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곳에 갈 거예요
2024년 04월 01일 출간
국내도서 : 2020년 03월 31일 출간
- 오디오북 상품 정보
- 듣기 가능 오디오
- 제공 언어 한국어
- 파일 정보 mp3 (140.00MB)
- ISBN 9791135769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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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분 140.00MB
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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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에 우리는 앉아서
자본주의를 배운다.
이 시대에 돈으로 생명과 영혼을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 문장을 읽을 때
어린 친구가 묻는다.
선생님, 영혼은 어떻게 팔아요?
그는 이제 십 년을 살았으니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작년에 죽은 친구는 이 시간이면 성당에 갔었다. 영혼이라는 게 있다면 좋은 곳에 있을 테지. 영혼은
호리병에 훅 담아 팔아요?
손을 모아 진지하게 입김을 후후 불고는 꺄르륵 웃는 것이다.
-「일요일」 부분
창과 빛이 있으면
시를 쓸 수 있지
저 창에 쏟아지는 빛으로
질서를 말할 수 있고
문 두드리고 들어오는 빛으로
환대를 말할 수 있고
나의 몸을 떠난 채
등 돌리고 있는 신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서」 부분
기억에 무슨 가치가 있어요?
책을 덮고 그는 묻는다.
내가 말하는 건 워크맨과 삐삐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그거 말이죠?
너의 시선은 화면을 찾는다.
이제 나는 텔레비전도 없이 사는데
옛날에는 영화를 비디오로 봤다는 이야기 저도 들어봤어요.
우리의 대화는 사물과 사물을 쌓으며
움직인다.
우리는 뭘 알고 있을까?
-「삐삐」 부분
그런 날이 있지. 하루 종일 하나의 빵만 떠올리는.
먹을 거 있어?
이거라도 괜찮다면.
가방 속에 넣어둔 포근하고 아름다운
빵.
출근길에 샀다가 종일 뒹굴고 퇴근길에 잊고 있던
버터 밀크바를 떠올리는 순간.
그에게는 오늘이 어떤 날이었을까. 짐승들은 좋았던 음식을 생각하며 하루를 살기도 한다는데. 손을 내밀고 온순한 눈망울을 그리다가
이게 뭐야?
다시 묻는 날.
-「버터 밀크바」 부분
아까 천둥이 쳤었어요
오늘은 좋은 곳에 갈 거예요
어린 친구들은 겨울왕국을 보러 가면서, 오늘 저는 좋은 곳에 가요, 제 두 번째 꿈을 이루는 거예요, 라고 떠들었는데
친구들은 꿈을 이뤘겠지 그들이 좋은 곳에 들러 언젠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까지, 그들의 시간은 흐를 것이다
-「좋은 곳에 갈 거예요」 부분
한여름 천사를 그린다면
적어도 사람의 얼굴은 아니겠지.
냉면에 올라간
차갑고 아무것도 없는 오이를 건져낸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어. 오이는.
우리의 이름과 같아.
-「구빈원」 부분
사라진 뒤에도 여기에 남아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것들에 대하여
지금 우리가 있는 여기는 앞서 있었던 무언가가 사라진 곳이다. 모든 존재들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아가기에, 오는 때도 가는 때도 제각각이기 마련이다. 시인은 자신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가 어느 틈에 사라진 존재들을 반복해서 그린다. 그 존재들은 품위나 단어와 같은 무형의 것들부터 한때 유행하던 사물, 사랑하던 개, 너무나 쉽게 죽는 사람 등등 다양하다.
시인은 이미 그의 곁을 떠난, 당근을 좋아하던 개를 생각하며 묻는다. “거기에도 있을까. 풀숲이, 도요새가, 천사가? 거기에도 당근이 있을까.” 이 물음은 달리 말하자면 ‘거기’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구원에 대해 궁금하지 않고 거기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하던 존재들이 거기로 가는 거라면 거기가 존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는 즉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바라는 일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구원에 관해 궁금하지 않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구원에 관해 말한다.
기억에 무슨 가치가 있어요?
책을 덮고 그는 묻는다.
-「삐삐」 부분
한때 넘쳐났으나 어느새 거의 다 사라진 삐삐를 두고 시인은 아이와 대화를 나눈다. 아이는 묻는다. 사라진 것을 기억하는 일에 가치가 있느냐고, 아니, 그때에도 가치라는 게 있었느냐고. 아이의 말을 듣고서 시인은 자신의 탄생에 대해 생각한다. 시인은 자신의 가치에 관해 비관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사라진 사람과 사물 들을 기록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시간대를 살다가 여기를 떠난 것들에 관해 기록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기록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 미래로 전달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빛의 태피스트리를 직조하듯, 시인이 창가에 앉아 빛을 받으며 시를 쓰는 이유 아닐까.
불쑥 찾아와 낯설게 만드는
엉뚱함과 농담들
생각을 해봐요
언제나 어른들이 했던 말
모르겠어
어른이 되고서 가장 많이 하는 말
생각하기를 배우는 아이처럼
-「모르겠어」 부분
시집에 실린 김소형의 에세이에 따르면, 그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이 때문인지 그의 시에는 어린이들에 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어린이는 아직 관습적인 사고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 존재다. 그렇기에 관습에서 비껴 있는 그들의 생각은 엉뚱하고 낯설다. 가령 “이 시대에 돈으로 생명과 영혼을 사고팔아서는 안 된다”고 어른이 가르칠 때, 어린이는 네, 라고 대답하지 않고 반문한다. “선생님, 영혼은 어떻게 팔아요?(…) 호리병에 훅 담아 팔아요?” 이 관습적이지 않은 아이의 생각과 말에 의해 관념과 상징에 불과하던 영혼은 별안간 용기에 담을 수 있는 물질이 된다. 그 엉뚱한 말이 시인의 관심을 이끌고, 시에 낯선 활력을 준다.
결코 늦지 않을 겁니다
그는 찾아온 신에게도
손짓한다
잠시면 돼요
아시죠?
십 분이면 충분한 거
-「지각하는 인간」 부분
그러한 엉뚱함과 함께 시집 곳곳에 숨어 있는 건 서늘한 농담이다. 죽음에 관한 생각들이 자주 등장하면서도 그것이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도록 찬물 같은 농담이 이어진다. 점심시간에 “잠시 죽을게”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금방 올 거지”라고 받아치는 사람, 누군가의 장례식 소식을 듣고는 “말도 없이 언제 돌아가셨대?”라고 의아해하는 사람 등을 주의 깊게 살피는 시인의 눈길에서는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태도가 드러난다. 이러한 낯선 말과 생각을 함께 읽으면서 독자들은 잠시 동안 이상한 기분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작가정보
낭독 김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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