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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의 지리학

로리 파슨스 지음 | 추선영 옮김
오월의봄

2024년 10월 18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9월 0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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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25.13MB)
ISBN 979116873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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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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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웨이스트나 플라스틱 사용 줄이기 같은 이른바 ‘착한 소비’가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을까? 만일 그렇다면, 기후재앙은 왜 점점 더 심해지고 가속화되는가? 각종 글로벌 기업들은 ‘지속가능성’, ‘녹색 성장’, ‘공정무역’, ‘친환경’, ‘유기농’ 따위의 구호와 라벨을 부착한 제품들을 쏟아내고, ‘윤리적 생산’을 촉구하는 소비자들의 목소리도 어느 때보다 높다. 그러나 현실은 정작 그 반대로 치닫고 있다.
시종일관 노동의 관점에서 이 책을 써내려간 지리학자 로리 파슨스는 그런 ‘녹색 전망’에 강한 의혹을 제기하며 글로벌 공급망이 감추고 있는 진실을 파헤친다. 하나의 재화가 더 이상 하나의 국가에서 생산되지 않는 글로벌 생산의 시대에 국내 탄소배출량만을 토대로 ‘탄소 감축’을 외치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가? 기업들은 가난한 국가들로 공장을 이전하면서 환경오염과 기후붕괴를 함께 팔아넘기고, 부유한 국가들은 그런 해외 생산의 폐단을 묵인하며 여전히 자국의 경계 안에서 배출된 탄소만을 집계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이 주장하는 친환경과 탄소 감축 노력의 실체다.
저자는 이 낡은 탄소 회계 메커니즘을 추적하기 위해 동남아시아(캄보디아)의 여러 생산 공장을 누비며 현장연구를 이어왔다. 환경저하와 기후위기가 중립적인 자연 현상이 아닌 ‘거대한 불평등’임을 직시하는 것이 그 논의의 출발점이다. 인상 깊게도 저자는 그간 숫자와 통계 자료, 충격적인 스펙터클로만 전달되어온 기후위기 현상을, (그 현상을 겪는) 한 개인의 삶 자체로 현현한다. 이런 ‘주관성’은 이 책만의 독특한 관점, 즉 기후변화를 부자가 아닌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직격하는 재앙으로 탁월하게 문제화하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 저자가 강조하듯, 기후는 절대로 혼자서 행동하지 않는다. 기후는 벽돌 가마와 의류 하청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도시 빈민의 삶을 통해(서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프롤로그_ 지속가능한 미래라는 신화 13
지속가능성을 향한 진화? 22 | 무지라는 이윤 33

1부 글로벌 경제의 어두운 세계

1장 글로벌 공장의 500년 역사: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경제 체계 46
산업 노동력의 탄생 55 | 의류 산업의 과거와 현재 67

2장 ‘훌륭한 소비’와 ‘지속가능성’이라는 함정: 공급망의 심연 78
글로벌 공장의 그린워싱 92 | 글로벌 공장이라는 거대한 공백 105

3장 탄소 식민주의: 부유한 국가들은 어떻게 배출량을 외주화하는가 118
의류 산업의 지리학 129 | 기후변화의 감춰진 진실 135 | 탄소 식민주의 141

2부 기후변화라는 거대한 불평등

4장 기후 불안정성: 글로벌 불평등이 만들어낸 취약성 152
신호와 잡음 159 | 기후변화의 경험들 171

5장 돈이 말한다: 기후 발언을 둘러싼 권력관계 184
인간 그리고 자연 194 |기후 지식이라는 권력 199 | 볼 수 있는 힘 205

6장 양의 탈을 쓴 늑대들: 기업 논리는 어떻게 기후행동을 포섭하는가 222
강우 도박 231 | 기후 진실의 정치학 242

에필로그_ 탄소 식민주의를 부추기는 여섯 가지 신화 257
환경에 대한 여섯가지 신화 264 | 첫 번째 신화 267 | 두 번째 신화 271 | 세 번째 신화 277 | 네 번째 신화 283 | 다섯 번째 신화 289 | 여섯 번째 신화 292 | 탄소 식민주의를 종식시키자 295

주 303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위험에 노출되는 취약성이 결코 불가피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선택, 혹은 좀 더 적절하게는 부富의 유무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함수이다. -20쪽

재해 위험의 지리학에서는 돈이 빠질 수 없다. 아이티, 미얀마,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같은 국가들은 산사태, 가뭄, 홍수, 폭염에 직면해 있고 이런 위험들은 앞으로 더욱 악화될 것이다. 수백만 명의 민중에게 이것은 농사의 중단과 식량의 부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의미를 반드시 이런 결과에서 찾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의 원인은 부의 창출에 관련된 환경 비용을 부를 축적하는 곳과 동떨어진 타지에서 지불하는 체계에 있다. 그 체계를 이 책에서는 탄소 식민주의라고 부른다. -20~21쪽

글로벌 체계 속에서 생산은 컨테이너에 드나드는 재화에 대한 분류와 기록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 시점부터 우리는 더 이상 재화를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 재화의 경로는 오직 그것을 기록한 일지를 통해서만 추적할 수 있고, 그 모습은 오직 출발할 때와 도착할 때만 표출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다. -103쪽

환경적 압력은 기계화를 앞당겼고, 의류 부문과 다른 산업으로의 전환을 재촉했으며,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생계 수단을 계속해서 압박하는 스트레스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75쪽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환경에 대한 지식보다 이 방대한 무지의 지형을 통해, 기후붕괴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위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다. -215쪽

민중은 기후변화가 아직 개발되지 않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불평등한 권력의 문제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기후붕괴의 영향이 더 명확해지면서, 이런 깨달음은 정치적·사회적 파열의 순간으로 전환될 잠재력을, 그리고 마침내 현상 유지를 탈피할 잠재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잠재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나서야 한다. -301쪽

‘훌륭한 소비’는 왜 실패하는가: 녹색 자본주의라는 환상

“이 모든 것은 글로벌화된 세계의 환경에 관한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진실을 가리킨다. 즉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적다.”

더 이상 기후변화가 사실이자 현실임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기후변화에 대한 과학적 증거를 두고 과학자들끼리 유의미한 논쟁을 벌였던 1970~1980년대, 그리고 지구 온난화의 원인으로 과연 인간을 지목할 수 있을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던 이들이 있었던 1990~2000년대를 지나 인류는 드디어 ‘기후합의climate consensus’의 시대를 맞았다. 이제 그 누구도 기후변화가 이미 시작되어 지금 여기에서 발생하고 있고, 점점 더 악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런 합의의 시대가 열리까지, 홍수, 가뭄, 폭염, 산사태, 허리케인 등과 같은 무수히 많은 재앙이 있었고, 지구의 온도는 매년 꼬박꼬박 상승했다.
기후변화를 둘러싼 여론의 지형 자체가 바뀌자 글로벌 경제를 주도하는 기업들도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경제성장과 환경적 지속가능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경제 확장을 포기할 수 없는 글로벌 기업이 택한 해결책은 한마디로 ‘그린워싱greenwashing’이라는 위장술이었다. 그린워싱은 말 그대로 친환경을 주장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와 거리가 먼 경영/생산을 지속하는 기업의 관행을 꼬집는 용어로, 기업이 제시하는 광고 및 홍보 문구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환경 논의는 진정한 지속가능성이 아닌 오직 지속가능한 것처럼 보이기만 하는 것들로 점철되어 있다.
게다가 그린워싱 기술은 갈수록 더 정교해지고 있어서 “새롭게 글로벌화된 오늘날의 경제는 최소한의 노력으로 지속가능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소비자들은 친환경 제품에 열광하며, 글로벌 기업은 그 기대에 부응해 진실성 여부와 관계없이 친환경 이미지에 대한 홍보에 집중한다. 그 덕택에 오늘날 부유한 국가의 번화가에서 판매되는 제품 중 친환경을 표방하지 않은 제품은 거의 없다. 바로 이것이 녹색 자본주의green capitalism라는 환상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검증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수익성을 높이는 한낱 환상에 불과하다. 기껏해야 그린워싱이고 최악의 경우 노골적인 거짓말이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곳: 글로벌 공장이라는 거대한 공백

“글로벌 경제의 상당 부분이 제품을 구입하는 사람들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극복할 수 없는 장벽이다. 이 장벽은 소비자들을 효과적으로 차단한다. 의도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현실은 불투명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훌륭한 소비’를 함정에 빠뜨리는 그린워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가? 로리 파슨스는 그린워싱을 단지 기업/브랜드가 자사의 제품 광고에 새겨넣곤 하는 미심쩍거나 명백히 거짓된 문구에 국한시키는 대신, 글로벌 생산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근본 메커니즘으로 분석한다. 다시 말해, 그린워싱이란 ‘100퍼센트 천연’, ‘생태 시대를 위한’, ‘생분해 가능한’, ‘재활용 가능한’, ‘오존층을 파괴하지 않는’ 따위의 녹색 문구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제국주의적 추출extractivism의 뿌리 깊은 관행 위에 안착한 21세기의 세계화는 그 역사적 기초를 바탕으로 ‘글로벌 공급망’이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과거 제국들이 구축한 공급망은, 오늘날 통신과 물류 부문에서 이룩한 엄청난 기술적 도약에 힘입어 전례 없는 수준으로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국제 공급망이 가능해지기까지, 핵심 운송 수단인 컨테이너의 도입과 1970~1980년대에 중국의 주도로 이뤄진 규제 완화라는 두 가지 주요한 혁신이 있었다. 기계화된 컨테이너는 인간 노동자 없이 크레인만으로 적재, 하역, 운송 과정을 실행하기 때문에 표준 가격을 꾸준히 낮추는 데 기여했으며, 규제 완화는 외국인의 소유를 방지하는 규제를 철폐함으로써 기업이 (타국에)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공장을 건설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혁신 덕택에 부유한 국가들은 원료를 추출하고, 재화를 가공하며, 폐기물을 글로벌 주변부로 돌려보내는 일련의 과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고, 거리보다 비용을 줄이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부상했다. 글로벌 공급망은 이런 식으로 (동떨어진) 생산국의 환경을 소비국들의 구미에 맞게 탈바꿈했다. 오늘날 생산이 더 이상 현지에서 이뤄지지 않게 된 이유다. 해외에 위치한 글로벌 공장은 각종 기술 지표에 의해 조정되는 원격 모니터링 방식으로 가동되기 때문에 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물리적 실체를 지닌 (전통적인 의미의) 공장과 달리, 물자와 재화가 생산되는 흐름/공정을 볼 수도 없고, 물자와 재화가 이동할 때마다 직접 점검할 수도 없다.
심지어 브랜드 측이 점검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길고 복잡한 공급망에 자리 잡고 있는 각각의 기착지마다 점검에 필요한 여건을 충분히 갖춘 조사단을 주기적으로 파견해 유의미한 감독을 시행한다는 것은 대부분 어불성설이다. 브랜드를 대신해 공정을 감독하는 현지 중개인이 ‘점검이 잘 이뤄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그저 그 말을 덮어놓고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떨어진 국가의 외딴 지역을 감독하는 과정에는 브랜드 자체가 설정한 기준을 이탈할 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다.

‘친환경 마크’ 이면에서 벌어지는 일: 탄소 식민주의

“만일 한 곳이 깨끗하기 때문에 나머지 한 곳이 파괴된 것이라면? 만일 한 곳이 안전하기 때문에 나머지 한 곳이 위험해진 것이라면?”

저자가 직접 만나 인터뷰한 캄보디아 의류 하청 공장 노동자들은 글로벌 공장 내부의 더 끔찍한 진실을 생생히 전해준다. 만연한 불법 하도급, 그리고 그렇게 하도급된 노동을 떠맡아 처리하는 수백 개의 소형 공장(말이 공장이지 실제로는 도로변의 판잣집)과 그곳에서 이뤄지는 악명 높은 착취는 해당 브랜드의 결정과 전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상승해온 최저임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 및 모범적인 공급망의 사례 등 공식화된 여러 지표들이 설명하지 못하는 이 거대한 그림자산업이야말로 의류 산업의 진짜 현실이다. 브랜드가 발주한 주문의 상당량을 생산하는 이 침묵의 노동력은 우리가 구입하는 옷의 라벨에도, 기업의 각종 공정성 지표에도 결코 표기되지 않는다.
캄보디아 의류 공장 노동자들의 사례는 환경 담론의 지형 자체가 크게 왜곡되어 있음을 일깨워준다. 지속가능하고 공정한 생산과 윤리적 소비의 흐름 속에서 친환경이 계속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대대적인 탄소 감축이 이뤄지고 있는데,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왜 계속해서 치솟는가? 재앙은 어째서 더 빈번해지고 극심해지는가?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은 1979년에 열린 제1차 세계기후회의부터 2016년에 체결된 파리협정에 이르기까지 여러 협약과 회의를 통해 탄소 배출을 줄이는 정책에 동의해왔고, 실제로 탄소 배출량을 ‘명백히’ 감축해왔다. 이것은 ‘객관적인’ 통계 자료에 의해 증명된 ‘사실’로, 유럽연합만 하더라도 이산화탄소 순배출량을 1990년 56억 톤에서 2018년 42억 톤으로 감축하는 데 성공했다.
이 불일치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답을 ‘탄소 식민주의carbon colonialism’라는 용어로 압축되는 불평등한 역사적 권력관계에서 찾는다. 탄소 식민주의란 말 그대로 더 많은 환경적 오염이 초래되는 산업 공정을 글로벌 남반구나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국가들로 체계적으로 수출/외주화하는 관행을 일컫는다. 이른바 ‘선진국’으로 알려진 부유한 국가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탄소 배출량을 자국의 환경 장부 바깥으로 이전시킨다. 물론 그들은 (환경오염이 큰) 생산 공정을 이전하면서도 그 생산이 제공하는 경제적 결실만큼은 그대로 차지한다. 유구한 식민주의의 역사는 오늘날 한층 더 진화해, 환경과 기후에 관한 담론마저 잠식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그 어떤 소비적 실천도 아니다. 즉 더 이상 어떤 친환경 제품을 계산대로 가져갈지를 고민할 것이 아니라, 열악한 노동환경과 값싼 일회용 노동력에 의존하면서도 손쉽게 친환경을 표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글로벌 체계의 발전 과정과 메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직시해야만 한다. 이는 곧 상품에 대한 지식을 생산과 공급망에 대한 지식으로 전환하는 실천이다.

반복되는 악순환: 통계 너머의 진실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 우리가 일하고 생활하는 환경, 삶에서 직면하는 특정한 압박감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주변 환경을 인식하는 방식을 형성한다.”

“기후는 절대로 혼자서 행동하지 않는다. 기후는 사회라는 옷을 입고 인간을 만난다. 기후는 거버넌스 체계와 경제의 모습으로도 등장하고, 규범, 도덕, 신념의 모습으로도 등장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이 두 가지 영역은 함께 작용하면서 가장 크게 고통받을 사람, 가장 적게 고통받을 사람, 기후붕괴의 승자가 될 사람을 결정한다.”

글로벌 생산 체계, 그리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탄소 식민주의의 진실은 우리가 인류의 위기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에서 사유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탄소 식민주의는 한 세계를 위해 다른 세계를 짓밟고 파괴하는 제국주의적 폭력의 가장 최신 버전으로, 개별 국가들의 탄소배출량 및 탄소 감축 비율이 가리고 있는 거대한 불평등을 드러낸다. 부유한 국가들이 글로벌 생산을 통해 깨끗함과 친환경을 표방하는 동안 그 생산의 대가(탄소나 쓰레기)는 가난한 국가들로 옮겨지고, 그곳의 현지 환경은 점진적으로 파괴된다. 재해를 비롯한 기후변화의 영향은, 더 부유한 국가에서는 수출하고 덜 부유한 국가에서는 경제성장의 대가로서 수입하는 방식으로 거래된다.
이것이 글로벌 경제가 기후변화를 악화하는 방식이다. 그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한, 기후변화 역시 중립적인 자연현상일 수 없다. 기후변화에 대한 경험은 국가적 차원에서든, 한 개인의 삶에서든 사회적 지위, 그리고 소유한 돈의 양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가장 단순한 차원에서 난방을 넉넉히 돌릴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추위란 완전히 다른 세계일 것이다. 기후변화의 경험을 조건짓는 이러한 주관성은 기후변화의 가장 덜 알려진 측면이지만, 물리량이나 통계 자료 같은 과학적 수치가 담아내지 못하는 중요한 측면을 드러낸다.
대다수의 보통 사람들은 기후에 대해 이야기할 때 주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즉 어떤 생업에 종사하는지와 결부시킨다.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며 생계를 건사하는 어촌 주민과 농사를 짓는 소규모 자영 농민이 같은 방식으로 기후변화를 체감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어촌 주민이라면 바람의 변화에 주목해 이야기하겠지만, 농민이라면 가뭄의 심각성을 강조할 것이다. 이처럼 기후란 “여전히 일반적으로 날씨, 대기의 질, 강우의 질같이 어떤 사람이 당장 직면한 기후”로서 경험된다.
저자가 기후의 과학적 개념 혹은 통계 지표나 객관적 수치로 드러나는 환경 정보를 넘어, 벽돌 노동자, 농민, 도시 빈민 등의 소상한 삶에 주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기후가 과학적 개념인만큼이나 문화적 개념이기도 하다면, 그리고 이것이 곧 우리 모두가 ‘자신만의 기후’를 경험하게 되는 방식이라면, 결국 기후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맥락을 이야기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기후과학조차 어떤 의미에서는 주관적이다. 기후과학자들 역시 자신과 관련 있다고 여기는 기간과 규모, 측면에 대해 평가한다.
저자가 현장연구를 통해 만난 농민과 노동자들은 “기후변화가 일상생활 및 노동의 경제학과 뒤섞이게 되는 미묘하고 복잡한 방식이 통계에 누락된다는”, 명백하지만 정작 잘 주목받지 못하는 핵심을 전해준다. 가뭄, 홍수, 폭염, 지구 온난화 등과 같은 기후변화는 농민들을 대출과 빚의 수렁에 빠뜨리고(기계화된 농업이 기계를 살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더 심하게는 자신의 토지를 포기하고 산업의 노동자가 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도시의 걸인이 되기도 한다.
변화한 환경이 민중들을 토지에서 내몰고, 그 민중들은 공장으로 몰려들고, 그렇게 가동되는 공장이 다시금 농촌의 환경을 파괴하는 이 악순환은 앞으로 더욱더 악화될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은 기후변화를 겪고 있는 세계를 뒤집어놓으면서 경관 자체를 바꾸고, 그에 상응하는 노동조건 역시 재구성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기후변화가 민중들에게 갖는 의미이다. “기후변화는 재앙적인 홍수, 더스트볼을 연상시키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가뭄 혹은 거리의 사람들이 쓰러져 사망할 정도의 폭염으로만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는 농사의 중단과 식량의 부족을 의미하며, 대다수의 민중들에게 점점 더 커지는 압력, 점점 더 강해지는 압박 요인, 협상력 감소, 노동조건 악화로 경험된다.”

기후 발언을 둘러싼 권력관계: ‘모른다는 것’은 어떻게 권력이 되는가

“아는 것이 힘이다. 그러나 누구의 힘인가? 무엇을 하는 힘인가? 지식은 어떤 방식으로 환경을 형성하는가?”

“다른 형태의 지식과 마찬가지로, 기후 지식 역시 권력이다.”

그리고 부의 권력은 단지 기후변화의 경험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기후 논의에 사용되는 용어를 선택하고, 어떤 이슈를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제시할지 결정하는 ‘발언의 권력’ 혹은 ‘언어의 권력’과 맞닿아 있다. 이런 점에서 저자가 《재앙의 지리학》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기후위기나 환경문제 그 자체가 아니다. 정말로 간과되고 있는 것은 그런 자연현상을 문제화하는 기저의 프레임, 즉 오늘날의 환경주의가 품고 있는 문제다. “환경을 보호하는 것은 더욱 깊은 수준에서 무엇이,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게 가치가 있는지를 규정하는 문제이다. 정의할 수 없는 것은 보호할 수 없다. 그러나 보호가 필요한 것을 정의할 수 있는 권력은 심히 불평등하다.”
보호 대상을 규정하거나 자연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권력은 철저히 경제적 여건에 따른 것이다. 결국 가난한 국가들은 신자유주의 개발 모델을 전폭적으로 승인하며 자국의 자연 자산을 세계시장에 내놓고, 그 가치에 대한 통제권까지 넘겨줄 수밖에 없다. 자연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용어들을 고안하는 것은 부의 권력을 쥔 국가들이며, 바로 그들이 환경을 대별할 수 있는 발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강조하듯,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지구, 우리가 알고 있는 기후·환경 지식은 ‘이미’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된’ 지식이다. 다시 말해, ‘이미’ 여기에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이 무언지를 결정하는 권력이 작동하고 있다. “인간의 환경은 무수히 많은 부작용과 무관한 것들,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 남긴 끝없는 유산에 관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지구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보이지 않고, 의도하지 않았으며, 원하지 않은 그림자다.”
이 말인즉슨, 기후위기 현상을 논할 때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환경 지식이 아니라, 이 ‘방대한 무지의 지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이 무지의 지형이야말로 기후붕괴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있는 위기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이다. 권력은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지니고 있는 틀, 그리고 그 틀을 통해 볼 수 있는 것과 관련되며, 그것을 파악할 수 있는 도구가 없어서 볼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과 관련된다.”
우리는 매일같이 각종 매장에 들러 이런저런 상품을 고르고 계산대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그 상품들 대다수에는 다양한 종류의 친환경 마크와 원산지나 제조국을 기재한 표시사항이 새겨져 있다. 그런 정보들은 우리 소비자들을 그 상품에 대해 분명하고 투명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뜨리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의류나 벽돌처럼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무해한 재화들이 어디에서, 어떤 경로를 거쳐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권력의 틀 속에서 제조되는 천편일률적인 지식, 즉 상품에 대한 지식이 아니다. 그런 무해한 물건들이 어떻게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변화에 연루되어 있는지 역추적하는 작업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라벨과 표시사항 배후의 중대한 진실은 영영 감춰지게 될 것이다.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온갖 추악한 일들을 감추고 ‘친환경’과 ‘지속가능성’을 가장하는 것은 너무도 쉽고 간편하다. 따라서, 그 환상이야말로 기후위기의 새로운 전선이다. 그 공허한 구호들을 ‘앎’이 아닌 ‘무지’의 지형으로 호출해 기후 논의의 장을 변혁해야 한다.

작가정보

로열홀러웨이런던대학 인문지리학 분야의 선임 강사로, 기후변화가 세계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다양한 프로젝트에서 책임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재앙 무역: 영국의 수입 및 해외 투자의 숨겨진 발자국The Disaster Trade: The Hidden Footprint of UK Imports and Investment Overseas’이나 ‘핫 트렌드: 글로벌 의류 산업이 캄보디아의 기후 취약성을 형성하는 방법Hot Trends: How the Global Garment Industry Shapes Climate Vulnerability in Cambodia’ 같은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주로 기후변화의 영향을 형성하는 경제적 불평등 및 주관성에 초점을 맞춰 글로벌 생산 체계에 숨겨진 환경 영향을 탐구한다. 또한 그는 ‘캄보디아의 현대판 노예제와 기후변화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Untold Stories of Modern Slavery and Climate Change from Cambodia’라는 제목으로 수행된 ‘블러드 브릭스Blood Bricks’ 프로젝트에 공동 연구자로 참여했다. 사회경제적 불평등, 노동환경 및 이주·이동성을 둘러싼 기후변화의 정치 등을 주제로 캄보디아의 벽돌 가마를 살펴보는 이 연구는 영국의 공신력 있는 교육 평가기관인 타임스 고등교육Times Higher Education에서 주관하는 2020년 올해의 연구 프로젝트 상을 수상했다. 《재앙의 지리학》은 미국출판인협회Association of American Publishers가 학술 출판 부문에서 수여하는 PROSE 상을 수상했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주관하는 펜 라이브러리 도서상Penn Libraries Book Prize 지속가능성 부문의 최종 후보에 올랐다.

전문 번역가. 옮긴 책으로 《민중을 위한 그린뉴딜》, 《모두를 위한 지구》, 《심층적응》(공역), 《누가 지구를 망치는가》, 《파타고니아 이야기》, 《멸종》,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아스팔트를 뚫고 피어난 꽃》, 《두 얼굴의 백신》, 《여름전쟁》, 《세상을 뒤집는 의사들》, 《에코의 함정》, 《추악한 동맹》, 《녹색성장의 유혹》, 《생태계의 파괴자 자본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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