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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슈퍼 옆 환상가게

민음의 시 323
강은교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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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8월 21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7월 1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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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11.45MB)
ISBN 9788937459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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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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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신작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가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강은교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생의 말년을 가리키는 말로 노년기 대신 ‘노을기’라는 말을 쓰고 싶어진다. 생의 노을이 지는 시간, “강물 위로 서서히 가라앉”는 해처럼 가만히 낮아지는 시간, “검은 몸부림”을 뒤에 남기고 사라지는, 그러면서 또 살아지는 시간.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노을기에 이르러 황혼의 조명 아래 환히 드러나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 그 가볍고도 무거운 생의 진경을 담아낸다.

『풀잎』 , 『허무집』 등의 시집을 통해 허무의 심연과 윤회적 가치관을 노래한 시인이 근래 천착해 온 테마는 ‘당고마기고모’다. ‘당고마기’는 ‘바리공주’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무속 신화다. 당고마기 서사의 핵심에는 잉태와 출산이 있다.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수난을 겪은 여성이 신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 신화 등 다양한 서사들이 당고마기를 중심으로 전승된다. 앞선 시집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시집에도 당고마기고모가 등장한다. 신화적 인물에 더해 혈연 기반의 호칭이 더해져 ‘당고마기고모’는 유장하고 장대한 시간 속에서 개인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강은교만의 거리가 된다.

당고마기고모에게서 계승된 우리의 고통, 우리의 고통으로 연장된 당고마기고모의 삶이 교차하는 곳에는 ‘깨진 아름다움’이 있다. 젊은 날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노을기의 아름다움은 미래도, 환상도, 다 깨진 뒤에 알게 되는 누추한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에는 서글픈 가운데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 대범하고도 담대한 사랑의 미학이 있다. 미래도, 환상도, 말하자면 “드넒은 여기 사랑하올 것들” 모두가 손안에 부서진 채 반짝일 때, 강은교의 언어는 깊은 허무의 공동체에 구전되는 사랑의 언어가 된다.
자서(自序)
1부 운조의, 현(絃)을 위한 파르티타
내가 팔을 뻗치면 13
꽃을 끌고 14
용서 15
붉은 달빛 16
저 하늘의 피리소리가 17
너를 잃으니 18
교목(喬木) 19
부활 20
가야금 21
자갈길 22
애란 잔디 23
가장 기-인 소리 24
무수한 내가 25
선물 26
너의 길 28
저녁 식탁 29
벽 30
붕대 31
아무데도 32
사랑하는 사람은 33
계단 34
그 작은 주점 35

2부 당고마기고모의 여행노래
당고마기고모의 굽 낮은 구두 39
하늘색 가위 42
환상가게 44
샛골목 안 우체국 48
당고마기고모는 살짝 절름거리네 50
당고마기고모의 흉터 53
고모의 자줏빛, 낡은 가방 54
찻집, ‘1968년 가을’ 56
초록빛 식탁 59
당고마기고모네 싱크대 62
짜다 만 붉은 털실 64
당고마기고모네 창 밑 67
이옥봉의 집 68
너무너무 안락한 의자 71
슈퍼마켓을 나오는 고모 74
빗속에 혼자 앉아 있는 당고마기고모 76
고모의 기도서 78
오래전에 쓴 시: 비마(飛馬) 80
고모의 골목 81
노을이 질 때 82
필립스 다리미 84

3부 내것이 아닌 나의
‘아니고’ 들에서 돌아오는 밤 89
인생 91
키 큰 금목서가 내게 말했네 93
어떤 전시장에서 94
봄·산길 96
앵두나무 가지를 부러뜨리다 97
검은 창들_ _ _ 구형왕릉에서 98
시집값 100
거대한 오후 101
내것이 아닌 나의 102
TV를 들여다보네 104
만두 106
나는 결국 DMZ에 가지 않았다 108
새가 난다-어느 시인에게 바침 110
양배추, 그리고 113
그 아이의 방 114

“고모, 노을이질 때가 됐어요” 나는 이층 계단에 올라 서서 외쳤어. 그리고 마구 뛰어 올라갔어. 구석에 있던 의자를 번쩍 들고,
고모가 느릿느릿 걸어오셨어. 고모는 의자에 풀썩 앉으셨어. 마치 싫은 자리에라도 억지로 앉는 듯이, “고모, 고모,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니, 노을을 보려니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애” 고모의 비스듬한 웃음, 나는 고개를 숙였어. 나도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야. 우리는 나란히 해를 바라보기 시작했어.
-「노을이 질 때」에서

**

“환상깨기” 첫줄을 읽는다. ‘우리는 너무 환상에 빠져 있다.’ 그렇게 시작되는 그 책,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책장을 넘겨 본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끄덕이며 우선 커피의 환상부터 깬다, 목마름을 축여 주리라는 그 환상, 달콤하리라는 그 환상, 그 환상, 깬다,
홀 한구석 유난히 어두워 보이는 한 켠에 노트북을 켜는 청년이 보인다, 읽던 페이지가 조그맣게 속삭인다, 환상을 깨게, 그 책의 저자를 넘어서리라는 생각을, 한 명제 뒤엔 늘 다른 명제가 나타나지, 저자만이 아는 명제가,
-「환상가게」에서

**

나는 하늘색 가위의 인상착의를 말해 주었지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짧은 바지를 입었으며 손에는 주머니를 들고 있음…… 뭐 그렇게 설명하곤 했지,

오, 나의 하늘색 가위, 당고마기고모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하늘색 가위, 지금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어딜 헤매고 있나, 아니, 어디선가 그 넓은 양팔을 벌려 흙이라든가, 그 무슨 꽃가지를 안고 있나
-「하늘색 가위」에서

**

배 같은 필립스 다리미
바다를 가네

파도처럼
스팀을 내뿜네

실크들이, 린넨들이
파도를 줍네

방 안 가득 돛들이 춤춰
풀먹인 옥양목 목소리 펄럭펄럭 춤춰
-「필립스 다리미」에서

**

다시 살아도 이렇게 살게 될 거야
스무 살에 연애를 하고
둬번쯤 긴 키스를 꿈꾸다가
사소한지 모르는 결혼을 하고
사소한지 모르는 이별을 하고
헐떡헐떡 뛰어가 버스를 타고
잠시 숨을 멈추는 동안
사소하고 사소하게 정찰표를 들여다보네
하루에도 몇 번씩 엘리베이터로 승천을 하고
에스컬레이터로 세상을 굽어 보며
내가 종족의 한 명임을 짐작하네
문득 별이 가까이 오는 저녁이면
뉴스를 보며 내가 그 여러 통계의 하나임을 실감하고
사소하고 사소하게 잠드네
-「인생」에서

■ 하늘색 가위
객관적 상관물을 찾는 것은 문학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백석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등장하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나 이청준 단편소설 「눈길」에 등장하는 치자나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객관적 상관물이다. 독자들은 갈매나무나 치자나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정서와 생각에 다가갈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객관적 상관물이라면 단연 ‘하늘색 가위’다. 시 「하늘색 가위」 에 등장하는 이 사물은 작중 화자가 잃어버린 물건이자 화자의 당고마기고모가 애지중지 하던 물건이다. 시는 화자가 잃어버린 가위를 찾으러 집안 여기저기, 동네 구석구석을 살피던 중 하늘색 가위를 찾는 것인지 그 가위를 아끼던 당고마기고모를 찾는 것인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광활해진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물이 상징적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의 차원으로 비상할 때, 일평생 교차하며 노동한 가위질과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어딜 헤매고” 있을 당고마기고모의 삶이 겹쳐진다. 하늘색 가위의 가위질은 당고마기고모의 고단한 걸음걸음과 닮았다.

■ 필립스 다리미
그리고 다리미가 있다. 「필립스 다리미」에서 다림질하는 일상적 순간은 어느새 바다 위에 배가 떠가고 파도가 이는 비일상적 풍경으로 바뀐다. 손에 쥐고 다림질하는 다리미는 바다 위를 떠가는 배가 되고, 다리미가 뿜어내는 스팀은 파도치며 일어나는 거품이 된다. 다리미가 지나간 자리마다 펴지는 옷감들의 주름. 주름의 파도를 옷감들이 줍는다. 이제 다림질하는 평범한 순간들은 다만 옷에 남겨진 주름을 펴는 것이 아니라 옷에 새겨진 시간을 펴는 행위가 된다. 시간을 편다는 것은 흠결 없는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옷감 위를 다리미가 지나갈 때 펴지는 것은 린넨이나 실크의 주름이지만 그 실체는 시간의 주름 속에 감춰진 기억들이다.

■ 시의 늪을 벗어나
책의 시작을 알리는 첫 페이지에는 시인이 쓴 서문, 즉 자서가 있다. 이 시집의 자서에서 강은교 시인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문장을 쓴다. “시여, 달아나라, 시여, 떠나라, 시의 늪들을./ 그때 시는 비로소 일어서리니.” 시에 대한 결심인 동시에 인생에 대한 결심이라고 해도 오독은 아닐 것이다. 인생이여, 달아나라, 떠나라, 인생의 늪들을. 그때 인생은 비로소 일어서리니. 일평생 시로 살아온 시인이 시에 대해 하는 단 한마디 말은 시로부터 달아나라는 것. 미래와 환상으로부터 달아나라는 것, 그때 비로소 미래도 환상도, 말하자면 우리가 기다리는 인생이 우리를 향해 돌아볼 것이니.

작가정보

저자(글) 강은교

1968년 월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외 2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허무집』, 『빈자일기』, 『소리집』, 『우리가 물이 되어』, 『바리연가집』 등이 있고 산문집 『그물 사이로』, 『추억제』,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구상문학상 본상을 수상했다. 동아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로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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