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토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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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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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모든 소설의 주인공은 더 이상 ‘사회 초년생’이 아닌 여성들이다. 이제는 방황도 실수도 사치가 되어 버린 나이이지만 이들에게는 여전히 고민이 많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선택지들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이 결혼을 지속해도 될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꼬리를 무는 질문과 불안, 권태 속에서 ‘꿈’은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넘어 떠올리기조차 힘든 먼 단어가 된 것 같다.
현실은 버겁고 꿈은 멀리 있지만 손끝에 만져지는 것이 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토템을 만지작거리는 여성들은 슬쩍 방향을 틀어 본다. 토템을 손에 단단히 쥐고 마음을 달리 먹어 보기, 그렇게 앞에 놓인 현실을 조금 다르게 보기. 작가의 말대로 소설 속 인물들은 이 “신통한 토템”을 “서로의 손에 슬며시 쥐여 주기”도 하므로, 『꿈과 토템』은 또한 우정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 걸음 용기 내어 일상을 바꿔 나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독자들 역시 어느새 손에 쥐어진 토템과 함께 오늘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꿈은, 미니멀리즘 51
모닝 루틴 95
501호의 좀비 125
탄생 163
친구가 되어 드립니다 191
공범의 반대말 227
작가의 말 238
작품 해설
다인분의 삶_김보경(문학평론가) 242
잠자리 한 마리가 소명의 시선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벌써 잠자리가 등장하다니. 한 해의 절반이 지나 버렸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또래 친구가 소유한 것, 회사 동료들이 가진 것, 그러나 자신은 갖지 못한 것과 여전히 부족한 점들이 차례차례 떠올랐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잠시나마 머릿속을 완전히 비우는 데도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무슨 생각 해요?” 동우가 침묵을 깨며 소곤거렸다.
“아무것도, 아무 생각도 안 해요.”
소명이 말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소명은 정말로 머릿속을 텅 비워 볼 참이었다. 자신에게 그러한 시간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는지 소명은 지금 막 깨달았다.
-「꿈은, 미니멀리즘」에서
유림아, 너를 품고 있을 때 엄마는 무척이나 충만했단다. 그와 동시에 고통스럽고 고독했단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며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선다. 두 딸의 손을 한 쪽씩 잡고 지독하게 외로운 기분이 들거든 꼭 엄마에게 얘기해 달라고 한 번 더 말한다.
“유림이, 진이, 둘 다 알았지? 엄마랑 약속하는 거야?”
“응!” 진이가 먼저 대꾸하자 “아빠한테도.” 하고 남편이 덧붙인다.
진이가 목소리를 높여 아빠에게도 얘기해 주겠다고 대답한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1층을 향하는 동안 유림은 여전히 입을 꾹 닫고 있어서 조바심이 난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대답을 안 해 주면 걱정이 된다고 채근하는 나를 유림이 엘리베이터 밖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말 안 해도 알던데 뭐.” 유림이 겸연쩍은 듯 중얼거린다. “나한테 고민거리 있으면 꼭 엄마가 먼저 물어보던데? 우리 큰딸 무슨 일 있구나 하면서.”
-「탄생」에서
성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눈빛을 보면 누구라도 모를 수가 없을 것이다. 연애가 막 시작될 즈음에 볼 수 있는, 특수한 발광체를 삼킨 듯한 눈빛. 그렇게 빛나던 눈빛이 뿜어내는 열기가 한순간 사그라지기도 한다는 사실은 경험을 통해 혹독히 배웠다. 그러나 성지는 그 점이 두려워서 연애를 피할 생각은 없었다. 실은 반대였다. 그런 눈빛을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로맨스는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가능한 게 아닐까 싶었다.
우솔의 팔짱을 끼면서 성지는 로맨스가 피어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성인이 되고 자기 세계가 확고해진 후에 친구를 만드는 일 같다고 생각했다. 연애 감정이나 인맥상 필요와 무관한 사심 없는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이 몇 배는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친구가 되어 드립니다」에서
■ 나만의 토템
어디 하나 기댈 수 없는 답답한 상황,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순간, 주머니 속에서 만져지는 작지만 단단한 물건은 불안을 이겨 낼 힘을 건네고 분노를 신중하게 꺼내 놓을 차분함을 준다. 나만의 작은 토템이다. 소설 「토템, 토템」에서 자신을 평가하는 말들에 둘러싸여 지쳐 가던 ‘소하’는 평범한 빨간 펜을 만지다 문득 깨달음을 얻는다. 세상은 빨간 펜을 손에 쥐고 자신을 평가하려는 이들로 가득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손에 쥐고 뚜벅뚜벅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소하가 ‘토템’으로 다시 호명하는 빨간 펜은 부당한 현실에 나의 기준을 적용할 용기를 준다. 토템의 마법을 경험한 소하는 빨간 펜에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친구들에게 나누기 시작한다. 소하가 건네는 것은 각자의 고민을 품고 살아가는 친구들을 위한 위로와 용기다.
■ 우정의 씨앗
무엇이든 토템이 될 수 있다. 고민을 들어 주는 친구, 그 친구와 함께 보내는 별일 없는 휴일, 지루한 일상에 틈을 내는 작은 루틴들까지. 토템은 사회적 기준들이 나를 자꾸 흔들어 놓을 때 다시 나를 나로 살아가게끔 해 주는 모든 것들이다. 은모든의 소설에는 언제나 이처럼 인물들이 자신을 돌보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그 순간을 함께 나누는 친구들이 있다. 「모닝 루틴」은 설 연휴를 함께 보내는 세 친구의 이야기다. 이혼을 하며 원치 않는 명절의 의무에서 벗어난 은하와 오랜만의 휴일을 만끽하려는 민주, 쏟아지는 집안사람들의 충고에서 탈출해 친구들의 집을 찾아온 성지. 이들이 함께하는 시간은 복잡한 고민을 잠시 내려놓고 서로를 북돋는 안식처가 된다. 친구들과의 관계는 서로의 감정을 헤아릴 여유가 없는 현실에 치여 멀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친구가 되어 드립니다」에서 성지가 소원해졌던 민주를 불현듯 떠올렸듯, 관계는 순식간에 회복되기도 한다. 「공범의 반대말」의 경진과 혜진이 보이스피싱을 당할 뻔한 노인을 합심해 도운 사건을 계기로 우정을 쌓게 되었듯, 삶에는 언제나 다시 재생되고 새로 움틀 수 있는 우정의 씨앗이 심겨 있다.
■ 가능성의 세계들
은모든의 소설을 읽어 온 독자들은 한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른 작품에도 등장하며, 그 인물들이 조금씩 다른 삶을 살아가는 ‘평행 우주’의 세계관이 흐르고 있음을 눈치챌 것이다. 문학평론가 김보경이 해설에서 짚어 주었듯, 이러한 평행 우주의 세계관은 특정한 삶이 옳다거나 그것만이 진짜라는 식의 당위와 원본성을 거부하며 “모든 가능한 삶을 최대치로 긍정”한다. 이 최대치의 긍정 속에서 인물들의 일상은 그 자체로 무수한 가능성이 된다. 이야기를 넘나들며 새로운 우주를 누비는 인물들을 따라가는 일은 그 자체로 읽는 즐거움을 선사하고, 벗어날 길 없는 듯한 답답한 현실을 조금은 거리 두고 바라볼 여유를 안겨 준다.
*토템, 토템
일터에서도 억지로 나간 선 자리에서도 시종일관 평가받는 말을 듣는 소하. 그의 눈에 문득 낯설게 들어오는 물건이 하나 있다. 출장에 갔다 머무른 호텔 방에서 발견한 빨간색 펜이다. 소하가 그 펜을 쥐고 있는 것을 본 낯선 이는 말한다. “저도 그 펜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걸 가지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지 뭐예요.”
*꿈은, 미니멀리즘
소명은 영어 공부, 운동, 자기 계발로 점철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사무실에서 온갖 잡다한 일을 맡아 하던 자신을 “저기요.”라고 부르는 직장 동료를 보며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인정받겠다’ 다짐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쌓인 스트레스는 쇼핑으로 풀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뒤, 소명은 더 이상 그런 생활을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어느새 빈틈없이 차 버린 집 안을 비워 보기로 한다. 옷, 화장품, 가전, 과거의 흔적을 담은 여러 물건들까지.
*모닝 루틴
설 연휴 아침, 은하는 함께 사는 민주와 느긋한 휴일을 보낼 계획이다. 이혼하기 전, 명절마다 시댁에 가서 집안일을 도맡아 하던 때에는 감히 생각지 못한 꿀 같은 휴식이다. 집에 있는 음식으로 요기를 하고 소파에 늘어져 영화를 보던 은하와 민주에게 친구 성지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명절 음식을 챙겨 갈 테니 오늘 하루만 재워 달라는 부탁이다.
*501호의 좀비
전 세계적인 좀비의 출몰로 성준네 집은 뜻밖의 명절을 맞았다. 좀비들이 지나갈 때까지 할머니와 부모님, 누나와 조카까지 한집에 모여 지내기로 한 것. 성준의 할머니는 이날을 대비해 냉장고를 꽉 채워 두었다. 그런데 옆집 501호의 사정은 열악하다. 안 그래도 먹거리가 부족한 한나와 이은의 집에 갑작스레 큰아버지와 그의 아내 종미가 들어오게 된 것. 그런데 큰아버지와 좀비 떼를 번갈아 보는 이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탄생
유림은 동생 진이의 생일을 맞아 가족 나들이를 떠난다. 중학생인 유림은 같은 반 마리와의 대화 이후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신이 난 진이는 자기가 태어나던 당시의 일을 들려 달라고 엄마를 조른다. 엄마는 인공 자궁 에그에서 진이가 태어나기까지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몸속에 유림을 품고 있을 당시의 고독에 대해, 진이가 태어나기까지 에그를 지켜 준 아빠의 사랑에 대해.
*친구가 되어 드립니다
대학 선배로부터 우솔을 소개받아 만난 성지. 사실 성지는 인간관계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지 오래다. 데이트는 지루하기만 하고, 데이트 도중 우솔이 한 말을 듣고 성지는 그가 가부장제 아래 편히 살아온 남자라고 단정 짓는다. 하지만 만남을 이어 가며 그것이 자신의 선입견과 오해였음을 알게 되고, 점차 우솔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한다. 성지는 우솔과의 데이트 중 오래 소원했던 친구 민주를 떠올린다.
*공범의 반대말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와 이어지는 짧은 소설. 함께 여행을 온 경진과 혜정에게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두 사람의 관계를 묻는다. 공범, 아니 ‘공범의 반대말’이라는 두 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걸까?
작가정보
작가의 말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인물과 매번 새로운 세계를 누비는 인물들을 앞으로도 오래도록 만나서 들여다보고 싶다. 책장을 펼치는 누군가가 거듭 등장하는 그들을 어느새 친구처럼 느끼는 순간도 그려 본다. 한동안 소원했다가도 다시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신통한 토템을 발견하면 서로의 손에 슬며시 쥐여 줄 수 있기를. 아주 오래전부터 먼 훗날까지 변치 않는 나의 꿈은 바로 그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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