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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틈새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31
권여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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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6월 30일 출간

종이책 : 2024년 06월 3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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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39.52MB)
ISBN 97911416066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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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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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방 _007
그 이름 아그네스 _019
허기 혹은 질투 _058
가을의 사다리 _108
미완의 책 _168
그의 딸 그의 누이 _221
마지막 무대 _273

해설|인아영(문학평론가)
모든 틈새는 장소다 _311

나의 한 살도 나의 열한 살도 이렇게 무대인지 벼랑인지 모를 어떤 모서리에 선 체험이었으리라. 새로운 끝 아니면 시작이었으리라. 둘을 적당히 곱하고 더해 가까스로 도달한 서른 살의 봄 지금처럼.(12~13쪽)

‘자기소개’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을 암시했다. 다들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있으려니 하는 유년의 수동성을 넘어 당당히 내가 바로 아무개라고 자기를 주장해야 하는 세계, 서로의 존재를 매번 정겨운 방식으로 일깨우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지고 독립된 개체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사회, 그런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소개를 해야 했다. 자기소개라는 절차는 일종의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소개자는 자기 이름을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명료히 발음해야 했고, 청중은 소개자가 임의로 요약한 그 혹은 그녀의 존재성을 강제로 받아들여야 했다. 자기소개는 소극적인 자들이 도태되고 적극적이고 용감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세계로의 입사식이었다. 불리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고 어떻게든 적극적으로 부르심을 유도하는 방식, 다른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한시바삐 소비하도록 이름을 세일하는 방식이었다.(24~25쪽)

거칠게 부서지는 파도와 무섭게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곤두박질치는 꿈의 순간에도 나는 내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목소리를 들었고, 내 귓가에 흐느끼듯 부서지는 그 목소리가 있는 한 언제든 우아하고 아름답게 죽어갈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46쪽)

나는 모든 우연을 필연화했다. 내가 채집한 어떤 정보도 새로운 사랑이 다가오는 징조였다. 나는 이런 표시와 저런 표시의 차이를 몰랐고 이렇게든 저렇게든 호감으로 치장한 이미지, 나를 인정해준다는 것이 명백하게 조합되어 나타나는 그 이미지를 향해 질주했다.
수많은 디테일이 차곡차곡 쌓여 오로지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고 종합되는 열정적 사랑이 아니라, 그것과 정반대로, 그렇게 표나는 유일무이성을 참을 수 없어하는 내 마음의 알리바바는 만나는 사람에게서 무엇인가를 건네받는 족족 그 정표에 동일한 표시를 하여 사랑이란 보물을 갈구하는 내 마음의 도적떼를 혼란시켰다.(56~57쪽)

각성이 항상 인생에 바람직한 건 아니다. 그것은 맑은 날보다 비 오는 날 온다.(59쪽)

모든 달콤한 매혹 속에는 그렇듯 파렴치한, 스스로 외면하고 싶은 죄스런 욕망이 씨앗처럼 단단히 박혀 있는 걸까.(79쪽)

대문 밖에서 나는 눈이 빠질 듯 대문 안쪽을 노려보았다. 나는 절대로 착한 딸이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윤아와 어울리면서 해수와 멀어지게 된 것이나 내게 도벽이 생긴 것이나 다 이즈음의 일이었지만 무엇보다 나쁜 것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독한 앙심을 품는 버릇이 생긴 것이었다.(106~107쪽)

나는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왜 불행은 가장 사심 없고 순결한 순간에 나를 습격하는가?(115쪽)

어느 날엔가 나는 꽃무늬 커튼을 친 어두운 방에서 가구에 둘러싸인 채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움직일 수 있다고,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믿음과는 달리 습기를 잔뜩 머금은 젖은 나무토막처럼 나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이렇게 서서히 젖어가고 싶다는 축축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번졌다. 먼 훗날 누군가 이 방에 들어와 내겐 전혀 개의치 않고 이 방의 가구들과 함께 나를 들어내어서 어디론가 싣고 가 낱낱이 부수어주기를, 그렇게 해체된 채로 햇볕 받으며 말라가기를, 골수부터 관절까지, 마디마디까지 곰팡이로 뒤덮였던 몸이 콱콱 쪼개지고 틀어지며 버쩍버쩍 말라가기를 나는 꿈꾸었다.(168~169쪽)

나는 풍비박산 난 내 젊은 날의 신념을 약하고 게으른 내 육체의 탓으로 돌렸다. 정신력과 의지의 결핍을 문제삼기보다 순수히 육체의 결함과 한계를 원망하는 것은 얼마나 더 불가항력적인 듯이 보이는가.(181쪽)

상처가 없다면 샤푸리야르왕이 어떻게 잠들지 않고 셰에라자드의 길고 지루한 이야기들을 들어낼 수 있겠는가? 셰에라자드의 무한한 이야기의 미로가 없다면 어찌 샤푸리야르왕을 벼락처럼 내려찍은 상처의 모서리가 찬란히 빛날 수 있겠는가? 낮과 밤이 교차하는 짧은 순간, 상처의 빛이 어둠 속에 잠긴 삶의 아픈 단면을 드러낸다.(218쪽)

당시에 내가 품고 있던 사랑에 대한 결론은 매우 단호한 것으로, 존재를 걸고 사랑을 요구할 수 없다면 존재를 걸고 잊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어정쩡한 존재의 걸쳐놓기는 차마 추악해서 견딜 수 없다고 나는 과감히 단언하고 있었다.(241쪽)

헛된 위로의 힘은 바로 그 헛됨에서 나왔다. 이따위 망상이라니, 부질없다, 부질없다, 하는 생각이 내 마음의 저변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가능에 대한 열망은 격렬했고 이성을 완전히 제압했다. 내 열망이 헛되다는 걸 알면서, 아니 바로 그 헛됨 때문에 나는 그것의 실현에 목숨을 걸었다. 확률이 낮을수록, 상황이 절망적일수록, 장기까지 팔아 올인하는 비운의 도박사처럼.(251쪽)

설령 모든 것이 한층 더 나빠진다 하더라도 나는 말을 믿고, 기억을 믿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을 믿을 것이다. 닫히지 않은 이야기, 닫히지 않은 믿음, 닫히지 않은 시간은 아름답다. (…) 상처로 열린 우리의 몸처럼, 기억의 빛살이 그 틈새, 그 푸르른 틈새를 비출 때 비로소 의미의 날개를 달고 찬란히 비상하는 우리의 현재처럼……(309쪽)

삶이 문학으로 남는 순간을 뜨겁게 새겨온 우리 시대 대표 작가 권여선, 그의 시작점에 놓인 첫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를 새롭게 다듬어 한국문학전집 제31권으로 선보인다. 소설집 『각각의 계절』(문학동네, 2023)과 『안녕 주정뱅이』(창비, 2016) 등의 작품을 통해 각별한 비평적 주목과 더불어 독자들의 너른 사랑을 받아온 그의 소설세계에서 『푸르른 틈새』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덜 이야기된 작품이었다. 기억의 강력한 자장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 누군가의 배반으로 남은 상처의 자국,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뜻밖의 사건, 그것들 아래에 은근하면서 강하게 깔려 있는 정치적인 분위기 등 권여선 소설의 독특한 형질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이 담긴 『푸르른 틈새』는 권여선의 소설세계가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촉발되어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알게 하는 중요한 문이자, 21세기 한국문학의 빛나는 성취를 새롭게 발견해내기 위해 시작된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의 목표에 어느 때보다 부합하는 목록이다.
1996년 출간된 작가의 등단작 『푸르른 틈새』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모든 것을 새로이 겪는 ‘미옥’을 통해 청춘과 성장의 의미를 되짚는 작품으로, 인물의 한 시절이 작가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문장과 예리한 유머로 구현된 청춘소설의 새로운 고전이라 할 수 있다. 대학에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은 무렵, 미옥은 우연히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서 알게 된 지명호를 마주치고는 그를 따라 고풍스런 학사 주점으로 향한다. 미옥에게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학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곳에서 미옥은 자신에게 조심스러우면서 다정하게 말을 걸어오는 차종태와 불온한 모든 것에 경계 태세를 취하는 류한영,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논쟁적인 화제를 주저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정수진, 소위 말하는 ‘여성적인 매력’을 맘껏 발산하며 이후 미옥으로 하여금 ‘여성스러움의 신비’를 동경하게 하는 노미혜와 만나게 된다. 술잔을 주고받는 중에 그들은 학생운동에 대해 날 선 대립각을 세우며 첨예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 모든 것이 미옥에게는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대학 풋내기 시절 내가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면 그건 한시바삐 어른이 되는 것이었”고, “어른이란 모름지기 ‘정치’와 ‘성’에 대해 확고부동한 입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미옥은 그들과 어울리며 그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시기를 통과해나간다. 상쾌함과 진득함이 범벅된 청춘의 오묘한 시기를.

작가정보

저자(글) 권여선

1965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인하대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6년 첫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제2회 상상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짧지 않은 공백기를 가지며 초창기 작가생활을 보낸 권여선은 2007년 단편소설 「약콩이 끓는 동안」으로 오영수문학상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2008년 단편소설 「사랑을 믿다」로 “드러내기보다는 숨김을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평과 함께 이상문학상을 받으면서 무명에 가까웠던 작가의 이름을 단번에 평단과 독자에게 강렬하게 각인시켰다.
『푸르른 틈새』 이후 십육 년 만에 선보인 두번째 장편소설 『레가토』로 “한국문학에서 기억의 윤리학이 성숙하고 있다는 증거”라는 평을 받으며 2012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세번째 장편소설 『토우의 집』으로 2015년 동리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성장해나갔다.
소설가로서 꼭 써야겠다고 다짐한 작품인 『레가토』와 『토우의 집』을 쓰고 난 후 현실 속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단편 작업에 매진하며 빛나는 작품 목록을 쌓아올린 작가는 2016년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로 동인문학상을, 2018년 단편소설 「모르는 영역」으로 “특유의 예민한 촉수와 리듬, 문체의 미묘한 힘이 압권”이라는 평을 받으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이효석문학상을, 2021년 단편소설 「기억의 왈츠」로 김유정문학상을, 2023년 단편소설 「사슴벌레식 문답」으로 김승옥문학상을 수상하며 자신의 작품세계가 누구와도 다른 독보적인 질감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선명히 증명해냈다.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안녕 주정뱅이』 『아직 멀었다는 말』 『각각의 계절』,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 『레가토』 『토우의 집』 『레몬』, 산문집 『오늘 뭐 먹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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