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랑한 나날
2024년 04월 19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12월 22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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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91193497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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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젯밥 서른 그릇과 탕국 두 다라이, 그리고 음복
음주가무를 장려하는 가정교육
원의 봉합술
24학번들이 이 글을 보지 않기를
영화제를 누가 영화 보러 가나
지속 가능한 술수저
365가지의 마실 이유
도쿄 가라오케 바의 혼노자
음주 연애 시뮬레이션 3부작
거기서부터 쓰기
술에 지지 않는 비밀, 마술싸
성공의 맛을 느끼고 싶다면 혼마카세를 먹으러 가자
술맛 나게 해 준 동료에게 바치는 헌사
절망의 도수
여보세요, 여기 신촌지구대인데요
술 좋아하는 나의 팀장님
Z세대 술렁각시들
‘그러나’의 시간
남자 어른들이 나가고, 접시며 그릇을 치우고, 남은 음식을 모아 마당의 개에게 밥을 주고, 그제야 여자들도 식사할 차례가 되었다. 에그 허리야, 니미 죽겄네 등등의 추임새와 함께 둘러앉은 여자들. 나는 조신한 어린이답게 어머니들의 눈치를 살피며 잠자코 나물밥을 비비고, 의젓한 언니 어린이답게 사촌 동생들의 나물밥까지 비벼 주었다. 큰 큰어머니는 속이 부대꼈는지 밥이 안 들어간다며 연신 탕국만 들이켰다. 다른 어머니들도 말없이 깨작대기만 했다. 그때 엄마가 부엌에서 무언가를 들고 왔다. 커다란 주전자였다. 가까이 가져오자 주둥이 사이로 달큼하고 요사한 냄새가 솔솔 났다.
--- p.22
큰어머니들은 이윽고 커다란 물컵에 음복주를 콸콸 부어 마셨다. 입으로 들어가는 안주는 지짐이였으나 상 위를 떠다니는 안주는 남편들이었다. 부산 놈팡이, 구미 시방새, 대구 개놈의자슥, 울산 망할놈 등등 경상도 곳곳에 사는 남의 편들이 경쟁적으로 씹혔다.
--- p.23
저는 언젠가는 제사를 졸업할 거예요. 음복주의 영험한 기운을 빌려 괘씸하게도 나는 조상님께 그런 소원을 빌었다.
--- p.24
겪어 본 적 없는 고약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깨자 밥 짓는 냄새가 솔솔 났다. 엄마가 북엇국을 끓여 놨으니 와서 먹으라고 했다. 학교에는 오늘 못 간다고 말해 놨으니까 천천히 밥 먹어라. 니들끼리 술 마시니까 재밌드나? 토할 정도로는 왜 마셨노? 속은 안 아프나? 대답도 못하고 국물만 퍼먹고 있는 나에게 엄마는 빨래를 개면서 비죽비죽 웃으며 말을 건넸다. 니 술 먹는 건 괜찮은데 무섭고 괴로울 정도로는 먹지 마라. 나는 쪽팔려서 그저 끄덕이며 북엇국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 p.34
신입사원 시절 처음으로 팀에서 온에어 시킨 광고는 (술꾼에게 참으로 적절하게도) 숙취해소 음료 TV 광고였다. 그때 경쟁PT에서 승리한 세일즈 전략은 ‘헛개차를 마실 이유를 매일 만들어 주어 음용 횟수를 늘리자’였다. 술을 마실 이유는 예고 없이 매일매일 찾아오니까.
--- p.73
오오. 칸코쿠진이 니혼고 노래를? 손님들은 신기해하며 소리를 질렀다. 스고이! 양복에 넥타이를 하고 뿔테 안경을 쓴, 일드 속 전형적인 직장인 스타일의 남성이 감탄사를 전했다. 스바라시! 모오 잇쿄쿠 오네가이!(근사한데! 한 곡 더!) 단골로 보이는 기모노 차림의 할머니도 말했다. 밤이 점점 깊어지며 의자에 못 앉은 손님이 생길 만큼 가게는 붐볐고, 나는 어쩐지 국위선양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으쓱해져서 나중엔 급기야 소녀시대 노래의 떼창을 유도하기까지 했다……
--- p.85
그러나 딱 한 사람, 내 옆자리에 앉은 사람만은 내 쪽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고독한 모습이었다. 혼자서 하이볼을 몇 잔째 마실 동안 이따금 핸드폰을 볼 뿐 말이 없었다. 그렇게 밤이 너무 늦었나 싶어 숙소로 돌아가는 길을 찾아보려 할 때쯤 갑자기 그 사람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화면 속 구글 번역기에는 서투른 번역 투의 한국어가 이렇게 적혀 있었다. [Nakashima Mika의 ‘눈의 꽃’을 부탁해도, 될까?] 스물다섯의 나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모치론데스(물론이죠). 그 노래를 마지막으로 도쿄의 지하철이 끊겼다.
--- p.86
8년 차가 된 지금은 술을 얻어먹을 일보다 사 먹일 일이 더 많아졌기에 열심히 빚을 갚고 있는 셈이다. 후배에게 술을 사 주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몸소 깨닫고 있다. 사회초년생인 너의 월급에서 이삼만 원이 얼마나 큰 출혈인지를 헤아리는 마음. 자랑할 일보다 좌절하는 일이 더 많을 너에게 이렇게라도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 오늘 나와 마신 술의 중량만큼 내일의 네가 더 오래 좋은 동료로 남아 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 마음을 신용카드에 눌러 담아 이제는 나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됐어, 너도 나중에 선배가 되면 후배들에게 갚아 줘. 그러고는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코를 만지며 생각하는 것이다. 와씨, 간지 작살났네. 선배도 예전에 밤에 누워 이렇게 생각하셨을까?
--- p.124
놀랍게도 술 퍼마실 생각이 우리를 더 열심히 일하게 만든다. 술 생각과 일 생각이 반비례할 것이라는 편견은 마치 학생이 연애를 하면 성적이 떨어질 것이라는 가정만큼이나 허술한 지레짐작인 것이다.
--- p.151
이미 단단하게 굳어 버린 무언가를 한 꺼풀 벗겨 그 너머의 이면을 드러내는 힘이 술에는 있다.
--- p.167
우리는 음주가무의 민족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 일도 열심히 하는…
왠지 지치는 날에도, 더없이 기쁜 날에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편의점에 들러 4캔 만 원짜리 맥주를 신중히 고르는 대한민국의 성인에게 술은 각별한 존재다. 삼겹살에 소주는 한국인의 소울푸드일 것이며 스포츠 관람 시에는 치맥이 필수인 데다 음주 후는 물론 맨정신으로도 노래방을 찾고 공연장에서는 떼창이 당연한 우리는 과연 음주가무의 민족이라 할 만하다.
성가대 뒤풀이로 진행된 엄마의 술자리에 따라가게 된 일곱 살 박지우 양은 “헬보이처럼 붉어져” 가는 어른들의 얼굴빛을 지켜보며 “아무리 재미있는 TV 프로도 이 자리만큼 흥미진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몸소 겪고서 그때부터 마실 수도 없는 술을 사랑하게 된다. 13년 후를 기약하며…
그가 음주가무 전문가로 성장한 데에는 이렇듯 오랜 역사가 있었다. 이제는 시대가 조금 변한 것 같지만, 뿌리 깊은 음주가무의 민족답게 미성년자 시절 부모님이나 가까운 어른으로부터 술잔을 건네받아 본 경험이 한 번씩은 있을 것이다. 어른이 주는 술은 괜찮아, 하는 말과 함께. 물론 이것을 올바른 문화라고 볼 수는 없지만 처음 술을 접할 때는 믿을 만한 어른이 함께인 게 좋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친구들이 놀러 온 집에서 엄마가 따라 준 맥주를 마셨던 첫 음주의 기억과 여고 남고 사이의 연합 자리에서 경쟁하듯 마셨던 폭주의 여파를 비교하며 안전한 술자리와 위험한 술자리의 간극을 일찍이 깨달은 작가는 “술 먹는 건 괜찮은데 무섭고 괴로울 정도로는 먹지 마라” 했던 엄마의 조언을 깊이 새기고 훗날 비로소 건강한 음주가무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신도 재미도 나지 않지만 아 신이 난다! 아 재미난다! 더 게임! 오브 데스!라고 외칠 줄 알아야만” 했던 술 게임과 이어지는 ‘탑 쓰리 지목 의식’까지 여학우에게만 이상한 온도 차가 적용되었던 2010년대 대학가의 음주 문화와 맞서 싸우고, 인턴 카피라이터로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선배들에게 얻어먹었던 밥과 술의 값만큼 이제는 후배들에게 술 잘 사 주는 멋진 언니가 되어 열심히 빚을 갚고 있다. 음주의 시대는 그렇게 대물림되는 동시에 조금씩 진보했다. 술 마시는 저녁 시간을 지키기 위해 업무 시간에 더욱 집중하는 프로페셔널한 음주인의 나날은 찰랑이는 술잔처럼 찬란하다. 술꾼은 자기 일이나 삶을 돌보는 데 소홀할 거라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 버리는 것이다.
자기 일을 사랑하는 멋진 어른이 되기까지의 우여곡절과 웃음의 힘을 믿는 사람의 유쾌한 일상을 술술 풀어낸 이 책은 그야말로 ‘술 이야기 읽는 재미’를 진하게 선사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술 문화부터 국위선양이라도 하듯 노래 실력을 뽐냈던 도쿄 가라오케 바에서의 어느 밤과 신입사원 시절 처음으로 팀에서 온에어 시킨 광고가 공교롭게도 숙취해소 음료 광고였던 일, 과거의 팀장님이자 또 한 명의 애주가 김민철 작가와의 에피소드까지 읽다 보면 취하는 기분이 드는 그의 음주가무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당신에게
“어떻게, 오늘도 한잔?”
‘혼술 지위 정상화 운동’을 이끄는 박지우 작가는 “이번 달이 유난히 벅찼던” “사람에게 치인 나머지 고독이 그리워진” 모두에게 혼술을 권한다. 직장인이라면 월급날에 혼자 오마카세를 먹으러 가는 사치를 누려도 좋다. 술과 나의 시간을 통해 또다시 달려 볼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러다가 사람들과 부대끼는 술자리의 분위기가 그리워지면 친구나 동료에게 슬쩍 운을 떼 보는 것이다. 어떻게, 오늘?
우리가 술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술보다는 술자리의 분위기가 재미있어서, 맨정신으로는 하지 못할 말과 행동을 해 버릴 용기를 줘서, 한잔 마시면 다 잊고 푹 잘 수 있어서, 그냥 맛있어서… 하루의 끝에 경쾌한 ‘캬~’ 소리로 나를 달래 주는 술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과하지 않은 음주가무는 신체와 정신 건강에 두루 유익할 게 분명하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있는 힘껏 좋아한다고 말하는 애주가 박지우의 도수 높은 고백을 읽으며 오늘도 고생한 자신에게 격려의 술 한잔을 건네 보아도 좋을 것이다.
“술의 힘에 기대면 뭐 어떤가. 일 잘하는 용사는 물약부터 똑똑하게 쓰는 법이다.”(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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