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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문학동네시인선 217
이승희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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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7월 30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7월 3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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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34.33MB)
ISBN 9791141606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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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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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시인선 217번으로 이승희 시인의 네번째 시집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를 펴낸다.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승희 시인은 첫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창비, 2006)에서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슬픔과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두번째 시집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문학동네, 2012)에서는 맨드라미로 대표되는 식물의 이미지와 일상의 풍경들을 통해 슬픔에 대한 더욱 깊어진 고찰을 보여주었다. “사물과 사람이 언제 문학을 포옹하는지, 문학은 어떻게 사물과 사람을 끌어당기는지에 대한 답을 기대할 수 있는 시”라는 평을 받으며 전봉건문학상을 수상한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문예중앙, 2017)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어두운 곳을 들여다보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슬픔과 죽음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생명력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식물의 이미지와 섬약하고 민감한 감정이 만나는 순간 발생하는 감정의 울림, 요컨대 여름과 식물과 슬픔이 한자리에 모여드는 바로 그 순간을 이승희 시인은 차분하고 깊은 언어로 담아낸다.
1부 어떤 식물은 멜로디처럼 흔들렸다
물속을 걸으면 물속을 걷는 사람이 생겨난다/ 헤어진 후/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물속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면/ 물과 뱀/ 나비가 왔다/ 초록 물고기/ 나는 물에 잠겨 있다/ 슬픔은 다할 수 없어/ 아름다운 버드나무 가지는 물에 잠겼네/ 버드나무는 잠을 자고/ 내 마음의 수몰 지구

2부 이제 막 물속으로 잠기려는 잎사귀
나는 버드나무가 좋아서/ 밤배/ 밤배/ 망자들/ 어떤 마음에 대하여/ 안방 몽유록/ 건설적인 생활/ 벽돌을 쌓는 사람들/ 정원에서의 하루

3부 높은 포물선을 그리며 여름이 발달하는 밤이었고
여름밤의 캐치볼/ 여름밤의 캐치볼/ 그건 다 여름이라 그래요/ 여름이니까 괜찮아/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2020/ 여름의 모양을 따라 해보는 날/ 또다른 여름/ 이제 그만 집에 가자라는 말/ 정원의 세계/ 즐거운 우리집/ 정원을 파는 상점/ 물속 정원

4부 한번 더 넘어져요 파도처럼 마지막처럼
사물들/ 복도의 마음/ 우리는 여수에서 하루를 살고/ 여수고등학교 가는 길/ 그러니까/ 유령에게/ 외야수의 기분으로 서 있는 밤/ 좌판의 세계/ 오늘 별이 뜨는 이유에 대해/ 외딴집/ 밤은 정말 거대하고 큰 새가 맞다네

5부 돌본다는 것은 그 옆에서 함께 잠든다는 것
해국과 바다/ 식물과 라디오/ 더피, 나의 고사리들/ 화단 이야기를 해보면요/ 나는 날마다 꽃집에 간다/ 식물의 밤/ 해국/ 코로키아/ 필로덴드론 레몬라임/ 백합의 일상/ 화단에 손톱을 심어요/ 올리브나무는 나의 뒤에서 오래 울어주었죠

발문_슬픔으로 건축한 존재
박동억(문학평론가)

밀어내고 떠나가고 다시 돌아가지 않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세계 그런 말을 하는 동안 귀와 입이 물의 흐름을 따라 조금 더 멀어졌다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물고기가 그 사이를 지나갔다 내게도 그런 집이 생기는 걸까 유언이 짧을수록 아름다운 생이라고 했는데 자꾸 혼잣말이 많아진다 그러니까 오늘은

저녁의 대문 앞에는 몇 년째 조등이 걸려 있었고
끝내 하지 못한 말들이 물고기떼처럼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_「나는 물에 잠겨 있다」 부분

말이 없는 세계였는데 어떤 식물은 멜로디처럼 흔들렸다. 누구도 돌봐주지 않았고 누구도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살아 있는 것 같았다. 한번 지나간 것들은 늦게라도 되돌아왔지만 무심한 얼굴로 다시 지나가곤 했다. 아니라고 말하는 거 이제 지겨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버드나무 가지가 물속으로 내려온다.
아팠던 날들은 아직도 아프다.

버드나무 아래 벗어두고 온 신발은 아직 거기 있을까?_「아름다운 버드나무 가지는 물에 잠겼네」 부분

버드나무에 바람이 불면 물속과 물 밖이 마주보며 함께 흔들렸다. 오래전 연인처럼 반짝였고 세상에는 오직 그 모습만 있는 것 같았다. 세계의 끝은 아닐까 생각하다가 따스하고 무료해서 마치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았다.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서 물가에 오래 서 있었다. 알 것 같은 사람이 있었고, 처음 보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아주 멀리 바다를 지나가는 배처럼 깜박이며 알 수 없는 이국의 말로 이야기했다. 내가 물속에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여전히 버드나무 아래에서 버드나무 잎사귀에 부서지는 햇살을 보고 있다. 눈부셨다. 눈부신 이것이 아름다운 것일까 생각했다. 한 번도 눈부신 적 없는 생이 자꾸 어딘가로 가려 했을 때 나는 햇살을 보고 아팠고, 바람을 보고 슬펐다._「버드나무는 잠을 자고」 부분

바깥을 향해서 손 흔들지 마 우린 이미 바깥이야 그리고 이 바깥에 안이란 없어 서로에게 스밀 어떤 자리도 없도록 해야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그럴지도 몰라 용서할 수 있으니까 맨살을 만지고 입술에 입술을 대고 건조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그래서 끝내 닿지 않으려 한다면 그렇다면 말이야 우린 서로의 망명지가 될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독립시켜야지 당신은 당신을 만지고 나는 나를 만지고 애초 없는 것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렇다면 말이야 우린 그렇게 마주보게 될지도 몰라 그러니 밤이 온다 보이지 않는 몸이 꽉 차서 우리는 사랑해라고 말할 수 있다_「망자들」 부분

화단은 시끄럽습니다 서로 모르는 식물끼리 같이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놀다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내일은 좀더 친해져서 함께 밥을 먹지 않을 테지요 욕하고 때리다가 엎드려 울고 나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겠지요 돌아오지 않은 아이들은 반성과 번성 사이에서 잠이 들고 꽃 같은 건 되고 싶어하지 않을 겁니다 건설적으로 죽고 싶어한다는 걸 믿어도 되나요 날마다 처음 보는 우리만 남아 오늘의 높이에 대해 말합니다 얼마나 더 기울어져야 똑바로 설 수 있나요 그러는 사이 누군가가 벽돌을 쌓고 있습니다 차곡차곡 아름다운 높이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이국의 세계를 걷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왼손과 나의 오른손이 겹쳐지는 이유 같습니다 _「건설적인 생활」 부분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멀어졌다 멀어짐의 이유라는 건 애초 없는 것 우린 여전히 서로의 가슴팍으로 날아가 꽂히는 첫번째 심장처럼 공을 주고받는다 멀어진다는 것은 나아간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온 힘과 간절함만 남는다는 것 우리는 어제보다 오늘 더 멀어지고 날마다 서로의 가슴팍을 향해서 더 멀어진다 우리가 던진 공은 가끔 우리의 사이에서 길을 잃고 떨어지거나 우리의 등뒤 어둠 속으로 던져지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멀어진다 그리고 더는 멀어질 수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캐치볼은 끝난다_「여름밤의 캐치볼」 부분

너는 오는 게 아니라 생겨나는 거니까 돌아갈 수 없다는 건 잘 살았다는 말 이 집엔 그런 것들이 살고 있다 이런 거짓말을 하고 싶은데 이제 다시 여름은 오지 않겠지 가버린 것들은 다시 오지 않아야 한다 거기서 누군가는 또 길을 잃을 것이고 어긋나려고 아름다워지겠지 나는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다_「이제 그만 집에 가자라는 말」 부분

내일은 내일로 가라고 말해주고 우리는 내일로 가지 않기로 약속을 하고 한번 더 넘어져요 파도처럼 마지막처럼_「우리는 여수에서 하루를 살고」 부분

밤이 되면 해변에 가려고 했다 그건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뻔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채로 나란히 걸었다 동의하지 않는 걸음으로 아플 때까지 걸었다 우리는 나란히 눈동자를 볼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였고, 나는 당신일 것이 분명했다 멀어지자 멀어질 만큼 멀어지면 우리는 식물처럼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우리는 어딘가에 도착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가 건넨 손은 등뒤에서 빗나갔다
(…)
약속한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여수고등학교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밤이 되면 해변에 가려고 한다 저 언덕만 넘으면 해변이 보이거나 끝내 서로를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날씨를 만날 수도 있을 테니_「여수고등학교 가는 길」 부분

내게 없는 손을 주세요
오늘은 손을 잡고 연두의 세계를 공부하겠습니다
없는 것들에 대해
애초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없는 것들은 자랍니다
없는 것들만 자랍니다
그런 밤이 있습니다
그런 밤만 가득합니다
그런 밤의 이마들을 자주 바라봅니다
쓰다듬어줍니다
만져지지 않는데
이렇게 가득해서
없는 것들로 풍요로워집니다
내겐 이런 게 다입니다
그게 가끔 살아 있는 이유가 된다거나
나 없이 연두로 가득한 세계를 천국이라 믿는 이유입니다_「더피, 나의 고사리들」 부분

병든 것들 옆에 나란히 누워보세요
사는 거같이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으니
아무도 모르게 죽은 몸을 배웅합니다
배회합니다
내가 참여할 수 없는 동화입니다

생각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생각으로부터 더 멀리 물러나세요_「화단에 손톱을 심어요」 부분

머리카락 사이에 손가락을 넣으면 모든 죄가 선명해졌다 비밀은 모두가 바라보는 그 자리에 있는 법이니까 여름이 끝나기 전에 말해줘 그게 여름만 기다린 사람에게 할 말이니 올리브나무 뒤로 올리브나무 종일 그 옆에서 무슨 주술처럼 비명처럼 나뭇잎들을 세어본다 올리브나무와 올리브나무 사이를 만져본다 그 사이로 무엇이 만져진다는 건 정말로 길을 잃었다는 말 이젠 어떤 추방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 올리브나무 아래 물고기들이 왜 그렇게 부드럽게 헤엄을 치는지 세상 모든 것들이 그렇게 따뜻하게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을_「올리브나무는 나의 뒤에서 오래 울어주었죠」 부분

밤이 되면 집은 불을 밝혀 물속으로 돌아간다

비로소 물속에도 꽃이 피고

나는 바깥을 견디지 않아도 좋았고
슬픔은 슬픔을 견디지 않아도 좋았고
세탁소 골목을 지나가는 몇몇 물고기들이
좋은 사람처럼 보여서 좋았다

(...)

작약이 이렇게나 피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았다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잘 찾아올 수 있을 것인데

물은 고요하고
대문 앞 가로등이
작약의 낯을 보고 있다
오래 만지고 있다

물속을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 같았다
_「헤어진 후」 부분

이번 시집에는 ‘물속’을 오래도록 가만히 들여다보거나 그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시적 화자가 자주 등장한다. 그는 왜 물 가까이에 있으려 할까. 아마 슬픔과 물의 속성이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축축하고 물기가 묻어 있다는 것. 인상적인 점은 충분히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화자가 비관에만 빠져 있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화자는 되레 물속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 초점을 맞춘다. 물속에도 “꽃이 피”며 “나비 한 마리”(「헤어진 후」)가 날아다닌다. “기차가 물속으로 들어”오기도 하고 “당연히 물속에도 비는 온다”(「아름다운 버드나무 가지는 물에 잠겼네」). 그리고 무엇보다 화자는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헤어진 후」)하다는 점을 발견해낸다.
이처럼 슬픔에서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슬픔에 깊이 빠져듦으로써 그 안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발견해내는 시인의 태도는 초연하고도 성숙하게 느껴진다. 사람이 물속에서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는 것과 달리 시인은 슬픔이라는 거대한 물속에서도 자연스럽게 숨쉬고 일상을 살아간다. 오히려 시인은 “물 밖으로 나올 마음이 없”(「슬픔은 다할 수 없어」)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시인은 지금 “슬픔을 다하는 중”(같은 시)이기 때문이다. ‘슬픔은 다할 수 없어’라는 시의 제목처럼 슬픔에는 끝이 없기에 그저 각자의 속도와 방식으로 슬픔 속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연못가 버드나무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몇 마리의 물고기가 툭툭 놓여났다
공중을 물들이며 스르르 잠기는 물고기

나는 그것을 며칠씩 바라보기도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버드나무처럼 웃는데
공중으로도
물속으로도
잘 잠겨들었다
공중과 물속이 서로를 잘 이해하는 것 같았다

버드나무는
물속에 잠긴 발등을 오래 바라보며
고요하다
이게 버드나무의 마음이라면

연못 속에서도
나뭇잎에서도
물고기들이 태어나고 자란다

어느 저녁
나도 툭 놓여나겠지

밤이 연못 속으로 고이고
물속은 한없이 깊어지고
나를 데려다준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살아 있는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할 때
_「초록 물고기」 전문

슬픔에 깊이 잠겨 있는 화자는 자신이 삶과 죽음의 교집합 속에 존재한다고 느끼는 듯 보인다. “잠시 살았다가 또 잠시 죽었다가 하였다”(「밤은 정말 거대하고 큰 새가 맞다네」), “살아 있는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할 때”(「초록 물고기」), “나는 어쩌면 아직 살아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물속을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면」) 같은 시구에서 화자의 그런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삶과 죽음은 각각 극과 극에 존재하며 삶은 밝은 것, 죽음은 어두운 것으로 여겨진다. 삶은 지향해야 하는 것이며 죽음은 피하고 싶은 두려운 일이다. 하지만 화자는 반대로 “죽는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사는 게 무”(「우리는 여수에서 하루를 살고」)섭다고 말하며 “죽음은 살아낼 수 없는”(「아름다운 버드나무 가지는 물에 잠겼네」) 것인지 고민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인이 ‘놓여난다’는 동사를 애정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시인은 화자의 입을 빌려 “놓여 있다와 놓여난다는 말을 좋아해요”(「백합의 일상」)라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화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죽음이 ‘놓여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것에 묶여 있는 현실의 삶보다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죽음 쪽으로 몸을 트는 것. 하지만 그렇다고 화자가 삶을 아예 등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으로부터 놓여나는 상태인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 살기 위해 놓여난 상태에 있는 것들, 대표적으로는 자연물들을 ‘따라’ 한다. 화자는 “물의 흐름을 따라”가고 “목단 나무줄기를 따라”가고 “강물을 따라”(「안방 몽유록」)간다. “구름의 모양을 따라”(「여름이니까 괜찮아」) 해보기도 하고 “여름의 모양을 따라”(「여름의 모양을 따라 해보는 날」) 하기도 한다. 삶 쪽에 머물면서 죽음의 놓여남을 바라보는, 즉 삶과 죽음을 겹쳐볼 수 있는 자리에서 살아가는 나름의 방식을 터득한 것이다.
이렇듯 이승희의 시에서는 살기 위해 죽음의 방식을 행하는 역설이 발생한다. 시인의 이러한 태도는 ‘여름’이라는 계절과도 연결된다. 이승희의 시에서 ‘여름’은 삶과 죽음, 슬픔을 잠시 잊고 초연해질 수 있는, 즉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처럼 보인다. “여름은 찬란했고 비로소 폐허가 되었다”(「외딴집」)나 “슬프다는 말을 데려와 잘 재워주자/ 여름이 지난 것을 모르도록”(「유령에게」) 등의 시구를 보면 시인에게 슬픔에서 잠시 벗어나는 여행과도 같은 계절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름은 잠깐의 일탈과 같이 짧게 지속된다. 그렇지만 이승희 시인은 조급해하지 않고 성숙하고 유연하게 여름을 기다린다. 당장의 절망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슬픔에 몸을 맡기며 여름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 역시 이 시집을 읽다보면 각자의 슬픔을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여름이 오고 가듯 자연스러운 속도와 방식으로 말이다.

여름의 모양으로

슬플 땐 더 슬픈 노래를 듣고
슬플 땐 더 슬픈 노래를 듣고

절벽에서 떨어지듯 자는 잠처럼 옥수숫대 사이로 여름이 스쳐지나가고 함께 걸어다니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생각하면 한 세계가 다 지난 것처럼 외로웠다 여름은 그렇게 캄캄한 것들을 잠시 닫아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했다 손가락으로 내 몸을 자주 만져보는 버릇이 생겼다 어떤 모양도 되지 못하는 나는 또다른 나의 생일을 믿기로 했다

사실은 처음부터 함께 있었다 감춘 것들을 아직 보여주지 않는 세계가 있을 뿐이고 우리는 그 세계를 끝내 만나지 못하고 동화는 그렇게 끝나겠지만 여름이 오고 다시 같은 기억으로 괴로워하다가 여름으로 버려질 테고 거의 정지 화면처럼 한없이 느리게 여름을 걸어가는 사람이 되겠지 여름의 모양을 따라 또 함께 걷고 싶었던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겠지 나는 여름을 다 살지도 못한 채 여름의 폐허만을 사랑한 채
_「여름의 모양을 따라 해보는 날」 부분

슬픔이 결국 존재의 무력함이나 죽음으로 귀결한다면, 이승희 시인은 그 어두운 곳으로 향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로부터 역설은 생겨난다. 그는 자신을 버리는 만큼 그가 바라는 존재를 얻을 것이다. 병드는 만큼 깊어질 것이다. 시집 전반의 식물 이미지와 미적인 풍경은 환부를 부드럽게 감싸지만, ‘놓이고’ ‘돌아가고’ ‘따라’ 흐르는 서술어 속에서 마음의 요동은 감지된다. 슬픔에 충분히 흔들릴 때, 최초의 ‘나’는 사라지고 그는 오롯이 슬픔으로 건축된 하나의 존재를 획득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슬픔을 다할 수 있는 것인지, 또한 이 슬픔의 서사시가 마침내 어딘가에 도달할 것인지는 답하기 어렵다. 다만 시인이 ‘무언가’라고 말한 그 타자성과 직면하는 순간처럼, 이 또한 사람이 이룰 수 있는 기적이라고 말해볼 뿐이다.
_박동억, 해설에서

■ 이승희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Q1. 이번 시집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 이후 7년 만에 출간하는 네번째 시집이지요? 세번째 시집 제목에 ‘여름’이 들어 있기도 하지만, 어쩐지 선생님의 시는 여름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금 계절에 출간하는 마음이 남다를 것 같은데, 오랜만에 시집을 출간하는 소감을 여쭤보고 싶어요.

‘여름’에서, 정확하게는 ‘여름 이미지’에서 진심으로 벗어나고 싶었어요. 세번째 시집에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저도 모르게 자꾸 그 이미지 속에 있는 걸 느꼈습니다. 아닌데, 아닌데 하면서도 끌려들어가는 느낌이어서 썩 유쾌하지는 않은데요. 결국 저는 아직 도망치지도 못하고 어딘가에 갇혀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면 아예 그 속으로 더 들어가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게 아마도 ‘물’의 이미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시집을 출간할 때의 마음이란 언제나 똑같습니다. 부끄럽고, 빨리 지나가면 좋겠는 마음입니다.

Q2. 시집 전반에 작약과 버드나무 등의 식물이 많이 등장하지요. 5부는 거의 매 시마다 다른 식물이 등장하기도 하고요. 시집에 이렇게 여러 식물들이 등장하는데 그중에서도 ‘작약’이 들어간 구절을 제목으로 골라주신 이유가 궁금해요.

시골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집에 가장 많이 자라던 꽃이 작약과 백합이었습니다. 그냥 보려고 키운 꽃들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약으로 팔기 위해서 키우시기도 해서 작약은 정말 지천에 있었는데요. 유년이 지나고서는 작약을 많이 못 봤어요. 그런데 힘들고 아플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가 작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게 ‘작약’의 이미지는 언젠가는 돌아갈 곳 혹은 내게 가장 행복하고 유일한 어떤 곳의 이미지로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작약을 꼭 제목에 넣고 싶었습니다.

Q3. 식물에 대해 더 여쭤보고 싶어요. 선생님께서는 식물에 관한 에세이인 『어떤 밤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폭스코너, 2021)를 출간하기도 하셨지요. 시에도 식물에 대한 언급이 다수 등장하는데 식물과 함께하는 일상이 시를 구상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시집에 식물들이 많이 등장하는 것은 제가 집에서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제 생활과 식물의 생활이 겹쳐져 있다고나 할까요. 마당이나 실내 공간에 여러 식물들이 있는데요. 매일 안부를 묻고, 물을 주고 햇살을 나눠주고, 라디오를 같이 듣고 그렇게 같이 살고 있습니다. 아주 가끔 제 시를 들어주고 고개도 끄덕이고, 가로젓기도 했던 아이들이라 ‘반려’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식물 이야기를 자주 쓰게 되었습니다.

Q4. 시집을 읽어보면 연속적으로 배치된 시들이 서로 이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해요. 예를 들어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라는 시구는 수록작 「헤어진 후」의 한 구절이자 「헤어진 후」의 바로 다음 시인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의 제목이기도 하고, 1부에 수록된 시들에서도 연속적으로 물고기와 물의 이미지가 등장하고요. 이렇게 시가 연결되듯 읽히는 구성을 의도하고 집필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네, 의도를 했는데요. 개인적으로 긴 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시는 시인의 연속적 세계를 담아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영화의 프레임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특히, 시집이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시집이란 결국 시인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업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작게 보면 예고편처럼 한 문장을 숨겨놓는 재미도 있었구요. 아마 앞으로도 이렇게 쓰는 시가 좀 있을 것 같습니다.

Q5. 마지막으로,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와 함께 여름을 보낼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주세요.

제 생각에 여름은, 이국의 계절 같아요. 마치 여름이라는 계절 동안은 지금 여기가 아닌 곳을 살아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어요. 걸어서 국경을 넘어가는 마음, 한 번쯤 여기가 아니어도 괜찮은 마음, 끝이 보이면 어때, 그래도 가는 거지, 지금은 여름이니까, 그런 마음. 그런 여름을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작가정보

저자(글) 이승희

199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이 있다. 전봉건문학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

작약이

피어 있는 방에 있습니다

누구의 안부였을까요

물을 끌어다 덮으면

누군가

나를 데리러 오는 것 같습니다

2024년 7월
이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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