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1936
2024년 05월 02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5월 0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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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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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인이 승리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순간이자
오늘의 분쟁이 시작된 1936~1939년 아랍 대봉기
그 3년의 고난을 재현하다
많은 사람이 중동분쟁을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한 나크바(Nakba, 대재앙)에서 기인했다고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1936년에서 1939년까지 3년간 팔레스타인에서 지속된 아랍 대봉기가 그 출발점이다. 1936년 봄, 팔레스타인에서는 유대인 공동체와 20년 동안 시온주의 프로젝트를 산파했던 영국 위임통치 당국을 겨냥한 봉기가 일어났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일어난 이 아랍 대봉기(Great Revolt)는 유대인, 영국인, 그리고 아랍인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오늘날 우리가 ‘중동분쟁’이라 부르는 사건 또한 이때 본격화되었다.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 대봉기는 민족적 정체성이 하나로 모였던 최초의 시기였다. 경쟁 관계의 가문, 도시와 농촌, 부자와 빈자 할 것 없이 모두 독립을 위한 단일 투쟁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봉기는 내전으로 비화되는 동시에 영국의 공격적인 진압, 시온주의자들의 반격으로 아랍 팔레스타인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로써 팔레스타인인의 전투력은 무력화됐고, 경제는 초토화됐으며, 대규모 난민이 발생했고, 유력 정치 지도자들은 추방됐다. 시온주의 종식을 목표로 시작된 대봉기는 오히려 아랍인들을 처절하게 분열시켰다. 이 때문에 그들은 10년 후 유대인의 이스라엘 건설에 맞설 수 없게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아랍 대봉기는 완전히 다른 유산을 남겼다. 대봉기를 목도한 시온주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아랍이 유대 국가 건설을 용인해주리란 환상을 버렸다. 주권국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원히 무력에 기대야 할지 모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봉기로 인해 수천 명의 유대인이 당대 최고의 군사 강국이었던 영국에 의해 훈련받고 무기를 지급받았다. 어설펐던 경비대는 강력한 유대인 군대의 씨앗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의 대학살과 히틀러의 위협 속에서 ‘분할’ ‘유대 국가’와 같은 불길한 단어가 처음으로 국제 외교 의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5년간 3개 대륙과 3개 언어를 넘나든 광범위한 기록 연구를 바탕으로 한 이 책은 단순한 사건 나열이 아니라 아랍, 유대, 그리고 영국 세력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 주요 인물들의 행동과 판단을 따라가며 서술된다.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역사의 장면을 통해서 아랍 대봉기 과정뿐 아니라 오늘날 중동분쟁의 패턴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들어가는 글:역사에서 사라진 팔레스타인 대봉기 11
1장 평온한 사막의 지배자들 21
신실한 소년 27│위임통치령의 탄생 33│팔레스타인의 잔혹한 봄 38│무프티 중의 무프티 42│평온한 나날들 47│고통의 나날들 50│벽은 우리의 것이다! 54│히틀러와 뜻을 같이하다 63│무사 얘기는 다르던데? 67
2장 피로 물든 야파 83
장작 패고 물 긷는 노예 91│테살로니키에서 온 남자 95│굉장한 도덕적힘 105│파업과 반격 112│동방에서 온 세 명의 왕 130
3장 두 국가 해법론 137
위원회, 항해를 떠나다 143│생각을 바꾼 대무프티 153│관개전문가의 등장 160│억누를 수 없는 갈등 173│예상치 못한 반향 181│두 총회 이야기 188
4장 검은 일요일 193
신의 선물 201│오직 이를 통해서만 209│불안한 운명 218│뒷걸음질 225
5장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기도 233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242│에덴동산 246│완벽한 대가관계 251│죽음이라는 특권 262│무법이 곧 법이다 276
6장 유대의 로렌스 283
사실의 논리 291│시온의 군대 299│9월의 두 주 318│디베랴와 타바리야 319│대무프티의 미소 324│다시, 필 330
7장 불타는 땅 339
자유 팔레스타인은 가능할까 350│3인방의 죽음 368│흩어진 마음 374│라헬, 내 민족을 사랑하는 384│다시 만납시다 387
마치는 글: 끝나지 않은 봉기 392
감사의 말 426
참고문헌 506
주 428
찾아보기 518
20세기 초 시온주의는 소수 이상주의적인 유대인의 전유물이었다. 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파이달라는 베를린에서 온 시온주의 지도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파이달라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유대인 이주에 반대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원하고 있죠. 유대인은 주변을 자극하고 활기를 불어넣는 진보적인 힘을 지녔으니까요. 문제는 숫자입니다. 유대인은 빵에 들어가는 소금과 같아요. 소량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너무 많이 넣으면 안 넣느니만 못 하다는 거죠.”
그 말을 들은 방문객이 말했다. “틀렸어요. 저희는 소금이 될 생각이 없습니다. 빵이 되려는 거지요.”
_ 27쪽 〈1장 평온한 사막의 지배자들〉 중에서
참극 속에도 영웅들의 이야기는 존재했다. 은퇴 후 텔아비브로 이주해 헤브론에서 여름을 나고 있었던 아런 번즈위그 라는 미국인은 자신이 겪은 일을 회상하며 “축복의 하나님이 크신 자비로 우리에게 뒷집의 아랍인을 보내주셨다”고 기록했다. 그를 구한 아랍인의 이름은 아부 마무드 알 쿠르디야였다. 쿠르디야 부부는 유대인을 자기 집에 숨기고 문 앞에 서서 폭도들에게 근처에 유대인이 없다고 말했다. 부부는 유대인 이웃을 숨긴 집 안에 열 살배기 아들을 함께 두고 안심시켰다. 집 안에 있던 아들은 부부가 알려준 대로 “여기는 유대인이 없어요. 다들 도망쳤어요!”라고 외쳤다. 아랍인 가정 수십 곳이 문을 열어 최소 250명의 유대인을 구했다. 카페라타는 이러한 아랍인이 없었다면 헤브론에는 유대인이 한 명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_ 58쪽 〈1장 평온한 사막의 지배자들〉 중에서
6월에는 유대인 아홉 명이 아랍인에게 살해됐고, 영국군이 아랍인 22명을 죽였다. 공격이 계속되자 정부는 비상조치를 더욱 강화했다. 정부는 공격이 발생한 도시와 마을 전체에 일괄적인 벌금을 부과하고 파업으로 문을 닫은 상점을 강제로 다시 열게 하는가 하면 반군 용의자의 집을 철거했다. 새로운 조치가 시행되며 강제수용소에 구금할 수 있는 기간이 최대 1년으로 늘었고, 무허가로 무기를 소지한 사람은 최대 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게 됐다. 군대나 경찰을 대상으로 한 시설 파괴 행위나 발포 행위는 종신형이나 교수형 대상이 됐다..
_ 119쪽 〈2장 피로 물든 야파〉 중에서
청문회는 긴 시간 이어졌다. 영국에서 30여 년을 지내며 의연한 태도를 연마한 바이츠만이었지만 슬슬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는 유럽의 유대인에게는 탈출구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600만 명의 유대인에게는 집이 필요했다. 아랍 봉기는 영제국을 조롱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아랍인들 사이에서는 반군 한 명이 총에 맞아 죽는 사이에 두 명이 영국의 무능함을 비웃다가 숨이 넘어간다는 농담이 유행했다.
바이츠만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저희 유대인의 존재 그 자체입니다. 위원회는 유대인에게 존재의 권리가 있는 것인지에만 답하면 됩니다. 그 답이 긍정적이라면, 거기부터 뭔가를 시작해볼 수 있겠지요. 저는 오늘 군더더기 없이 진실만을 말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가 해야 할 말은 다 했습니다. 더 이상 덧붙일 것도 없습니다. 지금보다 더 간절히 호소할 수도 없습니다. 제가 할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가타부타 결정을 좀 내려주십시오. 죄송합니다, 위원장님. 제가 좀 흥분했네요.”
_ 151쪽 〈3장 두 국가 해법론〉 중에서
그러나 제가 그리고 아랍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한 민족을 고통에서 구하기 위해 또 다른 민족, 즉 이 땅의 아랍 민족에게 똑같은 고통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
주어진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고 있었다. 안토니우스는 서둘러 결론으로 향했다.
“아랍인에게 죄가 있다면 그저 자기 나라의 발전과 진보를 보고 싶어 하는, 그 전통의 확립과 번성을 보고 싶어 하는 그리고 자신의 나라에서 자치와 자기존중과 존엄을 누리며 살고 싶어 하는 애국자였다는 것뿐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에게 중대한 불의가 저질러진 것입니다.
_ 159쪽 〈3장 두 국가 해법론〉 중에서
일주일 뒤 〈필 위원회 보고서〉가 공개됐다. 안토니우스는 친구에게 부탁해 오두막에서 약 1.6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가장 가까운 우체국에서 보고서를 받았다.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이 힘들었다. 결혼 생활은 무너지고 있었다. 보고서는 그의 일생의 과업, 아랍인과 팔레스타인을 서방 세계에 설명하기 위해 기울여온 노력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워싱턴에 있는 고용주에게 보낸 편지에서 〈필 위원회 보고서〉가 “수많은 오류와 부당한 가정으로 가득한 매우 불완전한 작품”이라고 비판했다. 영국에서는 이 보고서가 마치 새로운 “계시록”이라도 되는 양 칭송받고 있었지만, 그가 보기에는 가당치 않은 평가였다. 그는 보고서가 결론적으로 권고하고 있는 분할안이 부당하고 실현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_ 223쪽 〈4장 검은 일요일〉 중에서
가자에서 일했던 영국인 관리는 이렇게 회상했다. “아랍인이 싸워 지키고자 하는 대의는 수긍이 가고 정당하게 느껴졌다. 그들의 수단과 방법, 특히 비무장 상태의 무고한 유대인이나 심지어 자기 민족을 공격하는 방식은 야만적이고 용납할 수 없는 행위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존경과 호의가 충돌하면 호의가 우세하기 마련이다.”
이쯤 되면 팔레스타인 당국의 관리들이 자동반사적으로 아랍인에게만 호의를 베푼다고 여겼던 유대인의 불만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영국의 위임통치가 시작되고 20년 동안 유대인은 자신들에게 가장 호의적인 관리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요직에 앉는 행운을 누려왔다.
_ 238쪽 〈5장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기도〉 중에서
집행예정일 전날 밤, 벤요세프는 폴란드에 있는 옛 베타르 동료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활기 넘치지만 어딘가 어설픈 히브리어로 “친구들아, 나는 내일 교수형으로 죽는다. 나보다 행복한 사람이 또 있을까?”라고 적었다. 벤요세프는 자신의 죽음이 민족 해방을 위한 “전쟁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 어떤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유대 국가가 탄생할 것이라는 확신을 품은 채 죽을 것이다. (…) 제에브 자보틴스키 만세! 역사적 국경 안에 세워질 유대 국가 만세! 싸우는 히브리인 청년 만세!”
_ 26쪽 〈5장 예루살렘의 평화를 위한 기도〉 중에서
안토니우스는 유대인이 유럽에서 삶을 이어가는 게 불가능해졌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그러나 그 해결책을 팔레스타인에서 찾아야 할 필요도, 찾을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평소 인류애에 자부심을 가져온 에비앙회의 당사자들이 한심한 회의 결과를 바로잡아 “아랍 팔레스타인이 그동안 억지로 감내해야 했던 엄청난 희생의 일부분이라도 부담하는 데 동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에만 그 부담을 강요하는 것은 “문명 세계 전체의 의무에 대한 파렴치한 회피이며 도덕적으로도 부당한 행동”이라고 지적하면서 “한 민족의 박해를 완화하기 위해 또 다른 민족을 박해하는 것은 그 어떤 도덕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사실의 논리는 명확하다.” 그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미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고 있는 민족을 쫓아내거나 멸종시키지 않는 한 제2의 민족을 위한 자리는 만들어질 수 없다.”
_ 299쪽 〈6장 유대의 로렌스〉 중에서
윈게이트는 양파를 사과처럼 씹어 먹고 옷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채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런 괴짜 같은 모습 뒤에는 단순히 비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닌, 실제로 치명적인 진지함이 숨어 있었다. 벤구리온과 마찬가지로 그는 오직 한 가지 목표만 바라보는, 유머 감각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또한 벤구리온과 마찬가지로 그의 시선은 정치적·군사적 측면에서 온전한 유대 국가 건설을 실현하는 데 맞춰져 있었다. 유대인 부사관 교육 첫날 환영 연설에서 윈게이트는 그 야망을 선명히 드러냈다. 연설은 결연하지만 서툰 히브리어로 이루어졌다. 그는 이 연설에서 특유의 직설적인 태도로 유대인들조차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는 말을 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시온 군대의 기초를 세우고 있습니다.”
_ 317쪽 〈6장 유대의 로렌스〉 중에서
유대인 측과 아랍인 측이 첫 회의에서 보인 모습은 양측이 지닌 외교적 기술의 차이를 너무나도 극명히 드러냈다. 무사는 그 모습에 분노했다. 아랍인이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유리한 지형에 서게 됐는데, 어렵게 올라온 자리에서 내부의 이견을 드러내며 사소한 일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대표단 구성을 놓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대무프티는 반대파인 나샤시비 쪽 인사를 계속 거부했다.
독립을 위한 성숙함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체임벌린은 미혼인 두 누이에게 매주 보내는 편지에서 아랍의 첫 태도가 “너무나도 비타협적이고 극단주의적이어서 합의 도출의 가능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면서 “만약 양측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이 영국이 준비한 타협안대로 진행해야 할 것 같다”고 전했다.
_ 355쪽 〈 7장 불타는 땅〉 중에서
하지 아민은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만났다. 히틀러는 유럽 정복 후 중동에서 독일의 유일한 목표는 “영국의 비호 아래 아랍권에서 사는 유대인을 철저히 파괴하는 것”이라며 하지 아민을 안심시켰다. 그다음에는 나치 독일의 이인자 하인리히 힘러를 만났다. 힘러는 독일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 아민은 추후 아랍어로 작성한 회고록에 다소 건조한 문체로 이렇게 기록했다.
“그는 독일제국의 내무부장관이자 그 유명한 나치무장친위대의 친위대장이었으며 공안과 국가비밀경찰 게슈타포의 수장이었다. (…) 나는 힘러를 여러 차례 만났는데, 그의 영리함과 수완, 지식이 마음에 들었다.”
_397쪽 〈마치는 글〉 중에서
현대적 분쟁의 시작
아랍 대봉기는 어떻게 일어났나
1934년 11월 아랍의 비밀결사 검은 손(Black Hand)의 설립자이자 이맘인 이즈 알 딘 알 카삼이 팔레스타인 경찰에 의해 사망한다. 대규모 유대인 이민을 허가한 영국과 무장을 시작한 시온주의자들에 맞서 투쟁했던 알 카삼의 죽음은 팔레스타인 내 아랍과 유대 양측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이스라엘 초대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의 말처럼, 아랍인은 그 사건을 통해 “한 인간이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그의 죽음은 팔레스타인인에게 ‘도덕적 동력’을 부여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6년 4월 15일 텔아비브 야파에서 유대인 가금류 업자 하잔(Israel Hazan)이 아랍인들의 총격에 목숨을 잃는다. 총격을 가한 이들은 ‘알 카삼’의 원수를 갚기 위해 무기를 사야 한다며 기부금을 요구했고, 그에 응하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총을 쐈다. 하잔은 1936년에 시작된 아랍 대봉기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1930년대 팔레스타인은 아랍인의 민족 국가 건설 계획에 치명적인 위협을 마주한 상황이었다. 일단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을 위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한다는 영국-유대 간의 밸푸어 선언(1917)에도 소수를 유지하던 팔레스타인 내 유대인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한다. 4년 만에 2배 증가해 1937년 약 40만 명이 된 유대인은 이제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했다. 토지 매입도 급격히 늘어 1935년 유대인의 토지 매매 건수와 면적 모두 2배가 된다.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유대인 정착촌과 키부츠가 건설되기 시작한다. 전 세계적인 불황에서도 유대인이 지배하는 은행업, 산업, 건설업 부문은 번창했다.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내에서 정착촌을 지키는 무장단체 하가나, 노동조합연맹 히스타드루트, 유대인 경찰 노트림, 토지를 사들이는 유대민족기금, 임시정부인 유대인기구를 설립하는 등 이미 강력한 국가적 조직을 확립한 터였다. 반면 팔레스타인 아랍인에게는 이에 대응할 만한 조직이 거의 없었다. 양질의 일자리는 유대인이 장악했다. 이라크가 독립을 승인받고(1932), 시리아가 50일에 걸친 총파업 끝에 프랑스 철수 협상(1936)이 시작됐지만, 팔레스타인에서는 아랍인이 참여하는 입법의회조차 친시온주의 영국 정치가에 의해 무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알 카삼의 죽음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이스티클랄, Istiqlal)을 향한 열망, 그것도 무력 쟁취의 불씨를 당겼다. 알 카삼에 대한 복수, 독립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단 신념, 실질적 위협이 된 유대인으로 말미암은 아랍 대봉기는 시위와 불매운동, 공공시설 파괴, 게릴라전, 그리고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6개월간의 총파업을 포함해 3년간 지속된다.
아랍-유대 간의 투쟁 방식과 대응 논리의 기원을
치밀하게 재구성하다
현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미지 중 하나는 서안지구를 둘러싼 거대한 ‘분리 장벽’이다. 팔레스타인 땅에 뱀처럼 똬리를 튼 이 장벽은 2002년에 건설이 시작됐지만, 저자는 그 유래를 아랍 대봉기 진압을 위해 건설된 테거트 장벽(Tegart’s Wall)으로 본다. 1938년 경찰 자문관으로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찰스 테거트 경은 시리아와 레바논의 무장세력 침투를 막기 위해 국경에 철조망 울타리와 요새 건설을 계획한다. 자금 부족을 이유로 정부의 반대에 부딪힌 그에게 동아줄이 되어준 건 유대인들이었다. 시온주의 노동 지도부는 테거트의 요청에 1000명의 인력으로 3개월 안에 장벽을 완성시킨다. 시온주의자들에게 이 장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장벽의 위력을 확인한 것도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치안 유지에 유대인이 공식 활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도 유의미한 성과였기 때문이다. 장벽뿐 아니라 현재 이스라엘 군대가 시행하는 행정 구금 역시 대봉기 당시 영국 경찰이 용의자들을 구금했던 것에서 착안한 것이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테러범을 붙잡고 그 집을 철거하는 것 역시 위임통치 시기 영국이 쓰던 수법이다.
팔레스타인 아랍인 또한 대봉기의 유산을 상속받았다. 시위, 공공시설 파괴, 게릴라전과 총파업도 그렇지만, 오늘날 범아랍권으로 널리 퍼진 이스라엘 불매운동은 대봉기 기간 내내 지속했던 유대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과 유대인 손님에 대한 판매거부운동에서 비롯된 유서 깊은 방식이다. 1987년 결성된 팔레스타인 민족주의 정당이자 무장단체인 하마스는 자신들의 군사조직에 대봉기를 촉발한 알 카삼의 이름을 붙였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오스만식 페즈 모자를 벗고 아랍 무장투쟁의 상징인 체크무늬 케피예(머리에 두르는 아랍 전통 스카프)를 착용한 것도 대봉기 시기 아랍국가위원회의 지시에서 시작되었다.
저자는 아랍 대 유대 민족주의 충돌, 서로를 향한 공격과 대응을 치밀하게 재구성하면서도 ‘서술식 역사서’답게 유려한 이야기로 독자를 이끈다. 연대기가 아니라 현장감이 느껴지는 1936~1939년 팔레스타인의 시공간 속에서 독자들은 오늘날 아랍-유대 간의 투쟁 방식과 대응 논리의 원천을 파악할 수 있다.
맥마흔 선언 VS 밸푸어 선언
최대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말을 뒤집는 영국
맥마흔 선언과 사이크스-피코 비밀 협약, 밸푸어 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에서 영국의 목표는 오로지 자국의 이익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벌어지는 소요사태는 두고두고 골칫거리였다. 그때마다 영국은 국제연맹으로부터 부여받은 이중의 의무, 즉 “위임통치령이 비유대인의 시민적·종교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팔레스타인 내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기 위해서 각종 조사위원회를 꾸리고 백서를 발표한다. 실상은 그럴듯한 약속으로 아랍의 민심 달래기에 불과했고, 곧바로 무효화되기 일쑤였지만 영국은 위임통치 종료 때까지 이 전략을 포기하지 않았다.
1921년 야파에서 벌어진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식민장관 처칠이 발표한 〈처칠 백서〉, 1929년 8월, 예루살렘을 비롯해 20여 개 지역에서 벌어진 유혈사태의 대책 마련을 위해 발표한 〈호프 심프슨 보고서〉와 〈패스필드 백서〉는 모두 유대인 이민 허용치에 대한 제재를 약속했다. 그러나 시온주의 측의 로비와 홍보 총력전에 1931년 로이즈 조지 총리는 ‘대규모 유대인 이민은 계속’될 것이라는 일명 “검은 편지(Black Letter)”를 발표함으로써 이를 무효화한다. 이렇듯 영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은 대개 ‘맥마흔 선언-밸푸어 선언’ 패턴의 반복이었지만, 1937년 ‘필 왕립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1947년 국제연합 분할안, 클린턴 대통령의 클린턴 초안, 트럼프 대통령의 “세기의 거래” 그리고 바이든 정부의 공식 정책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할안’의 원전 격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1936년 아랍 대봉기 발발 후 파견된 필 위원회의 조사 과정을 유대와 아랍 측의 증언으로 재구성해 보여준다. 바이츠만(초대 이스라엘 대통령)을 비롯한 유대 측과 하지 아민(아랍고등위원회 창설자)과 같은 아랍 측 대표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른바 ‘두 국가 해법론’이 어떻게 제시됐는지 입체적으로 드러난다. 유대 국가, 아랍 국가, 영국 관리 구역으로 팔레스타인을 나누는 이 제안을 일컬어 위원회는 “깔끔한 분할(clean cut)”이라고 자평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유대인 증인 수, 시온주의자들의 로비 등으로 인구 대비 분할 면적뿐 아니라 위치 자체도 이미 시온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랍 측은 제안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고, 유대 측은 ‘유대 국가’는 받아들이되 보고서가 제안한 분할선은 거부하자고 협의한다. 대봉기를 잠재우기 위해 영국이 제시한 대책은 유혈사태를 잠재우기는커녕 봉기에 다시 불을 붙인다. 다시 영국은 〈우드헤드 위원회 보고서〉(1938)로 분할안 폐기를 권고하고 〈맥도널드 백서〉(1939)에서 독립적인 팔레스타인 국가 설립을 약속하는 등 말을 바꾸지만, 아랍 땅에 100년간 계속될 분쟁의 씨앗을 남긴 채 곧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대봉기가 진압당한 후 팔레스타인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까지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1939년 아랍 대봉기는 아랍에만 8000명의 사망자, 2만 명의 중상자, 4만 명의 난민을 발생시키며 영국군에 의해 진압됐다. 대봉기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경제는 그야말로 회복 불능 상태가 됐다. 지주들은 피난을 떠나고 농민들이 수천 명에 달하는 무장세력의 식량과 자금을 대느라 정신이 없는 동안 농작물은 모두 말라버렸다. 세수가 감소하고 정부에서 일하던 아랍인 수천 명이 충성을 의심받으며 직장을 잃었다. 아랍인 마을에서는 대봉기 기간 내내 비공식적으로 유대인 상점에 대한 불매운동과 유대인 손님에 대한 판매거부운동이 이어졌는데, 이 또한 아랍 상인들의 수입이 크게 줄어든 원인이 됐다. 한때 야파 항구를 통과했던 화물의 절반이 이제 유대인의 항구인 텔아비브로 갔다. 하지만 경제의 초토화보다 더 심각했던 것은 민족적 사기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대봉기를 계기로 아랍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 추방당했고, 대봉기를 진두지휘했던 아랍의 전사들 또한 영국에 의해 대부분 사망했다. 8000명의 아랍인 사망자 중 1500명이 같은 아랍인에 의해 살해당했을 만큼 내분 또한 심했다. 이런 상태에서 10년 뒤 194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인한 나크바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유대 진영에도 500여 명의 사망자와 1000명가량의 부상자가 발생했지만, 그들은 대봉기를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용했다. 그들은 3년간 단 한 곳의 정착촌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벽과 탑’ 사업으로 전략적 요충지에 60개의 정착촌을 추가로 건설했다. 아랍의 유대인 불매운동은 오히려 ‘자급 자족적이고 독립적인’ 유대인 농업과 산업을 만드는 데 직접적인 도움이 됐다. 시온주의 금속 산업과 무기 산업이 등장하면서 지뢰와 수류탄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곧 박격포와 폭탄의 생산까지 가능해졌다. 정착촌을 지키는 무장단체 하가나는 영국에 의해 대대적인 훈련과 무기를 지원받아 영국의 팔레스타인 치안 유지에 동참하기 시작했고, 건국 후 이들은 이스라엘방위군의 핵심이 되었다.
1936~1939년에 일어난 대봉기는 시온주의자들의 역사에서도, 아랍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를 유대인 자결권을 위한 투쟁으로만 볼 뿐 타인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행위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봉기는 그저 자신들의 위대한 건국 신화의 방해물일 뿐이었다. 아랍인들은 대봉기에서 교훈을 얻지 않았다. 나크바에 집중함으로써 작금의 상황에 대한 탓을 시온주의자나 주변 아랍 국가들, 영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돌렸다. 저자가 5년간 3개 대륙의 20개의 기록보관소를 넘나들며 아랍 대봉기를 재구성한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과거를 정확히 알 때 얽히고설킨 실타래의 첫 매듭을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오늘도 이스라엘에서는 90년째 아랍 대봉기가 이어지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땅에 평화는 찾아올 것인가. 이 책이 시급하고 시의적절한 이유다.
작가정보
Oren Kessler
텔아비브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저널리스트 겸 정치 분석 전문가. 미국에서 태어나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역사학부를 거쳐 이스라엘 라이히만대학교에서 외교와 분쟁 연구를 주제로 석사 과정을 마쳤다. 이후 이스라엘 일간지 《하레츠》와 《예루살렘 포스트》 등의 특파원으로 일한 뒤, 영국의 외교 싱크탱크 헨리 잭슨 소사이어티Henry Jackson Society와 미국의 외교 싱크탱크 민주주의수호재단Foundation for Defense of Democracies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다. 《포린 어페어》 《포린 폴리시》 등 외교 전문지와 《폴리티코》 등의 정치 전문 매체, 《월스트리트저널》과 《워싱턴 포스트》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에 꾸준히 다양한 글을 기고해왔다. 첫 저서인 《팔레스타인 1936》은 《월스트리트저널》 올해의 책과 《북리스트》 최고의 역사책으로 선정되었다.
서강대학교에서 영미문학을, 이화여자대학교 통번역대학원에서 한영통역을 공부했다. 졸업 후 국제교류 NGO를 거쳐 다양한 기관에서 상근 통번역사로 근무했으며, 현재는 좋은 책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번역 공동체 펍헙번역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대약탈박물관》 《자연의 발견》 《21세기 최고의 세계사 수업》 《걸리 드링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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