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몸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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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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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하오/ 문득 그 계절이 되는/ 아이와/ 공에 대해서라면/ 솔방울/ 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 호랑/ 기러기보자기 연습/ 오송/ 접면/ 다음 숏/ 금일/ 경주/ 잔디를 방안으로/ 얌 연습/ 불광천, 여름/ 그날의 빛 날씨/ 염화칼슘 보관함/ 빗소리/ 기억 몸짓/ 몸짓 기억/ 눈언저리의 솔잎들/ 호우 몸짓/ 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 의성어 생김새/ 의태어 만들어내며/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을 타고 가는/ 모락모락/ 통일 시/ 눈석임물/ 겨울에 여름 이미지/ 여름에 겨울 이미지/ 영화/ 우리 개의 놀라운 점/ 산서/ 합정/ 단소 소리/ 돌과 구름/ 여름에 어울리는 옷 사람/ 사랑을 굴러가게 한다고 그런 사랑이/ 백로
그러면 꿈을 꿀 수도 있을 텐데.
어느 날엔가 불현듯 떠오를 만한 꿈.
이 꿈속에서는 누군가 사과를 하고 또 누군가 용서를 하고
나는 그 둘 다가 되어서 사과와 용서를 하고
그래 미안해 그리고 괜찮아, 헤어나올 수 있을 거라고
이 꿈을 마저 꾼 다음에는 어디로든 들어가버리자고 숨어버릴 수 있다고.
_「문득 그 계절이 되는」에서
친구는 내 공을 바라보며 말했죠.
그거 품어볼 수 있나요, 혹은 깨지기도 하나요?
설마요. 나는 놀라 공을 움켜쥐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떨어뜨렸어요.
_「공에 대해서라면」에서
숲이 우거져 있었으니까.
비는 나무 이파리들에 닿은 후 흘러내렸으니까.
나는 쏟아지기보다는
흘러내리는 비를 맞고 걸어갈 수 있었으니까.
그 빗소리를 내내 들으면서 돌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개구리 소리가 울렸다. 그게 좋았다. 좋았어.
_「오송」에서
잠들고 꿈꾸고 깨어나는 우리가 여럿이라고 생각하니
드넓어지는 마음을 알아챘다
우리가 여럿이어서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다짐했다
우리가 여럿이라 슬펐다 기뻤다 하염없었다
_「기억 몸짓」에서
여름 표정이 되는 사람아.
여름 몸짓이 되는 사람아.
여름 풀벌레와 여름 야시장이 되는 사람아.
그렇게 여름이 되어 있는 사람이므로
너는 여름 목소리를 내어 나를 부를 것 같네.
_「여름에 어울리는 옷 사람」에서
흘러서 거기 잠깐 머무는 것들과의 조응
김수영문학상 수상 작가 안태운 신작 시집
“시공간을, 언어를, 이름을, 몸을 선뜻 가로지르는 안태운의 시”(홍성희 평론가)는 이번 시집에서도 특유의 리듬감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독자로 하여금 혼잣말하듯 산책하듯 보이는 것을 보고 생각나는 것을 따라 유영하고 발견하는 화자의 곁에서 그의 걸음걸음을 함께하게 한다. 일상성과 계절감이 잘 드러나는 장면들과 그것이 자아내는 노스탤지어는 “그날이 훌쩍 지나 이제 그 모든 일이 과거라는 게 놀라워서, 지금이라는 게. 그리고 나는 그리워하고 있구나”(「경주」)라는, 아련한 듯 담담한 듯한 화자의 태도에 자연스레 스며들게 한다. 그러면서 “이 빗소리에서 저 빗소리까지의 공간감. 거기서 나는 생겨나나”(「빗소리」)라는 안태운 시인 특유의 ‘공간감’, ‘장소성’에, “흘러서 거기 잠깐 머무는 것들”(「영화」), 요컨대 인간-비인간-사물을 망라한 개체와 종을 향한 고민에 마음을 맞대보게도 한다.
손끝의 장소
물갈퀴로 흘러드는 횡목
하오
당신은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데
당신은 부딪치오
시간의 끝에서 울다
공간과 사물로 있다
발가락을 움직여봐
모빌과 함께 산책해 있다
당신은 양의 집 근처에 가서 부른다
하지만 양은 어딘가로 나가 있었다
그러므로 당신은 뒤돌아 뛰어갔다
하오
놀았다오
자러 가기 전에 안부를 물었다오
음소 단위로 노래를 불렀다오
아름다웠다오
두 얼굴 뒤에 숨었다오
커튼 뒤로
내 뒤로
어느새 내 앞으로
도요새가 날아간다
당신은 몇 걸음 걷다가 체육을 했다
기억의 덩어리가 날아들었다
쐐기의 관계
하오
건물에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구름은 광장처럼 떨었다오
그사이
당신은 뒤돌아 망설였다오
우표를 붙였다오
당신을 사랑하오
수레와 함께 움직인다
민달팽이가 퍼져나간다
잔등과 환초
하오
당신이 어른이 되다니
당신이 어른이 된다니
_「하오」 전문
시집 초입에 실린 이 시는 시인이 가장 최근에 쓴 시다. 안태운의 시가 보여주는 이미지들과 몸짓들이 이 한 편 곳곳에 담겨 있다. 그의 시는 ‘리듬’과 ‘흐름’이라는 키워드와 떼려야 뗄 수 없는바, ‘울다’ ‘있다’ ‘했다’ ‘날아들었다’ ‘퍼져나간다’의 앞뒤에 ‘놀았다오’ ‘물었다오’ ‘불렀다오’ ‘망설였다오’와 같이 종결어미가 변형된 시구가 놓이면서 독특한 뉘앙스를 지닌 리듬감이 형성된다. 마치 누군가의 내레이션과 배경으로 흐르는 장면들이 공감각적으로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다. 그 장면은 선형적이기보다는 불연속적이고 연상 작용을 따르는 듯하다. ‘당신’으로 지칭되는 대상 역시 하나로 보이지는 않는다. ‘당신’마저 고정된 부표가 아닌, 어디로 어떻게 흘러 어디에서 멈추게 될지 모르는 움직임의 일부인 것 같다. “몸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 것처럼, 어떤 “기억의 덩어리”가 어디서 어떻게 날아들지 모르는 것처럼. “문득 그 계절이 되는. 나는 할머니가 살았던 곳의 담벼락을 거닐고 있었는데 문득 그 계절을 걷게 되면 내게 파도가 밀려오는 듯하고 나는 순간 놀라 다음 걸음을 걷고 또 놀라 그다음 걸음을 걷고…… 놀라서 걷는 걸음이 다음 걸음이 되는”(「문득 그 계절이 되는」) 것처럼. 파도가 밀려오고, 걸음이 이어지고,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흐르며, 문득 어떤 기억이 떠올랐다가 흘러간다. 탄생과 죽음이 그 흐름의 마디마디에 새겨진다. 시인이 시를 쓰고, 멈추고, 다시 쓰는 일 또한 그럴 것이다.
안태운 시인이 첫 시집부터 이번 시집까지 인간(동물)적인 것과 비인간동물적인 것, 인간의 삶과 자연 생태계에 관심을 기울여온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워 보인다. ‘인간성’ ‘동물성’ ‘사물성’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성질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제각각 능동적이며 또한 동등해질 수 있는지, 어떻게 조응할 수 있을지에 대한 천착은 이번 시집에서도 빛난다.
“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에 대해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그 장면과 감정이 낯설어지고” 그 일이 반복될수록 그에 설레거나, 무언가 각오하게 되거나, 께름칙함이나 상충됨을 느끼는 것. 동물원의 동물은 직업이 있는 동물이라 말할 수 있고 그들은 인간을 피하지 않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고, 한편 그 동물원에서 일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이 있으며 그것은 화자에게 여러 양가감정을 느끼게 한다. “야생동물은 스스로를 연민하지 않는다고도 감각하면서”. 비인간동물을 향한 어떤 유의 애틋함은 역시 인간중심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을 포함해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잘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여기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문득 낯설어하며/ 주위를 둘러”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인간의 어떤 감정과 장면」)
당장 해볼 수 있는 게 있을까, 멀리서라도
그러므로 오늘은 절멸한 생물들의 이름을 반복해서 되뇌어보는 시간을 가졌죠 생김새를 떠올려보며 오랫동안
……
랩스 프린지 림드 청개구리(Ecnomiohyla rabborum)
브램블 케이 멜로미스(Melomys rubicola)
포오울리(Melamprosops phaeosoma)
크리스마스섬집박쥐(Pipistrellus murrayi)
콰가(Equus quagga quagga)
세실부전나비(Glaucopsyche xerces)
스텔러바다소(Hydrodamalis gigas)
타이완구름표범(Neofelis nebulosa)
(……)
나는 한 인간 개체의 생애 동안 한 종이,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숱한 종이 절멸되고 있다는 사실에 아연해졌는데
그 시공간을 오랫동안 가늠해보다가 혜량할 수 없다,
라고 천천히 발음해보았는데
그런 내 인간의 몸과 마음을 낯설어하면서요
몸과 마음의 상실에 대해서
내 몸과 마음뿐 아니라 내 몸과 마음의 종뿐 아니라 다른 생물체의 대대손손의 상실에 대해 혜량할 수 없었는데요
_「생물 종 다양성 낭독용 시」에서
동식물이 자연도태보다 500배 빠르게 절멸하고 있는 인간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구에서 “가끔 무언가를 끼적이며 실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 낭독하고 발화하며 그날 실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지”(같은 시에서), 그건 ‘인간의 언어’로 명명된,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그 종의 이름들을 되뇌는 것처럼 막막한 일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랑을 사랑하게 놔둬도 좋을까 사랑이/ 사랑을 굴러가게 한다고// 굴러가라 하면 잘 굴러서/ 놓여 있는 사랑이라니// 어딘가에 있는 사랑// 그런 사랑이 흘러서 또 어딘가에 닿는다면”(「사랑을 굴러가게 한다고 그런 사랑이」) 하는 바람처럼, ‘사랑’이라는 인간의 모호한 언어가 구체적인 행위로 굴러가고 닿아서 영향을 주고받고 어우러질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서 마땅히 골몰해야 할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보는 것을 멈출 수는 없다. 혼자 하면 소박했을 생각들이, 시로 쓰이고 읽히고 거듭 읽히며 퍼져나가고 커지는 일 또한 바라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겨울, 기억하려고 낭독회에 함께 모여 있었고
어느 봄, 숲에서 길을 잃었는데 굴을 발견했다
그곳으로 들어가 잠들며 꿈을 꾸었고
어느 여름, 조카가 생기고 나서는 버스를 타고 가는 중학생을 보며 그는 내 과거가 아니라 조카의 미래라고 문득 여겨졌고
팔랑개비를 만들어보았고
깨어난다
어느 가을, 거울의 실금을 눈치챘고
어느 겨울, 날개응애와 애꽃벌
스치기
어느 봄, 옛 기억 속 장면에서는 나를 삼인칭으로 인식하게 되고
어느 여름, 끝말잇기를 하는 인간
아이의 냄새를 맡는다
아이가 냄새를 맡는다
어느 가을, 반딧불이와 노루와 버들치를 알았다
어느 겨울, 사슴벌레와 망초와 물범을 알았다
모습들
(……)
몸짓들
다르고 같다는 걸 알았다
같고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기억 속에서 어느 날 우리가 여럿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잠들고 꿈꾸고 깨어나는 우리가 여럿이라고 생각하니
드넓어지는 마음을 알아챘다
우리가 여럿이어서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다짐했다
우리가 여럿이라 슬펐다 기뻤다 하염없었다
그것
흐르는 강물
둘레
산란과 예감
탄성
감각들
우연
시간이 흐르고 있다
시간이 흐른다 되돌아온다
기척이 스민다
_「기억 몸짓」에서
‘나’가 대면하는 과거 ‘어느’ 계절의 기억들. 그것이 아이(‘조카’)를 알고부터는 ‘아이의 미래’로 대체된다. “기억 속 장면”에서 ‘나’는 “삼인칭으로 인식”되고 ‘어느 봄과 여름’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과거의 계절에서 도래할 미래의 모든 계절로 펼쳐진다. “아이의 냄새를 맡”자 “아이가 냄새를 맡는다”. 미래의 아이는 “어느 가을, 반딧불이와 노루와 버들치”를, “어느 겨울, 사슴벌레와 망초와 물범을 알”아가리라. 우리 존재의 “몸짓들”이 “다르고 같다는 걸” “같고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가 여럿이라는 사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여럿이어서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다짐”할 수 있고, “여럿이라 슬펐다 기뻤다”. 이렇듯 안태운의 “시간”은 “흐른다 되돌아온다”. 장면들, 모습들, 감각들, 몸짓들, 그리고 기억들과 함께. 반복적이고 순환적으로, 그리고 재귀적으로. 더는 ‘나’만의 것, ‘과거~현재’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과거~미래’의 것으로서. “하염없”이.
“그렇게 내가 미래의 아이를 안아주었으면”(「아이와」) 하는 마음. “행동을 하면 기억이 되고 과거의 기억이 나면 머무르고 인간의 기억이 미래 기억이 될 수 있다고 생각”(「몸짓 기억」)하는, “기억하는 게 미래 같”(「돌과 구름」다 생각하는 사유 방식은 인과적 시간성에서 동시적 시간성으로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킨다. 그러한 사유는 미래를 기억하는 일을 통해 현재를 다르게 보고 변화하게 할 가능성을 포함하며, 그 어떤 존재도 고립되거나 고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더 유연하게 운용돼 “스며들어 지속”(「몸짓 기억」)될 것이다. 그것이 어쩌면 시인 안태운이 “어느 날에는 시간이 흘러가도록 만지지 않”(‘시인의 말’)는 이유일지 모른다.
◎안태운 시인과의 미니 인터뷰
Q1. 4년 만의 신작 시집입니다. 저는 유독 인간-비인간 종에 골몰한 화자와 무언가 '되는 일'에 대한 집중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수록작들을 정리하며 어떤 생각을 많이 하셨을지 궁금합니다.
시편들을 정리하면서 지난 4년을 되돌아본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무엇에 가까이 있었는지도요. 사실 순간마다 시를 써서 두세 편씩 발표하는 일과 50편 가까이 되는 시편들을 하나의 책으로 만드는 일은 참 다른데요. 시편들을 일별하며 거두어들이고 버리고 다시 쓰고 새로 쓰며 하나의 흐름인 모음집을 꾸리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면서는 제가 탄생과 죽음, 자라남과 늙어감 곁에 있었으며 그게 내 주요한 삶 감각이었구나, 깨달았습니다. 무엇보다 개체와 종 사이에서 자주 오갔다고 덧붙이고 싶습니다.
Q2. 문학동네시인선은 아무래도 표지 컬러와 제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데요, 제목을 포함해 이번 시집의 인상이 독자들께 어떻게 다가가길 바라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니까요. 문학동네시인선을 통해 작업하면서 역시 고심했던 건 시집의 색깔이었습니다. 물론 제가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색은 밝은 군청과 보라 계열의 색이었으므로…… 이렇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여러 시안들 중 선택을 한 결과이지만 ‘썰’은 풀어볼 수 있겠네요. 표지색은 서리처럼 느껴졌으면 했습니다. 수증기가 얼어붙은 어떤 서늘하고 청명한 것이면서도 모서리를 연상하는 아슬아슬한 가장자리 같은. 하지만 글자색은 황색 계열의 따뜻하며 넓이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저는 차가움과 뜨거움이 함께 있는 걸 좋아하는데요. 제가 써왔던 시편들 역시 건조함과 습함이 그러니까 불과 물이 함께 있는 듯도 하고요. 뒤표지 도안은 총천연색의 단선적 움직임인 반면, 시집 내부의 사진들은 흑백의 입체적 움직임이고요, 그 둘이 어긋나는 듯하면서 조응한다고도요. ……이렇게 작성을 해보았지만 역시나 배색이 좋아서 직관적으로 결정했다고 말할 수밖에요! 그리고 ‘기억 몸짓’이라는 제목은 아마 시집을 찬찬히 읽어보시면 독자분들께 저마다의 방식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을 듯합니다.
Q3. 생각과 시선과 행동을 따라 이어지는 시구들을 읽다보면 화자와 함께 산책하는 기분이 듭니다. 어디에 가닿을지 모르는 채 읽는 편편들인데요, 이 시들이 어디에서 시작되고 어디에서 끝날지 시인은 어느 정도 알고 쓰기 시작할까 궁금했습니다.
사실 어느 순간 멈추는 것에 가깝지 않을까요. 편편마다 물론 다른데요. 어느 정도 꼴은 염두에 두지만 문장이 나아가는 건 순간적이며, 대부분 모르는 채로 움켜쥐지 않은 상태에서입니다. 직관적으로 다 되었다 하는 마음이 빨리 드는 시가 있는 반면 오래 써도 더 써봐야 할 시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는 언급하고 싶은데요. 어떤 시는 마지막 문장을 가장 처음 썼습니다. 써나갔고 퇴고를 지속했죠. 그 시는 발표 직전에 다시 한번 멈추어서 지면에 발표됩니다. 이후 필요를 느껴 다시 퇴고하면 그 시는 움직였다가 멈춘 것일 테고요, 또한 움직이다가 시집 최종교로 넘겼을 때 멈춥니다. 시의 마지막 문장은 내내 남은 채였는데요, 그 앞의 문장들은 계속 움직여왔고 때가 되면 멈췄습니다. 그러하다고 시집으로 묶여 출간된 시가 완전히 멈추었느냐 하면 그러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왜 계속 움직이게 하느냐? 물어보신다면…… 움직이고 싶어서.
Q4. 시집 앞뒤에 흑백 이미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지난 시집과는 배치도 컷수도 달라졌는데 어떤 의미를 담으셨을지 궁금합니다.
하나의 독특한 책이었으면 좋겠다 싶었어요. 시인선에 포함된 시집이지만, 조금은 다른 물성의 책. 시집에 사진 이미지를 넣으려 구상했던 시점은 꽤 되었지만,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나타날지는 몰랐습니다. 점점 구체화되면서 50편 가까이 되는 시를 사진 이미지로 처음과 끝에서 감싸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며, 그 흐름에 울림이 있기를 바랐습니다. 앞에서는 두세 컷으로만, 뒤에서는 열 컷 이상으로. 그 사진이라는, 이미지 사각형은 일종의 말줄임표처럼 느껴지게끔요. 여운이 깃들면 좋겠다 싶었고요. 텍스트는 텍스트로 사진은 사진으로 서 있되 어렴풋한 연결감을 느껴볼 수도 있을 듯하기도요.
사실 무엇보다 독자분들께 텍스트와 아울러 사진 이미지로 다채로운 걸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비밀을요.
Q5. 수록작 중 유독 마음에 남는 시가 있으실까요? 그 이유도 들려주세요.
최근에 쓴 시가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네요. 그 시는 「하오」입니다. 저는 이 시를 쓰면서 자주 읽었고 읽으면서 썼습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저는 자주 끊어서 연달아 스타카토처럼 아니면 랩하듯 그럼에도 마치 창을 하듯 길게 늘여서 음절 단위로 그 음절이 품은 의미와 비의미의 뉘앙스를 감각하면서 행갈이의 절벽과 그 미끄러짐으로 나아가면서 공간 및 시간의 이동과 시점의 변화를 되새기면서 우리말 어미의 연하고 질긴 성질을 유념하면서 자음자와 모음자와 받침이 주는 울림의 개개와 한아름을 환기하면서 읽고 썼고, 그리하자 저는 계속 ‘하오’ 하고 말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쓰고 나서는 이 시가 좋았습니다.
작가정보
작가의 말
어느 날에는 시간이 흘러가도록 만지지 않았다
2024년 여름
안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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