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넬로피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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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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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치 있고 도발적인 신화 스토리텔링
장르를 넘나들며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가 새롭게 번역되어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남성 중심의 질서를 전복하는 스토리텔링으로 매번 찬사를 받는 애트우드가 그리스신화의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 이야기를 새로 썼다. 역사적 사실과 신화 연구를 바탕으로 영웅 오디세우스의 아내이자 정숙한 여인으로만 평가되던 페넬로페를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오디세우스의 귀환까지 이십 년 세월 동안 애썼던 열두 시녀와 아들 텔레마코스, 트로이아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와 남편 메넬라오스까지 다양한 인물을 재해석했다.
이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만 나오지는 않는다. 신화는 원래 구전되었으며 지역에 따라 내용이 다르다. 동일한 신화가 한 지역에서는 이렇게 전해지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다르게 전해졌다. 이 책에서 나는 『오디세이아』 이외의 자료도 더러 끌어다 썼다. (...)
나는 교수형을 당한 열두 명의 시녀와 페넬로페에게 화자의 역할을 맡겼다. 시녀들은 주로 『오디세이아』를 정독하고 나면 자연히 떠오르는 두 가지 의문에 대해 노래하거나 낭송한다. 시녀들이 교살된 까닭은 무엇인가? 페넬로페의 진짜 속마음은 어땠을까? 『오디세이아』에 실린 이야기는 물샐틈없이 논리정연하지 않다.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너무 많다. 나는 교살당한 시녀들을 줄곧 잊을 수 없었는데, 『페넬로피아드』에 등장하는 페넬로페도 그들을 잊지 못해 괴로워한다. (본문 13p)
2000년 발표한 『눈먼 암살자』로 부커상을 수상하고,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인 『증언들』로 2019년 두번째 부커상을 수상하며 현대문학의 거장이자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거론되는 애트우드에게는 문학의 성역이 없다.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들을 발표해 페미니즘 작가로 명성을 얻은 애트우드는 『페넬로피아드』에서도 정본으로 취급되는 『오디세이아』의 허술한 틈을 파고들어, 신화의 새로운 판본을 만들어냈다.
“분노의 여신들이여, 복수의 여신들이여, 당신들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페넬로페와 열두 시녀의 시선에서 트로이아 전쟁을 조망하다
『페넬로피아드』는 영웅 오디세우스의 그림자에 가려 그동안 평면적으로 그려진 페넬로페의 숨겨져 있던 면모와 그녀의 조력자였던 열두 시녀를 전면에 드러낸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오디세우스와 페넬로페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아 전쟁에 참전하고,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가 떠난 이십 년 동안 이타케성을 굳건히 지킨다. 페넬로페의 지위와 재물을 탐낸 남성들이 구혼을 핑계로 성에 쳐들어와 한 사람을 선택하라며 협박하지만, 페넬로페는 시아버지의 수의를 지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낮에는 베를 짜고 밤에는 다시 풀며 시간을 버는 지혜를 발휘한다.
애트우드는 이렇듯 ‘지혜롭고 정숙한 아내’로 그려지는 페넬로페를 다각도에서 조명한다. 외모가 뛰어나 모두의 주목을 받는 헬레네를 질투하고, 오디세우스를 사랑하며, 이타케성에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한 인간으로서의 그녀를 주목한다. 무엇보다 구혼자들의 협박에 맞서는 과정에서 자신의 수족이 되어준 시녀들을 딸처럼 아끼던 페넬로페가 그들의 무고한 죽음 뒤에 절망하는 모습을 개연성 있게 그린다.
“겁탈당한 아이들이야. 가장 젊은 아이들. 가장 아름다운 아이들.” 나는 말했다. 그애들은 구혼자들과 어울리며 나의 눈과 귀가 되어주기도 했지만 그 말은 덧붙이지 않았다. 수의를 짜던 기나긴 밤 나를 도와주던 아이들. 눈처럼 새하얀 거위떼. 나의 지빠귀들, 나의 비둘기들.
(...) 대성통곡을 한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되살아나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혀를 깨물었다. 지난 세월 동안 그토록 자주 깨물었는데도 혀가 남아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본문 178~179p)
애트우드는 이 이야기의 주역임에도 그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열두 시녀의 이야기도 생생하게 전한다. 페넬로페를 도우며 이타케성을 지키고, 구혼자들의 정보를 빼내는 역할을 하며 그들에게 강간당하거나 겁박당하는 위험을 무릅쓴 어린 시녀들의 억울함을 외면하지 않는다. 억울하게 죽어간 열두 시녀의 비통함을 드러냄으로써 애트우드는 트로이아 전쟁의 승리라는 영광 뒤에 가려진 눈물과 희생을 직시한다.
나는 그이를 위해 정절을 지키지 않았던가? 온갖─강요에 가까운─유혹에도 아랑곳없이 그이를 마냥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야기의 공식 판본이 널리 알려지자 결국 내 꼴이 뭐가 되었나? 교훈적 전설. 여자들을 매질할 때 써먹는 회초리. 어째서 너희는 페넬로페처럼 사려 깊고 믿음직스럽고 참을성 많은 여자가 못 되느냐? 그게 정해진 대사였다. 가객도 그랬고 이야기꾼도 그랬다. 제발 나처럼 살지 마요! 나는 여러분의 귀에 대고 이렇게 외치고 싶다. (15~16p)
우리는 시녀들/ 당신이 죽여버린 여자들/ 당신이 저버린 여자들// 맨발을 움찔거리며/ 허공에서 춤추었네/
너무너무 억울했네 (19p)
우리는 어릴 때부터 왕궁에서 일했다. 동틀녘부터 해질녘까지 쉴새없이 일했다. 울어도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잠을 자다가도 발길질에 눈을 비비며 일어나야 했다. 우리는 어미 없는 자식이라는 말을 들었다. 아비 없는 자식이라는 말도 들었다. 게으르다는 말을 들었다. 더럽다는 말도 들었다. 우리는 더러웠다. 더러움이 우리의 관심사였고, 더러움이 우리의 직무였고, 더러움이 우리의 특기였고, 더러움이 우리의 허물이었다. (28~29p)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물은 저항하지 않아. 물은 그냥 흐르지. 물속에 손을 담가도 그저 그 손을 쓰다듬으며 지나갈 뿐이야. 물은 딱딱한 벽이 아니라서 아무도 가로막지 못해. 그렇지만 물은 언제나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야 말지. 물을 끝까지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그리고 물은 참을성이 많아.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이 바위를 닳아 없어지게 하지. 그걸 잊지 마라, 내 딸아. 너도 절반은 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장애물을 뚫고 갈 수 없다면 에둘러 가는 거야. 물이 그리하듯이. (62p)
나는 종종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 헬레네가 그렇게 허영심에 부풀지만 않았더라면 그녀의 이기심과 비뚤어진 욕망 때문에 우리 모두가 온갖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일도 없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녀도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94p)
신들은 내가 고통받길 원하지 않는다더니 말짱 헛소리였다. 신들은 모두 희롱하길 좋아한다. 나는 신들이 재미삼아 돌을 던지거나 꼬리에 불을 붙여 괴롭히는, 주인 없는 개와 같은 신세였다. 신들이 맛보고 싶어하는 것은 짐승의 기름이나 뼈가 아니라 우리의 고통이다. (142p)
하루종일 웃음과 다정한 말뿐,/ 고통의 눈물 따윈 찾을 수 없네./ 우리의 다스림은 자비로우니/ 언제나 태평성대 조화로워라.// 그러나 곧 아침이 우릴 깨우고./ 오늘도 닳도록 일만 하면서/ 역겨운 저 놈팡이 망나니들 앞에서/ 치맛자락 걷어올려 보여야 하네. (144~145p)
대성통곡을 한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되살아나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혀를 깨물었다. 지난 세월 동안 그토록 자주 깨물었는데도 혀가 남아나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179p)
분노의 여신들이여, 오 복수의 여신들이여, 당신들이 마지막 희망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벌을 내리고 원수를 갚아주십사 간청합니다! 살아생전에 누구의 옹호도 받지 못한 우리를 옹호해주세요! (202p)
당신은 우리를 줄줄이 엮었고, 당신은 우리를 목매달았고, 당신은 우리를 줄에 걸린 빨래처럼 주렁주렁 널어놓았죠. 이 무슨 만행인가요! 이 무슨 배은망덕인가요! 젊고 포동포동하고 더러운 계집애들을 머릿속에서 말끔히 지워버린 뒤에 당신은 스스로 얼마나 고결하고 얼마나 정의롭고 또 얼마나 깨끗해졌다고 생각하셨나요! (212p)
희곡, 소설, 노래, 시 등 장르를 넘나드는 실험적 형식으로
잠들어 있던 신화를 생동감 있게 되살린 작품
『페넬로피아드』는 이야기의 화자를 바꾸어 독자의 편견을 깨뜨릴 뿐 아니라, 형식 면에서도 실험적 시도를 한 작품이다. 애트우드는 이 작품을 상연을 목적으로 썼다고 밝힌 바 있는데, 바로 극본으로 사용해도 손색없을 희곡을 비롯해 산문, 노래, 시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이야기를 전개한다. 『오디세우스』에서는 불가능했지만, 시공간과 장르를 가로지를 수 있는 현대문학에서는 가능한 시도다. 특히, 시녀들의 목소리를 전달할 때는 코러스라인(노래와 시)을 활용하는데, 첫 시집 『서클 게임』으로 캐나다 총리 상을 수상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한 작가답게 시녀들의 고통을 재치 있으면서도 힘 있는 필치로 전달한다.
너무너무 억울했네
당신은 우리의 공포를 핥으며
즐거워하고
손을 들어올리며
떨어져내리는 우리를 구경하셨지
우리는 허공에서 춤추었네
당신이 저버린 여자들
당신이 죽여버린 여자들 (본문 20~21p)
코러스[탭댄스 구두를 신은 시녀들]
시녀들에게 덮어씌워!
저 음탕한 계집애들!
이유는 묻지 말고 높이 매달아─
시녀들에게 덮어씌워! (본문 169p)
판사: 그 뒤쪽에 무슨 소란입니까? 정숙하시오! 거기 아가씨들, 다들 꼬락서니가 그게 뭡니까? 옷매무시 좀 고쳐요! 목에 걸린 밧줄도 풀고! 착석하세요!
시녀들: 우리를 잊지 마세요, 판사님! 우리 사건은 어떻게 되는 거죠? 그를 풀어주면 안 돼요! 그는 우리를 잔혹하게 목매달았다고요! 우리 열두 명을! 열두 명의 젊은 여자를! 아무 이유도 없이! (본문 195~196p)
마거릿 애트우드는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꾸준히 경계를 무너뜨려온 작가다. 남성 중심의 서사를 전복시키며 페미니즘 작가로 명성을 얻었으며, 외교·환경·인권·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이 작품에서도 애트우드는 남성 중심의 신화를 여성의 관점에서 현대적으로 풀어내며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가장 소외되었던 존재인 열두 시녀를 내세워 위계질서를 뒤집었다. 초판이 출간된 지 12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신화의 가능성을 확장한, 도발적이며 전위적인 작품이다.
작가정보
1939년 11월,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나 온타리오와 퀘벡에서 자랐다. 퀘벡 북부에서 삼림곤충연구소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 그녀의 가족들은 매년 봄이면 북쪽의 황무지로 갔다가 가을에 도시로 돌아왔다. 이처럼 고립된 생활 속에서 애트우드에게는 책 읽기가 유일한 놀이였다. 여덟 살에 토론토의 정규학교에 입학한 후 뛰어난 적응력으로 또래들을 앞질러 열두 살에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고교 시절의 어느 날 시인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토론토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첫 시집 『서클 게임』으로 캐나다 총리 상을 수상했고, 악명 높은 살인 사건을 다룬 『먹을 수 있는 여자』(1969)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이후 남성 중심 사회를 비판하는 소설들을 발표해 페미니즘 작가로서 명성을 얻는 동시에 외교·환경·인권·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며 문학적 성취를 인정받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 토론토의 요크대학교 등에서 영문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국제사면위원회·캐나다 작가협회·민권운동연합회 등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작으로 『시녀 이야기』(1985), 『고양이 눈』(1988), 『도둑 신부』(1993), 『그레이스』(1996), 『오릭스와 크레이크』(2003), 『홍수의 해』(2009), 『미친 아담』(2013) 등이 있다. 2000년 발표한 『눈먼 암살자』로 부커상을 수상했고, 『시녀 이야기』의 후속작인 『증언들』로 2019년 두번째 부커상을 수상했다. 기발하고 지적이며 재치 있는 상상력을 지닌 작가로,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며 매년 노벨문학상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및 영문학과를 거쳐 마이애미대학교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살만 루슈디의 『분노』로 제2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무어의 마지막 한숨』 『악마의 시』 『한밤의 아이들』 『롤리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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