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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전쟁 1939-1945

교유서가

2024년 02월 29일 출간

종이책 : 2024년 02월 29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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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35.22MB)
ISBN 9791193710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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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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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그들에게 2차대전은 나치즘보다 정당했다

1944년 11월 17일, 독일군 장교인 빌름 호젠펠트는 바르샤바의 한 주택에 들어섰다. 해골 모습의 유대인이 부엌에서 음식을 찾고 있었다. 밤이 되자 호젠펠트는 유대인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쇼팽의 곡에 귀기울였다. 그 유대인이 바로 영화 〈피아니스트〉에 등장하는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이다. 호젠펠트는 슈필만이 건물 다락에 숨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몇 주 동안 정기적으로 음식도 가져다주었다. 1936년과 1938년의 뉘른베르크 나치당 전당대회에서 강렬하고 신비스러운 전율을 느꼈던 독일군 장교와 호젠펠트는 동일한 인물이다. 그는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그렇다면 호젠펠트는 2차대전에서 무엇을 위해 적과 싸웠을까? 독일이 일으킨 전쟁은 그의 내면을 어떻게 변화시켰을까? 그리고 언제 그는 독일의 전쟁범죄를 인식했을까?
이 책은 2차대전 사료로 독일인의 혼란스러운 속내에 접근한다. 집이나 길거리에서 포착된 수많은 내밀한 이야기로 2차대전의 편견을 헤집는다. 일기, 편지, 보고서, 법정 기록에 담긴 독일인의 생생한 육성은 전체주의의 전쟁범죄에 숨은 낯설고 새로운 진실을 증언한다. 그 진실이란 독일 국민이 패전의 순간까지 적극적으로 2차대전에 임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은 그들이 내면에 품었던 민족방어 전쟁 논리가 나치즘과 결부되며 어떻게 발전했는지 뒤따라간다.
이 책의 저자는 정보의 넓이를 담보하고자 편지와 일기와 공문서 등을 검토했다. 슈투트가르트 현대사도서관에서 편지 약 2만 5천 통을 살펴보거나 베를린 예술아카데미, 독일 일기아카이브,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역사박물관과 커뮤니케이션 박물관 전선병사 아카이브와 독일 연방문서보관소, 프라이부르크 독일 연방문서보관소-군사아카이브를 찾아갔다. 정보원들의 공문서, 독일군 우편행낭을 무작위로 검사한 검열관들의 보고서, 개인의 비밀스럽고 솔직한 일기 등을 채록했다. 정보의 깊이를 확보하고자 저자는 사회적 출신이 각양각색인 사람 중에서 특정 개인들을 선택했다. 그들의 사적인 희망과 계획이 전쟁 과정과 어떻게 얽히는지 오랫동안 추적했다.

“이 책은 그 길었던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 전쟁에서 발생한 독일 사회의 변화를 목록화하고 갈수록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 전쟁에 각 개인이 적응해간 미묘한 방식들, 종종 되돌릴 수 없던 그 방식들을 기록한다. 또한, 이 책은 사람들이 자신을 형성해간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겪은 변화하는 기대와 파동하는 희망과 두려움을 기록한다. 그들의 구체적인 삶은 경험을 재는 감정적인 잣대인 동시에 자기 파괴의 길을 가던 한 사회를 나타내는 도덕적 기압계였다.” _48쪽

저자는 전쟁에 대한 해석이 학문적 연구와 대중적 의식 모두에서 둘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그 두 가지 해석은 전쟁 시기의 독일인을 이야기할 때 상충한다. 한쪽은 모든 독일인을 희생자로 간주하고 다른 쪽은 모든 독일인을 가해자로 분류한다. 저자는 2005년의 종전 50주년 기념 과정들을 지켜보며 이 책의 출발점인 생각과 마주했다. 그는 기존의 역사가들이 올바른 교훈을 전쟁사에서 이끌어내려다가 역사 연구의 본질적 과제 중 하나를 외면했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역사가가 무엇보다도 우선 과거를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1939년 8월 26일에 동원령이 공포되었을 때 독일인은 미래를 몰랐다. 그들은 과거를 떠올렸다. 1차대전 패전이라는 불안한 그림자가 그들에게 드리웠다. 전쟁의 위기가 사회를 과격하게 변화시킨다는 생각은 나치 정권과 독일 사회의 관계를 재고하게 한다. 역사가 대부분은 함부르크 폭격과 스탈린그라드 패배가 독일인을 패배주의로 몰아넣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독일인은 전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치즘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의 복잡하고 혼란스럽고 역동적인 내면에 집중하는 이 책은 상식과 다르게 2차대전을 설명한다. 독일인에게 2차대전은 나치즘보다 정당했다. 그 이유는 전쟁이 생산해낸 종말론에 있었다. 그들은 의도적이고 폭력적인 정복 전쟁을 민족 방어 전쟁으로 여겼다. 전황이 악화될수록 애국적 헌신으로 더욱 단호히 제 나라를 방어하려고 했다. 독일 사회가 종말론적 사고방식을 수용한 일이야말로 2차대전 후반기에 독일인에게 발생한 결정적 변화였다.
지도
서언
편지와 일기의 주요 주인공들

프롤로그

제1부 방어전: 1939년 9월~1940년 봄
제1장 독일인들에게 환영받지 못한 전쟁
제2장 대오의 균열을 막아라
제3장 극단의 조치들

제2부 유럽의 주인: 1940년 5월~1941년 여름
제4장 진격
제5장 승자와 패자

제3부 1812년의 그림자: 1941년 여름~1942년 3월
제6장 독일의 십자군 전쟁
제7장 첫 패배

제4부 교착상태: 1942년 초~1943년 3월
제8장 비밀의 공유
제9장 유럽의 약탈
제10장 전사자에게 쓰는 편지

제5부 독일에 도착한 전쟁: 1943년 3월~1944년 여름
제11장 폭격과 복수
제12장 버티기
제13장 빌린 시간

제6부 완전한 패배: 1944년 여름~1945년 5월
제14장 참호가 된 나라
제15장 붕괴
제16장 종말

에필로그: 심연을 건너서

약어 | 주 | 역자해설: 형언할 수 없는 전쟁범죄와 내면의 성찰
참고문헌 | 찾아보기

이 책은 내가 지난 20년 넘게 2차대전 동안 독일에 살았거나 독일 점령하에 살았던 사람들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다. 원래 나는 이 책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2005년에 『전쟁의 증인들: 나치 치하 어린이들의 삶』을 발간한 뒤, 나 자신과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던 다른 이들에게 이제 더는 어린이, 홀로코스트 혹은 나치 독일에 대하여 쓰지 않겠다고 약속했었다. 이 책은 2차대전에서 독일인들이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에 대한 짤막한 논문으로 시작되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뭔가 말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느꼈다. 그 작업이 내가 2006~2007년에 베를린 자유대학교에서 안식년을 보내는 동안 커지기 시작했다. (17쪽)

이 책은 그 길었던 전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그 전쟁에서 발생한 독일 사회의 변화를 목록화하고 갈수록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 전쟁에 각 개인이 적응해간 미묘한 방식들, 종종 되돌릴 수 없던 그 방식들을 기록한다. 또한, 이 책은 사람들이 자신을 형성해간 사건들을 통과하면서 겪은 변화하는 기대와 파동하는 희망과 두려움을 기록한다. 그들의 구체적인 삶은 경험을 재는 감정적인 잣대인 동시에 자기 파괴의 길을 가던 한 사회를 나타내는 도덕적 기압계였다. (48쪽)

학살 작전은 대부분 사람들 눈을 벗어난 숲이나 연병장에서 자행되었지만, 일부는 구경꾼들 앞에서 벌어졌다. 1939년 10월 7일 토요일 저녁 스비에치에 주둔중이던 병사들이 그날 낮시간에 벌어진 학살 작전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전은 다음날 일찍 재개될 예정이었다. 그날 아침 이른 시각 파울 클루게 상병이 학살 구덩이 가까이로 갔다. 학살 기록을 남긴 병사들은 흔히 자신이 목격한 첫 장면을 기록한다. 그때 받은 인상이 가장 강렬하기 때문이다. 클루게는 기록했다. 버스가 유대인 묘지에 도착하고 한 여성이 아이 셋과 함께 내렸다. 가족은 30미터를 걸어 구덩이까지 갔다. 여자는 막내는 품에 안은 채 구덩이 안으로 기어내려갔고, 이어서 위에 서 있던 다른 한 아이를 안아서 구덩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지막 아이는 친위대원이 들어서 아래로 건네주었다. 여자가 아이들과 함께 구덩이 안에 엎드렸다. 클루게는 구덩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곳까지 갔다. 친위대원 네 명이 20센티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엎드린 네 사람의 목에 총을 겨누었다. 일을 끝낸 그들이 구경하던 클루게에게 시체를 흙으로 덮으라고 요구했다. 클루게는 주저하지 않고 복종했다. (75~76쪽)

알브링과 몰덴하우어와 달리 독일군에는 ‘처형 여행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유대인들과 빨치산들이 공개적으로교수되는 모습을 찍었다. 예비경찰대 대원 헤르만 기셴은 브레멘에서 가게를 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찰 대대가 어려운 과제를 맡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일이 ‘폴란드에서와 조금 비슷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리가에서 그는 영사기를 구입했다. 경찰 대대가 라트비아와 러시아에서 행할 작전을 찍어놓으면 그 필름이 ‘후에 기록이 되고 우리 아이들에게 매우 흥미로울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1941년 8월 7일 그는 아내 한나에게 그의 경찰대가 벌인 작전에 대하여 썼다. 전날 밤 ‘유대인 150명이 사살되었어. 남자들, 여자들, 아이들, 모두 제거되었어. 유대인들은 완전히 절멸되고 있어. 사랑하는 H, 제발 그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말아요. 그것은 그냥 그래야 해요.’ (252쪽)

1941년 11월 초 그 포로수용소에 친위 특공대가 도착했다. 전쟁포로와 민간인 중에서 유대인을 빗질하기 위해서였다. 특공대는 그때 가려낸 유대인들 일부를 시멘트 공장 지하실에서 사살했다. 야라우쉬는 집에 보낸 편지에서 그 일에 대하여 암시만 했다. 그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쳐주던 포로는 절반의 유대인이었는데, 야라우쉬는 아내 샤를로테에게 보낸 편지에 그 남자에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쓰지 않았다. 다만 ‘유대인들이 맨발로 눈 위를 걷는 것’을 보았다고, ‘내가 막을 수 없던 힘든 것들이 매우 고통스러운 인상을 주었는데, 그 일에 대해서는 (집에서) 말로 설명하겠다’라고만 썼다. 이틀 뒤 그는 새로운 러시아어 선생으로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학교 교사인 모스크바인에 대해서는 보다 열성적으로 묘사했다. 그가 투르게네프 소설을 큰 소리로 읽어주자 ‘마치 내가 그 나라의 영혼을 만지는 느낌, 그 영혼이 스스로를 지각하고 아는 방식으로 그 영혼을 만지는 느낌’을 받았다. (279~280쪽)

한스 알브링은 집단군중부 후미의 소도시 벨리시에서 겨울을 났다. 1942년 1월 말 소련군이 공격해오자 병사들은 끔찍한 조건 속에서 8주일을 버텼다. 씻지 못하고, 이에 갉히고, 배고픔에 시달리던 한스는 그 상황을 ‘최후의 심판과 비교하는 것이 지나친 과장은 아니’라고 믿었다. 1942년 3월 21일 그는 친구 오이겐 알트로게에게 ‘이 경험 속에서 나는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라고 쓴다. 소련군의 공격이 멈추고 2주일이 지난 뒤 알브링은 뮌스터의 가톨릭 선배로부터 받은 편지에 열광했다. 알브링은 그 편지를 길게 인용함으로써 그동안 자기가 갖게 된 관점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누가 알겠어. 우리가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릇되고 갈수록 왜곡되어간 인간관을 추종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새롭고도 진정한 인간관이 우리 내면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 아마 그것이 이 전쟁의 형이상학적인 의미일 거야.’ (308쪽)

1941년 11월 27일 고지 프랑켄 호르흐하임 유대인 12명이 그곳 기차역으로 행진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때 수많은 독일인 ‘주민들이 나와서’ ‘관심과 커다란 만족감’을 보여주었다. 강제이송 작전은 1938년 11월의 포그롬 이후 처음으로 유대인에게 가해진 집단적 가해 스펙터클이었다. 1938년의 포그롬이 히틀러청소년단과 독일소녀연맹의 소년 소녀들이 가세한 대중 축제가 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아직 떠나지 않고 있던 유대인들이 줄을 지어 걸어가는 행렬을 향하여 신구新舊 욕설들로 범벅이 된 구호들과 저주가 쏟아졌다. ‘저 건방진 유대인들을 보라!’ ‘이제 저들은 게토로 간다!’ ‘쓸모없는 식충 무리들!’ 바트 노이슈타트에서 늙고 못 먹은 유대인들이 시장 광장에 집합하자, 나치 활동가들이 사진을 찍었다. 그후 그 사진들은 포스터 크기로 확대되어 도시 중심가에서 전시된다. 유대인 행렬이 시장 광장에서 기차역으로 출발하자 ‘시끄럽게 떠드는 학동들 무리’가 기차역까지 행렬을 따라갔고, ‘기차가 떠날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343쪽)

뒤르케팔덴은 유대인에 대한 히틀러의 공적인 위협이 말뿐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동부전선에 복무하던 처남 발터 카슬러는 편지에서 키이우에 유대인이 한 명도 남지 않았다고 알렸다. 1942년 6월에 휴가를 나왔을 때 발터는 자신이 목격한 대량 학살과 다른 병사에게서 들은 프랑스 유대인 가스 학살에 대하여 카를 뒤르케펠덴과 대화를 나누었다. 뒤르케팔덴은 일기에 고백했다. ‘발터가 거듭해서 강조했다. ……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카를이 충격을 받자, 발터가 설명을 내놓았다. ‘나도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어. 그러나 나는 이제 알아. 우리가 죽느냐 사느냐가 걸린 문제야.’ 처남은 히틀러가 끊임없이 반복했던 주문呪文을 수용했던 것이다. 민족이 종말론적인 선택에 직면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카를이 반박했다. ‘그러나 그것은 살인이잖아’. 발터가 곧바로 내놓은 대답은 바로 나치 언론이 공급한 대답이었다. ‘이제까지 진행된 것으로 확실해진 것은, 우리가 패배하면 그들은 우리가 그들에게 행했던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행할 것이라는 거야.’ 카를 뒤르케팔덴은 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처남에게 반대하면 가족 안에 공개적인 균열을 일으킬 위험이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게슈타포로 밀고가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가족 내 관계가 뒤틀리고 자신이 고립될 가능성이 컸다. (353~354쪽)

갈렌을 비롯한 주교들이 유대인 학살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마르가레테 좀머는 베를린 주교 프라이징이 후견하는 복지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대인 혈통의 가톨릭 개종자들이 발트해 지역으로 이송된 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정보를 수집하고, 또 주교들에게 전달했다. 그녀는 내무부 고위 관리인 한스 글로프케로부터 비밀 정보를 얻기도 했다. 좀머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오스나브뤼크의 주교 베르닝이 1942년 2월 5일에 확언했다. ‘유대인을 완전히 절멸시키려는 계획이 분명 존재한다.’ 이는 하이드리히가 비밀 반제회의, 즉 고위 행정관리들에게 1,100만의 유럽 유대인의 임박한 학살에 대하여 알린 고위급 회의가 열리고 2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베르닝과 프라이징이 ‘인권을 조롱하는 방식으로 비아리아인들을 이송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하는 진정서를 주교회의에 상정했을 때는 그로부터 무려 18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더욱이 1943년 8월의 풀다 주교회의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 거부하지 않았어도 실상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그때는 유대인 대부분이 사망한 뒤였다. 독일 가톨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베르트람 추기경은 마가레트 좀머가 제출한 보고의 수신조차 거부했다. 그는 프라이징이 교차 서명을 통하여 진실성을 보장하는 한에서만 좀머의 보고서를 수신하겠다고 밝혔다. 물론 그는 그런 절차가 좀머와 프라이징을 게슈타포에게 노출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베르트람이 유대인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을 몰랐다고 가정하더라도, 이는 그가 알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355~356쪽)

프리크가 약속할 수 있는 것은 영향력을 행사하여 친위대 정보국에게 알선을 요청하는 것뿐이었다. 친위대 정보국은 클레퍼가 이튿날 정보국의 유대인과 과장 아돌프 아이히만과 만날 수 있도록 주선했다. 아이히만은 클레퍼에게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말했다. ‘알았다는 최종적인 답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일은 잘 진행될 거라고 생각해요.’ 클레퍼가 이번에도 아내 얘기를 꺼내자 아이히만이 단호하게 답했다. ‘합동 이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다음날 오후 아이히만이 레나테 문제의 결과를 알려주겠다며 클레퍼를 호출했다. 1942년 12월 10일의 두번째 만남에서 아이히만은 레나테의 출국 비자가 거부되었다고 통고했다. 요헨, 요한나, 레나테는 그들 방식으로 독일을 떠나기로 결단했다. ‘오늘 우리는 함께 죽음으로 간다.’ 예수가 손을 들어 식사를 축복하는 그림을 걸어놓고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그 그림과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면제와 가스가 작동하고 있었다. (374~375쪽)

1945년 4월 중순 독일군 군집단B에게는 무기와 탄약이 없었고, 군대는 루르의 숲과 도시 속으로 용해되고 있었다. 4월 15일 아우구스트 퇴퍼빈의 도시 졸링겐 시민들이 탱크 방어벽을 허물었고, 이튿날까지 그곳의 거의 모든 군인에게 민간인 옷을 건네주었다. 심지어 육군 소령조차 명령권을 포기한다고 선언했고, 이어서 맞지 않는 슈트를 걸치고 스포츠 모자를 썼다. 1945년 4월 17일, 졸링겐이 함락된 그날 군집단B의 총사령관 발터 모델 장군이 군대에 ‘해산’ 명령을 내림으로써 부대가 미군에게 항복하는 것을 피했다. 장군 30명을 포함하여 31만 7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모델은 상식과 충성의 자부심 사이에서 괴로워하다가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의 파울루스 장군이 행하기를 원했던 행동을 실천했다. 그는 숲으로 들어가 권총으로 자살했다. 다음날 미군 제97보병사단이 뒤셀도르프에 진입했다. 마리안네 스트라우스는 독일 당국에 체포될지 모른다는 공포에 너무나 시달렸던 나머지 열흘 뒤에야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712~713쪽)

뒤틀린 대의로 얼룩진 2차대전,
그 잃어버린 시간을 독일인의 이야기로 복원하다

한 병사가 1940년 2월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 썼다. ‘그 모든 것을 내년에는 할 수 있을 거야. 알았지?’ 2년 뒤, 다른 병사가 맹세했다. ‘우리가 지금 하지 못하는 모든 것을 다음에는 따라잡을 수 있을 거야’. 그들은 전쟁 이후의 삶을 꿈꿨다. 1939년 9월에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 전쟁은 독일에서 인기가 없었다. 그러나 전쟁은 독일인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지속되었다. 이 책은 독일인의 자아 탐색 과정에서 흥미롭고 끔찍한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야기로 전쟁이라는 잃어버린 시간에 참여했다.
독일군 장교인 빌름 호젠펠트는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는 1939년 8월 26일 나치가 동원령을 선포한 다음날에 징집되었다. 독일인이 폴란드인에게 가한 폭력을 목격한 호젠펠트는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나는 병사가 된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러나 오늘 나는 나의 회색 야전복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는 자신이 ‘인류에 대한 범죄 행위를 방어하는 방패가 된 것’을 고통스럽게 여겼다. 어쩌면 그 고통이 피아니스트 슈필만을 돕는 원동력이 됐을지도 모른다. 5년 3개월 반 동안 바르샤바에서 유대인 35만 명이 학살되었다.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130만 명이던 인구는 15만 3천 명으로 감소했다.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은 형체만 남은 도시에서 생존하여 걸어나왔다.
1942년 12월 초 베를린 교외에 사는 역사소설가 요헨 클레퍼가 내무장관 프리크를 만났다. 유대인 여성과 결혼하여 18세의 의붓딸을 둔 그는 전쟁 직전부터 불안했다. 그때 그는 예방책으로 유대인 아내가 강단 벽면에 루터와 힌덴부르크와 히틀러의 상징으로 가득한 교회에서 기독교 세례를 받도록 했다. 1942년 12월 초, 유대인 이송이 시작되고 혼합혼 부부를 강제로 이혼시킨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클레퍼는 프리크를 다시 찾아갔다. 짜증난 프리크는 그를 친위대 정보국으로 보냈다. 클레퍼는 그곳에서 유대인과 과장을 만났다. 클레퍼가 아내 이야기를 꺼내자 과장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합동 이민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클레퍼 딸의 출국 비자도 거부했다. 그 과장의 이름은 아돌프 아이히만이다. 클레퍼 가족은 그들 방식으로 독일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오늘 우리는 함께 죽음으로 간다.’ 예수의 그림을 걸어놓고 그들은 바닥에 엎드려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수면제와 가스가 작동하고 있었다.
이 책은 클레퍼 가족의 죽음을 암시한 후 역사의 아이러니를 비극적이고 문학적으로 서술한다. 사실 나치는 유대인과 기독교인 부부를 이혼시키지 않았다.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인인 빅토르 클렘퍼러는 그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종의 조치가 임박했다는 신호는 계속되었다. 1943년 3월 ‘아리아인’과 결혼한 베를린의 유대인 남자 1,800명이 체포됐다. 로젠스트라쎄 건물에 갇혔다. 그다음주 유대인 남자들의 아내들이 로젠스트라쎄 건물 밖 도로에 모였다. 그들은 외쳤다. ‘내 남편을 돌려내라!’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게슈타포는 남편들을 풀어주었다.
1944년 7월 20일에 누군가가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의 소재이기도 한 ‘발키리 작전’이다. 그날 클라우스 쉥크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설치한 폭탄은 히틀러의 동프로이센 야전사령부 회의실에서 폭발했다. 장교 세 명과 속기사가 죽었다. 그러나 회의실에 있던 다른 24명과 마찬가지로 히틀러는 고막이 터지고 상처만 입었을 뿐 무사했다. 독일인은 발키리 작전을 계기로 전보다 더 결집했다. 뉘른베르크 친위대 정보국 보고서에 따르면 나치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발키리 작전을 우려했다. ‘오직 지도자만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으며, 그의 죽음은 카오스와 내전을 일으킬 뿐’이라고 확신했다.
크리체프 수용소의 전쟁포로 식사 담당관인 콘라트 야라우쉬는 그곳에서 한 러시아인에게 러시아어를 배웠다. 러시아어 선생이 투르게네프 소설을 낭독하자 야라우쉬는 ‘내가 그 나라의 영혼을 만지는 느낌, 그 영혼이 스스로를 지각하고 아는 방식으로 그 영혼을 만지는 느낌’을 경험했다. 이 아름다운 순간에 뒤따르는 일은 학살이었다. 1941년 11월 초에 친위 특공대가 수용소에 도착했다. 특공대는 유대인 일부를 시멘트 공장 지하실로 데려가 사살했다.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야라우쉬는 의미심장한 일화를 언급한다. ‘유대인들이 맨발로 눈 위를 걷는’ 모습을 보았다는 그의 기록은 참혹한 뒷이야기를 암시한다.
1941년 7월 러시아 전선에서 행군하면서 한스 알브링은 서구의 문명화와 동구의 자연을 대조했다. ‘소나무숲이 아득히 멀리까지 뻗어 있’는 곳에서 감자를 깎는 유대인을 보고는 원시적이라며 '우스꽝스럽게 과장할 필요조차 없다'라고 편지에 썼다. 그는 볼셰비키를 혐오하고 그들의 무신론에 분노했다. 그러나 처형 때 총알이 머리 밖으로 뚫고 나오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고 충격에 휩싸였다. 고야의 가장 어두운 그림보다 더 어두운 장면들, 사살된 시체로 가득한 구덩이들을 목격하고 그는 괴로웠다. 1942년 3월이면 알브링은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생각한다. 그는 유대인 시체 더미를 보면서 종전에는 ‘마구잡이로 무질서하게 시체 위에 시체를 던져버렸는데 이제는 … 잘 정리되었다’고 무심히 말한다. 한 편지에서 그는 전쟁에서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고 쓴다. ‘우리가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릇되고 갈수록 왜곡되어간 인간관을 추종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새롭고도 진정한 인간관이 우리 내면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 아마 그것이 이 전쟁의 형이상학적인 의미일 거야.’ 그가 말하는 ‘전쟁의 형이상학적 의미’는 얼마나 2차대전이 복잡하고 끔찍하며 공허했는지 밝힌다.

“패전은 전쟁중의 모든 희망을 산산조각내고 오직 고통만을 남겼고, 헛된 영웅주의의 그림자는 종전 이후에 어느 장군이 동부전선의 전투에서 독일이 승리할 수도 있었다고 주장해도 그 주장을 압도해버렸다. 그리고 또 그 모든 종말론적인 예언들에도 불구하고 독일인들은 그러나 어떻든 횔더린의 ‘미지의 심연’의 피안에도 있지 않았다.” _785쪽


‘비밀의 공유’와 ‘침묵의 나선형’,
그때 독일인은 홀로코스트를 이미 알고 있었다

유럽에 사는 유대인 대부분은 1942년 초에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말에 유대인 대다수는 사망한다.
1942년, 소독 전문가이자 친위대 장교인 쿠르트 게르슈타인은 유대인 옷가지를 소독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고자 베우제츠를 방문했다. 유대인들이 가스실에 모여 있었다. 엔진을 수리하는 두 시간 반 동안 갇혀 있었다. 게르슈타인은 리비우 유대인들이 가스로 죽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와 동행한 인물은 친위대 자문위원이자 마르부르크대학교 위생학 교수인 빌헬름 판넨슈틸이었다. 그 교수는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매료되었다. 안경에 김이 서릴 때까지 그는 가스가 흐르는 구멍을 들여다보았다. 벌거벗은 유대인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선 그곳이 ‘유대교 회당’ 같다고 말했다. 이후에 어느 만찬에서 판넨슈틸은 수용소 요원들이 행하는 ‘작업의 위대성’을 칭송했다. 게르슈타인은 스웨덴 외교관에게 그 사실을 본국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베를린의 루터파 주교에게도 알렸다. 주교는 침묵했고 스웨덴으로 보낸 보고서는 서류철에 처박혔다.
하사관 빌헬름 코르니데스는 근처의 갈리치아 라바 루스카 역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젖소 운반 트럭 38대가 유대인을 가득 싣고 도착했다. 리비우에서 오는 마지막 유대인들이라고 한 경찰관이 코르니데스에게 말했다. 열차에서 코르니데스는 철도 경찰관 부부와 같은 칸에 탔다. 부부는 유대인 학살 수용소를 가리키겠다고 약속했다. 기차가 커다란 소나무 숲을 가로지르는데 어딘가에서 달착지근한 냄새가 났다. 벌써 냄새가 난다고 경찰관 아내가 외쳤다. 가스냄새라고 경찰이 웃으며 말했다. 소각장에서 나는 냄새였다. 비슷한 일화가 프랑스·벨기에 포로들의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노동을 위해 라바 루스카 역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독일인 예비경찰관에게 물었다. ‘유대인을 가득 실은 열차들이 도대체 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경찰관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하늘로.’
1943년 봄 스웨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한 벨기에 포로 두 명이 영국 요원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영국 요원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벨기에 포로들에게 가장 큰 인상을 준 것은 유대인 절멸이었다. 두 사람 모두 학살을 목격했다. 한 사람은 유대인을 실은 트럭이 숲으로 들어가서 몇 시간 뒤에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 트럭은 비어 있었다. 유대인 아이들과 여자들의 시체가 배수로와 기찻길에 방치되었다. 몇몇 독일인은 유대인 학살에 이용하는 체계적인 가스실을 자신들이 건설했다고 자랑했다.
학살 소식은 독일인들에게 빠르게 확산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시작한 소문은 전화 교환원들, 철도원들, 화학 공장 건설 엔지니어들을 통하여 퍼져나갔다. 선술집 술꾼들의 대화와 수많은 사람의 일기에도 등장한다. 그동안 많은 역사가는 독일인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정보를 가까운 친척과 가족들 사이에서만 비밀스럽게 공유했다고 생각했다. 친밀한 폐쇄적인 집단 너머에서는 익명의 소문으로 존재했다고 가정했다. 홀로코스트는 공적인 자리에서 대화의 주제가 될 수 없었다는 추정이다. 독일 경찰과 친위대의 수장인 하인리히 힘러는 유럽 유대인의 절멸이 비밀리에 공유해야 하는 과업이며 ‘우리는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져가야 한다’고 나치 제3제국 지도자들에게 역설했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에 따르면 비밀은 은밀하지 않았다. 많은 독일인이 홀로코스트라는 비밀을 공유했다. 그렇다면 그 ‘비밀’이 어떻게 일반인들 사이에서 공유됐던 것일까?
이 책은 괴벨스가 사용한 조심스럽고 섬세한 보도 관리에 집중한다. 괴벨스는 절멸에 대한 정보를 언론으로 독일인에게 넌지시 내비쳤다. 학살 정보로 공모의 느낌을 자아내려는 의도였다. 이 과정에서 ‘알지 못하는 앎’이 구축되었다. 그것은 공적인 충성이나 도덕적 책임감을 요구하지 않는 지식이었다. 이 책은 ‘침묵의 나선형’이라는 개념으로 그 지식을 설명한다. 그 용어는 전후 서독의 커뮤니케이션 연구자 엘리자베스 뇔레-노이만이 1974년에 고안했다. 그는 전후 서독의 민주주의와 관련하여 그 용어를 사용했지만, 그것은 1941년과 1942년에 영향받은 개념이기도 했다. 뇔레-노이만에 따르면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고 느끼는 개인은 고립이나 사회적 처벌을 두려워해서 침묵하는 경향이 있다. 그 경향은 소수 의견을 견지하는 잠재적인 사람의 수를 줄인다. 그 와중에 언론이 다수의 견해를 보도하면 다수 의견은 도덕적 지위가 강화되고 안정된다. 뇔레-노이만은 개인의 심리적 효과에 주의했다. 사적인 압력이 고립과 관련한 개인의 공포심을 촉발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보여준 것이다.
지금껏 여느 역사서는 홀로코스트 분석에서 작동 방식을 강조했다. 홀로코스트는 지난 20년간 나치 독일과 2차대전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결정했다. 비교적 최근에 정립된 시각이다. 그러나 그 시각 자체는 독일인들이 2차대전 당시 학살에서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말해주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는 독일인이 대량 학살에 관한 정보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 지식을 어떻게 자아에 통합했는지 이야기한다. 독일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나치즘이 아니라 전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제노사이드가 전쟁의 배경에 있다고 이해했다. 그렇기에 유대인과 독일인은 전혀 다른 기대와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 문제성이야말로 2차대전 독일사를 서술하는 이 책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독일인은 제 나라가 일으킨 전쟁이 대량 학살이라는 점을 자각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사실에 어떻게 영향받았을까? 달리 표현하면 2차대전은 독일인이 대량 학살에 대한 지각을 형성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복잡한 질문을 제기하는 이 책은 전범국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풍성하고 독특한 역사서다.

작가정보

니콜라스 스타가르트Nicholas Stargardt
옥스퍼드대학교 사학과에서 나치 역사를 강의하고 있는 영국 최고의 나치즘 연구자 중 한 명.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1939년에 나치를 피해 호주로 망명한 유대인이고, 어머니는 호주에서 아시아 불교문화를 연구하는 고고학자이다. 저자는 어린 시절 일본에도 잠깐 거주하다가 영국으로 이주했다.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독일 사민당의 반反군국주의 운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후 런던대학교를 거쳐 옥스퍼드대학교에 부임했다.
2005년에 독일인 어린이들 및 유대인 어린이들의 2차대전 경험을 재구성한 『전쟁의 증인들: 나치 치하 어린이들의 삶』을 발간하여 나치즘 연구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2015년에 출간한 『독일인의 전쟁 1939-1945』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책은 한국어판에 앞서 9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영국 작가협회(PEN)에서 수여하는 헤셀틸트먼상을 수상했다.

한국외대 독어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독일 보훔대학교 역사학과에서 「대공황기 독일 경제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나치즘과 동성애-독일의 동성애 담론과 문화』와 『감정의 역사-루터의 신성한 공포에서 나치의 차분한 열광까지』가 있고, 번역서로 『나치스 민족공동체와 노동계급』, 『나치 시대의 일상사: 순응, 저항, 인종주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히틀러국가: 나치 정치혁명의 이념과 현실』이 있다. 『독일인의 전쟁 1939-1945』는 나치즘에 관한 다섯번째 번역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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