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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응

주의 기울임, 알아차림, 어우러져 살아감에 관하여
팀 잉골드 지음 | 김현우 옮김
가망서사

2024년 04월 26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3월 2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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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28.36MB)   |  약 15.5만 자
ISBN 979119797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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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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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응》은 최근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전회의 흐름을 이끄는 학자 중 한 명인 인류학계의 석학 팀 잉골드의 최신작이다. 2013년 이래 약 7년간 쓴 인문ㆍ예술 에세이를 모아 2020년에 냈다. 생태와 존재를 둘러싼 여러 예술 작업을 매개로 자신만의 철학적 노선인 ‘조응’에 관한 사유를 펼쳐 보인다.
조응이란 세계 속 우리의 존재가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타자와 사물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식하며 응답하려는 감각이자, 응답을 책임으로 바꾸어나가는 삶의 방식이다. 잉골드는 오늘날 지구를 위협하는 총체적 생태 위기가 초래된 것은 “인간이 조응하는 법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과학기술적 세계관과 기계화된 지식 생산 체계를 비판하며 공생과 지속가능성을 회복하는 삶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일상과 단절된 학술적 글쓰기를 비판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추상적 담론에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앎의 실천 방법을 찾기 위해 인류학의 경계에서, 예술·건축·디자인 영역을 넘나들며 길러온 구체적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학계를 넘어 지혜를 나누려는 태도로 조응의 글쓰기 방식까지 고민한 결과물이다. 노학자가 평생의 앎과 예술에 대한 감응을 직조해 짜낸 말의 무늬들이 독자를 느리고 깊은 읽기로 이끈다.
추천의 말_이라영, 박선민

들어가며
초대하며

1장. 숲속 이야기
카렐리야 북부 어딘가…
칠흑 같은 어둠과 불빛
나무라는 존재의 그늘에서
저, 거, 저것!

2장. 뱉기, 오르기, 날기, 떨어지기
거품이 이는 말의 침
어느 등산가의 슬픔
비행기에서
눈이 내리는 소리

3장. 땅속으로 숨기
가위바위보
애드 코엘룸
우리는 떠 있을까?
대피소
징역살이

4장. 지구의 나이
운명의 원소
돌의 삶
돌제부두
멸종에 대하여
자기 강화에 관한 세 가지 우화

5장. 선, 주름, 실
풍경 속 선들
분필선과 그림자
주름
선을 데리고 산책하기
글자선과 취소선

6장. 말을 다시 사랑하기 위하여
세계와 만나는 말
손 글씨를 옹호하며
디아볼리즘과 로고필리아
차가운 푸른 철

다음을 기약하며

응답의 글_주윤정

pp.21~22
세계의 부, 기후, 교육 등의 차원에서 나타난 불균형이 우리의 사유를 가로막고 정신적 삶을 위태롭게 할까 봐 두렵다. 정말이지 우리는 무사유라는 전염병을 마주하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은 바로 우리의 태도다. 우리는 세계를 사랑하기는커녕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양, 불균형이 초래할 결과에 대한 숙고를 회피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경고했듯 우리는 ‘세계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만큼 세계를 사랑할지 말지’를 결정해야만 한다. 아렌트의 경고는 제2차 세계대전이 수그러들기 시작할 무렵에 나왔지만 또다시 위기를 맞닥뜨린 오늘날에도 여전히 무겁게 다가온다. 아렌트는 우리가 세계를 다시 사랑해야지만 다음 세대에게 다시 일어설 희망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유하고 글 쓰는 기예를 머리뿐 아니라 마음으로도 다시 익혀야 한다. -〈초대하며〉 중

pp.29~30
인간을 넘어선 세계의 진실은 그 무엇도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비인간과 세계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인간도 각자의 입장에서, 돌은 돌 아닌 것과, 나무는 나무 아닌 것과, 산은 산 아닌 것과 세계를 공유한다. 그러나 돌의 경계가 어디까지이고, 어디부터 돌 아닌 것이 시작되는지는 결코 확정되지 않고 계속 변한다. 나무와 산, 그리고 인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고여 있지 않고 주변으로 새어나가는 것이 생명의 조건이다. 물론 우리는 사물을 구분할 수 있다. 내게 사람이나 돌, 나무, 산 등을 가리켜보라고 하면 나는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가리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온전히 홀로 존재하는 독립체entity가 아니다. 내 관심은 오히려 무언가가 일어나서 (나를 포함한) 주변으로 넘쳐 흘러가는 중인 장소로 향한다. 돌의 짓을 하고 있는 돌stone in its stoning, 뻗어나가는 나무, 솟았다가 푹 꺼지기도 하는 산이 보인다. 심지어 곁에 있는 인간이 인간의 짓을 하는humaning 모습을 보기도 한다. 우리는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를 동사로 바꿔야 한다. ‘돌의 짓을 하다’, ‘나무의 짓을 하다’, ‘산의 짓을 하다’, ‘인간의 짓을 하다’ 등. 그렇게 하면 우리가 다른 많은 존재와 공유하며 거주하는 이 세계가 더 이상은, 애초에 어떤 분류의 선에 따라 이런저런 존재의 종류들로 나뉘어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사물이 생성되면서 나타나는 주름과 구김살을 따라 스스로 계속해서 구별 짓는 중인 세계에 우리 자신이 내던져졌음을 깨닫게 된다. 모두는 저만의 구별 짓는 이야기를 지니고 있다. 좀 더 정확히는, 모두가 구별 짓는 이야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돌, 나무 또는 산의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나면서 이끼, 새, 산악인 등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되는 중인 사물 또는 존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초대하며〉 중

pp.46~47
숲속 나무들만큼 함께 어울려 성장하는 공생coviviality을 더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을까? 그들은 인간보다 훨씬 더 사회적이다. 인간이 일시적인 문제에 집착하며 왔다 갔다 하는 동안 나무는 자기 자리를 지킨다. 나무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기들끼리 소통한다. 오래된 나무는 선조들의 뿌리에서 싹을 틔우는 어린 묘목을 보살핀다. 우리 인간은 그들의 길고 장엄한 대화를 엿듣는 사소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도서관이나 성당에 들어가듯 경건한 마음으로 숲에 들어가라. 사회학은 바로 그곳에서, 당신이 나무를 배우면서 시작된다. 당신 눈앞에는 책장에 꽂힌 책처럼, 혹은 성당의 기둥처럼 줄지어 선 나무 몸통이 빽빽하게 펼쳐진다. 고대인은 라틴어로 나무 몸통과 책을 모두 코덱스codex라고 불렀다. 숲에서 각각의 나무 몸통, 즉 코덱스는 (오늘날의 책처럼 앞뒤 표지 사이가 아닌) 저 높은 곳에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성당 천장의 부채꼴 궁륭이나 창문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 격자처럼 말이다. 이를 읽으려면 목을 뒤로 한껏 젖혀야 한다.
숲속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나도 복잡하다! 라틴어로 ‘함께com’와 ‘접다plicare’가 합쳐져 ‘복잡하게 하다complicate’라는 뜻의 영단어가 되었듯이, 숲속의 모든 것은 말 그대로 함께 접혀 있다. 무리 지어 있는 나무들 사이에서 한 나무가 어디에서 끝나고 또 다른 나무가 어디에서 시작하는지는 헤아리기 어렵다. 나무들은 모자이크의 조각들처럼 경계를 사이에 두고 맞닿아 있지도 않고 각기 고립된 채 서로 등을 돌리고 있지도 않다. 그보다는 서로의 위아래로, 서로를 파고들며 접히고 어우러져 있다. 여기저기 비죽비죽 나와 있는 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것 같은 땅바닥, 울퉁불퉁하고 주름진 나무껍질,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더미를 살펴보라. 나무들이 무리 지어 빚어낸 모든 선은 세계라는 직물-구조가 구겨져서 만들어진 주름이다. -〈숲속 이야기〉 중

pp.86~87
숲에 사는 동물들은 이런 잔가지의 불규칙성에 대처하는 법을 알고 있으며 심지어 그것을 잘 활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잔가지는 새들이 둥지를 짓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재료다. 잔가지로 만든 구조물은 설령 가장자리는 울퉁불퉁할지언정 옹이, 갈래, 굽이 등에 의해 얽혀 있기 때문에 좀처럼 해체되지 않는다. 또한 구조가 성겨서 둥지를 세차게 흔드는 바람의 공격도 무던히 견뎌낼 수 있다. 인간도 동물들의 성취를 관찰하며 배웠고 잔가지를 엮거나 땋아서 우리, 덫, 바구니, 요람, 의자 등 생활용품을 만드는 고리버들 공예로 승화시켰다. 가정에서는 잔가지들의 한쪽 끝을 한데 묶거나 막대기에 매달아 고르지 않은 표면과 바닥을 쓰는 데 안성맞춤인 솔과 빗자루도 만들었다. 지금 언급한 이 도구들의 형태는 얽힌 잔가지의 탄력성과 마찰력으로 유지된다. 잔가지는 본래 큰 규모의 구조를 빈틈없이 만드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고, 그런 의미에서 전체를 이루는 부품이 되기는 어렵다. 잔가지의 형태는 하나하나 다르다. 모든 잔가지는 고유하다. 하지만 그것들이 모이면, 누군가에게는 거처가 될 수 있다. -〈저, 거, 저것!〉 중

pp.162~163
이것이 바로 오래된 인식 속에서 땅이 카펫이나 코덱스처럼 부피를 지니는 이유다. 지표면은 계절의 흐름과 날씨의 변화, 작물 재배에 따라 바뀐다. 현재가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과거가 위로 솟아오른다. 땅은 경작이 이루어질 뿐 아니라 기억을 품는 곳이기도 하다. 땅이 갈려 오래전에 살았던 사람이나 일어난 사건의 기억이 표면으로 떠오르면 거주자들은 마치 그 사람이나 사건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마주할 수 있었다. 이는 중세 시대에 기억을 생생하게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책을 읽은 방식과도 비슷하다. 책은 글자를 짚는 독자의 손가락을 따라 큰 소리로 낭독됐다. 마치 책장이 되살아난 과거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땅도 책처럼 지난 수확의 풍요로움을 떠올리게 하며 농부에게 말 걸었을 것이다. 흙에 심은 씨앗은 책장의 단어처럼 싹을 틔우고 자라날 것이다. 순환하는 주기를 따라 과거에서 비롯된 비옥한 땅은 계절마다 풍성했던 농작물의 기억을 되살리며 오늘날에도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애드 코엘룸〉 중

pp.171~172
오늘날 몇몇 국가에서는 원자력 시설에서 나오는 방사성 폐기물을 폐광 깊은 곳에 매장한 후 수천 년의 분해 기간 동안 방치하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전에는 야생동물의 안식처이자 원시림으로 바뀔 예정이었던 대상 지역의 거주자들에게 이러한 계획은 철저히 숨겨진다. 그 지표면에 서식하며 대기를 마시는 생명체들은 땅속에서 은밀하게 스며 나오는 독의 정체를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어떤 기록도 남지 않기 때문에 향후 조사로 드러날 비밀도 없다. 오늘날의 기술관료들이 다음 세대에게 그런 끔찍한 속임수를 거리낌 없이 쓰는 것처럼, 우리가 전혀 모르는 과거 세대도 우리에게 이미 속임수를 썼을까? 사막의 모래 속에 묻힌 고대 도시들처럼 현재에 만들어지는 퇴적물도 잊힐 수 있을까? 우리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지구와 하늘 사이 열려 있는 땅에서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도 못한 채 살아가야 할까, 아니면 인간 산업에서 비롯된 유물 혹은 잔재가 죽은 자의 영혼과 뒤섞여 있는 국립기술공예박물관 내부 같은 지하 세계의 유리 천장 위를 표류해야 할까? 지금 우리는 발붙이고 있는 것일까, 붕 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운명은 그 둘 사이에서 진동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떠 있을까?〉 중

pp.196~197
모든 종류의 살아 있는 존재는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 와중에 서로의 삶의 방식에 주의를 기울인다. 고양이는 포식자의 관점에서 감각하고 움직이고 상상하면서 쥐를 연구하고, 쥐 역시 그 못지않게 도망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양이를 연구한다. 식물은 태양과 바람의 변화, 그리고 먹이를 먹거나 수분受粉을 하러 오는 생명체들의 움직임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뿐만 아니라, 자기들끼리 경험을 나누기도 한다.
우리가 이런 활동을 생명체만 한다고 한정한다면, 분명 누군가는 반대할 것이다. 바위와 돌, 강과 빙하, 산과 바다를 빼놓을 수 없다면서 말이다. 이들에게는 감각이라는 것이 없고, 듣거나 반응하지도 못한다고 하면 세계 곳곳의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을 텐데 무작정 우리가 옳고 그들이 틀렸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세계에서 빙하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지역인 북서 태평양 연안에 사는 틀링깃족은 빙하가 들을 수 있고, 사람들이 빙하에 대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빙하가 화를 내거나 돌변하지 않도록 그 앞에서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 강조하는데 틀링깃족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실제로 빙하에 귀가 달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지질학이 부정하는 바를 명확하게 인정하고 있다. 빙하는 바로 그 경이로운 존재감으로 이 세계에, 우리에게 현존한다는 것이다. 빙하는 눈부신 흰빛, 엄청난 습기와 한기, 그리고 특히 폭발하듯 갈라지는 소리로 존재한다. 그러한 존재 방식이 곧 빙하의 말이다. 그 소리는 우리 귀에서야 비로소 들리는 소리가 되고, 귀 기울여 들어야 비로소 그것은 빙하의 이야기가 된다. -〈지구의 나이〉 중

pp.197~198
자연은 침묵하지 않는다. 할 말이 없을 수는 있다. 우리가 과학의 프로토콜이 요구하는 대로 세계에 대한 사실과 명제에만 귀를 연다면 정말이지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나무에 부는 거센 바람, 폭포의 울부짖음, 새들의 노래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소리들은 그저 명제에 그친다. 우리는 이 세계에, 세계에 속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무신경에서 비롯된, 세계의 사물의 침묵이라는 결과에 직면해 있다. 사물은 순수한 형태로 정제하고 이성의 범주에 따라 정리한 박물관의 전시품처럼 조용해졌다. 우리는 지구온난화로 서식지, 생물종, 심지어 빙하까지 사라질까 봐 걱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아직 세계에서 사라지지는 않았더라도 자연을 사실로, 앎을 해석으로 바꾸며 삶에서의 대화가 단절되었기 때문에, 이미 우리를 떠나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구의 나이〉 중

pp.269~270
모든 풍경은 만물의 움직임으로 만들어진다. 풍경 속의 선은 이 움직임들이 다양한 경로로 나아가며 남기는 물질적 흔적이다. 이러한 선을 지각한다는 것은 사물을 보이는 만큼만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움직이는 방향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또한 사물의 배치나 겉모습만이 아니라 사물의 결, 질감, 흐름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종이에 남은 흑연 자국이 나아가는 길을 보기 때문에 그것을 선으로 지각한다. 고랑이나 구름, 갈대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선은 그 선을 둘러싼 환경과 구별될 수 있지만 환경은 그 선과 구별될 수 없다. 연필 자국은 종이와 구별되지만 종이는 연필 자국과 구별되지 않는다. 고랑은 땅과 구별되지만 땅은 고랑과 구별되지 않는다. 구름은 하늘과 구별되지만 하늘은 구름과 구별되지 않는다. 갈대는 습지와 구별되지만 습지는 갈대와 구별되지 않는다. 빛나는 하늘 아래에서 들판의 줄무늬를 다시 한번 관찰해 보라. 인간의 노동으로 새겨진, 빗물에 젖고 바람에 휩쓸려 난 이 줄들은 힘과 마찰로 빚어진 선이다. 이 선들은 농사일의 노고이자 그와 교차하는 물의 흐름, 새의 비행, 그 와중에 새들이 잠시 앉았다 가는 전기 케이블의 형상으로 풍경을 가로지른다. 그렇다, 풍경 속에는 선이 있고, 우리에게는 이를 증명하는 니샤 케샤브의 사진이 있다. -〈풍경 속 선들〉 중

pp.311~312
이는 우리가 계속 나아가는 수단이자 우리를 날라주는 수단이다. 인간과 비인간 모두를 포괄하는 타자와 함께, 과거를 인식하고 현재의 조건과 섬세하게 조율하며 미래의 가능성에 유연하게 열려 있는 삶을 살아가는 수단이다. 나는 이를 조응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볼 때 그것과 정확히 일치되는 것, 복제물simulacrum을 떠올리지 않고 그것에 직접 개입하고 질문하고 반응함으로써 응답하는 감각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을 때의 감각과도 같다. 내게 ‘세계를 만나자’라는 말은 이러한 조응에 동참하라는 (권유, 더 나아가 명령에 가까운) 초대다. 동시에 그것은 이른바 ‘접선주의tangentialism’적 태도로 물러나 있으려 하는 연구자들의 비겁함을 향한 불만이다. 접선한다는 것은 연구를 통해 접촉하게 된 존재들의 삶과 시대에 자신의 작업이 너무 밀접하게 뒤섞이는 불편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힐끗 보는 데에서 그친다는 뜻이다. 정말이지 조응과 접선주의는 정확히 반대말이다. 두 태도에서 이해하는 학문의 의미도 전혀 다르다. -〈세계와 만나는 말〉 중

pp.316~317
말로 세계를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생명체마다 각자의 방식이 있는 와중에, 언어를 통한 교감이야말로 언제나 인간의 방식이자 권리였다. 우리의 말을 대립하는 말이 아닌 환영하는 말이 되게 하자. 심문하거나 취조하는 말이 아닌 질문하는 말, 재현하는 말이 아닌 응답하는 말, 예측하는 말이 아닌 기대하는 말이 되게 하자. 그렇다고 모두가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세계와 맺는 관계의 측면에서, 자신이 설파한 것을 실천하는 데에 명백히 실패했을뿐더러 사고의 일관성이나 표현의 선명함이라는 장점도 갖추지 못한 철학자들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장인이 물질을 다루듯 우리 자신의 말을 다루어야 한다는 뜻이다. 노동의 흔적을 새김으로써 만들어진 과정을 드러내고, 그런 새김 자체가 말의 아름다움이 될 수 있도록. -〈세계와 만나는 말〉 중

★ “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을 다시 일깨운다. 21세기에 꼭 필요한 책.” -한스-울리히 오브리스트(서펜타인갤러리 디렉터)

★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더 늦기 전에 조응의 사유와 삶을 익혀야 한다.” -주윤정(부산대 사회학과 교수)

★ 온전한 삶과 살리는 앎을 회복하기 위하여 인류학자 팀 잉골드가 전하는 공생의 사유

“세계에서 빙하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지역인 북서 태평양 연안에 사는 틀링깃족은 빙하가 들을 수 있고, 사람들이 빙하에 대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실제로 빙하에 귀가 달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지질학이 부정하는 바를 명확하게 인정하고 있다. 빙하는 바로 그 경이로운 존재감으로 이 세계에, 우리에게 현존한다는 것이다. 빙하는 눈부신 흰빛, 엄청난 습기와 한기, 그리고 특히 폭발하듯 갈라지는 소리로 존재한다. 그러한 존재 방식이 곧 빙하의 말이다. 그 소리는 우리 귀에서야 비로소 들리는 소리가 되고, 귀 기울여 들어야 비로소 그것은 빙하의 이야기가 된다.” -본문 중

오늘날 지구를 위협하는 총체적 생태 위기가 초래된 것은 “인간이 조응하는 법을 망각했기 때문”이라고 영국의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말한다. 그에게 ‘조응’이란 세계 속 우리의 존재가 인간과 비인간을 포괄하는 타자와 사물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인식하며 응답하려는 감각이자, 응답을 책임으로 바꾸어나가는 삶의 방식을 뜻한다. 근대 이후 인간중심적 문명의 폐해는 과학기술적 접근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 그 자체가 자본주의·군사주의와 긴밀하게 얽혀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또한 기계화된 지식 생산 체계 역시 더 이상 세계를 회복하는 앎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런 와중에 인간을,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는 상호작용의 그물망 속 하나의 존재자로 되돌려야 한다는 잉골드의 입장은 일견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를 위시한 신유물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잉골드의 문제의식은 한발 더 나아간다. 자신의 입장이 추상적 철학 담론에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생태 윤리를 향한 주장이 인간과 세계 간 근본적 단절을 초래한 학계의 지식 생산 관습 속에서 재생산된다면 무슨 소용인지를 재차 묻는 것이다. 잉골드는 최근의 신유물론, 포스트휴머니즘 논의가 제안하는 ‘네트워크’의 중심에 여전히 근대적 인간중심성이 있음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정말로 위기를 해결하려면, 철학적 담론의 폐쇄적 자기지시성에서 피난처를 찾기보다는 바로 이 세계의 거주자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일갈한다.
잉골드가 자신만의 노선으로 제시해 온 ‘조응’은 이론이기 이전에 구체적인 몸의 감각이자 행위이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서로의 삶에 반응하고 개입하며 얽혀 세계를 이룬 방식이다. 1970년대에 핀란드 라플란드에서 순록 사냥 및 사육을 주로 하며 살아가는 사미족의 생활 양식을 연구한 경험은 이런 관점의 뿌리가 되었다. 자신들의 삶을 인간의 언어로 가르칠 수 없다고 생각한 사미족과 지내면서 잉골드는 자연 및 동물과의 관계, 전통적으로 앎이 발생하고 수행된 과정을 직접 몸으로 깨쳤다. 그 이후 그는 문명의 전개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본연의 조응을 다시 익혀야만 세계의 지속가능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그 실천 방법을 찾기 위해 인류학의 경계에서 활동해 왔다. 재직한 애버딘대학교를 중심으로 인류학적 접근과 예술ㆍ건축ㆍ디자인 등 물질적 창작을 아우르는 교육과 연구를 해왔다. 이를 통해 손과 몸의 기술로서의 예술, 그 과정에서의 사유와 윤리의 사례를 만드는 독창적인 행보를 보였다.
《조응》은 최근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대대적인 성찰과 인식ㆍ존재론적 전회의 흐름 속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학자 중 한 명인 인류학계의 석학 팀 잉골드의 최신작이다. 2013년 이래 약 7년간 쓴 인문ㆍ예술 에세이를 모아 2020년에 냈다. 자신의 주요 관심사인 생태와 존재에 관한 여러 예술 작업을 매개로 한 이 글들을 일컬어 잉골드는 예술과 주고받은 ‘편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조응’을 가리키는 영단어 ‘correspondence’에는 ‘편지 주고받기’의 뜻이 있으며, 잉골드는 상대방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편지 쓰는 감각이야말로 조응이라고 설명한다.) 삶과 맞닿지 않는 학술적 글쓰기를 비판해 온 저자는 이 책에서 “학문적 관행이라는 족쇄를 벗어던지고 아마추어로서 자유롭게 썼다”고 밝힌다. 학계를 넘어 지식 아닌 지혜를 나누려는 태도로 ‘조응’의 내용뿐 아니라 그에 걸맞은 글쓰기 방식까지 고민한 결과물이다. 노학자가 평생의 앎과 예술에 대한 감응을 한땀 한땀 직조해 짜낸 말의 무늬들이 오래된 풍경처럼 펼쳐지며 독자를 깊고 느린 읽기로 이끈다.


★ “땅을 생명이 뿌리내린 장소가 아니라 소유를 위한 영토로 바라보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잃어버리고, 혹은 잊고 있는가. 잉골드의 에세이는 연결된 존재들 사이의 세심한 관계를 다룬다.” -이라영(예술사회학자)

★ 구체적인 것을 향한 사랑의 윤리로 세계의 경이 속에 함께 살아 있기

“인간을 넘어선 세계의 진실은 그 무엇도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비인간과 세계를 공유한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비인간도 각자의 입장에서, 돌은 돌 아닌 것과, 나무는 나무 아닌 것과, 산은 산 아닌 것과 세계를 공유한다. 그러나 돌의 경계가 어디까지이고, 어디부터 돌 아닌 것이 시작되는지는 결코 확정되지 않고 계속 변한다. 나무와 산, 그리고 인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고여 있지 않고 주변으로 새어 나가는 것이 생명의 조건이다.” -본문 중

지구가 형성되고 물질이 작용하고 시간이 흐르고 눈과 비가 내리고, 생명이 약동하는 생태 현상을 다룬 예술에 관해 사유하며 저자는 우리가 잊은 세계의 근원을 생생히 나타내려 한다. 레드우드 나무를 태워 칠흑 같은 어둠을 만들어내는 조각가 데이비드 내시의 작업으로부터 빛과 색의 연원과 발현을 보고, 오래된 나무 속 나이테로부터 이전의 어린나무들을 포착한 조각가 주세페 페노네의 작업을 통해 장엄하게 이어지는 자연의 시간을 느낀다. 지구온난화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다양한 눈 내리는 소리를 좇는 예술가 미켈 니에토의 작업을 따라 날씨를 표현하는 언어의 형성을 발굴하고, 산업혁명기의 유산인 석탄 하역장 재생 프로젝트를 소재로 삶의 터전의 지속가능성을 질문한다.
학자들의 “세계를 대상화하고 거리를 유지하는 무균 상태의 말” 대신 아마추어의 “이끌림과 자율성, 책임감으로 몰두하는 말”로 쓰인 글에서는 이 하나뿐인 세계와 세계에 속한 존재들, 그리고 살아 있음을 향한 깊은 사랑이 묻어난다. 그 사랑이 바로 잉골드가 지닌 생태 윤리다. 그는 “세계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만큼 세계를 사랑할지 말지 결정해야 한다”는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오래된 경고를 인용하며 생명과 삶을 근심하는 연구자의 역할이란 현란한 개념과 드높은 지성의 경지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고 알아차리며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임을 몸소 보여준다.
조응하려면 무엇보다도 타자와 사물에 대한 인식틀부터 뒤집어야 한다고 잉골드는 말한다. 어떤 존재도 인간의 근시안적 상상처럼 고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사물을 지칭하는 명사를 동사로 바꾸기를 제안한다. 그들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위하며 스스로를 생성해 내고 있다. ‘돌’이 아니라 ‘돌의 짓을 하는 돌’, ‘나무’가 아니라 ‘나무의 짓을 하는 나무’, ‘인간’ 역시 ‘인간의 짓을 하는 인간’으로 대할 때 서로 어우러지며 영향을 주고받는 생태의 진리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다.
저자는 그런 관점에서 숲과 바다, 생태계를 바라보고 이야기를 전해준다. 오래전 빙하의 움직임과 지각 변동의 흔적을 읽어내며, 자연에 기대고 깃들여 살았던 인간 삶의 흥망성쇠를 떠올린다. 다양한 존재자들이 끊임없이 얽혀 온 움직임 자체가 놀라운 드라마임을 예민하게 드러낸다. 그 감수성과 통찰력을 통해 우리는 한 생명체로서 세계의 경이 속에 함께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된다.


★ “이 책은 가장 인간적인 문화의 결정체인 예술 역시 결국 자연이라는 무한한 우주 안에서 구분되지 않고 함께 존재하고 있다 말하며 걱정 많은 예술가인 나를 안심시킨다.” -박선민(미술작가)

★ 다시 세계에 생의 약동을 불어넣고 시적으로 거주하는 삶을 요청하는 독창적 존재론

“자연은 침묵하지 않는다. 할 말이 없을 수는 있다. 우리가 과학의 프로토콜이 요구하는 대로 세상에 대한 사실과 명제에만 귀를 연다면 정말이지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나무에 부는 거센 바람, 폭포의 울부짖음, 새들의 노래 등이 들리지 않을 것이다. 들리지 않는 소리들은 그저 명제에 그친다. 우리는 이 세계에, 세계에 속한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본문 중

세계가 전해주는 “은유적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예술의 방식을 경유해 잉골드는 강조한다. 우리가 발 디딘 땅과 경관은 온갖 삶들이 이어져 이룬 터전이라는 것, 땅이 갈아엎어지며 되풀이해 작물을 맺었듯, 이 세계의 시간은 선형적으로 지나가지 않고 가라앉고 드러나고 깎이고 새기는 만물의 움직임들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ㆍ순환된다는 것. 이런 통찰은 문명과 제도에 대한 이해를 뒤흔든다. 우리는 과연 진보해 왔는가? 인간 진보의 최전방으로 여겨지는 거대한 규모의 과학기술과 고도로 추상화된 지식으로 과연 지금의 기후위기와 멸종의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회복할 수 있는가? 질문은 거듭되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새로운 화두가 던져진다.
근대적 사고방식의 틀을 넘어 다시 거주지로서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하려는 사유의 여정은 앎의 기본 요소인 말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잉골드에게 말은 존재를 나타내고 타자와 관계 맺는 가장 인간적인 역량이자 권리로, 말의 타락이야말로 인간과 세계 간 관계가 파국에 이른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잉골드는 세계와의 단절을 가속화하고 숙고를 가로막는 말의 사용을 분석한다. 예를 들면 영국 국방부가 발표한 군사용어 중 상당수가 약어임을 지적하며, IED(급조폭발물), WMD(대량 살상 무기), SAM(지대공 미사일), NKZ(핵 살상 지대) 등의 두문자어가 차마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악한 힘의 작용을 간단한 사안처럼 포장해 실재로부터 분리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경향은 기업과 국가 권력에 힙입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비례해 심화되고 있다.
평생 생태와 삶을 탐구해 온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호소한다. 인간에게 주어진 귀한 삶의 방식인 언어와 이를 통한 교감을 회복하자고, 환영과 질문과 응답으로 말을 다시 빛나게 하자고, 장인처럼 우리의 말을 다시 다듬고 빚어내자고. 그런 의미에서 잉골드는 ‘언어’ 역시 명사 아닌 동사로, ‘언어하기’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 언어 역시 말하는 이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것으로 인식해 조응하자는 것이다. 한 예로 인간의 목소리와 몸짓과 정동과 고유성, 시간의 흐름을 품은 말과 손 글씨는 각자의 자리에서 다시 세계에 삶의 힘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이며 그것을 수행함으로써 우리는 이 세계에 다시 시적으로 거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팀 잉골드

(Tim Ingold)
팀 잉골드는 애버딘대학교의 사회인류학 명예교수다. 1948년생으로,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99년부터 애버딘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70년대부터 핀란드 라플란드 지역 사미족을 대상으로 현장 연구를 수행했으며 생태학, 진화론, 환경에 대한 지각과 숙련된 기술의 수행 등을 주제로 글을 썼다. 인류학과 고고학, 예술, 디자인 및 건축의 접점을 찾는 교육과 연구를 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라인스Lines》(2007), 《메이킹Making》(2013),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The Life of Lines》(2015), 《팀 잉골드의 인류학 강의Anthropology》(2018), 《조응Correspondences》(2020) 등이 있다. 영국학사원과 에든버러 왕립학회 회원이며 2022년에는 인류학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제국훈장을 받았다.

지역 기반 문화 기획자로 활동했다. 출판 편집, 지역 콘텐츠 제작, 국공립미술관 전시 자료 번역 등의 일을 해왔다. 여러 언어 사이를 오가는 것을 좋아하고 말을 다루는 세계에 오래 남고 싶어 출판 번역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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