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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몰로이/첫사랑 추방자/승부의 끝/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세계문학전집 102
사뮈엘 베케트 지음 | 김문해 옮김
동서문화사

2024년 07월 31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8월 0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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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18.40MB)
ISBN 9788949719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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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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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에서 깨닫는 인간의 부조리
구원의 손길은 과연 오는가!
꺼질 듯 말 듯 아른거리는 희망의 불빛!
인생이라는 ‘놀이’ 막판에 몰린 현대인의 비극적 삶!
고도를 기다리며
제1막…11
제2막…66

몰로이
제1부…119
제2부…206

첫사랑
첫사랑…299

추방자
추방자…325

승부의 끝
승부의 끝…343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425

베케트 생애와 문학
지칠 줄 모르는 욕망…439
베케트 생애와 문학…463
베케트 연보…489

에스트라공  가장 좋은 방법은 날 죽여주는 거야. 다른 놈처럼.
블라디미르  다른 놈이라니? (사이) 다른 놈 누구 말이야?
에스트라공  수십 억의 다른 놈들 말이야.
블라디미르  (격언조로) 인간은 저마다 작은 십자가를 지고 가. (한숨짓는다) 잠깐 사는 동안에, 그리고 그 뒤로도 잠깐.
에스트라공  그래, 그동안 우리 흥분하지 말고 얘기나 해보자. 어차피 침묵을 지킬 수는 없으니까.
블라디미르  맞아, 끊임없이 지껄여대는 거야.
에스트라공  그래야 생각을 안 하지.
블라디미르  지껄일 핑계야 늘 있는 거니까.
에스트라공  그래야 들리질 않지.
블라디미르  우린 나름대로 이유가 있으니까. (고도를 기다리며/p.73)


블라디미르  쓸데없는 얘기로 시간만 보내면 안 되지. (사이. 열띤 소리로) 자, 기회가 왔으니 무엇이든 하자! 누군가가 우리 같은 놈들을 필요로 하는 일이 언제나 있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지금도 꼭 우리보고 해달라는 건 아니잖아. 다른 놈들이라도 우리만큼은 해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보다 더 잘할 수도 있을걸. 방금 들은 도와달라는 소리는 인류 전체에게 한 말일 거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엔 우리 둘뿐이니, 싫건 좋건 그 인간이 우리란 말이지. 그러니 너무 늦기 전에 그 기회를 이용해야 해. 불행히도 인간으로 태어난 바에야 이번 한 번만이라도 의젓하게 인간이란 종족의 대표가 돼보자는 거야. 네 생각은 어때? (에스트라공, 아무 대꾸가 없다) 하기야 팔짱을 낀 채 할까 말까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도 우리 인간 조건에 어긋나는 일이지. 호랑이는 아무 생각 없이 제 동족을 구하러 뛰어들기도 하고 깊은 숲속으로 달아나버리기도 해. 하지만 문제는 그런 게 아니야. 문제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 따져보는 거지. 우린 다행히도 그걸 알고 있거든. 이 엄청난 혼돈 속에서도 오직 한 가지 확실한 게 있어. 우리는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야. (고도를 기다리며/p.95~96)


포조  (버럭 화를 내며) 그놈의 시간 얘기를 자꾸 꺼내서 사람을 괴롭히지 마시오! 말끝마다 언제 언제 하고 물어대다니! 당신, 정신 나간 사람 아니야? 그냥 어느 날이라고만 하면 됐지. 여느 날과 다름없는 어느 날 저놈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그리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 어느 같은 날 같은 순간에 말이오. 그만하면 된 것 아니오? (조금 침착해지며)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고, 해는 잠깐 희미하게 비추다가 다시 밤이 오는 거요. (그는 끈을 잡아당긴다) 앞으로! (고도를 기다리며/p.108)


나는 어머니의 이름을 불러야 할 때는 마그(Mag)라고 불렀다. 내가 어머니를 마그라고 불렀던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g자가 Ma라는 음절을 없애버렸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다른 어떤 글자보다도 확실하게 그 음절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ma 즉 어머니를 갖고 싶고, 부르고 싶은 욕구를 채웠다. 왜냐하면 마그라고 부르기 전에는 어쩔 수 없이 마라고 발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da는 우리 지방에선 아버지를 뜻한다. 그런데 내가 말하는 그 무렵에 어머니를 마, 마그, 혹은 카카(Caca) 백작부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부터 완전히 귀가 먹었기 때문이다. (몰로이/p.130)


갑자기 내게 빵 한 조각만 달라고 요구했다. 굴욕적인 부탁을 하는 그의 눈길이 이글거렸다. 그의 억양은 이방인의 억양이거나 말하는 습관을 잃어버린 사람의 억양이었다. 사실 나는 그의 뒷모습만 보고서 안도의 숨을 쉬며, 저 사람은 이방인이야, 혼잣말을 했었다. 정어리를 한 통 드릴까요? 내가 물었다. 그는 내게 빵을 요구했는데 나는 그에게 생선을 제안한 것이다. 나의 모든 성격이 여기에 나타났다. 빵이요. 그가 말했다. 나는 은신처에 들어가서 아들 녀석을 위해 남겨둔 빵 조각을 가져왔다. 녀석이 돌아오면 분명 배가 고플 테지만 나는 빵을 그에게 주었다. 나는 그가 빵을 그 자리에서 게걸스럽게 먹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두 쪽으로 자르더니 외투의 양쪽 주머니에 넣었다. (몰로이/p.264)


나는 정원에서 살았다. 나는 나에게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고 말하던 한 목소리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무렵에 그 목소리를 조금씩 더 알아듣기 시작했고, 그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는 모랑이 어렸을 때 배웠던 그런 말이 아니었으며, 그 자신도 어린 아들을 가르칠 때 그런 말들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는 그 목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침내 그 언어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그것을 이해했었고, 또 여전히 이해하고 있다. 아마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바로 그 목소리가 내게 그 보고서를 쓰라고 말했다. 이는 내가 예전보다 더 자유롭다는 뜻인가? 잘 모르겠다. 알아보아야겠다. 그래서 나는 집 안으로 들어와 이렇게 썼다. 자정이다. 비가 창문을 때리고 있다. 그때는 자정이 아니었다. 비가 오고 있지 않았다. (몰로이/p.296)


나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나의 결혼과 아버지의 죽음을 시간적 차원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 이 두 사건 사이에는 다른 차원에서 다른 관계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 내가 태어난 해, 분명히 말해 두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태어난 해는 절대로 잊을 수 없고, 적어놓아야 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 적어도 태어난 해는 숫자로 기억 속에 새겨져 있어서 삶조차 그 기억을 지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날짜도 조금만 노력하면 기억이 나므로 나는 내 방식대로 그날을 자축하곤 했다. 너무 자주 돌아오니까 해마다 그런다고는 할 수 없고, 어쩌다 한 번씩 자축한다는 말이다.(첫사랑/p.299)

현관 앞 계단은 그리 높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계단 수가 얼마나 되는지 수없이 세어보았는데도, 그 계단이 총 몇 개였는지는 아무래도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계단 수를 셀 적마다 인도를 디딘 발을 하나로 치고 첫 번째 계단에 올려놓은 발을 둘, 이렇게 쭉 세어가야 할지 아니면 인도를 디딘 발은 세지 말아야 할지 늘 아리송했다. 계단을 모두 오르고 난 뒤에도 같은 갈등에 부딪혔다. 반대 방향, 그러니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시작하고 어디서 끝내야 할지 몰랐다. (추방자/p.235)

햄 만약에 네가 나를 떠난다면 어떻게 그 사실을 알지?
클로브 (활기차게)
글쎄요, 그냥 호루라기를 부세요. 그리고 만약에 제가 달려오지 않는다면 전 당신을 떠난 거예요.
(…)
햄  네가 부엌에서 그저 그렇게 죽어 있게 될지도 몰라.
클로브  결과는 똑같겠지요.
햄  그래, 그래도 네가 만약 그냥 부엌에서 죽어 있다면, 내가 어떻게 알지?
클로브  글쎄요…… 머잖아 악취가 나겠죠.
햄  넌 이미 악취가 나. 모든 곳이 시체 썩는 냄새가 나.
클로브  우주 전체가 그렇죠. (승부의 끝/p.383~384)


자정이 지났다. 이런 고요함은 난생처음이다.
지구상에는 아무것도 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 아마도 나의 가장 좋았던 시절은 지나갔을 것이다. 행복해질 기회가 있었던 그 시절은. 하지만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활력이 넘치니까. 그렇다, 나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크라프는 앞을 빤히 바라본 채 움직이지 않는다. 테이프가 고요함 속에서 계속 돌아간다.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p.436)

신비에 싸인 이국적 울림 사뮈엘 베케트
사뮈엘 베케트는 스위프트, 와일드, 예이츠, 쇼, 싱 그리고 조이스 뒤를 잇는 아일랜드 문학의 계승자이다. 언어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영어와 프랑스어는 물론 그리스어, 독일어, 에스파냐어도 잘했으며 멕시코 시집을 번역하기도 했다. 예이츠와 쇼에 이어 아일랜드 작가로는 세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으나,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렸기에 연설을 피하려고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극작가이며, 자신이 속한 동시대 사람들의 삶의 조건과 양상을 독특한 극작법으로 생생하고 깊이 있게 표현했다.

기다림 속의 깨달음〈고도를 기다리며〉
1953년 겨울 파리 소극장 바빌론에서 처음 상연된 이래, 〈고도를 기다리며〉는 지금까지 수십 가지 언어로 번역되어 거의 모든 나라에서 공연되었다. 1969년 노벨문학상 수상했으며, 이 작품만큼 평론가나 연구가들의 흥미를 끄는 작품은 현대극 가운데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끝을 알 수 없는 기다림 속에서 깨닫는 인간의 부조리와 작가의 실존주의 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 있고, 수많은 베케트 연구가들에 의해 오늘날 이 작품에 관해 온갖 해석이 시도되고 있다.
이 연극의 등장인물은 떠돌이 두 사람, 거만하고 난폭한 남자와 그의 노예, 그리고 막이 끝날 때마다 “고도는 오지 않는다”며 알리는 한 소년, 이렇게 겨우 다섯뿐이다.
두 떠돌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어느 시골 길가 앙상한 나무 옆에서 ‘고도(Godot)’라는 인물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는다. 극이 진행될수록 고도라는 인물의 이미지는 혼란스러워지고, 마침내 그 존재조차 무척이나 의심스러워진다. 숨 막힐 듯 막막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손꼽아 기다리던 구원의 손길은 과연 언제야 올 것인가.

시대를 앞선 새로운 연극의 가능성
영원한 수수께끼의 걸작 〈고도를 기다리며〉는 미래의 희망을 간절히 꿈꾸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그 희망 때문에 끝내 지쳐 버린 오늘날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완전히 절망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그 희망의 불빛은 꺼질 듯 말 듯 하면서 여전히 우리 앞에 아른거린다. 이것이 바로 이 작품을 완전히 놓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매력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기다리는 행동, 아니 그보다는 기다리는 상태를 무대에 올리는 독창적인 발상에 따라 ‘거기에 있다’고 하는 인간의 근원적 조건을 주제로 한 가장 단순하면서도 즉흥적인 연극이다. 숙명적이거나 정열적인 연극, 갈등극 또는 상황극도 아닌 그저 존재에 대한 연극이다. 여기에 새로운 연극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흔히 ‘고도’는 신(God)을 의미하리라. 그러나 결코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다. 고도가 누구(무엇)인지는 이 연극을 접하는 사람들 저마다의 처지와 그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느냐에 따라 수많은 의미로 자유롭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도를 기다리며〉는 철저하게 관객을 향해 열려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베케트는 “고도가 누구인지는 나도 모른다. 알고 있다면 작품 속에 써 넣었을 것이다”라고 밝힌 적이 있다. 작자는 오히려 ‘고도’라는 함정을 파 놓고 거기에 관객이나 평론가를 불러들여 기묘함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작! 〈몰로이〉
〈몰로이〉는 1947년에 집필되어, 1951년 파리의 미뉘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작품은 그 무렵 프랑스 비평가들로부터 실존주의문학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사르트르 《구토》에 이어 가장 유망한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는다. 이때부터 베케트라는 이름이 프랑스 독자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지는데, 주목할 점은 〈몰로이〉가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쓰였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는 베케트의 주된 관심사인 인생의 부조리함, 자아탐구, 언어의 한계, 글쓰기 자체의 문제들, 작가의 죽음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이야기는 실질적인 사건 전개 없이 끊임없이 우회하며 제자리를 맴돌고, 주인공 몰로이의 정체는 아주 불확실하며, 그의 이름마저도 어머니 이름과 혼동되어 쓰인다. 시간과 공간은 우연에 내맡겨진 채로 무질서하게 저마다 떠다닌다. 실제 사건들은 환상으로 처리되거나 생략되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주인공 자신도 모른다. 꾸밈없는 일상 언어 사용은 이따금 거칠고 저속한 말들이 그대로 튀어나온다.
제1부와 제2부로 나누어진 〈몰로이〉는 이중 구조로서 서로 거울이 미지의 역할을 하는 대칭 구성이다. 1부와 2부는 분리된 이야기이면서도 반복과 이중적인 이미지로 이어진다. 몰로이와 모랑 사이의 혼란은 상호 주체적 혼란이다. 몰로이는 모랑의 기억할 수 없는 남일 뿐이며, 모랑의 정체는 몰로이로 되어가는 과정 속에 있는 타인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인물들 사이의 이러한 변형 이미지들의 반복은 소설의 불확실함을 한층 강화한다.
베케트는 〈몰로이〉에서 작품의 무의미를 드러내고 무(無)의 공간을 창조하기 위한 독특한 표현기법을 쓰고 있다. 그것은 한 번 말해진 선언을 곧이어 약화나 취소하는 형식이다. 이러한 선언과 부정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몰로이는 우리 눈앞에서 적힌 문장들을 고치고 사색의 결과들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한 사건에 대한 가정을 바꿈으로써 사실이 달라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선언과 부정 표현기법은 하나의 놀이처럼 작품에 역동적인 움직임을 부여해 준다. 사실 불확실과 방황의 안개 사이로 이러한 놀이 요소를 발견한다면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더욱 많은 유쾌함과 재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베케트 독창성의 증명 〈크라프의 마지막 테이프〉
이 희곡은 표현매체에 대한 베케트의 모든 독창성을 증명하는 작품이다. 테이프리코더라는 문명의 이기에서 그는 생각지도 못한 연극적인 기능을 끌어내 보였다. 이 신기한 방법으로 흥행에서도 대성공을 거둔 ‘영어로 쓰인 가장 뛰어난 단편드라마’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이 방법은 베케트 고유의 이상과 기술이다.
69번째 생일을 맞은 노인이 오랜 습관대로 한 해의 회고를 테이프에 녹음하려고 한다. 그는 먼저 30년 전의 테이프를 꺼내 들어본다. 만 39세인 그가 그해를 뒤돌아보며 녹음할 때 ‘10년인가 12년 전의’ 테이프를 들어본 감상을 말한다. 다른 작품에 자주 나오는 극 속의 극, 이야기 속의 이야기라는 베케트적 구조가 여기에서는 거의 기계적인 정확함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시간’의 극복은 물론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의 행복했던 한 때를 지금 찾았다 해서 그 행복이 지금의 크라프에게 고스란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좌절과 회한을 새삼스레 깨닫게 할 뿐이다. “나는 모든 시대를 돌리고 싶다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강조했던 39세의 테이프가 침묵 속을 헛돌고 있는, 69세 노인이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모습으로 막이 끝나는 것만큼 쓸쓸한 광경은 더 없으리라.

현대인의 비극적 삶의 모습 〈승부의 끝〉
〈승부의 끝〉은 1956년 집필하여 1957년 4월 런던에서 첫 상연한 뒤 같은 해 파리 미뉘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희곡은 형식과 주제적인 측면에서 베케트의 포스트모더니즘 극작기법과 문학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햄, 클로브, 클로브의 부모인 네그와 넬, 이 등장인물 네 명은 철저하게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더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인생이라는 체스놀이의 막판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무의미한 행동의 반복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찾아보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그들의 언어는 꾸준히 되풀이되고 발음되지만 결국 진리를 전달하는 수단이라기보다 단순한 놀이의 또 다른 도구가 되고 만다. 그 반복적인 행동과 언어는 무기력하게 인생의 종말을 기다리는 것을 상징한다. 인생이라는 놀이의 막판에 처해 있는 현대인의 비극적 삶의 면모를 깊게 드러내고 있다.

베케트 단편의 정수! 〈첫사랑〉
베케트 단편소설에서 주목할 점은, 회상 형식으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서술자 ‘나’의 환상이다. 이는 모태 회귀, 거세, 유혹, 근원 장면 등으로 분류되는 원초적 환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베케트는 언어를 통해 결핍, 무지, 무능과 같은 부족함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한때 위풍당당했을 튼튼한 성벽과 같은 언어의 구조물이 베케트의 단편소설들에서 여기저기 망가지고 무너진 상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첫사랑〉에서 끔찍할 만큼 가구들이 꽉꽉 들어찬 방을 본 내가 안락의자만 빼고 그 방의 가구들을 모두 복도로 내놨던 것처럼, 눈부신 다른 의미들은 모두 비우고 어렴풋하고 가느다란 한 줄기 빛과 같은 의미만을 언어의 구조물에 남겨둔 채로 말이다.
이러한 부족함은 순간 생각을 마비시키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지 일관성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수많은 생각과 고민의 장을 읽는 이에게 활짝 열어 주기도 한다.

작가정보

도쿄 니혼대학 문과 졸업. 불문학 영문학 부전공. 대구고보 불어과 영어과 강사 역임. 매일신문 편집국장 역임. 지은책 종군기 《조국의 날개》, 옮긴책 마르키 드 사드 《악덕의 번영》 하이스미스 《태양은 가득히》 요코미조 세이지 《혼징살인사건》 조르주 상드 《사랑의 요정》 《양치기 처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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