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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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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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202
작가의 말 216
*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 나는 둘로 나뉘었다. 오른쪽 절반은 더 이상 내가 아니고 왼쪽 절반에만 겨우 내가 남았다. 둘로 나뉘기 전까지 나는 오른손잡이였다. 그래서 나의 인생은 늘 오른쪽에서 시작됐다가 왼쪽으로 빠져나갔다. 오른손은 모험을, 왼손은 균형을 담당했다. 그러니 왼쪽 절반에 유폐된 나는 권태와 허무 사이를 오가다가 여생을 소진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서 사라진 오른쪽 절반의 인간이 나는 몹시 그립다. 그는 나를 통째로 지배하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9-10쪽
* 오른쪽 절반이 나의 무덤이라면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회한과 무력감을 모두 그곳에 파묻을 것이다. 왼쪽 절반뿐인 나는 지금부터 어린아이나 성자의 삶을 살아가겠다.
-27쪽
* 그 하천에 사는 물고기 중에는 도나우강에서 길을 잘못 든 개체도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탈출구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물살을 거슬러 올랐으나 그 하천이 시멘트 바닥에 뚫린 취수공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크게 절망했을 것이다. 몸속에 알이나 이리를 가득 품은 채 물 위로 떠오른 것들은 비닐봉지에 담겨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태워졌을 것이다. 어쩌면 아내도 이와 똑같은 상황인지 모르겠다. 모험심을 억누르지 못하고 어머니의 처절한 만류를 뿌리쳐가면서까지 너와 내게로 헤엄쳐 왔다가 뒤늦게나마 길을 잘못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지만 자신을 도와줄 어머니는 이미 살해당했고 탈출구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를 금고마저 일 년째 열리지 않고 있으니, 그녀는 밤마다 정부의 품에 안겨서 자신을 산 채로 화장시켜 달라고 읍소하고 있진 않을까.
-82-83쪽
* 뱀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토록 잔혹한 폭력을 당해야 할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누구든지 허기를 느끼면 뭔가를 삼켜야 한다. 배가 부르면 동물들은 상대의 목숨을 탐하지 않는다. 반면 인간들은 허기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매일 죽이고 없앤다.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들의 행동을 모두 이성적이고 이타적인 것으로 윤색한다.
-97-98쪽
* 그러니 우리의 죽음은 오른쪽 절반뿐인 너의 뇌 속에 숨어 있는 죄악으로 인해 왼쪽 절반뿐인 내가 살해당하는 사건으로 정의할 수 있다. 내가 우리의 죽음에 수긍하려면 너의 죄악부터 명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따금 나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야 할 수도 있겠지. 막대자석을 아무리 작게 잘라내더라도 양극이 남는 것처럼 우리를 아무리 작게 나누더라도 모든 조각에는 너와 내가 똑같은 부피로 편재해 있을 것이므로 매 순간 너와의 투쟁과 협상은 불가피할 것 같다. 우리 안의 순수함과 사악함을 확실하게 구별하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너를 쉥거라고 부르겠다. 네가 나를 무엇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127-128쪽
* 나는 쉥거를 죽이고 내 영혼과 육체의 유일한 주인으로서 오래 살 것이다. 아내의 임종까지 지켜본 뒤 법적 상속자가 내게 들려주는 주기도문 속에서 마지막 숨을 내쉬며, 나보다 먼저 죽은 자들을 향해 상스러운 저주를 쏟아부을 것이다. 기괴한 세계와 기구한 운명을 물려준 그
들에게 감사하거나 미안해할 이유는 전혀 없다.
-236쪽
* 하긴 아내도 한때 우리를 매혹했던 소녀였다. 그녀의 매력을 먼저 알아보고 열광했던 쪽은 내가 아니라 쉥거였고, 아내 역시 나보다는 쉥거에게 더 호감을 느꼈다. 어쩌면 우리와 아내의 결혼 생활을 파국으로 내몬 장본인은 아내와 쉥거 사이에 물혹처럼 박혀 있는 나 자신일 수도 있다. 아무리 애써도 그걸 터트리거나 잘라낼 수 없자 아내와 쉥거는 상대의 진심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고 판단됐을 때 쉥거는 슬그머니 내 뒤로 숨으며 자신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했다.
-140-141
* 그리고 어느 화창한 날에 하천변을 마지막으로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금고 안에 우리의 남은 인생을 모조리 쑤셔 넣은 다음 치사량의 두 배가 넘는 수면제를 한꺼번에 삼키기로 동의했다. 현실과 꿈, 삶과 죽음 사이의 영토는 너무 푹신해서 누구도 걸어서는 건널 수 없고 망둥이처럼 배를 깔고 미끄러지며 나아가야 한다.
-167
* 불필요한 진실을 영원히 봉인하기 위해 죽음이 인간을 찾아온다. 조물주에게도 비밀을 영원히 숨겨둘 금고가 필요한 것이다.
-175
존재와 존재, 의식과 의식,
기억과 기억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틈새
그 틈새가 펼쳐 보이는 알레고리!
김솔의 신작소설 『행간을 걷다』가 핀 시리즈 쉰한 번째 소설선으로 출간되었다. 익숙한 장소와 인물을 등장시키는 듯하지만 특유의 낯설게하기 기법으로 독자를 전혀 새로운 상상의 세계로 안내하는 김솔은 2012년 등단 이후 〈문지문학상〉 〈김준성문학상〉 〈젊은작가상〉 등을 수상하며 그 문학성을 인정받고 있다.
“언어가 아닌 여백으로 이야기를 완성해나가는,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이기호) “정교함과 분방함 사이에서 10년 이상 안정적으로 주행해온 그의 문장이, 어째서 여태 소수의 독자에게만 발견되어 일종의 비의秘儀처럼 읽혔는지 미스터리다.”(구병모)라는 평가를 받는 김솔의 이번 소설은 한 남자의 두 개로 나뉜 자아에 관한 이야기이다.
금고 제작자의 삶을 살다 환갑을 앞두고 뇌졸중을 앓게 되며 편마비가 온 남자는 마비된 한쪽 몸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권태와 회환에 빠질 것이라 예감한다. 죽음의 그림자를 품고 살게 된 남자는 마비된 몸과 온전한 몸으로 자아를 나누고, 마비된 쪽을 ‘너’(혹은 ‘쉥거’)라 지칭한 후, 그 안에 회환과 무력을 파묻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온전한 쪽만을 ‘나’라 여기고, 그 안에서 자기에게만 유효한 시간을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밝혀지지 않은 병의 원인이 몸속에 숨어 있다면 밝혀지지 않은 치료 방법 또한 몸속에 담겨 있을 것이라 여긴 남자는 매일 같은 시간에 하천을 따라 걷기로 결심한다. 매일 만나는 하천은 뇌졸중 환자의 시간처럼 느리게 흐르는 듯 보이지만, 고요한 그곳은 사실 군부 독재 시절 개발로 사라지고 인공 하천으로 거듭난, 뒤틀려진 욕망이 자리한 곳이다. 남자는 산책을 하며 불륜을 저지르는 아내,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살인과 미수에 그친 이야기 등을 떠올리며 자신을 둘러싼 욕망의 본질과 속성을 파헤치려 하지만 그 어떤 것에도 명쾌한 답을 찾지 못한다. 그러는 사이 죽은 ‘너’와 살아 있는 ‘나’는 ‘우리’가 되고, 하천은 행간이 되고, 이야기는 물을 사이에 둔 길 위의 모든 것이 되며 영겁과도 같은 천변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시종일관 새로운 시공간을 열어젖히며 생의 기쁨을 조잘거리는 이 소설이 삶과 죽음에 대해 일설하는 바는 명징하다. 삶의 생동과 진실이 약동하는 림보, 모순이 요동치는 여백, 모든 순간의 코리스모스가 살아 숨 쉬는 행간이 존재해야만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것. 그런 이중성의 시공간을 사유하며 ‘행간을 걷다’라는 현재진행형의 문장을 시인처럼 말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동어반복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 그 특수한 양자적 진술의 세계야말로 모두에게 모순적이어서 공평한 이 시대의 보편적 정신이다.
-전청림(문학평론가)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하천을 따라 산책하는 주인공과 함께 소설이 던지는 화두를 함께 풀어가며 존재와 존재, 의식과 의식, 기억과 기억 사이에 드러나지 않는 틈새를 들여다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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