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속에서 보낸 마지막 오후
2024년 09월 0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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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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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 가르츄
로드 킬
고 앙큼한 계집애
우주를 혼자서 떠돌아 다니는 것
이제 귀국해야 한다
서울, 그레이트 스모그 2052
푸른 이슬은 아직 옷을 적시지 않았네
손 안에 움켜쥔 빛
후기
그곳에 진득한 핏자국이 엉겨 붙어 있었다. 유주는 참담한 기분으로 심마를 보았다. 그녀는 아직도 떨고 있었다.
“마 띠밀라이 마야 가르츄. 마 상 아 비헤 가르츄.”
자신에게 되뇌기라도 하듯, 유주는 그 두 문장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 마야 가르츄
“두 분은 왠지 낯이 익군요. 예전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지만, 한 가지는 흐릿하게 이미지가 남아 있어요. 오래전 일이죠. 처음 아웃백을 여행할 때였던 것 같아요. 거기서 젊은 남녀를 만났죠. 그 사람들이 생각나는군요. 여자가 훈제연어 샌드위치를 만들어 줬는데, 맛이 형편없었어요.”
- 로드 킬
“얼마 전에 너랑 만났다고 했지? 우연은 아니었을 거야. 병원에서도 그랬고, 저도 알고 있었거든. 얼마 안 남았다는 거 말야. …… 평균 수명이 남들보다 짧다고도 하고. …… 그렇게 우연처럼 꾸며서라도, 가기 전에 널 한번 보고 싶었을 거야. 얼굴 볼 때마다 네 안불 물었어. 나도 뜸하다는 걸 알면서 말야. ‘그 오빤 잘 지내?’하고, 늘 똑같이…….”
임이가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가슴에 사무치는 느낌이었다.
- 고 앙큼한 계집애
“사진사하고 무용수가 기차에서 만나. 같이 세상 끝까지 가기로 해. 그래서 파타고니아로 가는 거야. 하지만 남자는 여자를 포주에게 팔아넘기고, 여자는 혼자 파타고니아에 남게 돼. 남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여자를 데리러 오지만, 여자는 남자를 용서하지 못해. 여자가 술집에서 알전구를 자기 음부에 끼우는데, 거기에 불이 들어왔던 거 같아.”
- 우주를 혼자서 떠돌아 다니는 것
순간, 쉐산의 봉우리를 덮고 있던 거대한 눈산이 귀가 멍하도록 굉음을 울리며 무너져 내렸다.
지난 수천 년간 한 번도 녹지 않았다는 쉐산의 빙하가 비로소 태양 아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겨우내 눈 속에 묻혀 있던 빙하의 무수한 얼음 기둥들이 눈사태를 뚫고 솟아 나온 것이다. 거대한 얼음의 숲이 겨울과 봄 사이의, 그 짧지만 강렬한 햇살을 받아 마구 작렬하기 시작했다. 한순간 강렬한 빛이 눈을 태워 버릴 만큼 무시무시하게 빛났다.
- 이제 귀국해야 한다
나는 항상 고정된 시간 속에 자유롭게 공간을 유영하는 꿈을 꾸었다. 어두운 지하에서 혼자 열차를 모는 일을 시작했던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른다. 하지만 막상 나에게 닥친 것은 고정된 공간 속에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이었다.
- 서울, 그레이트 스모그 2052
“그 많던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집에 돌아오면 제일 먼저 컴퓨터를 열고 그곳에 접속했어요. 열 명의 방을 차례로 돌고 게시판을 들락거리고, 자정을 전후해서 짧게 허용된 대화 시간 동안, 그녀들과 숨 가쁘게 이야기를 나눴죠.”
“…….”
“요즘도 유난히 빡빡한 날은 가끔 그곳에 들러요. 이젠 죽어 버린 게시판의 옛글들을 밤새워 읽고 또 읽고 하는 거죠. 꼭 한 번 운영을 본 적이 있어요.”
- 푸른 이슬은 아직 옷을 적시지 않았네
그로서는 이제 영원히 회복할 수 없게 된 어떤 것들이, 그녀에게는 가득 차고 넘쳐나는 것 같았다. 그럴 수만 있다면 그녀를 영원히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손안에 움켜쥔 빛처럼 도저히 쥐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 손 안에 움켜쥔 빛
“마 띠밀라이 마야 가르츄. 마 상 아 비헤 가르츄.”
사랑합니다, 결혼해 주세요.
간절한 고백이 공허해지는 순간.
김빛이 한국과 호주를 오가며 써내려 간 8편의 단편을 책으로 묶게 되었다.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낯선 나라를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김빛의 글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라고 할 만하다. ‘소외와 단절’, 김빛의 이야기는 다양한 시공간과 소재를 아우르지만, 늘 같은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변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한다’는 말은 외국어를 익힐 때, 제일 처음 배우는 말 중의 하나일 것이다. 네팔어로는 ‘마야 가르츄’라고 한다. 네팔어는 한국에서 배우기 쉽지 않은 언어다. 주인공 유주는 인터넷을 뒤져서 모두 두 문장을 네팔어로 조합해 낸다. ‘마 띠밀라이 마야 가츠츄. 마 상 아 비헤 가르츄.’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와 결혼해 주세요.’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단 한 번의 기회는 허무하게 사그라져 버린다.
김빛은 호주에서 만난 네팔 친구를 통해, 네팔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 친구의 여동생에 대한 얘기도 있었다. 여동생의 이름은 ‘심마’였다. 심마는 막내라는 뜻이라, 그러니 왠만한 집에는 심마가 하나씩 있는 셈이다. 심마도 호주로 오고 싶었지만, 비자를 받을 수 없었다.
비자란 이상한 제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 살 권리가 있다. 궁핍한 곳에 사는 사람이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아 떠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류 역사가 내내 그러한 이주 과정이었다. 예전에는 그 과정에서 전쟁과 살육이 벌어졌다면, 지금은 비자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달라진 셈이다. 지금 외국인들의 비자 심사를 하고 있는 현지인들도 과거에는 모두 외국인이었다. 합법적인 비자를 받기 위해, 지금도 수많은 현재의 외국인들이 과거의 외국인들과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중에 우리나라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비자를 받기 위해 선진국 대사관에 긴 줄을 서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 합법적으로 입국하고 체류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고 돈을 낸다. 이 과정에도 계급이 작용한다. 어느 나라든 교육 수준이나 기술 수준이 높고, 자산이 많은 사람들을 선별해서 비자를 발급해 주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외국에서도 결코 환영받지 못한다.
심마는 약혼자를 따라, 돈을 벌기 위해 한국으로 온다. 하지만 삶이 순조롭지는 못하다. 남편인 모한은 한국 여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녀가 임신을 하자 귀국하라고 독촉한다. 심마는 언어도 서툴고 모든 것이 낯설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남편 뿐이다. 그녀에게 한국은 낯설고 두려운 나라이다. 그런 그녀에게 남편의 배신은, 삶의 뿌리를 뒤흔드는 치명적인 사건이다.
이보다 취약한 삶의 조건을 찾기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 실낱같은 가능성에 온몸을 내맡길 수 밖에 없는 것이 심마라는 외국인 노동자, 그것도 여성의 삶이다. 여기서 김빛의 글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다. ‘속죄와 구원’, 다분히 기독교적이지만, 기독교적인 색채가 전혀 없는 리얼리즘 속에서 ‘속죄와 구원’의 메타포가 작동한다.
네팔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작은 나라는 결코 아니다. 인구는 우리나라의 절반이 넘고, 면적은 훨씬 크다. 전세계에서 8,000m가 넘는 봉우리 14개 중에 8개가 네팔에 있고, 현재는 마르스스 레닌주의자들과 마오주의자들이 연합한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다. 1인당 GDP는 2021년 현재 4,000달러 내외로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다. 그곳에서 삶을 꾸려가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들이다.
외국인들은 이제 우리 삶 속에 깊이 파고들어 왔다. 우리들의 삶도 그들의 존재를 배제하고는 더 이상 영위하기 어렵게 되었다. 하지만 길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아시안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는 아직도 낯선 이물감이 남아 있다. 작가도 백인종들이 세운 나라에 사는 황인종으로 비슷한 시선을 견디면 이 글들을 썼을 것이다.
호주는 죄수들이 세운 나라다. 영국이 폭증하는 죄수들을 자국에 수용할 수가 없어, 태평양 한가운데 남반구의 넓은 땅에 죄수들을 내버리듯이 이주시킨 것이 역사의 시작이었다. 남자들은 모두 범죄자들이었고, 처음으로 그 땅에 건너 간 백인 여자들은 창녀들이었다.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은 전 지구 상에서 가장 고립된 삶을 살아가던 인종들이었다. 그들은 백인들에게 무참하게 내몰렸다. 지금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외국인들이다.
범죄자들과 이방인들의 땅에서 작가가 써 내려간 8편의 글들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작은 울림이라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정보
저자(글) 김빛
서호주 만두라에 거주하며, 작가,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킬리만자로의 눈(번역서), 이 소설은 완벽하다(경장편) 등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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