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2024년 09월 30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9월 1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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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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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팡이처럼 스멀스멀 솟아나기 시작한다.
작가의 말
정보라 작가 인터뷰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두뇌 업로드가 완료되는 날까지, 혹은 정부가 프로젝트를 중단하는 날까지 (이쪽이 더 빨리 닥칠 가능성이 크다) 해가 떠 있는 대부분의 낮 시간을 나는 이 좁은 방 안에서 가느다란 햇빛을 받으며 무의식 상태로 누워서 보내게 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현재로서는 내가 예측할 수 있는 최선의 상황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문득 조그만 햇살이 몹시 아쉽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버스가 떠난 뒤에 텅 빈 마당으로 나가보았다.
그때 나가지 말 걸 그랬다고 나는 나중에 몇 번이나 후회했다. 괜히 밖에 나가지 않았으면 그 재수 없는 인간을 만나지도 않았을 텐데. (13~14쪽)
누워서 자면 돈을 받는다는 게 어쩐지 너무 훌륭해 보이는 조건이라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그때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슬픈 예감은 언제나 그렇듯이 들어맞았다. 어디에나 통계적으로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는 또라이가 있는 법이고 주변에 아무도 또라이가 없으면 내가 그 또라이라고 하지 않던가. 어디서 들었는지는 잊었지만 이 말은 정말 인생의 진리였다. (16~17쪽)
“참 좋은 분이에요. 제 옆방인데 낮에는 일하고 밤에만 올라와서 업로드하나 봐요.”
915호가 요가 선생님에게 화낼 때와는 딴판으로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그런데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세요? 연락처 교환하고 친하게 지내요, 우리.”
말하면서 915호는 나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생글생글 웃었다.
이 사람하고는 아무것도 교환하고 싶지 않다.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41쪽)
“여보세요? 여보세요! 문 열어주세요!”
그 목소리를 듣고 나는 강도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915호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보세요! 안에 있죠?”
나는 발소리를 죽여 침대로 가서 머리맡에 두었던 전화기를 집어 알림 소리를 무음으로 설정했다. 915호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필 이런 순간에 만에 하나 어디서든 전화가 오면 정말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915호는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연휴에 건물 안에 사람이 몇 명이나 남아 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이 건물에, 아니 이 지역 전체에 나와 저 미치광이 단둘만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가장 가까운 경찰서는 자동차로 적어도 네 시간 거리에 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겨도 도와줄 사람은커녕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걸 아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었다. (44~45쪽)
“지금 여기 입주하고 나서 신경망 피싱으로 불법 도박에 음란 사이트에 이제는 가상 마약에 중독까지 될 뻔했어요. 지원팀이 오셔서 불법 서버가 어디 있는지 찾으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최근에 이런 신경망 피싱 시도가 자주 일어나서 저희 지원팀이 지금 다른 센터에 나가서 모니터링 중입니다. 내일 지원팀 업무 개시하면 문의 전달하겠습니다.”
결국 안 온다는 얘기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50~51쪽)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행정의 관점에서 볼 때 서울 한복판에 전입신고를 하고 주소지를 갖고 살 돈이 없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밀려나고 밀려나다 못해 이 산속에 모여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에게도 아무것도 아니다. 살아 있으니까 살고 있을 뿐이다.
너의 먹잇감이 되기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내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듯, 네가 죽어도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다.
나는 밟았다. 기분이 좋았다.
겨울 산길은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얼어붙은 땅과 내 발 사이에서 사람의 목이 우드득, 하고 부러졌다. (68~69쪽)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비정한 현실, 고통을 피해 달아날 곳이 없는 사람들
“정말로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저주토끼〉 정보라의 섬뜩한 일상 공포
소설집 《저주토끼》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연작소설집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에세이 《아무튼, 데모》로 계속해서 싸우고, 끝까지 항복하지 않는 저항의 힘을 보여준 정보라 작가의 신작 소설 《창문》이 위즈덤하우스 단편소설 시리즈 위픽으로 출간되었다.
인공지능이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는 시대, 정부는 인간의 뇌를 통째로 데이터화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인터넷을 떠도는 ‘가짜’ 정보가 아닌 ‘진짜’ 인간의 뇌를 인공지능에게 학습시키고, 이를 기반으로 사회 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것. 달리 갈 곳이 없던 ‘나’는 공짜로 재워주고 돈도 준다는 이유만으로 정부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산골짜기 한가운데에 위치한 기계학습센터에 입주한다. “제18차 기술지식혁명 어쩌고 토탈 인공지능 파워빌딩 프로젝트가 저쩌고 뭔지 알 수 없는 텅 비고 화려한 수식어”처럼 번쩍거리고 매끈한 공간이 아닌, 기계학습센터는 산골짜기 한가운데 폐교된 대학교 기숙사를 개조한 곳에 위치한다. “당신의 뇌를 통째로 삽니다”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돈이 된다”라는 광고 문구가 마치 미래형 매혈이나 장기매매를 연상시킨다. 변두리로 내몰린 사람들, 밀려나고 밀려나다 못해 더 이상 갈 곳 없는 사람들, “살아 있으니까 살고 있을 뿐”인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이 그저 공짜로 재워주고 돈도 준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의식과 기억을 전부 팔아넘긴다.
하루 여덟 시간씩 꾸준히 뇌 속 정보를 업로드하는 단조로운 일상이지만, ‘나’에게는 뜻하지 않은 사건들이 곰팡이처럼 스멀스멀 솟아나기 시작한다. 맥락 없는 대화와 과장된 아첨을 덧붙이며 다가오는 915호 또라이를 마주치는가 하면, 도박, 마약, 포르노 등의 화면들이 두뇌연결된 ‘나’의 뇌 속을 제멋대로 휘저으며 펼쳐진다.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이 모여 두뇌를 연결하는 아주 단순한 행위를 반복하는 이 폐쇄적인 공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는 불쾌한 타인과 뇌 속을 침입하는 황당한 화면들이 반복해서 ‘나’를 헤집는 가운데, 실체를 알 수 없는 정부의 프로젝트도 끝을 향해 달려간다.
일상 속 무시무시한 공포와 뒤통수를 강타하는 듯 완벽하게 전복되는 이야기의 힘은 정보라 작가의 가장 큰 무기다. 독자들은 ‘나’가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소설을 따라가다가, 순식간에 가해자로 바뀐 뒤에도 쉽사리 이입된 감정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끝내 묘한 통쾌함과 상쾌함을 느끼며 혼란에 빠져든다. 소설을 읽는 동안 “불길하고 사악한 어떤 것이 머릿속에 차근차근, 한 톨씩, 한 방울씩 스미는 것”처럼 뇌를 점령당한 기분을 느끼다가, 책을 덮고 나면 비로소 진정한 공포가 시작된다. 과연 진짜 또라이는 누구일까? 나는 절대로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
위즈덤하우스는 2022년 11월부터 단편소설 연재 프로젝트 ‘위클리 픽션’을 통해 오늘 한국문학의 가장 다양한 모습, 가장 새로운 이야기를 일주일에 한 편씩 소개하고 있다. 구병모 〈파쇄〉, 조예은 〈만조를 기다리며〉, 안담 〈소녀는 따로 자란다〉, 최진영 〈오로라〉 등 1년 동안 50편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위픽 시리즈는 이렇게 연재를 마친 소설들을 순차적으로 출간하며, 이때 여러 편의 단편소설을 한데 묶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단 한 편’의 단편만으로 책을 구성하는 이례적인 시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한 편 한 편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위픽은 소재나 형식 등 그 어떤 기준과 구분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단 한 편의 이야기’라는 완결성에 주목한다. 소설가뿐만 아니라 논픽션 작가, 시인, 청소년문학 작가 등 다양한 작가들의 소설을 통해 장르와 경계를 허물며 이야기의 가능성과 재미를 확장한다.
시즌 1 50편에 이어 시즌 2는 더욱 새로운 작가와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시즌 2에는 강화길, 임선우, 단요, 정보라, 김보영, 이미상, 김화진, 정이현, 임솔아, 황정은 작가 등이 함께한다. 또한 시즌 2에는 작가 인터뷰를 수록하여 작품 안팎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1년 50가지 이야기 축제를 더욱 풍성하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위픽 시리즈 소개∥
위픽은 위즈덤하우스의 단편소설 시리즈입니다. ‘단 한 편의 이야기’를 깊게 호흡하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합니다. 이 작은 조각이 당신의 세계를 넓혀줄 새로운 한 조각이 되기를, 작은 조각 하나하나가 모여 당신의 이야기가 되기를, 당신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 한 조각의 문학이 되기를 꿈꿉니다.
한 조각의 문학, 위픽
구병모 《파쇄》
이희주 《마유미》
윤자영 《할매 떡볶이 레시피》
박소연 《북적대지만 은밀하게》
김기창 《크리스마스이브의 방문객》
이종산 《블루마블》
곽재식 《우주 대전의 끝》
김동식 《백 명 버튼》
배예람 《물 밑에 계시리라》
이소호 《나의 미치광이 이웃》
오한기 《나의 즐거운 육아 일기》
조예은 《만조를 기다리며》
도진기 《애니》
박솔뫼 《극동의 여자 친구들》
정혜윤 《마음 편해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워크숍》
황모과 《10초는 영원히》
김희선 《삼척, 불멸》
최정화 《봇로스 리포트》
정해연 《모델》
정이담 《환생꽃》
문지혁 《크리스마스 캐러셀》
김목인 《마르셀 아코디언 클럽》
전건우 《앙심》
최양선 《그림자 나비》
이하진 《확률의 무덤》
은모든 《감미롭고 간절한》
이유리 《잠이 오나요》
심너울 《이런, 우리 엄마가 우주선을 유괴했어요》
최현숙 《창신동 여자》
연여름 《2학기 한정 도서부》
서미애 《나의 여자 친구》
김원영 《우리의 클라이밍》
정지돈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들》
이서수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
이경희 《매듭 정리》
송경아 《무지개나래 반려동물 납골당》
현호정 《삼색도》
김 현 《고유한 형태》
김이환 《더 나은 인간》
이민진 《무칭》
안 담 《소녀는 따로 자란다》
조현아 《밥줄광대놀음》
김효인 《새로고침》
전혜진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자르면》
김청귤 《제습기 다이어트》
최의택 《논터널링》
김유담 《스페이스 M》
전삼혜 《나름에게 가는 길》
최진영 《오로라》
이혁진 《가장 완벽한 주행》
강화길 《영희와 제임스》
이문영 《루카스》
현찬양 《인현왕후의 회빙환을 위하여》
차현지 《다다른 날들》
김성중 《두더지 인간》
김서해 《라비우와 링과》
임선우 《0000》
듀 나 《바리》
한유리 《불멸의 인절미》
한정현 《사랑과 연합 0장》
위수정 《칠면조가 숨어 있어》
천희란 《작가의 말》
정보라 《창문》
작가정보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예일대에서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거쳐, 인디아나대에서 러시아문학과 폴란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주토끼》로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23년 국내 최초로 전미도서상 번역문학 부문 최종 후보에도 이름을 올렸다. 소설집 《저주토끼》 《한밤의 시간표》 《지구 생물체는 항복하라》, 장편소설 《호》 《고통에 관하여》 《밤이 오면 우리는》 등, 에세이 《아무튼, 데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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