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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를 당기다

조문환 지음
학이사

2024년 06월 10일 출간

국내도서 : 2022년 10월 01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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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58545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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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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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편지』(2012), 『바람의 지문』(2016), 『반나절의 드로잉』(2018) 등 시와 에세이로 섬세한 감수성을 선보인 조문환 시인의 새로운 시집이다. 창고 대방출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이번 시집에 실린 70여 편의 시는 그간 무시로 뱉어오던 천진한 언어를 정리해 모은 것이다.
1부. 텅 빈 한가운데

가슴이 오네 / 모른다 / 저편의 강이 내 강이듯 / 방방사진관 / 이월 / 텅 빈 한가운데 / 아이 엠 서울 / 시위를 당기다 / 너로 보였다 / 유월 같은 비린내 / 후회하지 않기 / 그득하다 / 시선 / 저 너머엔 붉은 소년이 있다 / 가을 묘사 / 돌부처 / 광개토대왕 / 나풀거리는

2부. 켜켜이 쌓이다

불필요한 공감 / 켜켜이 쌓이다 / 금광 / 내 이름에는 / 꼬리를 친다는 것 / 과거 진행형 / 한 사내 / 선행자 / 천국 가는 길 / 파도 / 감 따는 일 / 흔적 / 누군가 / 긴 이월 / 사자춤 / 이름 내놓은 역 / 너머

3부. 먼저 온 기별

같이 혼자 / 별이 떨어지다 / 먼저 온 기별 / 팽팽하다 / 먼 울음 / 도시고양이 생존연구소 / 창자 쏟아진 아침 / 외박 / 시 두 편 반 / 시리다 / 두고 온 것 / 비님 / 좋은 일 예상되는 날 / 둥지 / 말 한마디에 / 장마 / 타작마당 일기

4부. 곱하기 제로

사랑 총량의 법칙 / 강심장 / 이별연습 / 빈 다리 / 자연선택 / 박 영감 / 곱하기 제로 / 서울과 안〔不〕 서울 / 노을에 동백꽃 / 죽음에 대하여 / 이중인격자 / 정전 / 눈 맞춤 / 높이 나는 이유 / 개 / 끌려 나오다 / 마중 / 산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 정차 중

해설_살아있다는 건, 속에 아직 꽃이 있다는 것 … 이빈섬

[머리말]

망했다 폭삭 망했다
이참에 창고 대방출한다
개업 후 5년
재고떨이다

본전은 생각하지 않는다
밑져야 본전이다

창고 정리하고 훌훌 털어버리면
속이라도 시원할 것 같다
잡동사니는 발도 못 붙이게 할 테다

[책 속으로]

봉대 길에
실핏줄같이 가는 길에
태어난 지 채 나흘도 안 되는 고양이 새끼 한 마리

도토리만 한 것이
저보다 백 배는 더 큰 내 애마 앞에
단 한 발도 움직이지 않는다
눈을 부릅뜨지도 노려보지도 않는다

한가운데서

콩만 한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저리 간 큰
돌부처

-p. 29, 1부 ‘돌부처’ 중에서

알고 보니
내 이름 두 자는
내 아버지 소원이었소
억만 번 빌고 빈 소원
나는 아버지의 소원이 되었소

알고 보니
내 아들들의 이름은
나의 소원이었소
억만 번이라도 빌고 빌어야 이뤄질 소원

내가 가진 이름 두 자는
가문의 기도와
선조의 소원과
바람의 속삭임과
이슬과 비와 눈의 다독거림과
그 소리에 응답한 나의 호흡이었소

-p. 37, 2부 ‘내 이름에는’ 중에서

하늘과 산이 맞닿는 곳에는
마중 나온 소년이 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는 곳에는
벼랑으로 떨어져 가는 열차가 있다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에는
허리 굽은 낙타가 있다

저물어 가는 곳
시선의 끝이 머무는 곳
껌뻑 껌뻑이는 곳
눈물 맺히는 곳

누군가 서야 할 곳

-p. 52, 2부 ‘너머’ 중에서

동네 상조계장 박 영감은 키가 작고 왜소하나 얼굴은 하회탈처럼 유연하고 당찼으며 한겨울을 제외하고는 삼베적삼에 긴 담뱃대를 입에 물고 살았다

걸음도 빨라 팔순이 다 되도록 지게를 지고 번개처럼 짐을 져 날랐다 그런 아버지를 아들은 동네 부끄럽다고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박 영감은 늘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들로 산으로 나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상이 나면 동네 어귀에 홀로 서서 징을 두어 번 치고서는 “훠이! 훠이! 보소 동네 사람들 오늘 새벽에 인동 김 영감이 죽었소”라고 알리고서는 상가로 달려가 지붕에 올라서서 고인의 웃옷을 던져 놓고서는 초혼招魂을 했다

그러고 나서 상조계원들을 불러 모아 상여를 만들게 하고 장을 보게 하고 염을 하고 … 하는 일들을 일일이 돌봤다 상여가 나가고 매장을 마치면 다시 상가로 돌아와 뒷마무리를 끝낸 후 “욕보소 내 이제 가고만”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세상 사람 다 죽어도 박 영감은 죽지 않을 줄 알았다

-p. 82, 4부 ‘박 영감’ 중에서

홀연히 온 삶,
홀연히 온 시

지리산 악양 들판과 쌍계의 물소리와 그 마을의 낭창한 사투리, 이빈섬 시인은 하동을 시라 평한다. 그런 하동에서 난 조문환 시인은 홀연히 온 삶처럼 시와 만났다. 인생이 그렇게 왔듯이, 이 모습 이대로 시가 온 것이 행운이라 말하는 시인은 시로 삶의 영점 조정을 하고 있다.

“함석헌의 스승이자 이 나라 근대신학의 여명을 연 다석 류영모(1890~1981)는 인간은 모름을 지키는 존재로 보았다. 이른바 ‘모름지기’다. 알지 못하지만 알고 싶은 갈망을 내내 지니는 것이 바로, 신(神)을 향한 태도라고 본 것이다. 시는 어떤 사람에게는 신이기도 하다. 모름의 갈망으로 시를 쓰는 까닭은, 살아있는 내내 그것이 켕기기 때문이다.”(해설 중에서)

이빈섬 시인은 조문환 시인의 시를 추동하는 힘을 모름의 인정과 모름 속에 숨은 갈망이라 본다. “모르기 때문에 갈망하고/ 영원히 모르기를 바라는 것은/ 널 찾아 떠나기 위해서지”(‘모른다’ 중에서)라고 말하는 저자는 천진한 언어로 시를 찾아 나선다.

시로 지은 집 속에서 시인의 시간이, 삶이 흐른다. 시인에게 이월은 앓던 이가 양은 냄비 같은 곳에 나자빠지는 시간이다.(「이월」) 생명이 역동하는 유월은 젖비린내, 물비린내 흥건하게 마주쳐 온다.(「유월 같은 비린내」) 두꺼비 새끼가 얼마나 컸는지 보러 팔짝팔짝 뛰어 내려가는 태령 씨(「시선」), 차 앞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선 새끼 고양이(「돌부처」), 꼬리가 없어 표정을 읽을 수 없는 강아지(「꼬리를 친다는 것」), 따스한 온기가 아직 남아 있는 작은 둥지(「둥지」), 오동나무에서 튀어 오르는 수백 마리의 참새 떼(「시위를 당기다」)를 시인은 오랫동안 응시한다. 시선이 머문 시간만큼 그들의 생명력이 시가 되어 시인의 집 안으로 들어온다.

오가는 계절과 생명을 담은 시인은 점점 안으로 들어간다. 진정한 내 얼굴은 타인이 보는 얼굴, 지금 서 있는 이쪽의 강, 양심조차 내 것이 아니라 건너편의 것이다.(「저편의 강이 내 강이듯」) 이름 두 자 또한 아버지의 소원이었음을 알게 된 시인은 그 이름이 가문의 기도, 선조의 소원에서 더 나아가 바람의 속삭임과 이슬, 비, 눈의 다독거림, 그 소리에 응답한 자신의 호흡으로 이루어져 있음도 깨닫게 된다.(「내 이름에는」)

시인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다 피워내지 못한 꽃이 있다는 것”(「사랑 총량의 법칙」)이라고 한다. 오늘은 꽃피우는 날이다. 바닥 날 때까지 사랑을 쏟아내고, 이별을 연습하고, 가져온 것보다 두고 온 것이 더 많다는 걸 깨닫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하동의 바람을 담은 시인의 시는 모두가 꽃을 품고 시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조문환 시인은 잡동사니는 발도 못 붙이게 할 각오로 이번 시집에 모든 것을 훌훌 털어냈다. 홀연히 온 삶과 시에 고마워하는 시인의 시집은 독자가 무엇을 모르고, 그렇기에 무엇을 갈망하는지 돌이켜볼 수 있는 질문이 되었다. 속 시원해지기 위한 재고떨이라 말하지만 시마다 통효가 있고, 말맛이 있고, 새로움이 있다. 시위를 당겼다 놓은 후의 진동처럼 여운이 남는 시집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조문환

1963년 경남 하동에서 출생했다.
『하동편지』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 『괴테를 따라 이탈리아 로마 인문기행』 『나는 마을로 출근한다』를 썼으며, 『평사리 일기』 『바람의 지문』 『반나절의 드로잉』을 통해 시를 익혔다. 시로 삶의 영점 조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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