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망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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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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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
한국문학의 영원한 나목, 박완서의 유일한 역사소설
잊은 적 없는 고향을 되살리는 “씩씩하고 아름다운” 박완서의 방식
8 아들딸의 시대 162
9 인삼장의 연회 297
종장 429
“기미년 만세 통에 여란이 학생은 서울에 없었죠? 우리 집은 종로통 복청다리 근처니까 만세 통 한복판에 산 셈인데 그때 서울 장안이 어땠는 줄 알아요. 참 장했다우. 특히 학생들 장한 건 말도 못 해요. 학생들이니까 그렇게 일제히 한꺼번에 일어날 수가 있지 백성들이야 마음은 있어도 제각각이지 합칠 재간이 없잖아요. 여학생들도 남학생들과 똑같이 발을 구르고 두 손을 높이 들어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는데 정말 장합디다. 조선 사람이 아니면 모를까 그걸 보고 같이 따라서 만세를 안 부를 수가 없었으니까. 다리 밑에서 거지가 쪽박을 두드리며 만세를 부르지 않나, 부엌에서 밥 짓던 여편네가 부지깽이를 휘두르며 뛰쳐나오질 않나, 그동안 가만히 죽어 지낸 게 부끄럽고 원통해서 제각기 나 여기 살아 있다고 외치고 나서는데 그 힘에 천지가 진동하고 고목나무도 살아나 춤을 추는 것 같더라구요.”
-3권, 45쪽
종상이에게 만주 땅은, 만주 땅 중에서도 조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산다는 간도 지방은 꿈의 고장이었다. 힘이 부쳐서 이루 다 개간할 수 없다는 무진장 넓고 기름진 땅, 조선 사람이 모여 사는데도 일본의 경찰력이 미치지 않는 자치지역, 독립투사들의 의기가 충천하고 민족의 기상이 싱싱하게 살아 숨쉬는 곳, 그뿐일까 무력으로 당당하게 일본군과 싸워 대승한 별천지였다. 바로 두만강 너머에 그런 땅이 있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었고 언젠가는 마침내 그 기적적 기운이 햇살처럼 조선 땅에 퍼질 것을 믿고 싶었고 미리 확인해 두고 싶었다.
-3권, 89쪽
“내가 만들어 낸 인물들만이라도 그 그리운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며
운명과 싸워 흥하고 망하고 울고 웃게 하고 싶다는 건
내 오랜 작가적 소망이자 내 나름의 귀향의 방법이었다.”-박완서
1990년 초판을 출간한 박완서 작가의 장편소설 『미망』(전 3권)이 2024년 민음사에서 새롭게 출간되었다. 『미망』은 총 3권으로 이루어진 흔치 않은 대작으로, 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 이후 분단에 이르기까지 개성의 한 중인 출신 상인 전처만 집안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미망』은 박완서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에 집필했다고 알려져 있으며(“1988년 5월에 남편을 잃은 박완서는 그로부터 3개월 후인 1988년 8월에 아들마저 잃었다.”(장영은)), 작가로서 자신에게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던 ‘경험해 보지 못한 시대’에 대하여 쓴 이야기로, 삶의 고통과 창작의 고통이 범람하는 시간을 통과해 끝내 써낸 극복의 작품이다. 이 소설을 두고 박완서 작가는 생전 “내 작품 중 혹시 오십 년이나 백 년 후에도 읽힐 게 있다면 『미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산문집 『나를 닮은 목소리로』, 문학동네)라고 썼다. 그리고 오늘날 『미망』을 다시 읽은 독자들은 박완서 작가의 저 기대 어린 문장에 긍정할 것이다.
소설을 재해석한 표지, 『미망』의 새로운 얼굴
민음사 판 『미망』의 새로운 점이 많지만, 첫 번째로 이 소설의 인상을 독자들에게 다시금 ‘잊히지 않도록’ 해 줄 표지 그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 2, 3권에 각각 쓰인 이진주 작가의 그림에서 흰 손이 저마다 붙들고 있는 아스라한 것들은 마치 소설 속 인물들이 시대로부터 박해받고 방해받아도 끝끝내 붙들고자 했던 어떤 것들을 상징하는 듯하다.
두 번째로 새로운 점은 본문 편집과 이 과정에서 추가한 주석이다. 1990년 출간된 초판을 토대로 세계사 판에서 개정된 방언과 입말 등을 통일하였고, 소설에 쓰인 한자어와 일본어, 숙어 표현 등에서 현대의 독자들이 잘 알 수 없거나 쓰지 않는 고어(古語)에 대하여 박완서 작가의 맏딸이자 저작권자인 호원숙 작가와 편집부가 상의하여 그 의미를 풀어 두었다.
조선 말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을 거쳐 분단에 이르기까지
박완서가 채집하고 체화한 한반도의 이야기
『미망』은 박완서 작가의 소망이기도 했다. 초판 작가의 말에서 박완서는 이제는 가지 못하는 고향 개성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며 이렇게 쓴다. “내가 만들어 낸 인물들만이라도 그 그리운 산하를 거침없이 누비며 운명과 싸워 흥하고 망하고 울고 웃게 하고 싶다는 건 내 오랜 작가적 소망이자 내 나름의 귀향의 방법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소설에는 고향에 대한 작가의 커다란 애정을 보여 주는 개성 사람의 특질과 그 고장만의 상업과 사업가들의 방식, 특히 개성 지방의 물과 흙으로 키워 낸 인삼 농사에 대한 장면들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렇듯 『미망』은 이제는 가지 못하는 고향을 되살리는 동시에 한 집안의 일대기를 통해 한반도의 역사를 보여 주는 소설이다. 소설에는 대한민국 이전의 조선, 그 이전의 고려 시절부터 맥을 이어 온 역사와 경제, 그리고 구시대의 가족과 그로부터 뻗어 나가 변해 가는 아들딸들의 시대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다. 역사의 큰 줄기를 관통해 가는 와중에 박완서 작가 특유의 여성주의적 관점에 더해 인물에 대한 냉철하고 가식 없는 평가, 욕망에 대한 가차 없는 판단이 빛을 발하는 부분들이 넘쳐난다.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집필했음에도, 『미망』 속 박완서의 문장에는 결연하고 전진하는 듯한 힘이 서려 있다.
시대의 바람에 속절없이 나부꼈던
잎새 같은 사람들이 남긴 잊을 수 없는 눈빛
『미망』의 주요 등장인물은 신분제가 들썩이던 시절 비범한 상업 감각으로 인삼 농사와 장사를 통해 집안의 부를 축적한 전처만 영감과, 그가 유난히 애틋하게 아끼는 손녀 태임, 그리고 태임의 남편이 되는 쇠락한 양반 가문 출신 종상, 태임의 어머니가 친정의 하인과 간음하여 낳은 태임의 이부 동생 태남, 이후 시간이 흘러 태임과 종상이 결혼하여 낳은 딸 여란으로, 이외에도 이 가문을 중심으로 4대에 걸친 인물들이 혼란한 역사 속에서 각자의 신념과 욕망을 찾아 헤매며, 그 와중에 서로 반목하고 연민하거나 경쟁하고 동지가 된다.
소설의 제목 ‘미망(未忘)’의 뜻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음’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는 종종 제목의 동음이의어인 ‘미망(迷妄)’, 즉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상태’가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인물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의 시기에 닥쳐오는 혼란과 변화를 구시대(조선)보다 자유롭게 느끼며 폭발하는 개인적 욕망을 마주하면서도, 나라의 흥망 앞에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같은 ‘떳떳한 것’에 대해 거듭 고민한다는 점에서 그 단어는 운명 앞에서 헤매는 인물들의 마음을 절실하게 나타낸다. 작가가 끝까지 밀고 나간 이 세밀하면서도 우직한 소설을 그때보다 먼 훗날의, 지금의 독자들이 함께 체험하기를 권한다.
작가정보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6·25 전쟁으로 학업 중단했다. 1970년「여성동아」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작품으로는 단편집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친절한 복희씨』 등이 있고, 장편소설 『휘청거리는 오후』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도시의 흉년』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다. 또한 동화집 『자전거 도둑』, 수필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여자와 남자가 있는 풍경』 『살아있는 날의 소망』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가』 『잃어버린 여행가방』 『호미』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1980), 이상문학상(1981), 대한민국문학상(1990), 이산문학상(1991), 동인문학상(1994), 대산문학상(1997), 만해문학상(1999), 인촌상(2000), 황순원문학상(2001), 호암상(2006) 등을 수상했다. 2006년 서울대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2011년 담낭암 투병 중 별세하였다. 이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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