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라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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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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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이스마일 카다레
1992년작. 총 16장으로 구성된 이 장편소설은 기원전 26세기경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정치적 우화로, 쿠푸의 피라미드 건설 이야기에서 시작해 오늘날 전체주의 사회와 통치자와 지배계급의 권력 기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한다. 메멘토 모리로서의 파라오의 무덤인 이 신화적 건축물이 현존하는 땅에서, 카다레는 이 소설을 통해 잊힐 수 없는 또하나의 문학적 공간을 창조해냄으로써 오늘날 독자에게 역사의 시간을 건너온 보편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II 작업 개시: 다른 어떤 건축물과도 견줄 수 없는 준비과정 019
III 음모 037
IV 일상의 기록: 우측 면, 서쪽 모서리 047
V 피라미드가 하늘을 향해 치솟다 057
VI 왕의 먼지 068
VII 건축 일지 081
VIII 정상 가까이에서 088
IX 의혹으로 뒤덮인 겨울 098
X 건축 완료: 피라미드가 자신의 미라를 요구하다 111
XI 슬픔 119
XII 침입 128
XIII 안티피라미드 138
XIV 노화: 속임수 149
XV 해골더미 155
XVI 에필로그: 유리의 안쪽 162
해설 | 피라미드, 그 유혹과 기만, 대가에 대하여 165
이스마일 카다레 연보 171
“무엇보다 피라미드는 권력입니다, 폐하. 억압이요, 힘이요, 부이지요. 동시에 군중을 지배하고 그 정신을 우매화하고 의지를 꺾어놓는 무엇이며, 단조로움이요 소모입니다. 그러니까 지존이시여, 그건 폐하의 가장 든든한 보초입니다. 폐하의 비밀경찰이지요. 폐하의 군대고, 함대이고, 하렘입니다. 그 높이가 더해갈수록 그 그늘에 자리한 폐하의 백성은 미미한 존재로 보일 겁니다. 그 백성이 작아질수록 폐하의 위풍당당한 자태가 더욱 돋보일 테지요.”(16~17쪽)
과거에도 피라미드를 만들어왔지만, 기억하건대 이와 유사한 정신적 마비와 당혹감을 불러일으켰던 적은 없었다. 처형에 대한 공포와 피로, 채석장으로 보내질 수도 있다는 걱정만이 그런 낙담을 초래한 건 아니었다. 이 나라 전역에 불길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57쪽)
그들의 구상대로라면 안치소는 일종의 갑문이었고, 그곳을 통과해 피라미드는 깊디깊은 암흑세계와 소통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말하자면 피라미드의 뿌리며 피라미드를 땅에 정박시키는 닻이었다.(62쪽)
그들은 피라미드가 지나치게 높아서 하늘을 건드려 흠집이나 상처를 낼지도 모른다고 걱정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두고 보라고. 이제 우린 어쩌지! 어디로 숨지?”(67쪽)
모래와 풍문, 이것이 이집트다. 아버지 스네프루가 임종 직전 그에게 말했었다. 그것들을 지배하면 넌 이 나라를 지배할 거다. 나머지는 모두 허상에 불과해.(80쪽)
공식적인 발표대로라면 이번 수사가 밝혀내야 할 수수께끼의 열쇠는 피라미드 내부에 있었다. 축의 오른쪽, 백번째와 백세번째 단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지점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돌들이 들러붙어 있는 곳, 인간의 이성으로도 실성으로도 감지할 수 없는 무한한 고통이 자리한 곳이었다.(100쪽)
저마다 수수께끼가 지닌 양면성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수수께끼는 돌들을 보호막처럼 덮어쓴 채 바로 곁에 있었다. 이 세상도 저세상도 아닌 두 세상 모두에 속한, 무덤 속에 산 채로 매장된 생명체 같았다.(101쪽)
아무리 넋이 나가 있었어도 사람들은 분명히 알았다. 피라미드는 천상의 종자나 빛을 빨아들인다기보다 이집트를 통째로 먹어치우는 무엇이라는 것을. 이미 세워질 때부터 피라미드는 이집트를 집어삼켰고, 이제는 반추하는 물소처럼 삼킨 걸 되씹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108쪽)
이제는 어느 것이 진짜 피라미드이고 어느 것이 그 환영에 불과한지 그들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둘 중 누가 누구를 낳았는지 알 수 없었고,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때때로 밀랍으로 된 그 모조품을 바라보노라면 정맥 속 피가 얼어붙고 금세라도 울음이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양쪽이 다투어 불길함을 과시하는 듯했고, 하나는 눈에 보이고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둘이 쌍둥이로 태어난 게 아닌가 싶었다.(115쪽)
쿠푸는 마법사가 말하는 내용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애썼으나 정신이 흐트러졌다. 어느 순간 그가 중얼댔다. “내가 스스로 내 소멸을 준비한 거로군.” 하지만 마법사는 이 말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121쪽)
기다리던 미라를 받아 모신 피라미드는 성취감으로 충만해 보였다. 무수한 인간의 운명을 뒤집어놓았고 무수한 머리를 먹어치운 그것이 이제 도도하고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고 있었다.(124쪽)
‘덧없음’의 개념은 보다 무겁게 들리는 ‘완전한 소멸’의 개념과 상통한다. 여전히 윤곽이 잡히지 않는 이 모호한 생각이 선뜻 용기를 내지 못한 채 주저주저 여기저기서 응축되어 나타났다. 이집트가 피라미드들 없이 살 수 있을까? 피라미드들도 사라질 수 있을까? 이 공간이 끔찍한 혹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144쪽)
“시간이야.” 그는 기진맥진해서 벽 아래로 쓰러지며 중얼댔다. “너를 지상에서 쓸어낼 수 있는 건 시간뿐이야!”(151쪽)
그 진정한 첫번째 화신. 피라미드는 거울을 통해 이미지를 반사하듯 아득히 먼 곳, 다른 시대에 제 화신을 던져놓았다. 아시아의 한 오지인 이스파한 인근 대초원에서,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절대군주가 쿠푸처럼 피라미드를 세웠다. 사람들의 머리통을 잘라 만든 것이었지만, 돌로 쌓은 피라미드와 자매인 듯 흡사했다.(155쪽)
그는 필름을 현상액에서 꺼냈다가 다시 담갔다. 천 년, 이천 년, 사천 년의 깊이 속으로…… 하지만 필름을 다시 꺼내보아도 긁힌 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필름 자체의 결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핏자국이었다. 어떤 물, 어떤 용액으로도 지울 수 없는.(164쪽)
고국 알바니아의 현실을 세상에 알린 문학 대사
기원전까지 내려가 쓴 카다레 문학의 저력
“독재치하에서 나에게 산다는 건 문학을 창작하는 것이었다.”
_이스마일 카다레
남유럽 발칸반도 서부에 위치한 알바니아에서 태어나 종전 후 반수정주의적 민족주의자 엔베르 호자의 독재체제의 탄압과 검열을 피해 1990년 프랑스로 망명한 이스마일 카다레(Isma?l Kadar?, 1936~ ). 그는 조국의 뼈아픈 현실을 신화와 전설, 구전민담과 버무려 정치적 역사적 알레고리가 풍부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선보임으로써, 수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이름이 거론되어온 세계적인 작가다. 다니엘 켈만은 카다레를 두고 “그 어떤 작가보다 20세기와 그 어둠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 작가”라고 했다. 이번에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으로 나온 『피라미드』(1992)는 20세기 그 전후는 물론 기원전으로 내려가 오늘의 현실까지를 돌아보게 하는 대작이다. 〈슈피겔〉지는 이 소설을 가리켜 “불가사의한 건축 이야기를 등골 서늘한 우화로 풀어낸 소설. 문학의 승리다”라고 소개했다.
카다레는 『피라미드』를 1988~1990년에 집필했으나, 알바니아 국영 출판사에서 발표를 거부당했다. 1991년 1월 〈데모크라틱 르네상스〉에서 연재되던 이 글은, 마침내 알바니아가 다원민주주의 체제로 바뀌면서 티라나와 파리에서 1992년 출간되었다. 총 16장으로 구성된 이 장편소설은 기원전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정치적 우화로, 쿠푸의 피라미드 건설 이야기에서 시작해 오늘날 전체주의 사회와 통치자와 지배계급의 권력 기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제공한다. 메멘토 모리로서의 파라오의 무덤인 이 신화적 건축물이 현존하는 땅에서, 카다레는 이 소설을 통해 잊힐 수 없는 또하나의 문학적 공간을 창조해냄으로써 오늘날 독자에게 역사의 시간을 건너온 보편적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1993년 지중해문학상(해외문학 부문) 수상작.
파라오의 분신이자 무덤, 찬미와 증오, 풍요와 소진을 위한 위업의 시간
그 정치권력에 유혹당한 왕과 백성의 건축물이자 역사의 아이러니
“그는 필름을 현상액에서 꺼냈다가 다시 담갔다. 천 년, 이천 년, 사천 년의 깊이 속으로…… 하지만 필름을 다시 꺼내보아도 긁힌 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필름 자체의 결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핏자국이었다. 어떤 물, 어떤 용액으로도 지울 수 없는.” _본문에서
소설의 중심 배경은 기원전 26세기경 이집트 왕 쿠푸가 막 파라오로 등극해 (오늘날 서남쪽 카이로의 기자 지구에) 자신의 무덤이자 분신이 될 피라미드 건축을 시작해서 완공하기까지다. 처음 쿠푸는 자신만은 피라미드를 만들지 않겠노라 선언하나, 대신들과 사제집단은 민중을 사로잡을 통치수단이자 후세의 영광이 되리라며 그를 설득한다. 이에 쿠푸는 곧 지상최대의 건설작업에 돌입하고, 국가의 위업에 처음에는 모두가 의기양양 앞다투어 임한다. 그러나 피라미드가 하늘을 찌를 듯 정점에 가닿을수록 이집트의 자원과 에너지는 고갈되고, 채석장 및 건설 현장의 노동자들은 온갖 음모와 속임수에 휘말려 능지처참을 당하거나 위압적인 돌들에 깔려 죽음을 면치 못한다. 피라미드 없는 이집트는 상상도 할 수 없으나, 이제 그 무덤 건축물은 혹인지 괴물인지 유령인지 모를 무시무시한 생명체나 다름없다. 쿠푸가 죽고 난 후 마침내 미라가 안치된 후의 대비는 더욱 극명하다. 외국사절들의 눈에 보이는 위풍당당하고 장엄한 피라미드, 이집트인의 눈에 보이는 위압적이고 숨막히는 피라미드. 뜨거운 열기와 영겁의 모래바람 속에서 어느덧 시간은 흘러, 쿠푸를 비롯한 새 파라오의 무덤들이 도굴꾼들에 의해 파헤쳐지고, 목 졸려 살해당한 파라오 디두프리의 진실이 세상에 알려지며 다시 한번 피라미드는 공포와 신성모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막바지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4세기 중앙아시아의 지배자가 된 티무르 왕조와 그 도시 오트라르의 해골무덤 이야기로 이어지고, 오늘 그 현장 앞에서 한 관광객이 찍은 사진을 현상하며 발견한, 시간도 지우지 못한 오롯한 증거인 ‘핏자국’을 목격하는 것으로 끝난다. 소설의 액자를 빠져나온 관광객의 눈은 작가 자신의 것일 수도 있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독자의 눈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카다레가 축조한 소설세계의 외연은 막바지에서 오늘날 전제정치로 시름하는 카다레의 모국 알바니아를 비롯해 전 세계의 폭압이 깃든 땅까지를 폭넓게 확장하며 비춘다.
픽션과 실제가 만나는 형식미: 돌들과 주검의 숫자, 인간과 모래의 시간
카다레의 이 소설은 역사적인 실제 무대와 파라오의 이름을 가져와 쓰고 있으나, 특수한 인물이나 시대적 사건을 고증하며 파헤치는 역사소설과는 거리가 있다. 작가는 파라오 쿠푸를 세력에 흔들리고 허무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무덤을 더 높게 지어올리라 명하는 아이러니한 인물로 입체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어떻게 한 인간이 피라미드에 유혹당하고 기만당하고 그 악의 소용돌이에 점점 휘말려들게 되는지를 치밀하게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모래와 풍문. 이것이 이집트다”라는 쿠푸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정의처럼, 이 이야기 자체는 피라미드라는 현실적인 건축물을 둘러싸고 있으나 책장을 덮고 나면 보다 광범위한 시대와 장소를 염두에 둔 한 편의 절묘한 정치 우화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알레고리나 상징이 서사의 핍진감을 휘발시키지 않도록, ‘건축 일지’라는 장에서 보듯 작가는 매일의 시간 기록과 모래사막에서 견디는 영겁의 시간, 왕과 피라미드의 시간, 돌들과 주검의 숫자 등 그 극명한 대비가 빚어내는 세계를 꽤 상세히 목도하게 한다. 피라미드 단들이 층층이 하늘로 향해가고 육중한 돌들이 쌓아올려지는 숫자가 늘어날수록, 이집트 소식을 나르는 서판들이 늘어날수록, 정권은 그에 방해가 되는 풍문을 없애기 위해 혀를 자르고 눈을 없애는 등 처형과 고문을 일삼아 주검의 수를 늘린다. 그리하여 매 챕터와 글줄 하나하나를 통해 재현된 카다레의 이 피라미드는, 현재 우리의 눈에 하나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넘어 스탈린 및 호자의 독재정권 속에 있던 작가의 현실은 물론, 오늘의 무수한 유혈사태를 불러온 공포정치와 경찰국가에 대한 역사적 무덤의 증거로도 읽힌다.
〈엘 파이스〉는 카다레를 “카프카와 보르헤스의 뒤를 잇는 작가”로 소개하면서, 강력한 상부구조의 작동체제에 맞서 한 개인이 느끼는 무력감과 고독에 대한 비유를 끌어낸 것에서, 잊히지 않을 은유적 공간을 발명해낸 것에서 두 작가에 빗대었다. 전체주의사회의 잔혹한 메커니즘을 아주 또렷이 보여주는 『피라미드』를 통해, 카다레는 다시 한번 자신이 정치적 우화의 대가임을 입증해 보인다.
작가정보

Ismaïl Kadaré, 1936~
1936년 알바니아의 남부 지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났다. 티라나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학을 공부했고, 모스크바의 고리키문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953년 고등학생 때 이미 시집 『서정시』를 출간해 시인으로 데뷔했다. 1963년 첫 장편소설 『죽은 군대의 장군』을 발표해 일약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했고, 후에 이 작품으로 “그는 그의 조국 알바니아보다 유명하다”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후 많은 작품을 통해 신화와 전설, 구전민담 등을 자유롭게 변주하며 암울한 조국의 현실을 우화적으로 그려내는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했다. 몇몇 작품은 출간 금지라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전체주의를 고발하는 날카로운 시선을 잃지 않았고, 특유의 풍자와 유머로 우스꽝스러운 비극, 기괴한 웃음을 만들어내며 세계적인 작가로 입지를 굳혔다.
독재정권이 무너지기 직전 1990년 프랑스로 망명해 지금까지 왕성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수차례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다. 1992년 프랑스 치노델두카 국제상, 2005년 제1회 영국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2009년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왕세자상(문학 부문)을 수상했다. 2016년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최고 훈장을 수훈했으며, 2019년 박경리문학상, 2020년 노이슈타트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품으로 『죽은 군대의 장군』 『돌의 연대기』 『부서진 사월』 『꿈의 궁전』 『H 파일』 『아가멤논의 딸』 『누가 후계자를 죽였는가』 『광기의 풍토』 『사고』 『잘못된 만찬』 『떠나지 못하는 여자』 등이 있다.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학 응용언어학 과정을 이수한 뒤,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불과를 졸업했다. 이스마일 카다레, 실비 제르맹,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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