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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문보영 지음
한겨레출판사 출판사SHOP 바로가기

2024년 05월 22일 출간

종이책 : 2024년 05월 0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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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10.50MB)
ISBN 9791172130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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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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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이자 시집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산문집 《일기시대》 등 시인이자 일기 생활자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문보영이 3년 만에 신작 에세이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을 출간했다. 이번 산문집은 시인이 지난해 3개월간 아이오와 문학 레지던시 프로그램(IWP)에 참여하며 만났던 다양한 엑소포닉(exophoix, 이중 언어자) 작가들과의 발랄하고 코믹한 일상과, 지금까지의 삶의 반대 방향에서 발견하게 된 생의 의미를 들려준다.

시인이 다녀온 아이오와 시티는 외딴 시골 마을로, 윤슬이 빛나는 강과 고요하고 너른 들판이 펼쳐진 매우 느리게 시간이 흘러가는 장소였다. 선배 문학가인 최승자·최정례 시인 등이 먼저 다녀갔던 곳이었고, ‘문학의 도시’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지만, 시인에게 있어 아이오와는 체류 전후로 인생의 축이 나눠질 정도로 많은 가치관의 변화를 일으켰다. 한번도 외부인의 시선에서 한국을 바라볼 기회가 없었던 시인은 오히려 자신에게 가장 가까웠던 모국에서 한 발 떨어짐으로서 ‘한국 작가’로서의 자신의 정체성과, 언젠가부터 미세하고 납작해져버린 기존의 삶에 관해 깊이 고민하게 됐다. 시인의 말처럼 이 책은 지구 반대편에서 엑소포닉 작가들과 이민자들의 삶을 마주하며 변화한 내면의 기록이자, 자신의 ‘성장 소설’이기도 하다.

“아이오와에 오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것처럼 20대와 똑같은 30대를 살지 않았을까? 한국어로 시를 쓰며 시집을 내고, 문학을 하는. 이중 언어자로 살아가는 작가들과, 이민자들의 삶을 목격한 경험은 내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과 모험의 씨앗을 움트게 했다.”(5쪽)
프롤로그- 들판의 자유

1부
전망 없는 작가들의 모임
마리나와 걷기
죽고 싶어 하는 따뜻한 사람
작은 자유
탈출의 두 가지 방향
작가스럽지 않은 클럽
길을 몰라, 기적에 의해 구원받을 뿐
How are you 증후군
다른 바람이 느껴질 거야
옥수수밭 농장 투어

2부
나무 길
수업에 안 오면 너의 시를 지우겠대!
실눈 뜨고 느리게 걷는 사람
박스 밖으로
런드리맨
시詩음회
옆구리로 삐져나오는 언어
파리는 fly다
쓰기와 읽기의 불완전함

3부
자바 하우스
도망가는 존의 원고
야스히로 자서전
시카고 사건
비스킷 낭독회
소화불량의 책
겡끼데스까
밤에는 들판을 걸어야 해
쓰러지는 언어
깍두기의 삶
나무에 대해 말하기
종이와 나
흐린 날의 인형극사 그리고 골목 담배
문틈으로 들어오는 것들

4부
매일 신앙
내가 두 명이 될 가능성
시네마테크
잃어버린 우산을 찾기 위해 펼친 우산
장갑 이야기
나의 웅크림은 보상받는다
지명 수배자들
번역과 영혼
우산 밖으로 나가는 사람
초미세하게 살아가기

5부
맨발의 시인
여분의 심장
이해의 욕구
과거를 다시 살기
입시 설명회
미안하다고 말하지 마요
사랑이 있다면
공룡이 다가와
불화하는 가족
내 이름은 아이오와
종이컵의 결말

후기- 엑소포닉의 길
에필로그- 운명과 우연을 따라

낡은 아이오와 하우스 호텔 주변에는 강변을 따라 넓은 들판이 펼쳐진다. 낮에는 들판과 반대 방향으로 걸었지만, 밤이 되면 들판으로 들어갔다. 너무 고요해서 그곳에서라면 삶을 잊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난 끝없이 들판을 걸어보고 싶다. 반대 방향으로 걸었을 때 우연히 진짜 삶을 발견하게 되어 지금까지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국과 정반대에 있는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유를 발견한 것과 같이. 그것은 들판이 내게 준 것이었다._5쪽

아이오와에 와서 가장 먼저 한 말은 “My room has no view”이다. 작가들은 ‘아이오와 하우스 호텔’이라는 곳에 머문다. 호텔 인근에 아름다운 아이오와강이 흐르고 햇빛이 가득하지만 방은 어둠에 잠겨 있다. 창을 여니 강은커녕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카운터로 내려가 혹시 방을 바꿔줄 수 있는지 물어보니 모든 작가들의 방이 벽을 향해 있단다. 작가들에게 어두운 방을 배정하라는 상부의 지령이 있었나? 그게 아이오와 IWP의 은밀한 목적 인 걸까? 빛이 없는 곳에서 어떤 글이 탄생하는지 실험하는…. 여기 일종의 글쓰기 감옥?_14쪽

코토미와 에바 모두 동양인인 데다 또래여서 우리는 금세 삼총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 둘은 내 시선에서 두 개의 축을 이룬다. 비탈출 작가 vs 탈출 작가. 에바의 첫 소설집 제목은 ‘이 미친 세상에서 어떻게 사랑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이다. 반면 코토미의 첫 소설은 ‘이 미친 세상을 어떻게 탈출할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다. 그래서 제목이 ‘솔로 댄스(탈출 성공담)’다.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 아이오와에 머무는 동안 연구할 첫 번째 주제가 되지 않을까._28쪽

이곳에 온 지 몇 주 흘렀을 때 아자르와 타미를 중심으로 ‘writerly club’이라는 모임이 생겼다. 술 마시는 클럽이다. ‘writerly’는 ‘작가스러운’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술과 관련된 모든 것은 작가스러운 무언가(writerly)로 직결되는 모양인데 그러한 풍토를 저지하기 위해 에바와 나와 코토미는 일종의 야당(opposition party)으로서 지하 게임방 클럽을 개설했다. ‘작가스럽지 못한 클럽(non-writerly club)’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작가들을 위한 클럽이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주스를 마시며 보드게임과 닌텐도를 한다._45쪽

살다와 떠나다를 구별할 수 없다면, 내가 여기 살고 싶다고 말할 때 너는 내가 떠나고 싶어 한다고 이해하겠지. 이젠 떠나고 싶다고 말하면 여기서 살고 싶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지. 그건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아름다운 걸까. 그건 어두운 밤, 강을 건너는 새끼 오리 같은 것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들판의 나무들처럼 슬프겠지. 살고 싶다는 말은 떠나고 싶다는 말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아이오와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두 단어는 내게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단어였지만 이제 이 단어는 아주 가깝고 유사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_60쪽

들판의 뜻은 무엇인가? 사람이 걷게 만든 길은 아니지만 걸어도 괜찮은 길. 사람이 걷도록 만든 길보다는 이런 야생의 길에서 사슴을 만날 확률이 높을 테지만 노엘은 오늘도 사슴을 만나지 못했다. 졸린 눈으로 눈을 비비며 사슴을 만나러 갔다가 풀숲에서 나타난 것이 사람이어서 실망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런 길. 하루를 시작하는 대부분의 이들은 들판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 다운타운으로 간다. 삶의 반의어는 들판이구나. 그럼 들판을 걸어야지._72~73쪽

그 책은 쫙 펼쳐져 있었고, 오래된 지층처럼 보였다. 책 속에 계단 혹은 싱크홀이 있는 것도 같았다. 자세히 보면, 같은 책의 다른 장에서 뜯어온 단어들을 무작위로 붙여놓았다. 그리고 모든 장이 붙어 있어서 장을 넘길 수 없었다. 깊이를 가진 한 장의 책. 함부로 만지면 안 될 것 같은 포스를 풍기는 책인데 오릿이 그 책을 이리저리 만지고 들춰보다가, 책에 붙어 있던 단어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오릿은 방금 책이 웃긴 말을 했다며 와서 보란다. 떨어져 나간 단어가 ‘careless(조심성 없긴)’였던 것.

“우기는 쌍둥이야. 아주 어렸을 때 우기는 형이랑 거울 보듯 대화를 했대. 주로 둘이서만 대화를 나눴지. 어느 날 어머니는 아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어. 서로를 반사거울 삼아 언어를 배우다가 엉망인 한국어를 만들어낸 거지. 발음은 어눌하고 변방의 사투리 같았대. 그래서 어머니는 아이들을 밖으로 내보냈어. 진짜 언어를 배우게 하려고. 그런데 진짜 언어란 대체 뭐지? 지금 우리의 영어는 느는 걸까 아니면 점점 망해가는 걸까….” 우리의 영어는 느는 것도 퇴보하는 것도 아니었다. 옆구리를 통해 삐죽 튀어나오고 있었다._103쪽

우리는 도서관의 각 층에서 아무 책이나 골라 테이블에 부려놓고, 찢어진 종이에 책 문장을 한 개씩 뽑아 적었습니다. 그다음 종이를 섞고 문장을 골라 시를 썼습니다. 찢어진 종이들을 보고 있자니 책의 구토물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진심이라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심이 내면에 있어서 그것을 글로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라, 널브러진 문장들에서 진심을 사후적으로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술 먹은 다음 날 화장실에서 토를 하고, 그 토사물의 색을 보고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되는 것처럼요…._111~112쪽

나는 안경을 쓰지 않지만, 하위-일기를 보정하고 다듬어 일기를 쓸 때, 특수한 글쓰기 안경을 쓴 기분이 드는데, 이 특수 안경을 쓰고 하위-일기를 읽으면, 과거의 일들이 눈앞에 선명히 재생되고, 하위-일기에 적힌 문장의 파편에서 가지가 자라면서 일기라는 것을 쓸 수 있게 된다. 참고로 이 일기를 쓰면서도 다른 파일에 틈틈이 오늘의 하위-일기를 쓰고 있는데, 그건 이 일기를 쓰면서 동시에 내 삶이 진행되고 있고, 삶이 진행되면 글쓰기의 부스러기가 생겨 잘 모아놔야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부스러기는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치토스 봉지에 남은 부스러기와 본질이 같으므로 소중하게 다뤄야 한다._123쪽

사실 나는 미국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소속된 곳, 그리고 부대끼며 교류한 사람은 사실상 미국인은 하나도 없는 타국적의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단체니까. 한국인이 없는 한국 소재의 프랑스 국제 학교 같은 곳을 다닌 것과 유사하달까. 그러니 이민자들이 일상생활에서 수시로 겪는 차별과 갈등, 마이크로어그레션이랄지 유리천장, 인종 차별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그래서 이곳에 이민자로 혹은 유학생으로 오게 된다면 그것은 지금과 전혀 다른 경험이리라 생각된다._134쪽

어느 날 톰은 런던의 헌책방에서 먼지로 덮인 책 한 권을 집었다. 윌리엄 허렐 맬록(William Hurrell Mallock)이라는 빅토리아 시대 작가의 소설 《휴먼 도큐먼트(Human Document)》였다. 톰은 왠지 그 책을 다르게 읽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낱장에 그림을 그려 문장을 덮었고, 남겨진 문장을 엮어 새로운 문장을 썼다. 그림 사이로 내비치는 문장들이 부싯돌처럼 맞부딪혔을 때 그는 희미한 불꽃을 목격했을 것이다. 절단된 문장은 서로 공명했고, 재배치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문장이 발굴되었다. (내 멋대로 이름을 붙이자면 절단 문학….)_142~143쪽

어디에서 말하기를, 제2외국어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내려놔야 하는 것 중 하나가 100퍼센트 같은 단어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라고 한다. 언어와 언어는 1 대 1로 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언어가 빨리 는다는 것이다. 어차피 대체어가 없다면, 아주 멀어지는 건 어떤가? 새라는 단어를 손전등으로 번역하기, 바꿔버리기, 강탈하기, 중간에 탈환하기, 가로채기, 사기 치기. 하나의 언어가 다른 언어를 건드려 쓰러지게 하며, 돌이킬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내가 지니고 있는 번역에 관한 희미한 인상이다. 쓰러짐과 옮김. 들것으로 싣고 가다가 엎어버림. 그것의 반복._158쪽

나는 방한 나무의 생김새를 즉석에서 지어냈다. 마침 매일 나무 길을 걸으며 나무 몇 그루를 관찰했기에 그때 본 나무들(평생 내가 알고 지낸 나무는 이게 전부다)을 묘사했다. 아무 말이나 지껄였는데 생각해보니 내가 말한 나무들은 포옹하기에 좋은 나무가 아닌 것 같았고, 그래서 방한 나무는 사실 포옹할 수 없는 나무라고 거짓말했다. 그리고 둘레가 너무 커서 포옹할 수 없는 나무도 방한 나무라고 덧붙였다. 나를 껴안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나무를 상상했다고._164쪽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강해지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안다. 어떤 따뜻한 곳에서는 내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호구처럼 살아도 된다는 걸 안다. 아이오와에서도 똑같이 움츠려 있지만, 나의 웅크림은 보상받는다. 사람들은 호의를 알아차리고 보답한다. 며칠 전에 타로를 봤다. 이번 달에 당신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동시다발의 사랑이 발생하여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카드는 말했다. 나는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변하지 않기로 한다._209쪽

“저거 봐라, 문보영 또 퇴고 낭독한다.” 나는 미국에서 한국어로 낭독할 때 자유를 느낀다. 대부분 영어로 읽지만, 원본을 읽는 경우도 있는데, 몰래 한 연을 통째로 빠뜨리기도 한다. 한국어를 모르는 청중이 듣기에는 내 시가 너무 길게 느껴질까 걱정이 되어 그랬다. 그런데 연을 통째로 버렸을 때 의도치 않게 시가 나아지기도 해서 사후적으로 시를 손보기도 한다._217쪽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모르는 언어로 말할 때 대화에 깊은 구덩이가 생겨서 좋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음성의 쏟아짐 속에서만이 나의 귀는 자유롭다고. 그런데 나는 변하고 말았다. 이제 이해하고 싶다. 친구들의 모르는 언어를. 범람하는 언어에 파묻힌 나는 알아듣고 싶다. 내가 살고 싶어 하네. 이제는 미세하게 사는 것을 그만두고 싶구나. 변화하고 만 것이다._244~245쪽

나는 요즘 일기를 아주 아주 많이 쓴다. 내가 깨달은 건 난 행복해도 된다는 것이다. 난 행복해도 슬픈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행복한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별로인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멋진 시를 쓸 수 있다. 사랑이 많으면 나는 더 많은 것을, 그리고 더 좋은 것을 쓸 수 있다. 행복할수록 나의 영혼은 더 세분화될 수 있음을, 시인이지만 나도 행복해도 된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난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_255쪽

나무에도 미세한 잔물결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을 어느 날 나는 불현듯 기억해낼 것이다. 충분한 시간이 흐른 미래에서 나는 어느 아침을 기억하리. 그날은 아이오와와 내가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도록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준 것처럼 거리가 한산했다. 텅 빈 거리는 다정했고, 햇빛은 여러 겹의 유리를 투과한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나는 나무들에게 인사하던 순간과, 그 나무 길을 함께 걷던 이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나의 기억은 부정확할 것이며, 기억의 세부는 흐려질 것이다. 나는 부주의하게 기억할 것이고,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은 지어낼 것이며 과거는 걷잡을 수 없이 여러 길이 되어버릴 것이다._298쪽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나는 끝없이 들판을 걸어보고 싶다”

지나온 삶의 부스러기를 되돌아보고
앞으로 잘 살아내기를 응원하는 들판의 말들

이 책에는 제목뿐 아니라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로 ‘들판’이 등장한다. 들판은 사람이 걸을 수 있게 만든 길은 아니지만 ‘걸어도 괜찮은 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시인이 머물렀던 낡은 아이오와 하우스 호텔 주변에는 강변을 따라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고, 하루를 시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들판의 반대 방향으로 걸어 다운타운으로 갔다. 그 모습을 보며 시인은 생각한다. ‘삶의 반대편은 들판이구나. 그럼 들판을 걸어야지.’

시인 또한 낮에는 들판을 등지고 세상에 파묻혀 살았지만, 밤이 되면 다시 들판으로 돌아갔다. 시인에게 들판이란, 지나온 삶의 부스러기를 잊어버릴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선명하게 기억하고, 세상과 멀어져 균형을 맞출 수 있는 세계이자 ‘자유’였다.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에피소드와 시의 언어로 녹아 있는 사유들은 그래서 작가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하는 ‘들판의 말들’이다.

“아이오와는 뭔가를 잊을 수 있도록 돕고, 그것을 다시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이라던 동료 작가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 말은 어쩌면 들판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난 끝없이 들판을 걸어보고 싶다. 반대 방향으로 걸었을 때 우연히 진짜 삶을 발견하게 되어 지금까지의 삶을, 그리고 앞으로의 삶을 전혀 다르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국과 정반대에 있는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서 자유를 발견한 것과 같이. 그것은 들판이 내게 준 것이었다.”(5~6쪽)

“자신이 사는 곳을 사랑하기란 너무 어렵지 않은가요?”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도망치는 작은 자유

책은 시인이 아이오와에 도착한 직후부터 시간순으로 흘러가는데, 너른 들판이 펼쳐진 아이오와 하우스에 다양한 나라의 작가들이 IWP 참가 자격으로 하나둘씩 모이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코토미, 에바, 오릿, 야스히로, 메리 할머니, 츠베타, 라울 등 30여 명의 작가들은 첫날부터 하나 같이 개성 강하고 ‘괴짜’ 같은 존재감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어느 날에는 전망이 전혀 없는 ‘벽 뷰’ 방을 배정받은 작가들(일명 ‘전망 없는 작가들의 모임’)이 ‘창문 봉기(‘우리에게도 전망이 있는 방을 달라’)를 일으키기도 하고, 벽으로 둘러싸인 중정 한가운데에 있는 버려진 종이컵을 주제로 단체 채팅방에 모든 작가가 글쓰기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한다.

작가들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타국에서 언어적 충돌을 경험하면서도, 아이오와의 고요하고 너른 들판을 정서적 근간으로 공유하며 조금씩 서로에게 균형을 맞춘다. 들판은 이들에게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도망치는 작은 자유를 누리는 것을 가능케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IWP 작가들과의 교류가 점점 두터워지고, 시인은 그중 대만 출신의 일본 작가 코토미(탈출 작가), 홍콩 작가 에바(비탈출 작가)와 ‘삼총사’를 이루며 다양한 일상을 경험한다. 시인은 ‘탈출 작가(모국을 떠나 타국에 정착해 제2언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이)’와 ‘비탈출 작가(모국에서 자신의 언어로 작품 활동을 하는 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기도 하고, 한국어를 구사할 때와 영어를 구사할 때의 차이를 통해 자신에게서 이중 자아를 느끼기도 한다.

또한 아이오와 대학 수업을 청강하면서 문학적 영감이 가득한 새로운 형식의 예술 작품들을 접하는데, 그중 톰 필립스의 《휴무먼트》와 이르마 블랭크의 《하이퍼 텍스트》라는 책에서 발상의 전환점을 얻기도 한다. 엑소포닉 작가 오릿의 제안으로 함께 영어 시 쓰기 작업을 하는 과정도 흥미롭다. 엽서에 첫 단어를 쓰고 상대방의 방문 아래로 밀어 넣으면 그다음 사람이 단어를 추가하는 방식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하는 것이다. 타국어로 시를 쓴다는 걸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인은 “언어를 낯설게 느끼는 만큼 더 좋은 걸 만들 확률이 높아진다”는 조언을 동료 오릿에게 듣는다.

“아이오와에서 나는 많은 작가가 자신의 나라를 떠나 낯선 언어로 작품을 쓴다는 사실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살던 곳을 떠난 이유는 제각각이었지만, 언어의 충돌은 그 자체로 그들의 핸디캡이면서 동시에 개성이었고 글쓰기의 중요한 동력인 듯했다. 한편 그것은 하나의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도망치는 작은 자유이기도 했다.”(4~5쪽)

“나는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난 변하지 않기로 한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사랑할 수 있는 웅크림에 관해

아이오와 IWP 프로그램의 절반 이상이 흘러간 시점, 작가들은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서로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때도 헤아림의 지점을 만들어내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루는 새벽 5시에 노엘이 ‘너 몇 시에 뱀 잡으러 나가? 나도 같이 갈래’라는 문자를 보내왔는데, 알고 봤더니 SNS에 시인이 올린 게시물 글이 ‘저는 매일 뱀을 잡으러 들판으로 나갑니다’라고 잘못 번역된 것이었다. 그 뒤로 시인과 노엘은 종종 의식처럼 서로를 의지하며 들판을 걸었다.

시인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초경량의 삶을 살아왔다.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지는 쪽을 항상 택해왔는데, 그러한 삶의 태도가 타인에게 ‘호구’처럼 비춰질 때가 많았다. 그래서 미세하게 살아가는 방법 외에 사는 법을 잊어버리고 살아왔다. 하지만 아이오와에서는 똑같이 움츠려 있어도 사람들은 호의를 알아차리고 그에게 보답을 해주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조금 더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강해지는 것 외의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걸 안다. 어떤 따뜻한 곳에서는 내가 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호구처럼 살아도 된다는 걸 안다. 아이오와에서도 똑같이 움츠려 있지만, 나의 웅크림은 보상받는다. 사람들은 호의를 알아차리고 보답한다. 며칠 전에 타로를 봤다. 이번 달에 당신은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 동시다발의 사랑이 발생하여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한다. 카드는 말했다. 나는 강해지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변하지 않기로 한다.”(209쪽)

시인은 지금까지 일기를 쓰는 일이, “외로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방에서 글을 쓰고 자신을 위한 둥지를 트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오와에서 쓴 일기는 다르다. 시인의 말에 따르면 이 일기들은 그곳에서의 뭉근한 경험들로 인해 자신도 “행복해도 된다는 걸 알아버린” 것에 대한 반추다. 시인이 “아이오와에서의 행복했던 기억으로 면회를 가기 위해” 썼다는 이 책을 통해 독자들 또한 ‘자신만의 아이오와’를 찾아 떠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요즘 일기를 아주 아주 많이 쓴다. 내가 깨달은 건 난 행복해도 된다는 것이다. 난 행복해도 슬픈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행복한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별로인 시를 쓸 수 있고, 행복해도 멋진 시를 쓸 수 있다. 사랑이 많으면 나는 더 많은 것을, 그리고 더 좋은 것을 쓸 수 있다. 행복할수록 나의 영혼은 더 세분화될 수 있음을, 시인이지만 나도 행복해도 된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난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255쪽)

작가정보

저자(글) 문보영

시인. 시집 《책기둥》 《배틀그라운드》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소설집 《하품의 언덕》, 산문집 《준최선의 롱런》 《일기시대》 《불안해서 오늘도 버렸습니다》 등이 있다. 독자들의 집으로 손글씨 원고를 부치는 일기 딜리버리를 운영하고 있다. 제36회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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