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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국제질서 맥락으로 이해하기

패권 전환기 속 대한민국의 미래
정하늘 지음
국제법질서연구소

2024년 05월 01일 출간

종이책 : 2023년 11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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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9.12MB)
ISBN 979119841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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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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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한 국제뉴스가 쏟아지는 오늘날, 국제정세를 읽는 문해력은 어느덧 모든 이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소양이 됐다. 그러나 복잡한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고 자신만의대응 전략을 세우기 위해서는 먼저 근저에 깔린 국제질서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 정치, 경제, 이념, 기술의 발전이 수천 년에 걸쳐 켜켜이 쌓여 형성된 국제질서는 그 맥락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 국제질서 맥락으로 이해하기 - 패권 전환기 속 대한민국의 미래”는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국제질서를 하나의 흐름으로 풀어 독자에게 전달하는 책이다. 이책은 인류의 역사와 사상의 진화에 따른 국제질서의 변천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현행국제질서가 어떠한 경로를 따라 오늘날까지 왔고, 또 인류의 역사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동서냉전 이후 등장하여 최근까지 유지된 미국 중심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정확히 무엇이었으며, 21세기에 초강대국으로 부상한 중국의 도전이 현행 국제질서에 어떠한 변화를 불러왔는지를 쉽고 심층적으로 풀어낸다. 나아가 최근 변화하기 시작한 국제질서가 우리 삶에 미칠 영향과,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주요 국가들이 가진 저마다의 복안을 분석하고 대한민국이 가져야 할 자세를 제안한다.
복잡한 사안일수록 나무가 아닌 숲을 보는 눈이 필요하다. 한 치 앞의 국제정세도 내다보기 어려울 만큼 엄중한 오늘날, 이 책을 통해 자신만의 시각으로 국제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눈을 얻을 수 있다면 분명 대한민국의 모든 이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제1장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01. 급변하는 세계
1980년대 서울
2018년 서울
그리고 현재
02. 세계는 분열되고 있다
변화하는 국제질서
과도기 속 기로(岐路)에 선 대한민국
제2장 패권의 역사, 그리고 질서의 진화
01. 소개
02.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이상
패권주의와 자유주의
자유주의 사상의 본질
자유주의와 국제사회의 이상향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이론적 토대
이상과 현실의 차이
03. 힘의 균형 위에 세워진 질서와 평화, 그리고 붕괴
영국과 러시아의 ‘그레이트 게임’
비스마르크와 통일 독일제국의 등장
파국의 씨앗
04. 제1차 세계대전과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시도, 그리고 실패
전쟁의 경과
종전과 구질서의 붕괴
자유주의 이상 구현을 위한 시도
국제연맹의 실패와 자유주의 이상의 한계
05. 제2차 세계대전과 구시대의 종말
전쟁의 배경
전쟁의 발단
전쟁의 경과
종전과 새로운 패권 질서의 부상
06. 동서냉전의 시대
양극화된 패권
핵무기 경쟁
이념 경쟁
경제 경쟁
냉전기의 국제질서
냉전의 경과와 종결
제3장 팍스 아메리카나와 자유주의 국제질서
01. 미국의 세계 패권과 자유주의 국제질서
‘팍스 아메리카나’의 이해
마침내 현실에 구현된 자유주의 국제질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성격
세계화와 통합된 세계
02.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지탱하는 힘
미국의 패권적 힘
다자주의로 뭉친 국제사회
03.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빛과 그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기
미국 일방주의와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패권성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기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그림자
04. 팍스 아메리카나의 황혼
9·11 테러와 테러와의 전쟁
2008년 금융위기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과 미국 우선주의
정치 양극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2021년 아프가니스탄 철수
제4장 미·중 패권 경쟁의 시대
01. 미·중 패권 경쟁의 올바른 이해
02. 중국의 굴기(屈起)
중화(中華) 백 년의 기연이 된 WTO 가입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거인
패권을 향한 선전포고
03. 미·중 무역분쟁
분쟁의 배경
WTO 체제의 한계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對中) 무역분쟁
바이든 행정부가 계승한 미·중 무역분쟁
글로벌 가치사슬의 단절과 글로벌 공급망의 분절
경제제재의 시대와 자유무역질서의 종말
04. 미·중 기술 경쟁
중국의 기술 굴기
4차 산업혁명과 기술 패러다임의 전환
중국의 반도체 산업을 정조준한 미국의 수출통제
05. 미·중 안보, 군사 경쟁
아직은 절대적인 격차
미·중 핵무기 경쟁
인도·태평양에서 벌어지는 지정학적 경쟁
06. 미·중 패권 경쟁의 결과
중국은 세계패권국이 될 수 있을까?
중국은 미국과 양극체제를 형성할 수 있을까?
중국은 21세기에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강대국이 될 수 있을까?
중국은 미국의 세계 패권을 해체할 수 있을까?
07. 해체되는 미국의 세계 패권
제도적 패권의 약화
반미연대와 글로벌 사우스의 발호
달러 패권의 약화
08. 전환기의 평화를 위협하는 변수
제5장 우크라이나와 대만해협
01. 불길한 변수
02. 우크라이나 전쟁과 도미노 효과
전쟁의 배경
전쟁의 경과
우크라이나 전쟁의 함의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
우크라이나 전쟁과 대만해협
03. 미·중 패권 경쟁의 잠재적 승부처가 된 대만해협
대만해협에서의 미·중 군사 대치 상황
미국의 전략
대만의 대응
침공 가능성과 침공 시점
전쟁을 피하기 위한 노력
04. 우크라이나와 대만, 그리고 한반도
단기적 영향
중장기적 영향
제6장 패권국이 없는 세계
01. 불안정한 세상
잠재적 지역 패권국의 발호
‘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
날로 심화하는 군비경쟁
산업정책, 새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
02. 미국의 선택과 미래
고립주의의 대두
패권국의 퇴장과 최강대국의 귀환
미국의 대외 균형 전략과 억지력
03. 중국에 맞서는 미국의 동맹들
미국의 가장 긴밀한 동맹 세력: 파이브 아이즈/영미동맹
동상이몽에서 깨어난 필리핀
서태평양의 대항마 일본
04. 최후의 이상주의자, 유럽의 도전
분열에서 통합으로
유럽의 한계
공동의 외적 앞에 뭉치는 유럽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
다극화되는 국제질서 속 유럽의 이상주의적 노력
05. 이해관계로 뭉친 반미연대
반목의 역사를 공유하는 세 나라
상호보완을 위한 반미연대
최강대국에 맞서는 두 초강대국의 합종연횡
반미연대의 아킬레스건
06. 시대의 흐름은 ‘글로벌 사우스’로
글로벌 사우스를 찾아온 기회
반미(反美)가 아닌 탈미(脫美)
글로벌 사우스의 도전과 자원 민족주의
07. 글로벌 사우스의 각자도생
중남미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08. 패권을 꿈꾸는 과거의 제국
인도양의 패자가 될 숙명을 타고난 인도
오스만 제국을 계승하려는 튀르키예
패권 지향적 균형 외교
제7장 남은 21세기의 국제질서
01. 현상 진단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종언
패권 질서의 전환기
02. 남은 21세기의 국제질서는 무엇이 될까?
규칙 기반 국제질서와 다극적 국제질서, 그리고 천하질서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유일한 대안
03. 다자주의의 미래
다극화된 세상의 다자주의
21세기 다자주의의 한계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다자주의
제8장 갈림길에 선 대한민국
01. 한반도 역사와 동북아시아 국제질서
중화(中華)의 중력 속에 살았던 이천 년
팍스 시니카의 종언과 실기(失期)의 대가
일제 강점기와 반일 정체성의 대두
반으로 쪼개진 나라의 비극
동서 냉전기 자유 진영 속의 대한민국
자유주의 국제질서 속의 대한민국
02. 변화하는 국제질서 속의 대한민국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적 환경
미·중 패권 경쟁 속 대한민국이 마주한 딜레마
앞으로 5년 또는 길어야 10년 안에 결정될 대한민국의 미래
03. 대한민국의 대전략
대한민국의 단기 전략
대한민국의 중장기 전략
실타래같이 얽힌 북한 문제
04. 대한민국의 숙제
제9장 맺는말

우리는 복잡한 세상 속에서 허덕이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포털의 1위를 차지하는 굵직한 뉴스들조차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숨 가쁘게 교체되는 세상이다. 땅을 밟고 살아가는 인간이 지구의 자전과 공전을 느끼지 못하듯이, 변화무쌍한 시류 속에 살아가는 우리가 세상을 움직이는 큰 흐름을 감지하고 또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만큼은 이 책을 읽는 모두가 암암리에 느끼고 있었으리라 믿는다. 바로 나라 밖 사건들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모든 나라들이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현대 사회에서는 나라 밖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도 우리 삶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예전에도 저 멀리 중동에서 발생한 소요 사태는 당장 우리 집의 냉난방비와 자가용 주유비를 올렸다. 태평양 건너 미국이 금리를 올리면 우리나라에서 달러가 빠져나가고, 원-달러 환율이 상승해 우리 금융시장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들어 벌어지는 여러 사건의 향방은 과거의 평면적인 영향과는 차원이 다른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다. 왜냐하면 현재 범세계적으로 관찰되고 있는 일련의 변화는 독립적인 사건이 아니라 국제사회의 질서 그 자체가 바뀌는 과정에서 초래되는 거대한 흐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국제질서가 도래할 때까지 이러한 과도기적 변화는 계속될 것이다. 그 변화의 끝에 새로운 국제질서가 도래한 뒤에는, 우리 모두 지금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것이 일종의 과도기적 변화라는 점을 깨닫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을 깨달아야만 우리의 눈앞에 어떠한 미래들이 펼쳐져 있는 지, 또 그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미래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찾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그러한 노력을 시작해야만 우리가 이제부터 어떠한 방향성을 갖고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지를 늦지 않게 판단할 수 있다.

(PP. 37-38)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 눈앞에 놓인 길들이 우리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게 될지를 예상하려면 먼저 우리가 어떤 경로를 통해 여기까지 왔는지를 반추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처한 현실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날의 국제질서를 있게 한 패권의 역사와 국제사회의 진화 과정을 알아야만 한다. 역사학자 데이비드 맥컬로프의 말대로 “역사는 위험한 시기를 항해하기 위한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동서냉전이 종식된 이래 세계는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질서 아래 놓여 있었다. 냉전의 승리자인 미국을 세계패권국(global hegemon)이라고도 부른다. 오늘날의 국제질서는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세계패권국인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질서라고 해서 일극적(一極的, unipolar) 국제질서라 불리기도 한다. 최근의 혼란은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현상 변경 세력은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체제(unipolarity)를 다극체제(multipolarity)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일극’ 또는 ‘다극’이란 몇 개의 나라가 국제사회를 주도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 냉전기에 세계를 양분했던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던 세계를 양극체제(bipolarity)라 칭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국제사회의 일극체제를 다극체제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은 미국이란 유일 패권국이 주도하는 시대를 끝내고 복수 또는 다수의 강대국이 선도하는 국제질서를 구현하겠다는 의미다. 현실적인 국제질서는 이처럼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힘’의 숫자에 의해 좌우된다. 그런데 현행 국제질서에는 국제사회를 주도하는 힘의 숫자와 무관한 명칭도 붙어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라는 이름이 그것이다. 이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아직도 국제사회의 대세적 질서로 남아 있다. 그러나 미국의 일극적 패권이 쇠퇴함에 따라 자유주의 국제질서도 함께 훼손되고 있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인공적인 질서다. 문명의 태동기 이전부터 인류는 ‘자연 상태’라는 현실의 굴레 속에서 살아왔다. 자연 상태란 곧 약육강식. 약육강식의 세상에서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삶을 살 수밖에 없다. 이 잔혹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인류는 부족을 이루었고, 부족이 모여 국가를 건설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건설한 사회에는 자연히 위계적 지배체계가 수립됐다. 요컨대 모든 인간 사회는 한가지 근본적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셈이다. 구성원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 말이다. 근대 서구사회에서 자유민주주의 사상이 정립되기 훨씬 이전부터, 모든 사회적 지배체제는 구성원들을 보호할 의무를 부담했다. 지배의 당위성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저마다 달랐을지언정, 구성원들을 보호할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지배체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말할 것도 없다. 현대 문명국가는 공권력을 제공하는 ‘정부’라는 지배체제를 통해 사회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구성원들이 약육강식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보장한다. 구성원에 대한 보호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국가를 ‘실패한 국가(failed state)’라고 정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야말로 정부의 기본적 역할이다. 그러나 주권 국가(sovereign states)들이 모여 구성한 국제사회에는 국가들을 다스리는 상위의 지배체제, 즉 ‘세계정부’가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된다. 원시적 무정부상태(anarchy)에 놓인 국제사회에서 모든 국가는 지배체제가 없는 자연 상태에 놓인 개인이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각자도생할 수밖에 없다. 이 무정부상태의 숙명을 극복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고안된 질서가 바로 자유주의 국제질서이다. 현행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인류가 오랜 전란의 시대와 제국주의 식민 지배 시대를 거쳐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전 인류가 핵전쟁의 위협에 노출됐던 동서냉전을 겪은 끝에 마침내 구현한 결과물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제대로 구현되어 범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미국의 세계 패권이 확립된 이후였기 때문에, 미국의 일극적 패권에 의해 유지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미국의 패권 질서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pp. 43-45)


미국과 반세기에 걸쳐 세계를 양분했던 대제국 소련이 1991년 해체됐다. 이후 약 30년간 미국은 인류 역사상 유일무이한 세계패권국(global hegemon)으로 불리게 된다. 지난 30여 년의 세월과 오늘날의 패권 전환기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미국의 ‘세계 패권(global hegemony)’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을 넘어 인류 역사상 가장 강대한 국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강대국과 패권국은 다르다. 패권국은 최강대국일 수밖에 없지만, 최강대국이 곧 패권국인 것은 아니다. 패권국이 되기 위해서는 역내 모든 경쟁 세력을 거의 동시에 위압할 수 있는 위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패권의 존부(存否)는 군사력과 군사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하드파워적인 국력 요소(경제력, 인구 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소프트파워적인 영향력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패권국이 될 수 없다. 한데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세계패권국이 등장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패권의 범위가 특정 지역으로 제한되는 지역 패권국(regional hegemon)은 역사상 종종 등장했다. 그러나 세계패권국은 전 세계 모든 경쟁국을 직접 압도할 것이 요구된다. 자국을 중심으로 일정한 세력권 내에 지역 패권을 구축하는 것과,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패권을 구축하는 것은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제아무리 세계 최강대국이라도 자국의 앞마당이 아닌, 멀리 떨어진 외국에 투사할 수 있는 국력은 수많은 지정학·지경학적 요인으로 인해 제한된다. 거리나 지리 등의 물리적 요인뿐 아니라 문화적·사회적·인종적 차이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요인이 제약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제약을 극복하고 언제 어디서든,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압도적인 국력을 투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국력 지표에서 지구상의 모든 경쟁국을 한꺼번에 압도했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미국이나, 세계 패권을 완성한 1990년대의 미국조차도 그 정도의 국력은 갖추지 못했었다. 최전성기의 미국조차 모든 사안에 있어 중국과 러시아를 항상 굴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중국이나 러시아의 세력권(sphere of influence)에 속한 나라에 대한 영향력에도 제한이 따랐다.

그러나 소프트파워적인 영향력이 패권과 정말로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설사 다른 모든 나라들을 강압하여 자국의 의지에 완벽히 복속하도록 강제하진 못하더라도, 역내 모든 나라들이 따르는 ‘게임의 규칙’을 세우고 통제하며 또 유지한다면, 그 또한 연성적 의미에서의 패권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다면 바로 최근까지도 미국은 세계패권국이라 불릴 만한 자격이 있었다. 탈냉전(脫冷戰) 시대 미국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역사상 그어떤 패권국도 누려본 적이 없을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그러한 영향력을 통해 국제질서를 형성하고 유지하며 통제했기 때문이다. 많은 자유주의 국제정치학자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일컬어 ‘패권적 지도력(hegemonic leadership)’ 또는 ‘패권적 질서(hegemonic order)’라고 정의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pp. 139-140)


미국의 세계 패권이 흔들리고 있다. 흔히 중국의 부상이 원인이라고들 하고, 실제로도 그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다만 중국이 미국에 필적하는 종합 국력을 갖추려면 아직도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번 세기 중에 중국이 미국을 추월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중국의 지속적 성공과 미국의 지속적 실패라는 두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은 21세기의 남은 기간에도 세계 최강대국의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다들 중국이 미국을 위협한다고 얘기하는 걸까? 미국의 최강대국 지위를 위협할 잠재력을 가진 유일한 국가의 부상에 따른, 일종의 설레발일까? 그렇지는 않다. 중국은 미국을 실제로 위협하고 있다. 다만 중국이 위협하는 것은 미국의 세계 최강대국 지위가 아니라 세계패권국 지위이다. 중국은 미국의 세계 패권을 위협하기 위해 미국을 능가하거나 대체할 필요가 없다. 그저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한 지역 패권국(regional hegemon)에 등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산에 두 마리 호랑이가 살 수 없다는 옛 속담처럼, 두 개의 패권이 같은 역내에 공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전 세계를 역내로 삼는 세계패권국이 있는 세상에 지역 패권국이 존재할 수 없는 이유다. 반대로 지역 패권국이 존재하는 세상에는 세계패권국이 존재할 수 없다. 지구상에 미국의 패권적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 충분히 넓게 형성되면 어느 순간 일극적 세계 패권은 해체되고, 미국은 가장 큰 지역 패권국으로 격하될 것이다.

미국은 2021년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보고서에서 중국을 최대의 지정학적 도전이라 규정했다. 이듬해인 2022년에 발간된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는 중국을 현행 국제질서를 자국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재가공(reshape)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가진 유일한 경쟁국이라 규정했다. 중국은 미국의 세계 패권, 더 나아가 미국의 세계 패권에 기반한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위협이 되고 있다.

(pp. 209-210)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무력 침공했다. 그로 인해 미국과 러시아, 또는 미국과 중국 간에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할 가능성이 생겼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방은 대만해협에서의 전쟁 가능성은 물론이고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과 중국 또는 반미연대 간에 전면전이 벌어지게 된다면 시시한 패권 경쟁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인류의 존망이 걸린 제3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운 좋게 확전 방지에 성공해 전면전을 회피하더라도, 양측의 무력 충돌은 현재 진행 중인 패권 경쟁의 기간과 성격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을 것이다.

강대국 간의 무력 충돌은 참혹한 결과를 불러온다. 초강대국 간의 전쟁은 말할 필요도 없다. 무력 충돌을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오래된 격언이 알려주는 바와 같이 전쟁을 막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강한 군사력을 갖춤으로써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억지(deter)하는 것이다. 문제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은 경쟁국의 불안과 오해를 조장해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높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야심 때문이든, 미국의 봉쇄전략 때문이든, 상호 불신과 오해 때문이든, 아니면 양측의 자기실현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 때문이든, 현재 진행 중인 미·중 패권 경쟁이 냉전에서 열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pp. 313-314)


탈냉전기의 전면적 자유 무역은 끝났다. WTO 분쟁해결절차가 담보하던 WTO 협정의 강제력은 마비됐다. 전 세계를 아우르던 GVC와 공급망은 분절되고 있다. 다만 전쟁과 같은 파국으로 치닫지 않는 이상 진영 간의 디커플링은 4차 산업혁명에서 중추적인 기술 영역으로 제한될 가능성이 높다. 첨단기술이나 기술 집약 품목에 대해서는 무역·투자의 디커플링이 이미 진행되고 있지만, 비민감 기술과 품목의 수출입은 여전히 WTO 협정의 일반원칙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 자유 무역은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탈세계화(de-globalization)’라 불리기 시작한 패권 전환기에도 WTO 다자무역체제는 느슨한 상태로나마 존속할 것이다. 아직 ‘신냉전’이 개시되었다고 볼 수는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패권 전환기가 지속되는 한 국제사회에는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불확실성은 불안정을 부르고, 불안정은 비용과 리스크가 된다. 이 불안정한 패권 전환기는 언제까지, 또 어떠한 모습으로 이어질까? 그리고 패권 전환기 이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p. 371)


남은 21세기에 대한민국이 안전하게 번영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각계각층의 전문가들 사이에 하루가 멀다고 이 주제로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전문가마다 상황에 대한 진단이 다르다 보니 해결책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모두가 한결같이 동의하는 지점이 있다. 대한민국은 국제질서에 결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점이다.

그렇다. 대한민국의 미래는 국제질서에 달려있다. 대한민국의 안보는 동북아시아 정세에 종속되고, 동북아의 정세는 더욱 큰 국제질서와 직결되어 있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다. 만일 지금 당신이 대한민국 땅 어딘 가에서 이 책을 읽고 있다면, 잠시 눈을 들어 주변을 둘러보라. 당신이 어디에 있든, 눈 앞에 보이는 물건과 설비, 자재의 상당수가 수입품일 것이다. 설사 당신이 우연히 ‘Made in Korea’로 점철된 장소에 있다고 해도 눈앞에 보이는 물건들의 원재료만큼은 대부분 수입품이리라. 부존자원이 빈약한 대한민국은 자원을 수입하지 못하면 잠시도 산업을 유지할 수 없다. 내수도 당연히 키워야 하지만, 수출 주도형 산업을 포기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수출해야 외화를 벌고, 외화를 벌어야 소비재와 필수재를 수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제무역이 필요하다. 그런데 국제무역을 위한 환경은 국제질서에 좌우된다. 대한민국은 탈냉전기 30여 년간 자유주의 국제질서 속에서 한민족 역사상 처음으로 ‘이밥에 고깃국’을 맘껏 먹는 것을 넘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성공을 견인해온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해체될 미래에 새로 들어설 국제질서 또한, 그것이 무엇이든 대한민국의 미래를 사실상 결정하게 될 것이다.

(pp. 631-632)

작가정보

저자(글) 정하늘

수상:

2018년 영국 Chambers & Partners 선정 국제통상분야 Leading Lawyer (Global)
2018년 영국 Chambers & Partners 선정 국제통상분야 Leading Lawyer (Asia-Pacific)
2017년 제10회 심당국제거래학술상
2017년 영국 Chambers & Partners 선정 국제통상분야 Leading Lawyer (Global)
2017년 영국 Chambers & Partners 선정 국제통상분야 Leading Lawyer (Asia-Pacific)
2016년 영국 Chambers & Partners 선정 국제통상분야 Leading Lawyer (Global)
2016년 영국 Chambers & Partners 선정 국제통상분야 Leading Lawyer (Asia-Pacific)
2016년 영국 Law Business Research 선정 법률전문가(Expert Panel)
2015년 영국 Chambers & Partners 선정 국제통상분야 Leading Lawyer (Global)
2015년 영국 Chambers & Partners 선정 국제통상분야 Leading Lawyer (Asia-Pacific)
2013년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표창
2010년 합동참모의장 표창 (2회)
2010년 전력발전본부장 표창

경력:

2022~현재 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 국제중재인
2018~2022 산업통상자원부 통상분쟁대응과장(부이사관)
2008~2018 법무법인 세종 선임외국변호사(2016~2018), 외국변호사(2008~2009, 2012-2016)
2010~2012 합동참모본부 국제법담당
2009~2010 소말리아 대해적부대(청해부대) 2진 법무참모
2007~2008 SL Partners 외국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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