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함께 걷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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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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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건물과 사라지는 기억으로 번역하기
‘5·18의 도시’라는 오래된 이미지 위에
구체적인 일상을 덧입히기
‘5·18의 도시’, ‘민주주의의 고장’ 그리고 ‘노잼 도시’이자 소멸 위험의 지방 도시. 우리에게 익숙한 광주의 이미지들이다. 광주는 매년 5월 정치인들이 찾는 곳이자 잊을 만하면 가짜 뉴스에 휘말리는 정치적인 도시다. 5·18 민주화운동의 이미지는 여전히 강력하지만, 40년 전 항쟁의 이미지는 지금 젊은 세대의 고민과 잘 이어지지 않는다. 광주는 다른 지방 도시들처럼 ‘지방 소멸’ 담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지만, 실제 광주에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 않다.
광주에서 나고 자란 철학 연구자 김서라의 『이미지와 함께 걷기』는 광주를 둘러싼 이미지에 대한 비평이자, 광주에서 살며 쓰는 광주 이야기이다. 저자는 광주에 대한 익숙한 이미지들 사이에서 낯선 이미지들을 발견하고, 광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일상을 보여 준다. “사진 비평가처럼, 도시사 연구자처럼, 인류학자처럼” 보는 김서라는 광주 구석구석을 누비며 새로운 형식의 글쓰기를 보여 준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대로 “몸을 움직여 읽고, 제 삶을 섞어 읽는” 그의 글은 자신이 살아가는 장소를 탐색하는 에세이이자 그가 선 삶의 자리를 바꾸는 비평이다.
서울과 지방으로 양분된 한국에서 한 지방 도시가 처한 상황을 들여다보는 일은 ‘지방’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이미지와 함께 걷기』는 지방에 대한 말을 지방의 말로 다시 쓴다. ‘지방 소멸’이라는, 이제는 익숙해진 단어는 지방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기약 없는 헤어짐의 반복을 의미한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란 ‘유잼 도시’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건물들, 재개발과 도시재생이라는 이름하에 거주지에서 밀려나는 사람들과 사라지는 기억들로 나타난다.
김서라는 수도권 중심 개발의 역사에서 지방 도시가 어떤 모양으로 바뀌며 어떻게 적응했는지, 그 변화 속에서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모양 지어졌는지를 보여 준다. 도시의 기억을 담은 오래된 길과 건물들은 사라지고 사람들 사이의 우연한 마주침은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김서라는 일상에서 출발해 새로운 도시의 몽타주를 그릴 수 있다고 말한다. 길에서 마주치는 기억의 파편을 주우며, 몸에 스며든 기억을 따라, 김서라와 함께 걸으며 새로운 도시를 그려 보자.
1장 전남의 이미지들
역사의 잔해와 무덤 순례자-오종태론 17
보존된 고향, 고향의 파편들-「민속가」의 후경으로부터 40
이미지 덮어쓰기 -사북과 광주 56
2장 광주 2순환도로
나는 아직도 1순환도로에서 75
순환도로 이전의 교통 84
학동의 결집체들 92
2순환도로: 상무지구의 밀실들 101
2순환도로 바깥의 사람들 112
도시의 생존 호흡법 121
3장 방직공장의 가장자리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 100-3 133
그린요양병원, 서울의 문래동과 광주의 유동 143
양동 도시제사 공장의 함성 155
기억을 따라 걷기 163
글을 쓰는 동안 도저히 잊히지 않던 이미지가 있다. 붉은 토사와 건물 잔해가 도로로 쏟아져 내린 처참한 풍경. 23층부터 38층까지 한쪽 귀퉁이가 무너져 내린 아파트. 2021년과 2022년에 학동과 화정동에서 일어난 붕괴 사고의 이미지다. 학동에서 처음 참사가 일어났을 때 나는 《릿터》에 ‘광주 2순환도로’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막 연재하고 있었다. 2년이 지났고 나는 붕괴 이전과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 이미지는 쉽게 잊을 수 없었다. 도시라는 스크린 위에 언제든 다시 상영될 수 있는 필름처럼 뇌리에 박혀 버린 탓이다. 다른 이들도 아직 그 이미지를 잊지 않았다면, 광주가 표상하는 인권과 민주주의, 문화예술의 도시라는 구호는 이미 설득력을 잃었을 공산이 크다. 우리는 판촉 뒤에서 벌어지던 일을 뒤늦게 목도한 셈이다.(5쪽)
오종태에게 사진은 고정된 시공간이 아니다. 유동하는 이미지이자 역사의 이미지이고 파괴와 소멸 바로 직전에 놓인 동시대의 이미지다. 아우슈비츠가 현재한다는 감각, 곧 신체 반응(이는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능동적인 해석이다.)이 일으키는 ‘행위’가 기존에 확정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나 세계를 다르게 명명하도록 추동한다면, 사진 기록의 ‘고정성’은 역사를 통해서 변주될 수 있는 것이다.(37쪽)
강봉규가 살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멀리 나아간 개발의 논리는 중앙과 지방의 시간적 거리를 한참 줄여 놓았지만, 수도권과 지방의 삶의 거리는 그 둘 사이의 땅값 차이로 환산되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버렸다. 중앙과 지방 사이, 도시와 고향의 이미지의 거리가 벌어질 대로 벌어진 지금, 그 틈을 메우기란 쉽지 않다. 그 가운데 대낮의 광장에서 레드 콤플렉스의 유령이 출몰하고, 금이 간 벽과 풀, 냄새와 느린 생활은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된다.(51쪽)
언제부턴가 구도심의 공기에는 먼지가 끼기 시작했다. 공기 속에 떠나지도 정착하지도 못하는 먼지가 미끄러지듯 날리고 있다. 해가 갈수록 빈 동네가 늘어 가고 친구들은 흩어지고 가족들도 헤어진다. 다시 오겠다는 기약 없이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헤어짐의 반복이 지역 소멸이라는 의제로 만들어진 지 오래다. 빈 공간을 채우고 사람들을 살게 하려고 여러 방책이 시행되고 있다. 끊임없이 도시를 브랜딩하고 이미지를 만든다. 이를 위한 주된 방법은 재개발, 재건축, 도시재생을 하면서 도시의 외관을 바꾸는 일이다. 공사가 반복되고, 아무 일 없을 것 같았던 도시에 커다란 균열이 갔다. 2021년과 2022년, 학동과 화정동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76~77쪽)
우리가 같은 도시에서 살고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다시 출발하자. 지금의 마주침을 1980년 5월처럼 만들고자 애써 조직할 필요는 없다. 도로 위에서 서로의 생존을 챙겼던 두 운전자처럼 서로가 어떤 생존의 조건에 있는지 알면 그리고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다는 그 조건을 감각하면, 이 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스레 눈에 띈다는 엄마의 희망이 존재한다. 그게 함께 호흡하는 숨이 된다. 생존이 전부가 아닌 삶은 서로의 숨으로부터 비롯한다. 도시의 커다란 도로와 빌딩들, 아파트 단지, 구도심을 걷는 중 서로 보이지 않게 될지라도 언제나 함께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129쪽)
도시를 걷는 사람 없이 도시공간은 아무 의미가 없다. 도시를 살고 또 걷는 누구나가 도시의 주체다. 도시의 길이 지어진 데에는 어떤 목적이 있겠지만, 사람이 그 길을 걸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실현된다. 도시가 마치 머릿속 관념대로 만들어진 환상처럼 느껴질 때, 그 안에서 내가 무력한 존재라고 느껴질 때, 세르토를 떠올리며 어디든 나가 걸어 본다. 걷는 시간만큼은 몸이 움직이는 대로, 무의식에서 길어 올린 이미지가 가리키는 대로 걸으면서 연이어 일어나는 기억을 되새길 수 있다.(141쪽)
수십 년 동안 수천, 수만의 노동자들을 고통에 몰아넣은 공장의 역사는 목포나 나주에 비해 큰 도시가 아니었던 광주를 대도시로 만든 중요한 자산으로 꼽힌다. 일제 때에는 도시제사 공장 외에도 약림제사 공장, 종연제사 공장이 각각 광주의 유동과 학동에 있었다. 목포항까지 연결된 호남선이 1922년에 생긴 이후 대형 섬유공장들이 광주에 들어섰고, 이는 광주가 지금과 같은 대도시가 된 기반이었다. 그렇다면 광주는 섬유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만든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61쪽)
■ 광주와 전남의 이미지
김서라는 2021년 《광남일보》에 사진작가 오종태의 작품을 다룬 미술비평 「역사의 잔해와 무덤 순례자」를 발표하며 데뷔했다. 이 글에서 그는 오종태가 무등산을 찍은 사진작품의 제목을 ‘아우슈비츠’로 다시 이름 붙인 사실에 주목한다. 이를 단서 삼아 일제강점기부터 근대화 시기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몸에 스며든 역사의 폭력성을 읽고, 그의 작품을 애도의 비문(碑文)으로 위치 짓는다.
『이미지와 함께 걷기』 1부 ‘전남의 이미지들’에는 이처럼 광주와 전남을 재현한 이미지에 대한 비평이 실렸다. 김서라는 ‘순수한 고향’으로 전남을 기록하고자 했던 사진작가 강봉규의 작품을 비평하며 개발과 보존의 이분법을 벗어나고자 한다. 나아가 광주에 사북항쟁을 ‘폭동’의 이미지로 전파했던 사진보도를 비판하고 이를 덮어쓰는 새로운 이미지를 꺼내 놓는다. 광주에서 활동하는 미술작가 박화연은 직접 사북을 찾아가 관련자들의 증언을 듣고 사북의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한다. 근대화 시기에 만들어진 광주와 전남의 이미지들은 여전히 수도권과 지방의 이분법을, ‘전라디언의 굴레’를 만들고 있다. 그 익숙한 이미지를 이탈하는 순간을 포착하는 글은 그 자체로 역사 다시 쓰기이자 정치적인 말하기다.
■ 새로 그리는 도시
『이미지와 함께 걷기』는 이미지 비평인 동시에 새로운 도시를 그리려는 기획자의 제안서다. 2부 ‘광주 2순환도로’와 3부 ‘방직공장의 가장자리’에서 이어지는 글들은 광주 도시개발의 상징인 ‘순환도로’를 중심으로 광주의 구도심과 신도심, 오래된 건물과 재개발이 한창인 공사장 사이를 거닌다. 김서라는 1980년부터 급격하게 진행된 근대화의 결과 파괴된 것들의 흔적을 수집한다. 그가 시선을 두는 곳은 고층빌딩이 지어지기 이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주거지, 그곳의 풍경을 만들던 소리들, 구도심에 여전히 머무는 사람들의 이야기, 오래된 방직공장에 남아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흔적이다. 곧 허물어질 방직공장의 오래된 건물들을 둘러보며 김서라는 여성 노동자들이 함께 울고 웃던 시간을, 고용주의 폭력에 맞서 싸운 기록을 발견한다. 여성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다시 들은 그는 “광주는 섬유공장의 여성 노동자들이 만든 도시”라는 호명으로 도시의 기원을 다시 쓴다. 역사의 흔적과 기억의 파편을 수집하며 도시를 걷고 쓰는 일은 새로운 모양의 도시를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다.
도시는 점차 그곳에 살아가는 이들의 삶과 동떨어진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 사는 길과 동네에 그들의 일상과는 무관한 수식어들이 붙고, 도시재생이라는 이름 아래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는 공사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김서라가 말하듯 도시를 걷는 사람 없이 도시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서로를, 서로의 생존 조건을 계속 마주치는 일은 저항의 시작이 될 수 있다. 도시에서의 삶에 지칠 때 붙잡을 수 있는, 『이미지의 함께 걷기』가 발견해 내는 희망의 순간이다.
작가정보
광주에서 나고 자란 연구자. 전남대학교 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고, 현재 발터 벤야민의 이미지론을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다. 2021년 《광남일보》 신춘문예에 미술평론 「역사의 잔해와 무덤 순례자-오종태론」이 당선되며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광주의 연구 공동체 ‘광주 모더니즘’에 참여하며 광주와 지역 이미지, 지역 문화에 대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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