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속의 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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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빈집 _037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_065
물속의 입 _125
호텔 캘리포니아 _139
콘시어지 _157
탐정 안찬기 _165
여기, 무슨 일이 있나요 _183
돌의 심리학 _207
유카 _219
섬 _249
소송 _255
그해 여름의 수기 _283
발문|강화길(소설가)
그는 옛이야기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 _311
차를 세웠으나 내리지는 못한 채 숲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선 나무들의 숲이었다. 하얗고, 곧은. 마치 빽빽이 솟아난 뼈들이 빛을 뿜어내는 듯한 숲이었다.
할머니.
그런 숲에서는 할머니를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었으나 마침내 이르렀으므로.
할머니, 자작나무 숲이야.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죽은 사람은 대답할 수 없다. 할머니는 지금 내 차 안에 죽어 있고, 나는 그런 할머니를 버리러 가는 길이다.(「자작나무 숲」, 7~8쪽)
“내가 뭘 어쨌다고!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느냐고!”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장 꺼내서 묻어줘! 묻어주란 말이야!”
남편이 그녀의 두 손목을 거머쥐었다. 손목이 부러질 듯한 악력이었다. 그녀는 또 한번 공포를 느꼈고, 더는 비명을 지를 수도 악을 쓸 수도 없었다. 남편은 곧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일상적인 목소리였다.
“여기 묻을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빈집」, 55쪽)
애거사 크리스티 소설의 원래 제목이 ‘열 명의 흑인 소년들’ 혹은 ‘열 명의 인디언 소년들’이라는 걸 안찬기는 역시 그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소설에서는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인형이 한 개씩 사라진다고 했다. 물론 예술가 숙소에 인디언 인형 같은 것은 없었다. 그러나 안찬기 역시 이 상황이 소설과 지나치게 흡사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섬, 풍랑으로 끊긴 배, 고립, 죽음…… 그리고 각자의 이유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각자의 죄.(「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94쪽)
여객선이 들어왔다. 배가 섬을 떠날 때, 안찬기는 선창 너머로 높은 갯바위를 보았다. 언제 태풍이 불었냐는 듯 쨍하고 화창한 날씨라 눈이 부셨지만, 그래서 잘못 본 것이려니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 갯바위에 정말로 귀신의 손 같은 것들이 너풀너풀했다. 너풀너풀하는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섬으로 밀려드는 파도의 포말들이 하얗게 일어서서 무수한 흰옷 입은 여자들로 변하는 게 아닌가. 여자들은 일제히 돌아서서 바다를 향해,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한 명이 투신하고, 또 한 명이 투신하고, 또 한 명이 투신했다. 이해할 수 없는 환영이었다.(「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122~123쪽)
앤은 물속에 머리가 잠기자마자 그토록 악착같던 울음을 뚝 그쳤다. 하기야 물속에서 어떻게 울 수 있겠나. 머리가 물에 잠긴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유리 물그릇에 담긴 아이의 머리는 마치 강이나 바닷가의 자갈처럼 비현실적으로 부드럽고, 둥글고, 아름답고, 투명했다. 그때 아이의 발목을 붙들고 있던 나는 아이의 머리를 붙든 목사님을 바라보며 생각했었다. 내가 발목을 붙들고 있는 아이가 앤일까, 목사님이 붙잡고 있는 머리가 앤일까.(「물속의 입」, 131쪽)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안찬기의 눈살이 갑자기 깊이 찌푸려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욕설이 나오려는 걸 참으려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경찰에서 퇴임하면서 그는 술과 담배를 끊듯 욕설도 끊었다. 그러려고 했다.
그런데 흰옷 입은 여자가 또 거기에 있었다.
또 거기에서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젠장…… 다 잊어버린 환영인 줄 알았는데, 돌아오니 또다시 거기에 있었다. 돌아버릴 것 같았다.(「탐정 안찬기」, 172쪽)
열지 마!
이번에는 분명히 소리가 들렸다.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흰옷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가 그에게 너풀너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의 눈길을 끈 것은 흰옷 입은 여자가 아니었다. 흰옷 입은 여자보다 더 기이한 것이 있었다. 출렁이듯 흔들리는 그림자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돌덩어리 같은 무언가를 들고서.(「탐정 안찬기」, 180쪽)
그때 갑자기 목이 선뜩했다. 본능적으로 손이 뒷목으로 갔다. 손바닥에 물이 묻어났다. 묻어난 건 물기뿐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건져질 때, 미역처럼 늘어져 있던, 아이의 긴 머리카락…… 사진으로만 봤던 그 촉감이 같이 묻어났다. 아이는 엄마도 아빠도 없는 곳에서 혼자 물에 빠져 죽었다. 아빠가 손님들의 세계에 있고, 엄마도 이야기의 세계 속에 있느라 딸이 죽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가 죽어가며 할 수 있는 일이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죽는 날까지, 아니 죽어서도 지옥에서 살아가게 될 엄마 아빠의 목을 휘어감는 일이었을까. 엘리베이터 천장에서 쏟아져내린 머리카락이 그의 목을 휘어감았다.(「여기, 무슨 일이 있나요」, 199쪽)
여기, 아무도, 안 계십니까? 누구 없어요?
침묵. 사사삭.
또 사사삭 하고 소리가 나는데, 돌이 구르는 소리는 아니었다. 돌이 구르는 소리가 사사삭 하고 날 리는 없었다. 그것은 외부에서 그를 문지르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의 테두리, 그의 몸을 문지르는 소리. 그는 곰곰 생각했다. 그게 무슨 뜻일까. 그의 몸에 테두리가 있다는 것은……(「돌의 심리학」, 210쪽)
바위 아래서부터 자라난 길쭉길쭉 미끌미끌한 풀이 바위 위까지 올라와 흔들렸다. 그러다 바람이 불자 그 키 큰 풀들이 휘청휘청 일어섰다. 주유소 풍선 인형처럼 팔을 흔들며 일어섰다. 미친 여자의 머리카락처럼 늘어졌다 일어서고 일어섰다 늘어졌다. 발목을 거머쥐겠다는 듯이, 입맛을 짯짯 다시듯이, 혀를 내밀듯이.(「유카」, 244쪽)
자전거를 다리 초입에 세우고, 둘은 여전히 물에 젖어 있는 다리를 삼분의 일 지점까지 걸어서 갔다. 수기가 다리난간에 손을 얹었을 때, 명기도 같이 난간을 잡았다. 아주 잠깐, 둘의 손이 닿았다. 수기가 얼른 그 손을 떼어냈는지, 아니면 명기가 그랬는지, 아무튼 그 순간은 찰나처럼 짧았다. 그랬음에도 수기는 온몸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현기증을 느꼈고, 깊은 홀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그해 여름의 수기」, 301~302쪽)
언제든 떨쳐낼 수는 있지만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을
끈덕진 공포감이 차오른다
새로운 관점으로 조명하는 김인숙 단편의 장르적 묘미!
1983년 등단한 이래 40여 년간 왕성한 작품활동을 지속하며 화려한 이력을 쌓아온 소설가 김인숙의 신작 소설집 『물속의 입』이 출간되었다. 독특하게도 이번 소설집은 ‘미스터리ㆍ호러 단편선’으로 명명된다. 그간 김인숙에게 유수의 문학상을 안겨준 값진 수상작들과 작가의 최근작을 한데 모아 읽을 때 발견되는 장르적 가치를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김인숙 단편문학을 아우르는 제1의 특징이자 가장 강렬한 매력은 단연 독자의 허를 찌르는 서스펜스다. 그런데 그간 김인숙의 서스펜스는 ‘일상의 표층을 뚫고 나오는 인생의 비의’를 드러내는 상징적 장치로서 문학적 가치를 공인받곤 했다. 김인숙 소설의 깊고 둔중한 주제의식에 다다르는 데 서스펜스가 가교 역할을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작품이 설정한 목적지에 시선을 고정하느라 그곳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독서의 즐거움이 다소 가려져왔던 것은 아닐까.
『물속의 입』은 김인숙 단편이 지닌 서스펜스를 오롯이 음미하는 독서 체험을 선사하고자 기획되었다. 아직 단행본으로 묶이지 않은 단편을 기계적으로 취합하는 대신 미스터리 성격이 뚜렷하면서 빼어난 작품성을 지닌 「자작나무 숲」(2023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그해 여름의 수기」(2020 오영수문학상 수상작) 등을 선별해 수록하였으며, 이미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나 이 단편선을 통해 새롭게 독해할 필요가 있는 단편 「빈집」(2012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을 재수록했다. 또한 작가가 2023년 가을부터 단편선의 콘셉트에 맞추어 집필한 미발표 신작들을 대대적으로 선보인다.
김인숙 소설의 미스터리한 매력을 집약해서 보여주며 단편선의 포문을 여는 작품은 「자작나무 숲」이다. 이 단편은 할머니의 시신을 유기하려는 손녀딸의 움직임으로 시작되며 첫머리에서부터 충격을 안긴다. 집안을 쓰레기로 가득 채우고 삶의 부산물 같은 감정들도 꼭꼭 끌어안고 살았던 ‘호더’ 할머니의 유품들 사이에서 언제 튀어나올지 모를 반전에 대한 예감 때문에 시종 긴장감이 유지된다.
「자작나무 숲」의 ‘집’ ‘상속’ ‘반전’이라는 키워드는 다음 수록작인 「빈집」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수십 년을 함께 살며 속속들이 알아온 남편에 대한 증오와 사랑을 털어놓는 교양 있는 아내의 목소리와, 그런 아내에게 철저히 숨겨온 남편의 섬찟한 비밀을 나란히 놓으며 “인간 본연의 심연을 향해 문을 열어놓고 있는 소설”이라 평해진 이 작품은 장르적 읽기를 시도할 때 또 한번 독특한 매력을 발산한다.
앞선 두 작품 속 인물과 언뜻 겹쳐 보이는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는 이후 9편의 소설들은 ‘물’과 ‘죽음’의 이미지로 수렴되며 연작을 이룬다. 비밀스러운 섬 ‘하인도’와 섬뜩한 환상성을 지닌 건물 ‘호텔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펼쳐지는 이 독립적이고도 유기적인 짧은 이야기들은 김인숙 소설세계의 한층 넓어진 지평을 생생히 조망하게 해준다. 애거사 크리스티의 동명의 작품을 모티브로 삼은 범죄 사건이 벌어지는 단편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이 연작의 복선이자 열쇠 역할을 한다. 정석적인 추리 서사와 김인숙 특유의 착란적인 호러 무드를 접목시킨 이 소설들에는 음습하고 서늘한 비극이 물속의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다. 작가가 2023년 발표한 장편 추리소설 『더 게임』의 전직 형사 안찬기가 재등장해 사건을 해결해나간다는 점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연작 뒤편에 배치된 두 단편은 김인숙 단편에서 서스펜스가 작동해온 방식을 되새겨보게 해주는 작품들이다. 「소송」은 모종의 사건에 연루된 두 형제가 애써 감추려 하지만 각자의 죄에 따른 심판의 순간마다 불쑥 내보이고 마는 비겁한 본성을 포착하고, 단편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수작 「그해 여름의 수기」는 수해로 가족을 잃은 여름날 한 소녀에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을 시공이 뒤틀린 통로로 빠져버리는 초자연현상으로 형상화하며 오묘하고 신비로운 장면을 탄생시킨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선연한 감각은 먼 훗날 그 첫사랑 상대가 비루한 인생에 발이 ‘빠지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는 슬픔과 오버랩되며 격한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이처럼 『물속의 입』을 읽는 여정은 촘촘하게 짜인 사건과 트릭이 선사하는 긴박감에서 출발하여 환상과 착란으로 부풀어가는 공포를 지나 인간의 내면에 감춰져 있던 진실을 찌르고 들어오는 날카로운 감동으로 마무리된다. 외부 세계에서 우연히 벌어진 듯 보이던 갈등을 인간의 마음속에 묻혀 있던 갈등의 씨앗 앞으로 기어이 들이밀어 보일 때 생성되는 서스펜스. 외부의 사건과 내부의 정동을 꿰는 이 한 땀의 서스펜스로 인해 김인숙 소설의 인물들도, 독자들도 이야기에 꿰여 좀처럼 빠져나올 수 없게 된다. 마치 ‘언제든 원할 때 체크아웃할 수 있지만 절대로 떠날 수는 없는’ 공간인 호텔 캘리포니아처럼, 이 책의 강렬한 잔상은 독서를 마친 후로도 오래도록 뇌리를 떠돌며 일상을 문득 긴장시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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