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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림 49일

조정희 장편소설
조정희 지음
BG북갤러리

2024년 05월 23일 출간

종이책 : 2024년 05월 17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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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pdf (3.16MB)
ISBN 978896495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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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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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를 하면서 소설 세계에 입문한 후, 다수의 작품을 발표해온 조정희 작가의 신작. 49일간 벌어진 각종 악행 사건들을 단죄하는 속 시원한 스토리가 전개되는 이 소설은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될 빌런들을 처단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옴니버스(Omnibus) 형식을 띠고 있으며, ‘악행’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짧은 사건들이 한 편의 작품을 이루었다.
프롤로그

내가 죽은 날

1. 하늘 아래 숨을 곳은 없다
왕이 죽기 전(1)

2. 어때, 섬뜩하지
왕이 죽기 전(2)

3. 사냥꾼, 사냥감이 되다
나는 어미 고양이
철민 숙자의 오두막(1)

4. 악몽에 굴복하다
철민 숙자의 오두막(2)

5. 악행, 강제종료되다
과대망상

6. 양심을 선언하다
뫼비우스 숲

7. 청산유수 말을 잃다
49일
숲에 스미다

에필로그
작가의 말

이제 나는 스스로 그 별명을 쓰기로 한다. 나는 ‘왕’이다. 스스로 선택한 만큼 의미도 내가 부여했다. ‘나를 지탱하고 움직이고 사용하는 자’란 의미다. 사실은, ‘자신의 몸을 자신의 의지대로 쓰지 못하고 죽은 자’의 한풀이용 이름이란 걸 고백하고 있는 중이다.
/ p.12

그 몰골을 하고 거기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말이 펜션이지 물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더구나 도로도 없어 오두막을 하나 짓는 데도 꽤 돈이 들어갔다. 물론 투자한 만큼 빼먹었고 그런 결정은 신의 한 수였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애당초 집을 지을 수 없는 맹지에 오두막을 짓기로 결심한 데는 그만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대가 아주 말랑하기도 했지만 이미 깊이 발을 들이민 상태라 빠져나가기 힘들다는 것도 알았다. 큰돈을 따려면 판돈도 그만큼 커야 하는 법이다. 그래서 돈을 들여 소형 트럭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내고 외관만 번듯한 오두막을 지었다. 미끼 상품이 완성된 셈이다. 그걸 본 투자자는 완벽하게 걸려들었다.
/ pp.18-19

사전 조사도 할 겸 1년 만에 다시 찾은 오두막.
그런데 사람이 있었다.
기겁하는 줄 알았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기도 했지만 낯익은 놈이라 더 놀랐다. 죽은 부부의 아들이 거기 있다니. 부모 일로 몇 번 찾아와 귀찮게 했던 놈이라 얼굴을 익히 알고도 남았지만, A는 한 번 본 인물도 잘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하여튼 아들이 분명했다. 아들도 부모만큼 말랑해서 처리는 쉬웠다. 그랬던 놈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섬뜩하기까지 했다.
/ p.19

셋은 대한민국 상류층 자식들이다. 상류란 말이 사실 참 불편하다. 오직 재산으로 평가되는 상류층이란 말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현재 인류의 가치관 추세가 그렇다. 고매한 인격과 높은 도덕심, 봉사 행위를 기준으로 상류, 하류를 논하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왕은 그런 세상이 오길 기대한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지금 힘을 보태고 있는 중이다.
/ p.24

라이온이 의자에서 일어나는 동시에 방문이 벌컥 열린다.
아래위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문 앞에 서 있다. 어? 부모가 아니다. 그런데 누구? 어떻게 들어왔지? 두서없는 생각이 스친다. 동시에 라이온은 책상 옆에 세워 놓은 야구 방망이를 잡는다. 강도나 도둑이 아니라면 밤에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들어올 리가 없다. 라이온의 판단이다.
/ p.28

왕은 대꾸 없이 팔짱을 낀 채 치타와 백호를 본다. 둘은 라이온이 아파하는 것만 보고도 겁에 질려 꼼짝하지 못한다. 그런데 왕이 쓰러진 라이온을 두고 자신들을 보자 오줌을 쌀 지경이다.
검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은 호리호리한 남자. 마른 몸 어디에서 그런 괴력이 나오는 걸까. 무술 유단자라도 되는 걸까. 그리고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빠른 움직임이라니.
/ p.30

- 그건 장난으로…….
라이온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항변한다. 아니 항변을 마치지 못한다. 라이온은 목이 잡혀 벽에 붙어 서 있다. 몸을 구부리는 과정도 팔을 뻗는 과정도 없었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왕은 라이온의 목을 잡아 일으켜 벽에 붙여 세웠다. 라이온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진다. 두 손으로 왕의 손을 잡아떼어보려 하지만 팔은 꿈쩍하지 않는다. 사람의 팔이 아니라 기계에 잡힌 느낌이다. 속수무책 숨이 조여오고 기절 직전에 손이 풀린다. 라이온이 숨을 몰아쉬며 컥컥거린다.
- 이런 장난 말이냐?
/ p.32

아직 미성년이라 철이 없었다고 두둔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두둔하는 자들한테 묻고 싶다. 당신들 미성년 자식이 친구한테 고문당하듯 맞고 살아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그런 어진 마음으로 용서하겠다면 기꺼이 고개 숙여 받아들이겠다. 그런 분이라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어떤 부모가 그럴 수 있을까. 그리고 철이 없다는 말이 그런 뜻이던가. 철이 없다는 말로 넘어갈 차원의 행위인가. 친구들과 서로 치고받고 싸운 일이 아니다. 항거불능 상태로 몰아넣은 친구를 일방적으로 때리고 목숨을 위협한 행위였다.
/ pp.33-34

부모가 자식을 잃었다.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해자를 밝힌 유서도 있었다. 유서에는, 친구들이 괴롭혀서 힘들었다는 말과 셋의 이름이 있었다. 분명히 가해자가 존재하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학교도, 경찰도, 가해자 변호에만 열중하는 이상한 세상을 겪었다.
/ p.37

하지만 왕은 그렇게 또 모습을 드러냈다.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노크도 없었다는 것.
방문도 열리지 않았는데 침대 앞에 서 있었다.
라이온은 침대에 기대앉아 스마트폰을 보다 그를 발견했다.
검은 옷, 긴 머리, 납빛의 얼굴.
너무 놀라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목이 졸리는 느낌과 함께 엉덩이도 아픈 듯했다. 그리고 정말 목이 졸렸다. 이번엔 진짜 소리를 낼 수 없었다. 엄마 말을 듣지 않았어야 했는데, 왕이 시키는 대로 할 걸, 공포와 후회가 소용돌이쳤다.
/ p.43

- 잘못했어요.
입이 자유로워지자 저절로 나온 말이었다.
- 부모 뒤에 숨지 마라. 약속대로 하지 않으면 다시 온다.
왕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소리도 없이. 문을 통하지도 않고.
/ p.45

부모 장례를 치르고, A의 행적을 좇아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냉엄한 현실에 부딪히고, 자신의 무능함에 절망했다. 무얼 하든 먹고살 수 있는 젊음이 있지 않으냐 하겠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부모를 죽음으로 몰고 간 놈을 잡겠다고, 아니, 원인을 파헤치겠다고 뛰어다닐 땐 의욕이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고, 할 것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순간, 살아갈 의욕마저 사라졌다. 그런 허탈한 마음으로 오두막을 찾았다. 그나마 부모의 흔적이 있을 것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 p.50

전 재산을 잃은 이유가, 죽음의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범죄행위가 분명했다. 그런데 가해자가 없었다. 아니 있지만 없었다. 법은 피해자를 구제하지도 가해자를 제재하지도 못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오히려 감정이 거세게 올라왔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울분으로 밥도 넘어가지 않았고 잠도 잘 수 없었다. 그러나 울분마저 오래 가지 않았다. 거세게 타올랐던 울분은 식은 재로 남았고, 재는 어떤 열기도 품을 수 없게 되었다.
/ p.56

부모는 사망한 지 일주일 만에 세상에 드러났다.
왕은 그때 워킹 홀리데이 비자로 뉴질랜드에 있었다. 타지에서 부모의 부고를 받은 것이다. 졸업 후 취업 준비생으로 1년을 보내고 또 몇 달을 아르바이트로 어영부영 지내고 있자니 부모한테 면목이 서지 않았다. 더구나 재수로 대학에 들어갔고 중간에 군대를 다녀왔다. 그래서 졸업했을 땐 이미 나이가 찬 실업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런데 곧바로 취업도 하지 못하고 부모한테 얹혀있자니 좀 답답했다. 진짜 경제적인 독립은 어렵고 독립생활이라도 해야겠다, 궁리 끝에 얻은 타개책이 워킹 홀리데이였다.
/ pp.83-84

- 씨팔.
어머니가 떠오르는 순간 자동 발사되는 욕.
별 밤에 어머니 얼굴이 왜 끼어드는지, 어머니 얼굴에 왜 욕이 뒤따르는지, 그 이유를 자신도 잘 모른다. 어머니에 대한 심정은 마냥 복잡하다. 가끔은 불쌍한 마음이 들고 대개는 괴롭히고 싶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마음은 온통 어지럽다. 아니, 괴롭다. 어머니 탓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자신을 이런 혼란의 구렁텅이로 몰아간 사람이 어머니라고.
/ p.89

그러던 차에 신무기를 만났고 신세계가 열린 것이다. 화살을 장전하고 조준하고 쏘는 맛이 정말 짜릿했다. 화살을 맞고 놀라 펄쩍 뛰는 순간엔 거의 숨이 넘어갈 듯 흥분되었다. 절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런 것이 바로 정신의 고양인가, 고양이 사냥이 바로 정신의 고양이군. 혼자 말해놓고 혼자 웃었다.
화살을 맞은 고양이가 쓰러져 도망가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화살을 회수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화살을 매단 채 미친 듯이 달아난다. 달아나는 뒤를 슬금슬금 쫓는 기분도 괜찮다.
/ p.97

살금살금 다가가 냄새를 맡고 먹기 시작했어. 냄새에 이상한 것이 섞여 있지도 않았지. 한 알을 씹고 두 알을 씹고 세 알을 물었을 때 눈에 불이 번쩍 났어. 발길에 차인 줄 알았어. 분명히 아무도 없었는데, 라는 생각 같은 건 할 수도 없었지. 그 자리에서 펄쩍 뛸 정도로 큰 충격이 왔거든. 정신없이 달렸어. 눈앞이 흐리고 이마에 무엇이 붙어서 자꾸 따라왔어. 그래도 달리는 걸 멈출 수가 없었지. 놈이 쫓아 올까 너무 겁이 났거든. 멀리 달아나 어딘가 숨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 pp.104-105

풀로 뒤덮인 길을 헤치며 왔는데 화살 맞은 고양이라니.
철민과 숙자는 잠시 자신들의 처지를 잊고 고양이 몰골에 마음이 뺏긴다. 이마엔 화살이 불편하게 달려 있고, 배는 땅에 닿을 듯 처져 있다. 새끼를 가진 것이 분명한데, 배만 불룩하고 어깨와 등은 앙상하게 말랐다. 얼마나 굶주린 것인가.
/ pp.108-109

둘은 가까이에서 비로소 이마에 꽂힌 화살을 자세히 본다. 젓가락만 하다. 재빨리 잡으면 잡힐 것도 같지만 그러지 못한다. 어차피 함부로 뽑을 수는 없다. 병원에 데려가야 하겠지만 더구나 그럴 엄두는 내지 못한다.
/ p.111

펜션 두 채에 부부가 살 집 한 채를 지어준다는 조건이었다. 국립 휴양림에 가까워 완공되는 순간부터 손님이 너무 많아 힘들 것이라 했다. 공기 좋고 경치 좋은 곳에서 휴양하며 돈도 벌 수 있으니 그야말로 꿩먹고알먹고였다. 놈의 감언이설대로라면 그랬다. 감언이설에 넘어가는 사람이 어리석은 게 아니라 속지 않을 수 없는 말이 감언이설이었다. 아들을 생각하면 더 달콤한 결단이었다. 지왕이 돌아오면 같이 해도 괜찮겠다. 굳이 직장을 구하지 못해도 걱정이 없겠다. 그런 결정에 무게를 보탠 아들이었지만 부부는 아들한테 알리지는 않았다. 부담될 수도 있겠다 싶었고 싫다 하면 강요할 마음은 없었다. 하고 싶은 일을 찾게 되면 그것도 좋았다.
/ p.115

공사 비용이 자꾸 달라졌다. 손님들의 취향을 운운하며 인테리어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퇴직금이 몽땅 들어간 사업을 그만둘 수 없다는 걸 A는 너무도 잘 알았다. 언젠가부터 A가 부부의 갑이 되어있었다. A가 하는 대로 끌려갔다. 집을 팔고 월세로 옮겨갈 때는 완전히 목숨을 매단 꼴이 되었다. 불안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때쯤 속셈을 알아챘을지도 몰랐다. 알면서도 자신을 속이고 있었을지도.
/ p.116

‘네가 하는 짓을 멈추고 네가 했던 짓을 세상에 밝혀.’
뚜렷한 그놈 목소리와 함께 악몽이 시작되었다. 물에 잠겼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꿈에서도 꿈이 깨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의식을 잃기 전에 꿈에서 깨어나는 걸 알기 때문이다. 수도 없이 꾼 꿈이라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깨어나지 않았다. 깨어나지 않는 악몽이 계속되었다. 지옥이 떠올랐다. 그건 지옥이었다. 불에 타면서도 죽을 수 없는 지옥. 공기를 들이마실 수 없는데도 숨이 끊어지지 않는 지옥. 언제까지나 그렇게 살아야 한다면 죽기를 빌어야 했다. 죽는 것이 복이 될 수 있는 곳이 지옥이었다.
- 제발 죽여줘.
/ pp.135-136

몸을 실어 다시 민다. 덜컥, 문이 열리고 삼색이가 재빨리 빠져나간다. 어슴푸레한 빛이 숲에 깔려있었다. 잘 살아라. 풀숲으로 사라지는 삼색이한테 작별 인사를 한다. 그리고 사료 포대를 밖으로 끌어내 오두막 벽에 기대어 놓고, 물그릇에 물을 가득 채워 사료 포대 옆에 놓아두었다. 그걸 하는 데도 숨이 차고 진땀이 난다.
안으로 들어와 오두막 문을 꼭 닫는다.
열린 문으로 비치던 희미한 빛이 사라지자 오두막 안은 완전한 어둠에 싸인다.
철민은 어둠을 더듬어 침대로 간다.
그리고 숙자 옆에 눕는다.
/ pp.147-148

어느 날 수위실을 들여다보다 안으로 쓱 들어갔다. 그냥 들어갔을 뿐인데 임씨 눈에 두려움이 가득했다. 갑자기 머리가 돌았는지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자기 모습이 옛날의 아버지 같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무런 반항도 못 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그때부터 심심하면 내려가 겁을 주고 주먹질을 했다. 며칠만 지나면 겁먹는 꼴이 보고 싶어졌다. 차츰 임씨 하나로 마음이 차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괜한 시비를 걸고 화풀이를 했다. 자신의 완력이 꽤 쓸만하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상대는 항상 신중히 골랐다. 손쉬운 상대를 고르는 것. 그것이 백전백승의 전략이었다.
/ p.155

- 시키는 대로 할게요. 제발.
침대 곁에 가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K가 주저앉자 왕이 침대에서 내려왔다. 눈길은 여전히 K를 향한 채. 그리고 사라졌다. 사라진 뒤에도 그 눈빛이 남아 K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한참 동안 딸 침대 곁을 떠돌았다.
놈이 사라졌다. 걷는 것도 나가는 것도 보지 못했다. 방문은 K가 막고 있고 현관문도 닫혀 있었다. 그러나 놈은 더 이상 집안에 없었다. 마술사건 아니건, 사람이건 아니건, 그런 놈을 이길 수는 없었다. 이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 pp.186-187

떠도는 의식을 분별하는 힘을 가진 자가 있다. 생명이 끝난 자리에서 생겨난 힘이다. 망상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게 망상이라면 그런 망상에 갇혀버린 자가 되었다고 해야 할까.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오는 어떤 의식을 감지해버린 왕. 지독한 고통의 의식이 마치 호소하듯 다가왔다. 한숨과 아픔과 슬픔이 무게를 달리해 왕의 어깨에 내려앉은 것이다. 왕은 기꺼이 짐을 졌다. 의식 속으로 들어온 하소연을 외면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마음이 없었으니, 스스로 망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 자라 해야겠다.
/ p.109

- 어떤 놈이 분명히 다리를 걸었어.
A가 확신에 차 있다는 건 알겠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는 힘들다. 입술 밖으로 나온 말은 마치 팝콘처럼 사방으로 튀었다. 앞니 세 개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머지도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 망가진 잇몸이 아물지 않아 새로 이를 심으려 해도 기다려야 한다. 이리저리 찢어져 봉합한 입술도 부어있는 상태. 말을 다듬어 낼 구강구조가 이러니 발음이 온전할 리 없다. 더구나 숨이 들어가고 나가는 코도 제구실을 하기엔 아직 엉망이다. 완전히 주저앉은 코뼈를 세우는 수술은 복잡했고 회복도 더디다. 그래도 말하지 않고 있을 땐 자신의 처지를 잠시 잊어버리기도 한다.
/ pp.197-198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A는 계속 같은 말을 했다. 분명히 누군가 자신의 다리를 걸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CCTV 어디에도 그런 사람은 없었다. A가 넘어지는 장면에 장발 남자가 지나가긴 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A가 넘어지는 동시에 지나갔으니 발을 걸었다고 할 수 없었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면, 장발의 그 남자가 그 후로 어느 CCTV에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 길을 따라간 흔적도 버스나 택시를 탄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범인으로 특정하고 수사를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범행 장면이 포착되지도 않았고 신원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A는 병원에서도, 퇴원해서도 같은 소리를 했지만, 없는 사람을 잡을 수도 수사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pp.203-204

왕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다. 키 큰 나무들 사이로 엷은 빛이 은은하다.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반백의 긴 머리가 낯빛과 하나로 어우러진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빛깔만 어울릴 뿐이다.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노인이지만 얼굴은 젊은이다. 깊은 주름도 없고 턱선도 단정하다. 넓고 반듯한 이마에 우뚝한 콧날, 기름한 눈매. 누가 봐도 잘생겼다고 할만한 얼굴이다. 그런데 인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기가 없긴 하다. 젊음의 생기가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어깨에도 걸음걸이에도 생기가 없다. 멀리서 보면 노인이라 착각할 정도다.
남은 생명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한,
삶을 끝내고 떠나가는 모습이 저러할까, 싶은,
/ pp.211-212

해가 넘어가고 희미한 빛만 남은 숲. 잠자리에 깃들어야 할 새들의 울음이 숲을 채운다. 울음소리가 높아질수록 왕의 몸은 희미해지다 이윽고 사라진다. 바람이 일고 나무들이 춤을 춘다. 마치 오두막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처럼.
빈 의자.
왕이 앉아 있던 의자엔 아무도 없다.
바람이,
열린 오두막 안으로 들이친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그 뒤를 따른다.

오두막 야전 침대에,
미라처럼 된 왕이 누워있다.
/ pp.214-2

악행 사건 단죄하는, 독자가 대신 위로받는 ‘대리만족 소설’
옴니버스식 구성, 여러 개의 사건 모아 한 편의 작품 이뤄

교사를 하면서 소설 세계에 입문한 후, 다수의 작품을 발표해온 조정희 작가의 신작. 조정희 장편소설 《휴양림 49일》은 49일간 벌어진 각종 악행 사건들을 단죄하는 속 시원한 스토리가 전개되어 독자가 대신 위로받는 ‘대리만족 소설’이다. 사회에 존재해서는 안 될 빌런들을 처단하는 내용의 이 소설은 옴니버스(Omnibus) 형식을 띠고 있으며, ‘악행’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여러 개의 짧은 사건들이 한 편의 작품을 이루었다.

소설의 시작과 끝 ‘휴양림’, 49재(四十九齋) 의미 담은 ‘49일’
학폭 가해 학생, 갑질 주민, 투자자 꾄 사기꾼 등 빌런 처단

소설의 시작과 끝은 숲속의 오두막, 즉 ‘휴양림’이다. 여기서 ‘49일’은 49재(四十九齋)를 암시한다. 사람이 죽은 뒤 7일마다 일곱 번씩 명복을 빌어주고 49일째에 치르는 불교식 제사의례인 49재는 죽은 이가 그동안에 불법을 깨닫고 좋은 다음 세상에서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비는 제례의식이다.
《휴양림 49일》은 약 50일 동안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당들의 죄를 단죄하는 다양한 상황들이 묘사되는데 악행을 저지른 자들을 회복 불능의 상황으로까지 만들어버린다. 그것도 누가, 어떤 방법으로 해결했는지 세상은 전혀 모른다. 오리무중에 빠진 수사기관과 국민은 추측만 할 뿐이다.
단죄 대상은 학교폭력 가해 학생들이나 필리핀 거점 취업사기단 우두머리, 고양이를 화살로 쏘며 동물을 학대한 사회 부적응자 청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적 몰이에만 몰입하고 법 위에 군림했던 못된 정치인, 아파트 경비원을 폭행하며 집요하게 괴롭힌 갑질 주민, 가해자 측과 은밀한 거래로 피해자의 변호를 포기한 비리 변호사, 청산유수 언별술로 투자자를 꾄 사기꾼 등 사회 곳곳의 빌런들이다.

주인공 최지왕, ‘나를 지탱하고, 움직이고, 사용하는 자’
49일 동안 일어난 사건들을 따라 악행, 강제종료되다

주인공 최지왕. “나는 ‘왕’이다.” 지왕 스스로 쓰기로 한 별명이다. ‘나를 지탱하고 움직이고 사용하는 자’란 의미다. 사실은, ‘자신의 몸을 자신의 의지대로 쓰지 못하고 죽은 자’의 한풀이용 이름일 수도 있다. 결국 숲속 오두막에서 미라로 발견된, 죽은 지 50일 정도 지난 남자 시신이 이를 암시한다.
소설 속에서 사건을 접한 한 경찰관은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한다.
“귀신이 사람을 폭행할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이건 귀신이 사람을 폭행한 증거라 할 수밖에 없어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온갖 사건 사고를 마주하다 보면 귀신이 사람 일에 간섭을 좀 했으면 싶을 때도 있거든요. 법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범죄자도 분명 있으니까요.”
벅찬 49일 동안 일어났던 사건들을 따라 악행이 강제종료되었다. 독자들의 울분을 속 시원하게 해소하였다. 내가 아닌, 주인공 ‘왕’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좀 더 과감하고 파괴력 있는 작품, 독자에게 통쾌함 선사
“귀신은 뭐하나,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바로 그런 심정”

《휴양림 49일》은 그간 조정희 작가가 내놓은 소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작품이다. 연인 간의 사랑 또는 이별, 현실을 뛰어넘는 가족 간의 사랑 그리고 사람 이야기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면 이번 작품은 좀 더 과감하고 파괴력이 있다. 읽는 이로 하여금 통쾌함을 선사한다. 내가 하지 못한 것을 히어로가 나타나 해결해 주는 듯하다. 그래서 독자가 대신 위로받는 ‘대리만족 소설’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다.
“돈으로 언론을 조종하고, 돈으로 여론을 조성하고, 돈으로 사람을 흔듭니다. 그 말은, 돈이 없으면, 언론의 죄를 입고, 여론의 매를 맞고, 사람에 배신당할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참 분통이 터지는 일”이라고 말한 저자는 “억울한 누명에 죽고, 일을 잃고, 가정이 파탄 난 사람들. 두 눈 뜨고 그런 일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무력감을 떨쳐버리기 위한 방법이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런 놈 안 잡아가고, 바로 그런 심정이라고 할까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좋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만들어낸 망상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도 쓰는 동안 스스로 위로받는 시간이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사회 안전망에 대한 불안감, 악당들이 착한 사람들보다 잘사는 세상 속에서 연이어 발생하는 사건 전개, 이를 따라잡는 조정희 작가만의 생생한 필치로 그려낸 긴장감 넘치는 이 소설이 독자들의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함과 불안감, 긴장감 등을 해소하는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킬지 주목된다.

작가정보

저자(글) 조정희

국어국문학과를 나와 교사를 하면서 소설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말수가 적은 게 아니라 할 말이 많았다는 걸 글을 쓰면서 깨닫게 되었다.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글 쓰는 일은 절대적으로 혼자 하는 일이라 그렇다는 것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 모든 사람이 듣고 싶은 말은 아니라는 것도.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외로움의 방을 갖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외로움을 달래는 방법이 각자 다르고 글쓰기도 그 방법이 되어준다는 것도.

출간 작품으로 단편소설집 《나는 소꿉친구와 결혼했다》, 장편소설 《복동이 사라졌다》 외 11편, 여행 에세이 《하늬/높새/갈마/소슬바람 러시아로 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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