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틈의 위로
2024년 08월 14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7월 17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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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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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던 대로 사는 것에 지친 당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숨 쉴 틈
《빈틈의 위로》는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끝없이 완벽하기를 바라면서 우울과 공허와 외로움 등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려주는 심리 에세이다. 정신과 의사 김지용의 예리하면서도 세심한 문제 제기로 시작해, 자타공인 꿈을 이뤄본 사람들(MBC 강다솜 아나운서, MBC 서미란 피디, 김태술 전 프로농구선수)이 어느 순간 무너지거나 갈등하거나 방황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균형 감각을 찾기 위해 분투한 이야기가 차례대로 등장한다. 이들의 고백은 때로는 무척이나 솔직하고 용감해서 놀랍고, 때로는 깊고 내밀해서 숨죽여 읽게 된다.
사회적으로 이름과 얼굴을 알린 사람들의 어쩌면 가장 우울하고 고단한 시절에 관한 고백이 담긴 이 책은, 이들이 우울과 고단의 바깥으로 나오는 데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기에 더 현실적이다. 그래서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로 읽힌다. 타인의 시선과 내적 요구로 무너져본 적이 있다면, 책의 어느 한 대목에서든 자기 이야기가 포개져 보일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정신과 의사 김지용은 이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와 통합하며, ‘해야 하는 일’ 사이에 ‘하고 싶은 일’을 슬쩍 끼워 넣는 것만으로도 잃었던 삶의 감각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해야 할 일에 잡아먹히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우리 삶에 ‘빈틈’을 확보해주는 일. ‘사회적 압력’의 포화가 쏟아지고, ‘완벽한 삶’이라는 도달 불가능한 망령 같은 목표를 붙잡고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어쩌면 ‘빈틈을 확보해 야금야금 위로받는 순간을 즐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지 않을까.
머리말 | 열심히 살았지만 공허한 당신에게
1. 해야 하는 일에 짓눌린 당신에게 필요한 것: 김지용
그 놈의 영어 공부
“잘 지냈어요. 코로나에 걸렸었거든요”
하나가 아닌 마음
누구나 남이 그려준 가면을 쓰고 산다
열심히 노력해도 자존감이 높아지지 않는다면
2. 마음의 염증을 흘려보내는 법: 강다솜
매일 뺨을 맞는 기분
“정말 나랑 안 맞아”
입사한 해에 휴가 간 첫 신입
강다솜 좀비 시절
“나만의 꽃밭을 만들고 싶어”
예상치 못한 설렘
영화 300편이 내게 준 것
아등바등의 역사
사진이라는 세계
무용함이 우리를 구한다
3. 불안이 필요 이상으로 덩치를 키우지 않도록: 서미란
장래희망이 ‘건강’인 아이
스무 살의 가출 사건
아픈 걸 아프다고 말할 줄 아는 능력
약하지만 약하지 않습니다: 탄자니아 여행 이야기
다섯 번의 낙방 그리고 합격
‘잘해야 한다’는 마음
“나는 화날 때 책을 읽어”
조심하지 않고 마구마구 신나게
나의 번아웃 이야기
“이게 라디오지”
4. 내 안의 이인조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김태술
비상 그리고 추락
사라진 내 전부
내 안의 마음들
결핍과 성공, 그리고 성공과 결핍
이 또한 내 삶이다
“농구 코트는 네게 너무 좁아”
5. 무엇보다 나를 더 아껴보고 싶어서: 다시 김지용
어쩌다 쓴 감투
“힘든 이야기, 죄송해요”
내 마음의 방파제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난 잘 안 우는 사람인데”
맺음말 | 내게 빈틈을 선물해주기로 했다
처음엔 이 정도로 ‘열심’인 이유가 우울증 때문이리라 의심했다. 우울증 상태에서는 자기 자신이 부정적으로 보이고 주변 모든 것이 불안하게 느껴지니, 발전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더 크게 느낀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볼수록, 그들의 삶을 더 이해할수록 새로운 답이 보였다. 이 지나친 ‘열심’의 모습은 우울증의 결과이기에 앞서 원인이기도 했다. 내 진료실에는 우울증에 걸리기 이전부터 항상 쫓기듯 살아온 분들이 참 많았다. 마치 밀린 숙제들에, 빚 독촉에 쫓기듯 급박하게 해야 할 공부와 일을 처리하는 데 삶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쪽)
평생 페르소나의 명령을 따르며 해야 하는 일들만 계속 해오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못하고 살아왔으니 행복감을 느낄 기회조차 없었던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만두거나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공허하다’, ‘껍데기로만 사는 것 같다’는 내담자들의 말은 놀랍도록 적확하다. 겉껍질인 ‘페르소나’에 충실하느라 더 깊숙한 곳에 숨은 ‘자기’의 욕구는 외면하고 있는 상황을 직관적으로 표현한 것이니 말이다. (52쪽)
노력하지 말고, 공부하지 말고, 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슬쩍 끼워 넣어주길 바랄 뿐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의 반대로 그만두어야만 했던 그림, 삶이 바빠지며 오랫동안 쉬었던 테니스,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감히 엄두도 못 냈던 노래 수업, 조용한 낚시터에서 보내는 혼자만의 시간 같은 아주 소소한 활동이라도 괜찮다. 작더라도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삶에 끼워 넣은 분들에게 나타나는 변화를 나는 끊임없이 목격한다. 일상에 ‘사소한’ 변화를 주었을 뿐인데, 정신건강에는 놀랄 정도로 ‘큰’ 변화를 일으키는 장면을 정말 많이 보았기에 증언할 수밖에 없다. (60쪽)
불안하고 우울했던 시절, 나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매일 힘에 겨웠지만 회사 생활을 하는 모두가 그 정도는 힘든 줄 알았다. 웃고 싶지 않았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 직업은 아나운서였다. 이미지 관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우울해 보이고 힘 빠져 보이는 사람에게 애써 만든 프로그램을 맡기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프로그램에 활기를 넣어주고 좋은 에너지를 불어넣을 사람을 찾기 마련이다. (91쪽)
처음엔 회사에서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온 나 자신을 쉬게 하려는 목적으로 누워 있었지만, 이젠 그냥 주말이면 나의 정체성이 ‘누워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건 휴식이 아니라 그저 나를 옥죄는 일일 뿐이었다. ‘나랑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무슨 힘으로 잘 살아가는 걸까?’ 가만히 둘러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내가 꿈꾸는 나무처럼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무엇에 의지하고 있을까? 그저 타고난 성격 외에도, 삶에 다른 부분이 있지 않을까? 천천히 살펴보니 보였다. 그들에게는 모두 자기만의 꽃밭이 있었다. (100쪽)
지금까지 내가 말한 것들 모두 별 볼 일 없어 보일 수 있다. 사실 정말 별거 없다. 그런데 이런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들이 내 일상을 받쳐주는 든든한 기둥이 된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나보다 더 빨리 알고, 찾았으면 좋겠다. 사소한 것이라도 당신에게 안정을 주는, 좋아하는 무언가를 꼭 알아챘으면 좋겠다. 그게 나의 세수 후 로션 바르기처럼 매일 하는 것이라 특별할 것 없어 보여도, 그저 내게 효과가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 시간을 좋아하면 된다. (142쪽)
나는 선천성 골형성부전증이라는 희귀난치병을 가지고 태어났다. 태어나던 병원에서부터 의사가 아이를 키우는 과정이 어려울 거라고 알려줬지만 젊은 부부는 어떤 일이 닥칠지 잘 몰랐던 것 같다. 그러다 걸음마를 뗄 무렵부터 수없이 골절이 이어졌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아예 학교를 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골절 후 회복하는 기간이 남들보다 세 배쯤 길기도 했고, 좀 나아서 이제 걸을 수 있나 싶을 때 다시 골절되는 일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발끝부터 가슴까지 전신에 깁스를 하고 기약 없이 누워 있는 날이 많았다. (152쪽)
면접장에서 나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일은 평생 맞서왔던 어떤 벽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었다. ‘키가 작네요’, ‘어릴 때 아픈 적이 있다고요’, ‘걷는 건 괜찮은가요’, ‘지금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 무리가 없나요’, ‘우리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등 이어지는 질문은 언제나 꼼꼼하고 때로 집요했다.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시선의 벽. 거기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어려워서 가끔은 길을 잃던 나에게 탄자니아 여행은 큰 힌트가 되어주었다. 나는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강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그를 지킬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 (177쪽)
타고난 성정이든 살면서 배운 어떤 것이든, 나를 포함한 누구에게나 아마 그런 ‘의젓함’이라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덕에 가끔은 믿음직하다거나 성숙하다는 칭찬을 받기도 하고, 삶을 살아가는 데 많이 도움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의젓하고 언제나 성숙한 사람이란 세상에 있을 수 없다. 누구나 어떤 부분에서 약간은 부족하고 허술하며 나약하니까. 또한 그 나약한 모습을 절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겠다고 생각하면 삶은 너무나 고달파진다. 그러니 내 존재를 사랑하는 어떤 이의 마음을 한번 믿어보면 어떨까. 믿어야 마음껏 흙 발자국도 남기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활짝 웃을 수도 있을 테니까. (203-204쪽)
하지만 지금 돌이켜볼 때 내 고통을 더 키운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누구보다 내가 강력한 송곳으로 나를 찌르고 있었다. 힘들어하는 나를 돌보지 않고 계속해서 자책하고 실망만 해댔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지? 매일 밤 그런 고민을 하느라 해가 뜰 때까지 잠을 못 이루기 일쑤였고, 불면이 고통스러우면서도 잠에 들기 싫었던 날이 많았다. 아침이 오면 끔찍한 하루가 다시 시작이 될 테니까. 날이 밝아 거울에서 만나는 내 모습이 끔찍하게 싫었다. (227쪽)
내면을 들여다본 수많은 낮과 밤을 보낸 뒤, 나는 결국 아픈 내 마음, 무너진 상황을 인정하기로 했다. 늘 빛나고 싶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도 내려놓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스스로를 돌보는 일이었다.
천천히 나를 보듬어주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를 보듬어주는 데 특별한 노력이 필요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 편에 서서 ‘괜찮아,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이면 충분했다. (253쪽)
물론 과거의 빠른 속도에 익숙한 나는 여전히 지금 삶의 속도가 어색하고, 이래도 되는지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된다. 하지만 선수 시절 후반기가 내게 알려준 그 의미를 잊지 않으려 애쓴다. 당시 많이 괴로웠던 그 시간을 이제는 진정한 선물처럼 느낀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확실히 성숙해졌다. 예전의 나는 농구선수로서 꽤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자존감은 그렇게 높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한계를 인정하는 것, 그렇지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삶을 시도하는 것. 그것이 정말 나를 존중하는 마음이 아닐까? 이전과 다른 나를 내 일부로 받아들이며 나는 한층 더 단단해지고 확장될 수 있었다. (261쪽)
자기합리화는 마음을 지키는 좋은 기술이지만, 그래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진료실에서 자주 드리는 조언을 내게 적용해야만 했다. 많은 분들이 정신과 의사에게는 강한 마음을 갖게 되는 획기적인 방법이 있기를, 뭔가 엄청난 심리적 기술이 있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내가 활용하는 이 기술은 사실 특별한 게 아니다. 다만 성능은 확실하다고 느끼는, 내 두 번째 기술은 ‘생각을 끊어주는 도구’를 갖는 것이다. (287쪽)
공허함을 해결하기 위해 자기 돌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건네면 ‘시간이 없다, 마음의 여유가 없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시기가 아니다, 남들에게 뒤쳐질 것이다’ 같은 반응이 돌아온다. 모두가 약속한 듯 똑같이 대답한다. 하지만 자기 돌봄은 애써서 확보하고 지켜내야 할 필수적 활동이다. 해야 할 것들 마친 뒤 남는 시간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기 돌봄의 시간을 따로 만들고 지켜야 한다. 쉽지 않겠지만 내 삶을 내 것으로 만들고,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으려면 그래야 한다. (297쪽)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렇게 공허하고 무기력할까”
살던 대로 사는 것에 지친 당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숨 쉴 틈
어느 날 한 외국 작가가 ‘세계에서 가장 우울한 나라, 한국’이라는 주제로 유튜브에 영상을 올렸다. ‘무슨 근거로 우리를 비하하는 건가?’ 억울한 마음 반, 궁금한 마음 반으로 시청한 영상은 ‘뼈아프지만 반박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노력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시키는 대로 열심히만 살아온 사람들은 ‘이제 우리나라는 망했다, 미래는 없다’며 집단적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다. 사회적 압력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원하는 삶을 포기한 결과, 예술과 과학 기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라 자부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 부수적 피해로 높은 자살률, 깊은 우울을 떠안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는, 어쩌면 이런 사회적 우울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하는 직업이 아닐까? 2017년 정신질환을 향한 오해를 바로 잡고, 정신과의 문턱을 낮추기 위해 정신과 의사들이 모여 시작한 팟캐스트 〈뇌부자들(지금은 구독자수 22만 명의 유튜브 채널로 운영 중이다)〉의 김지용이 잠시도 쉬지 못한 채 쫓기듯 사는 사람들을 위한 책, 《빈틈의 위로》를 기획해 내놓았다. 작은 진료실에서 일하는 의사로서 사회적 우울을 해결하기 위한 거대 담론을 제시하는 일은 무리이지만, ‘개인의 변화’를 이끌고 그 변화들이 모인다면 조금 더 건강한 사회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에서다.
“우울증에 걸린 많은 사람들을 곁에서 지켜봤다. 치료하기 위해 함께 노력도 했다. 흔히들 질병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꿈꾸지만, 다시 또 지진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삶의 형태를 새롭게 바꿔야 한다. 직장 상사 때문에, 부모 때문에, 연이은 취업 실패에 숨 막히는 내 삶은 바뀔 수 없다고, 이 나라에 사는 이상 답이 없다는 대답이 자주 돌아온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변화는 분명히 가능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에서 시작되는 변화가 결국 내 삶에 ‘숨 쉴 틈’을 만들어낸다.” -8쪽
우리 마음속에는 ‘이인조’가 산다
해야 하는 일에 사로잡힌 ‘페르소나’와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는 ‘자기’
3년간 병원을 찾아도 증상이 제자리걸음인 사람들, 약을 늘리고 상담을 해도 우울과 불안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정신과 의사 김지용은 미안함과 열패감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호전이 없던 환자가 ‘코로나에 걸려서 마침내 쉴 수 있었다’며 만면에 웃음을 띠고 진료실 문을 열었을 때, 그는 깨닫는다. ‘해야 하는 일’에 장악당한 사람에게 어쩌면 잠깐의 ‘숨 쉴 틈’이 그 무엇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작은 ‘빈틈’이 삶에 커다란 위로를 안겨줄 수 있음을.
영화 〈인사이드아웃 2〉에는 여러 마음들이 등장한다. 〈인사이드아웃〉 1편이 태어나서 유년기까지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다섯 가지 감정(기쁨, 슬픔, 버럭, 까칠 소심)을 펼쳐 보여줬다면, 〈인사이드아웃 2〉에는 사춘기에 진입하며 생겨난 새로운 마음들, ‘불안’과 ‘부러움’과 ‘당황’과 ‘따분함’ 등이 합류한다. 《빈틈의 위로》에서 저자 김지용은 우리 마음속에는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이인조’가 존재하며, 이를 ‘페르소나(가면)’와 ‘자기(셀프)’이라 칭한다. 페르소나는 가정과 사회의 압력과 문화로 인해 형성된 ‘해야 할 일에 매인 마음’을 뜻한다. 〈인사이드아웃 2〉에서 사춘기에 사회적 압력과 환경으로 인해 새로 생겨나게 되는 ‘불안’과 ‘부러움’, ‘당황’ 등이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본능에 가깝고 가장 원초적이랄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을 추구하는 마음’이 ‘자기(셀프)’다. 〈인사이드아웃 2〉에 등장하는 어린 시절부터 형성된 다섯 가지 마음의 원형이 ‘자기’라 하겠다. 책은 페르소나와 자기 사이의 균형이 무너졌을 때, 특히 ‘해야 하는 일’을 강요하는 페르소나의 무게에 ‘하고 싶은 마음’이 짓눌렸을 때 무기력과 공허감을 느낄 수 있다고 짚어낸다.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은, 변화에 관한 이야기
그저 열심히 사느라 잠시도 쉬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한 끗 처방
《빈틈의 위로》는 ‘페르소나’에 ‘자기’가 장악당해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 누구보다 열심히 살고 끝없이 완벽하기를 바라면서 우울과 공허와 외로움 등 부정적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삶의 균형을 되찾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알려주는 심리 에세이다. 정신과 의사 김지용의 예리하면서도 세심한 문제 제기로 시작해, 자타공인 꿈을 이뤄본 사람들(MBC 강다솜 아나운서, MBC 서미란 피디, 김태술 전 프로농구선수)이 어느 순간 무너지거나 갈등하거나 방황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균형 감각을 찾기 위해 분투한 이야기가 차례대로 등장한다. 이들의 고백은 때로는 무척이나 솔직하고 용감해서 놀랍고, 때로는 깊고 내밀해 숨죽여 읽게 된다.
“이 책은 나 혼자 적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만의 이야기로는 독자들의 삶에 변화를 줄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노력과 성취와 우울의 과정을 거친 뒤 인생의 두 번째 챕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글을 부탁했다.” (9쪽)
정신과 의사, 아나운서, 라디오 피디, 전 프로농구선수가 발견한
공허와 무기력에서 나를 구출하는 법
〈실화탐사대〉, 〈14F〉 등을 진행하고 있는 MBC 강다솜 아나운서는 심한 무기력으로 퇴근 후 ‘누워 있는 사람’으로 산 적이 있었음을 이 책에서 처음 고백한다. 남모를 고통에 시달리며 우울감에 빠져 기억조차 흐리던 시절, 강 아나운서를 구원한 것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무작정 영화를 보기 시작했고, 2년간 300편의 영화를 보면서 무기력에서 벗어날 힘을 키웠다. 그 후 강 아나운서가 우울과 공허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기만의 꽃밭’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도해본 역사는, 너무 성실해서 눈물겹다. 그는 과연 ‘자기만의 꽃밭’을 발견했을까? 책에 그 이야기를 자세히 풀어냈다.
“내 상태를 돌아보고 챙기는 일, 나 역시 그것을 쓸모없는 일이라 여겼었다. 그러다 마음이 부러져 그 고생을 해놓고서는, 아직도 가끔 그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정말 무용하나. 내 커리어에 이게 대체 무슨 도움이 되는 걸까.’ (중략) 무용함은 내 일상을 안정적으로 꾸려나가기 위한 수단이다. 쓸모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날 지탱해주는 지지대이다.” (143-144쪽)
현재 〈김현철의 디스크쇼〉를 연출 중이며, 북팟캐스트 〈서담서담〉을 5년째 진행ㆍ연출하고 있는 MBC 서미란 피디는 골형성부전증이라는 신체장애를 안고 있다. 그런 그가 ‘자신을 가두는 강력한 틀을 부수며 단단한 사람’으로 성장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물론 처음부터 그렇게 단단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외로움이 자신을 키웠고,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시행착오’를 통해 누구보다 단호하고 강한 자아를 만들어나갔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스스로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서 피디의 이야기는 남들이 바라고 시키는 대로만 사는 것에 지친 사람들에게 ‘내가 원하는 길대로 인생을 걸어가는 감각’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아프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에겐 쉬운 일이 자신에게만 유독 어려워서, 스스로의 부족함과 허술함을 감추느라 애쓰며 이삼십 대를 보내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처럼 그런데 애써 감추려 하는 바로 그 부분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결정적인 힌트를 주는 것일 확률이 높다. 내 경우엔 그건 ‘아프다’고 말할 줄 아는 능력이었다.” (171쪽)
농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름만 대면 아는, ‘천재 가드’로 불린 김태술 전 프로농구선수의 이야기를 담은 건 순전히 저자 김지용의 ‘팬심’에서 비롯됐다. 리그 우승, 신인왕, 베스트 5,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 등 국내 최고의 농구선수로 활약하던 그가 폭풍처럼 몰아닥친 슬럼프에 쓰러지자 모든 사람이 의아해했다. 누구보다 슬럼프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그는, 드라마 같은 극복 스토리 대신 그 안에서 어떻게 결국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었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들려준다. 그의 글을 통해, 한 사람의 세계가 ‘성공’이라는 작은 우물에서 ‘성장’이라는 더 큰 바다로 나가갈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발견하게 된다.
“이기기 위해 맞서 싸우다 보면 조급한 마음에 시야가 좁아지고 실수도 하게 된다. 하지만 지지 않는 것을 목표로 하면 이 파도가 내게 위협이란 것을 인정하고, 더 넓은 시각에서 다양한 방안들을 모색해볼 수 있다. 10년 전 나를 집어삼킨 슬럼프는 내게서 많은 것을 빼앗아갔지만, 마냥 잃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지금의 내가 좋다.” (254쪽)
특히 책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는, 김지용이 나머지 세 저자와 나눈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다룬 글은, 마치 어느 정신과 진료실의 상담 장면을 옮겨 놓은 듯하다. 그 글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일종의 심리 치료를 받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해야 하는 일 사이에 하고 싶은 일 슬쩍 끼워 넣기
빈틈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가장 궁극적인 방법
사회적으로 이름과 얼굴을 알린 사람들의 어쩌면 가장 우울하고 고단한 시절에 관한 고백이 담긴 이 책은, 이들이 우울과 고단의 바깥으로 나오는 데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기에 더 현실적이다. 그래서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이야기’로 읽힌다. 타인의 시선과 내적 요구로 무너져본 적이 있다면, 책의 어느 한 대목에서든 자기 이야기가 포개져 보일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정신과 의사 김지용은 이들의 이야기를 자신의 이야기와 통합하며, ‘해야 하는 일’ 사이에 ‘하고 싶은 일’을 슬쩍 끼워 넣는 것만으로도 잃었던 삶의 감각을 어느 정도 되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해야 할 일에 잡아먹히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우리 삶에 ‘빈틈’을 확보해주는 일. ‘사회적 압력’의 포화가 쏟아지고, ‘완벽한 삶’이라는 도달 불가능한 망령 같은 목표를 붙잡고 살고 있다면, 그리고 그 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어쩌면 ‘빈틈을 확보해 야금야금 위로받는 순간을 즐기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지 않을까.
“마음속에서 계속 부딪히는 이인조를 잘 달래며, 그 사이의 적당한 긴장을 유지하는 것. 해야 하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위한 시간을 각각 마련해주는 것. 그것이 결국 나를 지키며 세상에 지지 않고 살아갈 가장 현명한 방법 아닐까?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야 할 일만 하면서 사는 것은 너무도 끔찍한 일이니 말이다.” (303쪽)
작가정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정신 질환을 향한 오해와 편견을 줄이고 올바른 정보를 전달할 목적으로 2017년 동료들과 시작한 채널 〈뇌부자들〉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유 퀴즈 온 더 블럭〉, MBC 공익 광고 등 다양한 방송을 통해서도 정신 건강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북팟캐스트 〈서담서담〉에 참여하며 꾸준한 독서를, 동아일보 〈김지용의 마음처방〉 등에 꾸준한 기고를 하고 있다. 〈뇌부자들〉 멤버들과 함께 쓴 책으로 《어쩐지 도망치고 싶더라니》, 혼자 쓴 책으로 《어쩌다 정신과 의사》가 있다.
방송인이자 농구 해설위원. 프로농구선수로 리그 우승, 신인왕, 베스트 5, 인천 아시안게임 금메달 등의 커리어를 쌓으며 ‘천재 가드’라는 별칭을 얻었다. 어느 날 태풍처럼 강타한 슬럼프로 인생의 방향을 틀고 익숙한 농구장이 아닌 불안전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 인생을 배우며 경험하고 있다. 현재는 방송인,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농구 재능 기부를 하고 있으며, 농구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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