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형의 삶
2024년 07월 10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7월 1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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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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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사람들은 그곳을 ‘파리’라 불렀지만, 그 두 글자에 꾹꾹 눌러 담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내겐 많았다. 일상의 때를 살살 벗겨내자, 시간의 먼지를 슬쩍 털어내자, 파리라는 꿈은 여전히 젊게 펄떡이고 있었다. 덕분에 두 달 동안 파리에서 한 권의 책으로도 압축될 리 없는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그토록 간단할 리 없다. 나의 여행 가방 안에는 두 달 동안의 짐뿐만이 아니라 수십 년의 시간이 함께 담겼으니까.
-〈프롤로그〉 중
이상한 일이었다. 루오 특유의 검정 선이 어둠으로 읽히지 않고, 그의 단단함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특유의 그 두께는 슬픔의 두께가 아니라, 자신의 것을 쌓아 올린 시간의 두께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뚜벅뚜벅 자신의 길을 걸어간 거다. 의심과 싸우며 자신의 색깔과 선을 밀고 나간 거다. (…) 눈이 선명해졌다.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또렷해졌다. 마음이 단단해졌다. 분명 같은 그림이었지만 그날 그 그림이 내게 준 새로운 감정은 바로 용기였다.
-〈No. 5〉 중
지금부터 굳은살을 다 떼어내고, 생살의 따끔따끔한 시기를 거쳐, 새살이 돋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보드라운 시간들이 필요하다. 오늘 먹은 버터의 부드러움을 마음에 바르고, 각양각색의 치즈들로 감싸서, 일곱 가지 무지개의 빛깔을 쬔다면 너무 늦지 않게 새살이 돋아날 것이다. (…) 궁금함은 점점 커졌다. 억지로 틈을 벌려서 도망치듯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면 어떤 무늬의 여행이 될까. 돌아가야 하는 날이 가까워질수록 억울한 마음이 자라나지 않는다면 여행은 어떤 방향으로 흐르게 될까. 살고 싶은 속도대로 살아도 되는 여행이라면, 내가 살고 싶은 속도는 어떤 걸까. 그 속도를 열심히 찾아보자, 라고 쓰려다가 멈춘다. 찾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 그래도 되는 시간이다. 그래도 되는 시간을 내가 나에게 선물한 것이다.
-〈No. 8〉 중
생마르탱 운하에 앉아 맥주 한 캔씩을 마시며 젊은이들 틈에 끼어본다. 시간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얼마나 가차 없이 굴었는지 우리는 아니까, 애써 더 느긋해진다. 허락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을,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았던 모양으로 살아버린다. 몽마르트르 언덕을 코앞에 두고도 언덕에 오르는 대신 밥을 먹으며 여유롭게 수다를 떤다. 다시 핫핑크 원피스를 꺼내 입고 지베르니 모네의 정원에도 다 녀오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가서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문 방을 보고, 고흐의 밀밭과 고흐의 무덤에도 방문한다. 우아즈 강에서 짧게 피크닉도 한다. 뭘 하든 둘이서는 다 처음이었다. 처음이 벚꽃잎처럼 소복이 쌓인다.
-〈No. 20〉 중
오일 파스텔을 오늘 처음 만져보는 왕초보 우리를 앉혀놓고 작가님은 아무 문제없다는 듯이 수업을 시작하셨다. 오일 파스텔의 기본에 대해 설명하시는 듯했는데, 이상했다. 왜 오랫동안 멍울진 내 마음이 살살 풀리고 있는 거지. 왜 용기 내서 그려보고 싶다는 마음만 쑥쑥 자라고 있는 거지.
“정확한 형태를 그리려고 하지 마세요. 윤곽을 의식하지 말고 색 덩어리로 바라보는 거죠. 여기 분홍색이 있네, 노란색 덩어리가 그 옆에 있고, 끝부분엔 하얀색이 있고.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오일 파스텔에 틀리는 건 없어요. 이것 보세요. 갑자기 이렇게 그리면 틀린 거 같죠? 틀렸다고 생각이 들면 거기에서 다시 그려나가면 돼요. 틀리는 건 없어요.”
-〈No. 27〉 중
짐작조차 하지 못한 뾰족함을 품고 좁은 길을 온몸으로 밀며 나아가는 삶도 있고, 두려움을 마주하고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삶도 있다. 누군가가 만들어준 안전한 울타리가 없어도, 스스로 하고 싶은 일들을 울타리로 세우며 살아가는 삶도 있다. 이런 용기를, 저런 대범함을, 이상한 긍정을 파리에서 만났다.
-〈No. 34〉 중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고 깊이깊이 숨을 내뱉으며, 이 감각은 또 얼마나 오랜만인가 생각했다. 자연 속에서만 새롭게 깨어나는 감각들이 있다. 바다의 광활함이 주는 사고의 폭이 있고, 자갈의 재잘거림이 깨우는 청각의 예민함이 있고, 작은 들꽃들이 흔들어 깨우는 마음의 진동이 있다. 그것들이 동시에 나를 찾아와서 나는 그곳에서 아낌없이 행복했다.
-〈 No. 38〉 중
인생의 선을 하나 넘으면
새로운 단어, 새로운 상상,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김민철 작가는 광고대행사 TBWA 막내 카피라이터로 입사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까지 20년간 한 회사에 다녔다. 동료, 선후배 그리고 ‘나’와 함께 광고의 세계에서 무럭무럭 성장했고 《내 일로 건너가는 법》, 《모든 요일의 여행》, 《모든 요일의 기록》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가 되었다. 일 앞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일상을 지키기 위해 힘써왔던 결과물들은 훌륭했지만 아무리 시선을 멀리 두어도 회사였고, 매일 눈앞에 빚쟁이처럼 달려드는 일들 앞에서 정신을 차리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속도와 효율에 거세된 감각들을 되찾고 싶었고, 순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무정형의 시간’이 자신에게도 존재할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다른 모양의 삶이 필요했다. 조각조각 폐허가 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사랑이 필요했다. 스무 살부터 사랑해온, 누군가는 ‘파리’라 부르는 오랜 꿈의 세계로 떠나고 싶었다. 이 여행은 그렇게 시작된다.
아주 단순하고 직관적인 행복을 찾아 떠난 파리
사랑은 스무 살, 파리 퐁피두 센터 도서관에서 싹텄다. 그곳에 첫눈에 반한 후 좋은 날, 좋은 나의 모습으로 이곳에 다시 돌아올 거라 다짐했지만 매번 무릎이 꺾인 꿈이 현실이 되는 데에는 20년이 걸렸다. 어렵게 휴가를 내 이곳에 찾아온 적이 있지만 잠깐 스쳐가는 여행자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파리에 도착한 때는 5월, 무채색 도시에 갖가지 색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봄이었고, 이제 ‘우리 동네’가 된 곳에서 두 달의 시간이 펼쳐졌으니.
아침을 달리는 러너들과 인사를 하고, 뤽상부르 공원을 지나 갓 나온 트라디를 베어 무는 것으로 파리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쉽진 않았지만 초조함과 강박에 촘촘하게 여행을 계획했던 과거의 ‘나’는 한국에 두고 왔다. 좁은 상상 속에 여행을 가두지 않고 내 마음의 방향이 흘러가는 데 몰두하자, 가 유일한 목표였다. 그러자 그토록 보고 싶었던 파리의 맨얼굴과 마주하게 되었다.
이런 낭만이라면,
얼마든지 이끌릴 수 있지
봄과 여름, 두 계절에 걸쳐 파리는 다양한 모양을 보여준다. 흔히 ‘관광지’라고 불리는 파리의 중심에서부터 진짜 로컬까지, 알고 있지만 모르고 있는 파리의 구석구석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김민철 작가가 견고하게 세워온 깊고 넓은 취향의 세계를 함께 향유하는 지적 즐거움도 매력을 더한다. 파리에서 하고 싶은 일 중 ‘같은 미술관 여러 번 가기’가 있을 정도로 그림 애호가인 그녀는 퐁피두 센터의 미술관을 시작으로 부르델 미술관, 자드킨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등에서 만나 그림과 조각상에 대한 특별한 시각과 감상을 보여준다. 평소 치즈와 와인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지만 더 세세한 결을 맞추며 확장되어가는 자신만의 모험들이 여행 내내 이뤄진다.
이 삶을 계속 여행해보고 싶어졌다, 무정형으로
이 모든 것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되찾기 위한 용기다. 오래전 분명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새 잃어버린 꿈, 낭만, 취향, 행복 등 나만의 ‘좋음’들이 번져 내가 좋아하는 것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는 용기다. ‘무정형의 삶’은 책의 제목이지만 이 반짝이는 능력을 되살려 원하는 모양의 삶을 빚어가겠다는 작가의 다짐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앞으로 어떤 형태와 시간이 찾아올지 알 수 없지만 오늘의 나를 빛나게 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면 충분히 원하는 모양의 행복에 한 걸음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파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내가 좋아하는 곳이 지구의 중심이니, 그곳에 서서, 이 용기와 이 마음에 지독하게 전염되어, 오늘 치 반짝임을 손에 꼭 쥐고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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