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기 없음
2024년 09월 13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9월 1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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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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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보면 2000년대 인터넷소설에서나 일어날 법한 이야기지만, 이 일들을 모두 실제로 겪은 사람이 있다. 『나는 거기 없음』의 저자 곽예인은 자신이 학창 시절 ‘그렇게까지 미인이 아니라서’ 자신의 여자친구가 되어줄 것 같은 애, 한번쯤 헤집어볼 만한, 이겨볼 만한 여자애였다고 회상한다. 그는 ‘팔리는 재능’을 살려 아이돌이 되고자 연예 기획사에 들어갔다가, 혹독한 다이어트와 몸무게 강박으로 인해 섭식장애를 얻어 몸과 마음이 다 상한 뒤에야 데뷔를 포기했다. 이후로는 페북스타와 유튜브 리포터를 거쳐 소규모 인플루언서, 인체모델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나는 거기 없음』은 곽예인이라는 한 사람에게 벌어졌던 불운의 연대기이지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수많은 ‘○○’들의 불운을 변주한 것이기도 하다. 이 책에 적힌 불운을 읽는 동안 ‘○○’에 들어갈 누군가의 이름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거기 없음』은 그런 이름들을 소환해냄으로써,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교묘한 폭력의 모습을 또렷하게 그려낸다.
학교에는 새로운 예쁜 여자애가 생겨난다
애매하게 팔리는 여자애
#2 연습실, 섭식장애
아이돌, 인플루언서, ( ) 되기
빠르게 찍히는 좋아요
#3 호주, 발리, 타이완, 어디든
먹고, 기도하고… 도망쳐라
바다는 공평할지라도
잘 수 있는 여자 그리고 오빠 있는 여자
Scene of Taiwan
#4 사랑의 장소들
해원 1
90퍼센트 레즈비언
사랑하는 여자의 아이를 낳고 싶다
해원 2
별로 안 힘든 피해자
#5 내면 응시 가능
어느 날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우리들 안에선 더 이상 불운이 아니라는 것
Without Frame
이상한 여자들을 미워하는 여자들
여기 있는 여자들
그들을 보고 있다
#6 밉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
죽은 친구들이 밉다
묻기로 했던 것
_에필로그 보영이만 있으면 괜찮았다
나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동시에 미움을 받았다. 한번쯤 헤집어볼 만한, 이겨볼 만한 여자애였다. 남자들은 모두 내가 본인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지 않는 여자친구가 되어주길 바라면서도 나를 ‘신 포도’로 여겼다. 저 포도는 너덜너덜한 걸레일 거야! 사귀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몰차게 거절했단 이유로 열일곱 살의 나를 ‘일간베스트저장소’에 박제한 애도 있었다.
반면 여자들은 나와 친구가 되고 싶다며 다가오다가도 쉬이 돌아서곤 했다. 평범한 주제에 인기가 있는 건 말이 안 되니까. ‘나보다 못난 네가 인기 있을 리 없’으니까. 내게 반한 건 그 애들의 짝남인데 뺨을 얻어맞는 건 매번 나였다. (p.21)
네 콘셉트는 ( )야. 실장님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머리도 자르지 말고 입술엔 틴트만 발라. 살은 더 빼야겠고. 3킬로그램만 더 빼. 안면 윤곽이나 양악도 생각해보자. 덧니는 귀여우니까 내버려두고. 교복 치마도 줄였으면 다시 늘려. 앞머리 자르지 말고. 웃을 때 헤헤 하고 수줍고 해맑게 웃어. 아니 그 느낌 아니고. ‘헤헤’. 포인트가 있어. 거울 보고 연습해 와. 눈에 힘 좀 풀고 다니고. 야하게. 나른한 느낌 알지. 연구해 와. 너 나이 많은 편인 거 알지? 이게 네 마지막 기회야. 됐어. 가봐. (p.30)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여자 아이돌 몸매 사진과 그들에게 달린 악플을 보며 목표를 곱씹었다. 텅 빈 몸만이 나를 저 길로 이끌 수 있기에 매일 더 날카로워지는 턱선과 이목구비, 줄어드는 몸무게를 보며 고통을 달랬다. 몸무게 정체기가 찾아오면 입이 바싹 마를 때까지 침을 뱉었다. 1그램이라도 더 줄이고 싶었다. (p.33)
이미지를 팔아 버는 돈은 너무나 달콤하다. 나는 본격적으로 이미지 노동자의 길로 들어서기로 다짐한다. 다만 엄청난 셀럽은 되고 싶지 않았다. 딱 2천에서 1만 사이의, 이쪽 분야 사람들은 “아, 걔?” 하는, 한 달에 한두 개 협찬을 받고 석 달에 하나쯤 광고가 들어오는, 그 정도의 사람이 되고 싶었고 딱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예상은 적중한다. (p.40-41)
나는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제공하는 노동으로 돈을 버는 게 분명했는데도, 나의 노력은 노동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목이 터져라 소리치고 싶었다. 나의 노동을 인정해달라! 너네도 회사 갔다 집에 돌아가면 편하게 있지 않느냐! 나의 단면만 보고 나를 다 안다고 말하지 마라! 여행 소녀도 자살하고 싶다! 건강 섹시녀도 내향적일 수 있다! 삭발녀의 삭발은 4년 된 남자친구와 함께 민 것이다! 풍성한 공주 드레스가 입고 싶은 날이 있다! 사실 90퍼센트 레즈비언에 엉망진창이다! (p.42)
발리의 밤은 무법 지대였다. ‘열 시가 넘으면 아시안 여자는 혼자 돌아다니지 않는 게 좋다’는 게스트하우스 스태프의 말은 인종차별이 아닌 충고였던 것이다. 편의점에 잠시 들렀다 돌아가는 길에 약에 취한 백인 남자들이 쫓아와 캣콜링을 하는 일쯤은 양반이었다. “How much”라며 말을 거는 남자들은 인종 불문이었다. 손목을 쥐여 잡힌 채로 질질 끌려다니다 신혼여행을 온 중국인 부부에 의해 구출되기도 했다. 밤이 찾아오면 숙소 문을 걸어 잠그고 의자를 문고리 밑에 비스듬히 세워뒀다. 혼자 숙소에 갇혀 벌벌 떨며 해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p.50)
그녀는 북토크에 왔다. 패널 중 한 명인 활동가 여름은 말한다. “어떤 측면에선, 우리는 모두 숨 쉬듯 성매매 되고 있기도 하잖아요?” 그녀는 와하하 웃는다.
몇 년 전 타지에서 만났던 남자를 떠올린다. 남자를 찾아가 죽일 생각을 매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냥 알았을 뿐이다. 세상엔 어떤 패턴이 있다는 걸. 더 큰 폭력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에 몸을 팔 수밖에 없는 패턴, 재화로서 존재하지 않으면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패턴이 있다는 걸. 어떤 삶은 그런 패턴의 무수한 반복일 뿐이라는 걸. 그 안에서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p.91)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었다. 나는 여자 곁에서 비로소 살아 있다고 느꼈다. 어떤 남자도 주지 못하는 것이었다. 여자와 있을 때만 숨을 쉬는 것 같았고, 다른 때는 멈춰 있는 것만 같았다. 여태껏 받아들이지 못했던 나의 정체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내내 시달렸던 외로움은 살아 있음을 갈망하기에 찾아오는 공허였다. 여자를 사랑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그 외로움은 모조리 사라졌다. 만나는 사람이 연인으로는 최악이라고 해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인정한 것만으로도 오롯이 존재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p.108)
눈을 감으면 다시 그날로 돌아간다. 여기서 말하는 그날은 며칠 전 말했던 그날은 아니다. […] 그 일베충이 나를 좋아해서, 좋아한다고 소문이 다 나서, 내가 친해지고 싶었던 그 여자애가 나를 싫어하게 되고 왜냐면 그 일베충은 그 여자애가 찜한 애니까… 나는 진짜 죽고 싶고 여자애들은 진짜 예민하고 재수 없고 그래서 깜찍하다고 생각하면서 꾸역꾸역 학교를 다니고… 아닌가? 이때는 생각보다 괜찮았던 듯. 아니면 그날일 수도 있다. 존이 소리를 지르고 나를 밀치고 내가 울고 걔가 장난이었다고 달래고 그때인가? 아닌가? 언제임? 도대체? 전부임? (p.137-138)
스물두 살의 나는 여자들의 사진을 찍기로 결심했다. 당시 미디어에서 재현하는 여성의 모습은 다소 납작해 보였다. 꿈이 많은 당찬 소녀의 모습 아니면 순진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얼굴, 그것도 아니면 능숙하고 섹시한 요부의 모습이었다. 물론 그런 모습의 여자들도 존재하지만 나는 그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내가 아는 여자들은 좀 더 다채로웠다. 틈만 나면 울어재끼고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화도 많고 저밖에 모르고 남자를 너무 좋아해서 꼴불견이고 시끄럽고 말 많고 실수도 많이 하면서 땍땍거리고…. 나는 그 여자들을 사랑했다. (p.149)
나는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사진을 찍거나, 사진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본 세상은 쪼잔하고 치졸했다. 나는 세상이 가진 최악의 면을 몰래 찍어서 길이길이 기억하고 놀려 먹고 싶었다. 내가 찍은 사진 안에는 내가 겪은 모든 이상한 일들이 있었다. 나는 미친 여자가 아니라고, 이건 ‘진짜’, ‘정말로’ 일어난 일이라고 꽥꽥대면서 말하지 않아도 사진에는 남아 있었다. (p.157)
걔들은 잘 살고 싶어서 죽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생각처럼 되지 않는 삶이, 목적을 찾을 수 없는 매일이 끝나지 않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가 될 수 없어서, 기준에 맞춰 깎이고 변화해야만 했던 그들을 안다. 그럼에도 잘 살아보려 했던 그들을 안다. (p.192-193)
● 네 목표는 ( )가 되는 거야
_이미지 노동자에게는 페르소나만 있고 ‘나’는 없다
아이돌 데뷔를 위해 입사한 연예 기획사에서 요구한 건 가수로서의 실력이 아닌 ‘43’이라는 숫자, 즉 몸무게였다. 데뷔라는 목표만을 위해 1그램이라도 줄이고 싶어서 입이 바싹 마를 때까지 침을 뱉고, 식욕이 도는 날이면 닥치는 대로 먹은 후 살이 찌기 전에 모조리 토해내기를 반복했던 것이 섭식장애로 이어졌다.
말라서 죽든지 미쳐서 죽든지, 확실히 죽을 거라는 예감에 데뷔를 포기한 뒤로는 페이스북, 유튜브, 인스타그램과 틱톡 등의 소셜미디어에서 다양한 페르소나들(여행 소녀, 건강 섹시 워홀녀, 삭발 힙스터, 홍콩 감성 헤테로 커플, 오타쿠 레즈비언 등)을 상품화해 얻은 ‘좋아요’로 돈을 벌었다. 하지만 솔직한 모습을 조금이라도 드러내려고 하면 팔로워들은 가차없이 언팔로우 버튼을 누르고 떠나가버렸다.
“아주 가끔은 핸드폰을 꺼도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페르소나가 나를 잡아먹은 것만 같다고 느낀다. […] 팔로워들은 모두 나의 페르소나가 ‘진짜’고 진짜 나는 가짜이길 바라는 것만 같았다.”
●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 큰 폭력에 비하면
_쉽게 접근 가능한 여자에게 가해지는 폭력
“발리의 밤은 무법 지대였다. […] 편의점에 잠시 들렀다 돌아가는 길에 약에 취한 백인 남자들이 쫓아와 캣콜링을 하는 일쯤은 양반이었다. “How much”라며 말을 거는 남자들은 인종 불문이었다.”
새로운 꿈을 찾기 위해 해외로 나갔지만 동양인 여자, 그것도 혼자인 여자에 대한 위협이 끊이지 않았다. ‘잘 수 있는 여자’라고 간주되니 인종, 연령을 불문한 남자들이 폭력적으로 접근해 왔다. 하지만 ‘오빠가 있다’고 말하기만 해도 그들의 ‘시도’를 막을 수 있었다. 낯선 나라에서 안전하게 생활하기 위해 어떤 남자와 함께 생활하게 됐고 그와 연인 관계로 발전했지만 그 남자 역시 연인에게 화내고, 손찌검하는 사람이었다. “더 큰 폭력을 피하기 위해 또 다른 폭력에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그 관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도 없었다. 작가는 자조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를 만나면서 얻어맞기나 하는 레즈비언이라니.”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남자와의 관계는 끝났지만, 타인에게 그저 몸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일은 계속 벌어졌다. 반드시 성별 때문에 일어나는 폭력은 아니었다. “자주 여자를 사랑하고 가끔 남자를 좋아”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난 뒤에도 동성 지인으로부터 원치 않은 성관계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 어느 날부터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_나의 불운이지만 나만의 것은 아닌
“중요한 약속을 완전히 잊어버리거나 몸 곳곳에 원인 모를 멍이 생기거나, 했던 이야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만났던 친구들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고, 하루의 절반이 통째로 사라지고, 정신을 차려보면 신호등을 건너고 있거나, 통증이 느껴져 정신을 차리면 시멘트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자다가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 들어 눈을 뜨면 부엌에 가 있고, 잠꼬대로 서늘한 말을 하고, 깨어 있을 때는 자주 화냈다.”
작가는 언젠가부터 나타나는 이상증세에 병원을 찾고 스트레스로 인한 신체화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겪은 슬픔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 ) 되기’를 강요하는 사회에 의해 끊임없이 소외되고 소거되었던, “맞고 싸우고 절망하고 사라지고 싶었”던 순간들에 대해.
작가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슬픔들을 마주하면서 카메라를 들었다. 자신과 다르지만 비슷한 여자들의 모습을 찾아 담기 시작했다. 처음엔 여자를 사랑해서, 매체에서 납작하게만 묘사되던 여자들의 다양한 구석을 발견하려는 의지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던 것이지만, 이제 그는 뷰파인더를 통해 자꾸만 어떤 존재로 치환되고 소외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거기에 있지만 실은 거기에 없는 사람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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