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사랑했습니다
2024년 10월 31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9월 23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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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그 한 가지
그는 사랑했습니다
사소한 일
천 개의 마리오네트
어제의 눈물, 그로부터
발문_상처와 슬픔을 사색하는 시간(장두영 문학평론가)
작가의 말
지금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오늘을 살아내는 일. 이렇게든 저렇게든 살아내기 위해 애쓰는 거다.
_「괜찮다고 대답한다」 중에서
아직 따뜻하다. 어머니 목욕을 시켜드려야겠다. 아내가 없는 사이에. 어머니의 목욕을 거들어본 적 없는 아내가 행여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자신의 맨몸을 며느리가 볼까 염려하는 어머니가 서글퍼지지 않도록. 그러나 이건 순전히 나의 생각일 뿐이다. 사실 나는 아내의 마음이나 어머니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넘겨짚고 추측할 뿐이지만, 내가 기대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아마 이런 것들이지 싶다. 누군가의 진심을 헤아린다는 건 모험이 따르는 일이니까. 고무장갑을 벗어 소리 나게 털거나 설거지하고 그릇 내려놓는 소리가 시끄러워도 나는 아내의 낯빛을 살핀다. 손길 움직임 하나 미세한 떨림조차 다 귀에 들리는 순간들이 있다.
_「괜찮다고 대답한다」 중에서
세상은 살아갈수록 재미있는 것 같다. 누군 기필코 살고 누군 기어이 죽는다. 누군 호강에 겹고 누군 버겁게 고생한다. 또 어떤 이는 심심해 죽겠고 어떤 이는 바빠서 죽겠다. 어떤 이는 지지리 가난하고 어떤 이는 각별하게 부자다. 누군 속터지게 말이 없고 누군 끊임없이 떠들어댄다. 고개 숙인 사람, 고개 쳐든 사람. 너무 철학적이었는지 골이 아프다. 욱신거리는 골이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소변이 마렵다고. 뇌 속의 관리 감독관은 역시 고급인력이다. 이런 생리적인 것들은 자기들이 나서지 않고 신호체계로 알려주니 말이다.
_「괜찮다고 대답한다」 중에서
나도 좋았다고. 하지만 두려웠다고. 은하와 함께 햇살 들어오는 집의 창문과 따뜻한 실내 그리고 튼튼한 집의 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내가 나를 믿을 수 없는 시간이 불현듯 찾아오면 당황한 은하가 울상이 된 채 말했다. 믿고 싶었다고. 내가 한 얘기에 꿈을 꿀 수 있었다고. 거짓말쟁이가 되지는 말아야 하는데. 은하를 힘들게 하는 인간은 그게 누구든 죽이고 싶었다. 부당한 대접을 하는 상사나 운전 중 위험하게 끼어들어 사고를 일으킬 뻔한 트럭 기사 그리고 언어폭력으로 마음에 상처를 준 인간들. 폭력적으로 변했다는 친구도.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른 채 학대가 일상이 된 누군가에게 오래전 야구 배트 잡은 손에 느꼈을 감각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그러면 안 되니까. 폭력은 갚는 게 아니니까.
_「그 한 가지」 중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참 좋아.
바깥에서 보는 실내 풍경이 좋으면 어떨까, 자주 생각해.
밖에서 안이 보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은하가 준수를 언뜻 바라보고는 웃었다.
나는 가끔 커다란 창문을 그려. 큰 창문으로 보면 내가 꿈꾸는 풍경이 조금은 보이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
이렇게 등을 돌리고 앉아봐.
준수가 일어나 은하의 의자 등받이를 돌려주었다. 자신도 창문을 등지고 앉았다.
미닫이창이 있고 붙박이창도 있어. 여닫을 수 있는 창도 있고 내려 닫을 수 있는 창도 있지. 형태나 크기는 여러 가지지만 창은 집에 빛을 주기 위해서 만드는 거야. 보여? 햇살이 집에 들어와 있어.
그러네. 따뜻해.
은하의 발가락에 햇살이 앉아 있었다.
_「그 한 가지」 중에서
가늠하기 어려운 건 길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심장이 언제 곤두박질칠지, 흔들리던 눈길이 어느 순간 하얗게 사라진 길을 쫓고 있을지, 머리는 어느 순간 먹통이 되어 판단력을 잃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오롯이 혼자 빠져나가야 하는데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순간, 추월하는 차들처럼 공포가 뒤에서 쏜살같이 쫓아오며 굉음을 냈다. 핸들이 저절로 움직인 것처럼 차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럴 땐 차라리 터널 벽에 차 머리를 박고 그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_「그는 사랑했습니다」 중에서
버스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도로가 혼잡한 탓에 버스 전용 차선조차 밀려 있었다. 보행 신호가 켜졌는데도 차들은 사람들이 건너갈 공간을 다 내주지 못했다. 좁아진 횡단보도 위로 사람들이 차를 피해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건넜다. 문득 살아가는 일이 건널목을 건너는 일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나 대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는 길. 살아내고 죽어가는 일이 몰래 이어지는, 그러나 그저 건너가면 되는 길이다.
_「어제의 눈물 그로부터」 중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세심히 어루만지는 이야기
유희란 소설가 두 번째 소설집
섬세한 필치로 상처받은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유희란 소설가의 두 번째 소설집 『그는 사랑했습니다』가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표제작인 「그는 사랑했습니다」를 포함하여 6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저마다의 상처와 상실, 트라우마를 안고 있는 인물들은 그 모든 것을 고요히 감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눈에 띄는 행동으로 자신이 상처받았음을 호소하지는 않는다. 그저 그들의 내면은 고요히 들끓고 있으며 자신에게 닥친 사건을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지를 할 수 있는 한 가늠해보는 중이다. 이 소설집은 그렇게 자신을 보듬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이기도 하다.
“상처와 슬픔에 관한 깊은 탐색의 결과인 유희란의 소설은
희망을 향한 응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_장두영(문학평론가)
첫 번째 수록작인 「괜찮다고 대답한다」의 주인공은 구조조정의 대상이 된다. 중년의 나이에 갑자기 직장을 잃은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늙은 어머니가 있다. 만나는 친구들도 모두 특별할 것 없는 소시민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기에 모두 한둘씩 삐걱거리는 사정이 있고 저마다의 곤경을 견뎌내며 삶을 버티는 중이다.
「그 한 가지」의 주인공 준수에게도 삶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이다. 세입자가 이사를 나가고 집을 확인하던 준수는 여러 곳에서 전 세입자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들을 발견하지만 그에게 따져 묻지 못한다. 다만 그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지를 곱씹어볼 뿐이다.
중편 분량의 「그는 사랑했습니다」는 남편에게 동성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아내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한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갈등과 감정적 소용돌이”를 집요할 정도로 섬세하게 그려낸다.
「사소한 일」의 상미는 아주 어린 시절의 불행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다. 동창들과의 모임에서는 몸을 치장한 명품과 대화 속에서 서로의 경제 사정을 가늠하기 바쁘다. 돈이 필요한 친구에게 선뜻 큰돈을 빌려주겠다고 허세를 부리지만 여유자금은 없어 오랫동안 들었던 적금을 깨서 빌려줘야 하는 처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납득이 가지 않는 말과 행동들도 그가 지나온 시간을 헤아리다 보면 그러한 허세가 상미에게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천 개의 마리오네리트」의 상처와 고통은 좀처럼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이 이야기의 바깥에서 동정의 시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갖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그 시간을 온몸으로 겪어내고 있는 ‘나’는 누구보다도 삶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소설집의 마지막에 수록된 「어제의 눈물, 그로부터」의 ‘나’와 수연은 각각 사랑했던 친구, 애인인 준기를 잃고 긴 애도의 시간을 통과하는 중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상처와 죄책감을 떠오르게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행복했던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 또 각자가 지닌 삶의 무게를 공감해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무심히 지나가버린 일상 속에서도 저마다 얼마나 긴 슬픔을 견뎌내고 있는지를 유희란은 자신만의 섬세한 스타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 그 누구도 쉽게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려낸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상처와 슬픔이란 겪어내야 하는 것이며, 아무리 슬픔으로 가득 찬 인생일지라도 살아내야 한다는 삶의 의무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장두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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