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물 들었네
2024년 06월 10일 출간
종이책 : 2022년 08월 0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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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일 정보 ePUB (0.32MB)
- ISBN 9791158545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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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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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본질은 고통이다. 고통에 대한 기록이 시이다. 사람은 오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가기도 한다. 우리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시는 순간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것이다.”
만찬晩餐 / 조화造花를 파는 노인 / 짐을 진 여인 / 공양 / 겨울 안부 / 물푸레나무학과 / 받침 / 봉선화 술집 / 양순이 / 빈틈 / 팔공산에서 / 주름 / 도자기
2부. 엄마 생각
당신 이름을 세 번 부르기도 전 / 불이 / 좋은 데 / 새 한 마리 / 전기장판 / 아끼다 / 피에타 / 풀물 / 파문 / 유년의 아랫목 / 유리구슬 / 도마 / 풀잎 밥상
3부. 산밭 일기
말뚝 / 눈 속의 흙 / 방문 / 고구마 모종을 심으며 / 번제燔祭 / 감자를 삶아 먹다 / 꽃술을 빨다 / 입동 무렵 / 그해 여름의 끝 / 째깍째깍 / 풍경 / 파종 / 경칩 무렵 / 연꽃
4부. 새들의 간이역
물방울이 앉았던 자리 / 즐거운 여행 / 명랑이가 산다 / 빌어먹다 / 새의 출근길 / 새의 옷 / 물방울 / 첫사랑 / 개와 늑대의 시간 / 수심가 / 낮달 / 자물쇠 / 새들의 간이역 / 잠시
해설_지극한 시는 어렵지 않다 … 김수상
[머리말]
시의 본질은 고통이다. 고통에 대한 기록이 시이다. 사람은 오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가기도 한다. 우리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시는 순간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것이다. 유한성에 대한 증언으로 세 번째 시집을 묶는다. 이제 강물을 건넜으니 배를 불태울 때다.
[책 속으로]
콩나물 김칫국을 새롭게 먹어도
우리는 희한하게 고물이 되어갔다
고물이 고물을 먹어 치우는 배부른 저녁이었다
우리의 저녁은 항상 최후의 만찬이었다
-p. 12, 1부 ‘만찬’ 중에서
왜가리가 한쪽 발로 서있는 이유는
대구역에서 신발 한 짝으로 누워있을
그이를 염려하기 때문일 것이오
신발 잃지 않도록 유념하오
이만 총총
-p. 17, 1부 ‘겨울 안부’ 중에서
한바탕 놀이가 끝나자
베란다 앞마당 목련꽃을 이불 삼아서
졸면서도 두 귀를 쫑긋 세운다
양순이는 죽어서도 귀를 세울런가
목련나무 아래 묻혀서도 경계를 할런가
내가 거실 바닥에 눕자
다가와 얼굴을 핥고 난리다
내 처지를 아는지 양순이는
정성을 다해 내 얼굴을 핥고
나는 양순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뜯긴 화장지처럼 목련이 지는 봄날
죽음이 나와 양순이 곁에서 잠시 놀고 있었다
-p. 21, 1부 ‘양순이’ 중에서
아끼는 마음과는 다르게
아끼는 당신은 너무 일찍 길을 떠났다
아끼는 것은 아깝게 이사 갔다
밥상을 마주하다가
포르릉 떠나가더라도
눈사람처럼 쉽게 녹아내리더라도
아끼는 마음은 당신을 아까워할 것이다
-p. 33, 2부 ‘아끼다’ 중에서
나는 밤새워 일해 땀방울이 되었단다
밥도 안 먹고 아침까지 일한 모양이구나
퉁퉁 눈이 붓고
여러 번 미끄러지면서
아침 지나면 나는 또 일하러 간단다
풀잎의 이마를 쓰다듬어준 후
죽어서도 일하러 간단다
일하러 간 뒤 풀잎 밥상에
눈물 자국 같은 흔적 남아있어도
너희는 울지 말고 밥 먹거라
-p. 40, 2부 ‘풀잎 밥상’ 중에서
새들은 한뎃잠 잔 후
남천나무 붉은 열매를 걸식한다
벌들도 자존심 버리고
벚꽃에게 기대어 종일 빌어먹고
입이 없는 푸석한 흙도
봄비를 덥석덥석 빌어먹는다
내 마음도 진작 빌어먹을 수 있었다면
당신이 건네던 밥그릇을 깨지 않았을 텐데
추운 옥탑방에 살면서도
철근 같은 자존심을 구부릴 수 있었을 텐데
-p. 63, 4부 ‘빌어먹다’ 중에서
그 새는 그림자 한 장 한 장을 이어붙여서
하늘을 영원처럼 날아간 것이다
순간순간을 모아서 영원을 날아간 것이다
한 땀 한 땀 허공에 박음질해서
영원 같은 옷 한 벌 만든 것이다
새가 입은 옷이 빨리 해지는 것은
너무 많은 순간의 옷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p. 65, 4부 ‘새의 옷’ 중에서
<b>순간 속에서 꿈꾸는 영원</b>
2017년, 중국에서 마이크로소프트 인공지능 챗봇 ‘샤오빙’이 쓴 시집이 출간되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급변하는 환경 속에서 AI도 시를 쓰고, 문학의 장르 간 경계는 희미해졌다. 다양한 문학적 실험으로 회화처럼 ‘이해’에서 ‘감각’의 차원으로 진화하기도 한다. 시의 본질, 시인의 역할은 무엇인지 돌아봐야 할 때다.
박경한 시인의 시는 정직하다. 도전적인 ‘젊은 시’라기보다 고전적이라 표현할 만하다. 하지만 그만큼 직관적으로 위안과 재미를 전한다. 삶과 죽음 사이 펼쳐진 온갖 사건들을 건져 올려 시적 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김수상 시인은 이에 대해 “시가 안 읽히는 시대에 술술 잘 읽히는 시를 쓰는 시인이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 말한다.
산밭에서의 일상, 어머니, 죽음에 대한 성찰이 담긴 50여 편의 시는 시의 본질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잘 드러낸다. “시의 본질은 고통이다. 고통에 대한 기록이 시이다. 사람은 오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가기도 한다. 우리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지금도 죽어가고 있다. 시는 순간 속에서 영원을 꿈꾸는 것이다.”
대원사 앞마당에
부처의 입술 같은 매화가 지고 있다
그러게, 모든 게 잠깐이네
떨어진 꽃잎들이 부처를 닮았는지
흙에게 엎드려 공양한다
- 16쪽, ‘공양’ 중에서
시인은 세 번째 시집으로 유한성에 대해 증언한다. 온 힘을 다해 대상을 낚아채 시 속에 담음으로써 유한함, 결핍에서 오는 생존의 고통은 영원의 영역으로 향한다. “아끼는 당신은 너무 일찍 길을 떠났”을지라도 시로 남아 곧 삶을 대하는 자세가 된 것이다. 죽음에 대한 성찰 끝에 시인은 손바닥에 풀물 드는 삶을 선택한다.
죽음이 있기에 진실한 삶을 갈망할 수 있다는 시인의 시는 삶에 죽음을 불러들인다. 영원을 꾀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지만 시집 『풀물 들었네』는 시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 “우리의 저녁은 항상 최후의 만찬”이나 다름없으며 “느리지만, 확실하게 지금도 죽어가고 있”으나 진실된 시는 삶의 닻이 되어 영원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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