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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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가을෴짝짓기와 구애 27
겨울෴고치 안에서 63
이른෴봄 허물벗기 71
늦봄෴허물 씹어 먹기 86
초여름෴영역 넓히기 108
한여름෴빛 아래에서 118
늦여름෴그늘을 찾아 130
가을෴초입 당분을 모아 150
그들의 한살이 166
작품해설 190
작가의 말 214
* 나는 우리의 저술가들에게 말했다.
믿기 어려울 정도의 사소함, 그것이 우리가 부여받은 필력이다. 가라, 톡토기답게 튀어 올라 유한한 두발이의 삶을 무한한 갉작임으로 기록하라. 모기답게 깊숙이 침을 찔러 익은 복숭아 같은 인간의 외피에서 비탄의 적혈구를 뽑아내라. 거미답게 단백질 실을 엮어 우리를 눌러 죽이는 그들의 엄지와 검지 사이에 방사형 텍스트를 수놓아라!
-26쪽
* 누 선생의 말씀대로 지구의 모든 구성원에겐 실상 어떤 이름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름이란 하나로 고정할 수 없는 우리의 탈바꿈을 가둬놓는 두발이엄지의 형식이다. 우리는 한시도 멈춰 있지 않고 늘 다른 것으로 흐른다. 물방개와 물땅땅이는 두꺼비에게로 흘러 구름이 되고, 왕풍뎅이와 산누에나방은 동고비에게로 흘러 빗방울이 된다. 꽃과 나무는 나비로 날개를 갖고, 땅과 바위는 벼룩의 도움으로 점프한다. 느낄 수 있겠는가? 위가 들리고 밑이 빠지는 쾌감을, 삼키는 뜨거움과 씹히는 상쾌함을, 구름으로 응결되고 빗방울로 추락하는 기쁨을. 두발이엄지도 우리처럼 믿고 느끼는가?
-30-31쪽
* 시간의 풍화와 침식작용에도 사라지지 않는 불안의 난반사와 응어리진 충격파가 필자의 윗입술을 떨리게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버들의 팬티 검사 기억과 호랑의 욕실 구멍 기억은 두 암컷 엄지의 내면 진피와 관절지 형성에 주요 영향을 미쳤기에 필자는 모른 척 지나칠 수 없다.
-104쪽
* 세상엔 한시라도 빨리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자돌이’가 많았으나,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런 세상이라도, 세상은 버들을 만들어 호랑의 곁에 보내주었다. 그것이 호랑이 이 세상이 증오로 가득 차 있지만은 않다고 믿는 이유였다. 그것이 호랑이 버들의 옷과 신발을 정리하며 버들의 욕망과 버들의 상처, 버들의 조증을 이해하려는 이유였다.
-107쪽
* 나도 그렇다고, 나에게도 당신의 그 상처가 있다고. 그렇게 입을 열어 자신의 생채기를 꺼내 보이면 어떤 이들은 버들 앞에 재판소를 세워 땅땅땅 판사봉을 때렸지. 냉소와 야멸찬 웃음으로 버들의 진심을 내동댕이쳤어. 그렇게 멍들고 찢어져도 버들은 계속 사람들과 연결돼 있고 싶어 했어. 「왜 너 자신을 낭비해. 왜 그렇게 너 자신을 꺼내서 진열해놔.」 호랑은 버들을 이해하지 못했어. 버들의 마음은 알았지만 버들의 방식은 위험하고 어리석어 보였지. 하지만 기절하듯 쓰러져 잠이 든 버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의 몰인정함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끝없이 싸우고 있는 버들을 느낄 수 있었어.
-110-111쪽
* 버들 나는 언제나 네가 전부야. 네가, 내, 전부야.
호랑 그럼 됐네. 내가 전부니까 세상이 망하든 말든 상관없잖아.
버들 나는 괜찮아. 난 받아들였어. 근데 넌 어떡해?
호랑 내가 왜?
버들 넌 무서워하잖아.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그래서 나랑 못 헤어지는 거잖아.
-136쪽
* 여전히 번개가 내리치던 어느 밤, 침대에 누운 호랑이 버들의 허벅지를 끌어안았다. 버들은 호랑의 옷 속에 손을 넣어 등을 만졌고, 호랑은 버들의 아랫배에 뺨을 문질렀다. 두 사람의 팔과 다리가 등나무의 줄기처럼 엇갈려 있을 때, 불현듯 버들이 고개를 들어 창가를 봤다. 기척을 느끼고 귀 끝을 움찔하는 개나 고양이처럼. 잠시 뒤 창밖에서 빛이 번쩍했다. 버들은 번개가 치기도 전에 번개의 기미를 알아차린 것이다. 고양이를 어루만질 때 야옹 하고 고양이가 울기 전 그르릉 하는 배 속의 울림을 먼저 느끼듯이.
저 얼굴이 그 얼굴일까.
호랑이 버들을 바라봤다.
그래, 이제 나도 괜찮아. 죽음이든 삶이든. 그러니 나에게 무너져 내려.
-148-149
* 호랑 다른 사람이 그렇게 중요해?
버들 안 중요해. 그래도 그 사람들이 없으면…… 상상해봐.
몇 초의 시간이 흐른 뒤 호랑이 휴대전화를 바닥에 탁 내려놓는다.
호랑 상상했어. 난 괜찮아. 난 너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아.
버들 난 아냐.
그 말에 호랑이 버들을 뚫어져라 본다. 입술을 깨문다. 욕을 내뱉고 싶은 얼굴이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고 귓속에 짧은 이명이 울린다. 버들은 고요하다.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나도 그랬지만, 너의 선택은 용납해줄 수 없다는 표정이다.
-160-161
* 호랑이 헛웃음을 지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어. 뭐라고 설득해야 할지 몰라 눈앞이 막막했지. 호랑에겐 버들의 마음을 돌릴 근거나 당위가 남아 있지 않았어. 버들이 자신에게 어떤 사랑을 주든, 그 마음의 크기가 어떻든, 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이어야 했으니까. 그래야 버들이 조금이라도 덜 아플 테니까. 세상을 사랑하는 너는 언제나 세상에 지게 되어 있고, 널 사랑하는 나는 그렇게 세상에 두들겨 맞고 돌아온 너를 또다시 아프게 할 수 없으니까. 그게 내가 아는 사랑, 너에게 배운 사랑의 방법이니까.
-163
* 신이 악이라면, 그 악이 우리의 날개를 만들고 두발이엄지를 만들었다면, 나는 그 악에 올라타겠어. 번식하고 살아남아 나와 이어진 다른 생명들에게 내 느낌을 전해주고 싶어. 나는 수레바퀴를 굴리겠어. 그 바퀴에 내 몸이 짓이겨진대도, 우리가 낳은 인간이 또다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한대도, 나는 또 다른 버들과 호랑을 만들고 싶어. 설령 그게 악이라 해도 그 악은 끝없이 희망을 품고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내니까. 태어난 아이들과 태어날 아이들과 태어나지 못한 아이들. 터무니없을 정도로 흥겨운 나의 이 도약과 떨림을 그 애들에게도 전해주고 싶어. 그러니 버들과 호랑은 비생식 암컷 엄지가 아니야. 나를 낳았으니까. 내 안에서 어리석은 꿈을 일으켰으니까. 나는 다시 나에게서 탈피하고 있어
-183-184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 이후 첫 소설!
순수하면서도 도발적인 상상력이 가득한 김멜라 신작
2021년부터 〈젊은작가상〉을 3회 연속 수상하고, 마침내 2024년 〈젊은작가상 대상〉을 거머쥔 작가 김멜라는 2014년 『자음과모음』으로 등단한, 10년차 소설가이다. 이미 굳어진 사회의 가치 판단과 해석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사회적 약자들에게 시선을 돌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작품들을 다수 발표한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그간 발표한 소설들과는 달리 챕터마다 다른 화자를 도입하며 형식적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얼핏 ‘비인간-화자’가 레즈비언을 관찰한다는 점에서 전작 「저녁 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이번 신작은 “자연 다큐멘터리의 웅장함을 능가한 소설의 규모로 오히려 김멜라 유니버스의 확장을 가늠케”(민가경)하고 있다.
‘비생식 동거 집단’인 두 레즈비언(일명 두발이엄지, 호랑&버들)을 관찰하며 인간이 지속적으로 누락해온 자연의 거대한 비밀을 밝히고자 하는 세 마리의 곤충(톡토기, 거미, 모기)은 자신들의 삶은 어찌하여 이토록 많은 죽음을 내포하며, 자신들을 위협하는 그들의 감정은 무엇이고, 어떤 이유로 두려움과 행복이라는 모순된 영역을 정신없이 오가는가에 대해 연구하기로 마음먹는다.
관찰 기록을 매끄럽게 정리하는 톡토기와 목격한 장면들을 시나리오의 형식으로 재현하는 거미, 그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종합하는 해석자 역할을 맡은 모기는 두발이엄지의 삶이 슬픔의 계절과 기쁨의 계절이 서로 다른 시점으로 찾아오지만, 그 안에서 서로를 각성시키고 관계를 단단히 만들어나가는, 어떤 시절의 주기로 반복되는 시간의 연속체라고 결론 내린다. 흡사 자신들의 삶과 다를 것 없는 그들의 삶을 관찰한 이후 곤충들은 두발이엄지를 향한 오해와 갈등을 풀고 그들의 존재와 삶의 행태를 받아들이고 궁극적으로 세계를 신뢰하는 ‘환희’로 나아간다.
“그래, 이제 나도 괜찮아.
죽음이든 삶이든.
그러니 나에게 무너져 내려”
‘번개의 경고’를 통해 앞으로 닥쳐올 재난을 예감하는 재주를 가진 버들이 어느 날 큰 재난의 전조를 느끼고, 호랑은 버들에게 서둘러 그곳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생식’을 전제로 하는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비생식집단’ 호랑은 환멸뿐인 그곳을 벗어나 버들과의 행복한 탈주를 꿈꾸지만, 버들은 세상이 “냉소와 야멸찬 웃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내동댕이”(111p)치더라도 계속 그곳에 남겠다고 선언한다. 호랑은 그런 버들에게 상처받지만 그것이 자신을 향한 더 큰 사랑임을, 나아가 이 세계 자체를 향하는 사랑임을 깨닫고 그 사랑에 자신도 기꺼이 동참하기로 마음먹는다.
세상의 몰인정함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맞서 싸우며 세상 안에서 공존하기로 결정한 두 사람은 다른 개체를 향한 이해와 공감, 배려를 통해 하나의 흐름으로 함께 흐르기를 꿈꾼다. 그것은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추상과 관념의, 자연과 유리된 인간만의 무엇이 아니라 바로 이 자연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존재자들의 얽힘이 발생시키는 거대한 힘”(207p)인 ‘윤리’의 다른 실천이기도 하다. 이들은 다른 개체를 향한 이타적인 사랑, 모두에게로 전염되는 거대하고 강력한 힘을 지닌 인간의 윤리를 기꺼이 행사하기로 마음먹는다.
욕심 그득한 소설이 도착했다. 밀도 높은 장면 묘사와 정념의 소묘, 꽉꽉 압축된 서사. 청각을 틔워내는 의성어의 향연. 주제는 또 어떠한가. 인간과 비인간의 전복, 복합 재해와 디스토피아, 생식과 비생식, 그 아래 놓은 퀴어, 광기, 기억의 탈은폐, 시간의 상대성, 존재의 유한성. 그리고 이 모든 대안으로서의 사랑……. 그러나 허투루 쓰인 문장은 없다. 이 많은 제재들의 우열을 가려 줄 세우거나 취사 선택하지 않은 단호함에서 김멜라의 자신만만함을 읽는다.“
-민가경
작가정보
작가의 말
어느 한 시절에 저와 연인이 세상과 동떨어져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해도, 우리는 둘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을 뿐, 우리가 웃거나 아파할 때 우리를 지켜보는 무수한 눈과 섬세한 몸들이 함께였습니다. 저는 그 분명한 사실을 소설로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그 깨달음이 준 환희를 세상에 전하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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