 활동가의 심장을 가진 화학 전공자.
8년간 기자로 일했다.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혐오를 지켜볼 수밖에 없어 고민하다 언론사를 그만두고 비정규직 문제에 직접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활동가로 일하다 만난 다양한 사람들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여기에 과학적 상상력을 더해 소설을 쓰고 있다.
욕망과 이기, 소외와 연대에 관심이 깊다.
2023년 「제니의 역」으로 제6회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단편 「비가 그칠 때까지」로 손바닥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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