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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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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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헌터》는 뼈의 증언을 좇는 집념의 인류학자 선주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이 70여 년 세월을 초월해 만나는 스펙터클한 ‘유골 추적기’이자 생생한 역사 논픽션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한겨레에서 30여 년간 베테랑 기자로 일해온 고경태는 꾸준히 폭력과 억압의 흔적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전작에서 특히 베트남전쟁기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면밀히 다룬 저자는 이번엔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과 국가폭력 피해자의 상흔을 심도 있게 다룬다. 2023년 3월 아산에서 유골이 발굴된 직후, 한 주에도 몇 차례씩 아산의 발굴 현장과 청주에 위치한 선주의 연구소를 찾아 취재했다. 그렇게 〈한겨레〉에 6개월 동안 폭발적으로 써내려간 기획기사 ‘본 헌터’를 개고하고,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연표·이름 대조표·역사사회학자의 발문을 추가하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맥락을 보강해 책으로 선보인다.
이 책은 두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되는 독특한 ‘교차식 구성’을 따르며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의 참상과 땅속에 묻힌 진실을 추적한다. 먼저, 하나의 축은 민간인 학살사건 이야기로, 유골·생존 피해자·유가족·유품·관련 주변인·가해자 등 여러 화자의 시점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학살 사건을 입체적으로 재현해낸다. 다른 하나는 인골에 대한 순전한 호기심으로 한평생 유해가 남긴 진실을 좇아온 실존인물 ‘뼈 인류학자’ 선주의 이야기이다.
영문도 모른 채 죽임 당한 이들과 집념의 인류학자, 서로 관계가 없어 보이던 두 이야기는 시공간을 초월해 결국 아산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만나게 된다. 발문을 집필한 역사사회학자 강성현이 언급한 바와 같이, 두 이야기가 교차하는 “일종의 ‘다크 투어’ 방식으로 죽음의 이유와 특징을 탐문”한다는 점은 이 책의 큰 특징이다. 여기에 생생한 현장 사진과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으로 독자에게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높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한국전쟁 취재의 축은 충남 아산이었다. 처음 그 작은 도시에서 1000명 넘게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아산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었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대한민국 지역 중에 전쟁과 학살의 광풍을 비껴간 곳이 거의 없다. 그 지명 뒤에 모두 ‘대학살’이라는 말을 붙여도 모자람이 없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죽이고 죽었다는 말인가. _서문 중에서, 5~6쪽.
1부
65만 시간의 기다림
사람을 할 결심
나, A4-5
끈기의 합기도 소년
중학생의 절규
슬기슬기 손 선생
“여긴 땅 파면 다 시체야”
모란, 폐결핵, 사투
검은 낫은 말이 없고
버클리의 두 얼굴
나는 어느 집 자식이었나
뼈들에 압도당하다
소리 없는 도망
아치섬에서 온 손님
사색 없이 사형, 사형
인류의 조상, 루시
나는 프락치가 됐다
흥수아이에 대한 추리
은비녀의 독백
장 선생 뼈의 증언
오빠의 환청
머리뼈의 역사
아버지를 찾아서
경식의 치아가 사라졌다
2부
“부역 혐의 처형”
육군유해발굴단으로
맹씨네 연좌제
태극기 휘날리며
7일간의 감금
미완의 집념
우리는 이성의 빛을 품고 있는가
역사와 목숨에 대한 상상력
죽음은 평등하지 않다는 것
금정굴 유해 발굴
큐브의 말들
귀신의 바다
왜 이렇게까지 죽였을까
상왕동의 찡그린 남자
충무공의 후손들
골령골과 모던 미스
신은 위대했다
슈팅스타가 창공을 가르자
사라진 아버지의 진실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으로
아버지는 인민위원장
해양 뼈대학
피해자가 가해자로
마침내 만나다
본 헌터
봄을 기다리며
발문: 한국전쟁 전후, 광풍의 역사 틈으로·강성현
부록
- 인물 이름 대조표
-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연표
나는 동쪽으로 튀어나온 참호 안에서 발견되었다. 내 머리는 북서쪽을 향해 있었다. 산 정상을 등진 상태였다. 두 손은 모인 채였다. 그 위에 삐삐선이 감겨 있었다. 다른 동료들은 죄다 나를 마주 보고 있다가 눈을 감은 것 같다. 그들은 두 줄이었다. 그들의 손도 삐삐선으로 묶였다. 옆으로 누운 8자 모양의 줄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연결된 각 삐삐선의 길이가 50센티미터였다. 나와 동료들은 손이 묶여 이곳에 끌려왔다._28쪽
무엇보다 A17, A18, A19 중엔 어린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의 뼈가 발견된 곳에서는 중中 자 동복 단추가 맣ㄴ이 나왔다. 여러 단추들이 섞인 걸 보면 여러 중학교의 학생들이 섞였다. 1950년대 중학교는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통합된 곳이었다. 천동 버클도 나왔다. ‘천농(天農)’이라고 쓰인 단추도 나왔다. 천안농업중학교 학생이다. 이들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뼈로 보건대 나이는 16~20세, 18~22세 사이로 추정되었다._43쪽
손 선생은 오늘의 선주를 만든 거울 같은 존재였다. 대부였다. 직관과 열정, 과학적 사고의 방법을 배웠다. 손 선생은 발굴 현장에서 돌이 나오면 묻고 또 물었다. 어떻게 쓰였을까. 누가, 왜, 어떻게 만들었을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우리말 고집이었다. 외국어를 우리말로 고쳐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찾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손 선생은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시절, 틈만 나면 선배였던 동주를 찾아가 기숙사 다락방에서 밤을 지새우며 우리 말과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노라고 했다. 뗀석기는 손 선생이 만든 말이었다. 그것은 본래 영어로 플레이크 툴(flake tool) 또는 한자어로 박편(薄片)이었다. 핸드 액스(hand axe)는 주먹도끼로 바꾸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슬기슬기 사람으로 바꾸었다._48~49쪽
다행히도 나는 14~15세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위턱과 아래턱의 치아를 통해 분석한 결과였다. 치아 뿌리가 완전히 형성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여자인지 남자인지, 키가 몇 센티미터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뼈들은 아이라는 것만을 증명했다. 아, 함께 노출된 나의 파트너 새지기 2-1을 소개해야지. (중략) 새지기 2-1은 여성이며 30~34세로 추정되었다. 키는 150.7센티미터라고 했다. 새지기 2-1과 나는 엉켜 있었다. 그렇다면 새지기 2-1은 엄마인가. 나는 엄마에게 안겨 있다가 최후를 맞이했는가._65~66쪽
승우의 사촌동생 승완은 승우가 고문당했던 공회당에 끌려가 몽둥이찜질을 당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인민 재판에서 호선 엄마가 죄가 없다고 거들어줘서 살았다. 승완과 함께 끌려간 친형수와 세 살배기 세화, 돌쟁이 민화도 일단 살았다. 승완은 생전에 툭툭 던지듯 말했다. “낫으로 죽였어.” (중략) 죽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집을 차지했다. 신팥집만 그런 게 아니었다. 승우의 사촌동생 승완도 죄인이 되어 집에서 쫓겨났다._80쪽
선주는 사람 털의 단면을 미세하게 잘라 분석하는 기계에 관심이 갔다. 이른바 마이크로 톰(micro tom)이었다. 성별·인종별로 체모의 형태가 달랐다. 머리털, 겨드랑이 털, 음모, 다리털도 단면을 잘라놓고 현미경으로 보면 제각기 달랐다. 선주는 샘플링을 해 지구상의 털들이 각기 어떻게 다른지 연구하겠다며 털을 모으기도 했다. 의무장교인 친구에게 부탁해 군부대 안에서 털을 모으다가 정보참모에게 발각돼 곤란한 일을 겪기도 했다. (중략) 사학과 대학원생의 이상한 수업 여행이었다. 치아형태학을 배우겠다고 연세대 치대를, 사람 뼈를 알고 싶다고 같은 대학 의대의 문을 두드렸으니 말이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_99쪽
처음에는 큰아버지 선준과 아버지 경준, 고모부 칠영만 끌려갔다. 두 손이 삐삐손에 묶여 끌려가는 광경을 오빠가 목격했다. 성재산의 유해들에게서 발견된 그 검고 굵은 삐삐선 말이다. 그 뒤 나머지 일가족과 인근의 마을에서 지목된 사람들이 어느 곡물 창고에 끌려왔다. (중략) 1·4 후퇴였다. 이 지역을 수복했던 경찰과 치안대원들은 다시 인민군이 내려올까 봐 두려워했다. 설마 우리 가족 같은 사람들이 인민군·중공군과 힘을 합쳐 보복할까 봐 미리 죽이려 했던 것일까. 창고에 잡혀 온 사람들은 200여 명이나 되었다._147쪽
1950년 9·28 수복 뒤 죄 없는 마을 사람들이 부역 혐의로 끌려가자 할아버지가 연판장을 돌리고 진정서를 면사무소와 경찰서에 보낸 게 화근이었다. 동네 목숨 줄을 쥐고 있는 향토방위대 부위원장 김 씨의 눈 밖에 완전히 나버린 것이다. 그것은 멸족의 불씨가 되었다. 이틀 뒤 열 명의 가족이 곡물창고에 있던 사람들과 함께 모산역 철길을 따라 성재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_189쪽
인민군이 물러가고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9월 29일 밤부터 10월 초까지가 1차 시기라면, 10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가 2차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 1·4 후퇴 때가 마지막 3차였다. 1·4 후퇴 때는 특히 가족 단위의 처형이 많았다. (중략) 여러 사람의 증언을 들으면서 ‘왜 이렇게까지 죽였을까’에 관해 수없이 질문을 던져보았다. 분노의 본질은 무엇이었을까._260~261쪽
2009년 발굴을 마친 뒤의 어느 날, 선주는 다시 한번 사진을 쳐다보았다. 찡그린 표정의 남자 좌우와 위아래로 수를 하나씩 세보았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트럭에는 몇 명까지 탈 수 있을까. 서른다섯, 서른여섯. 그 이상으로는 숫자가 넘어가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선주의 머리에 걸렸다._271~272쪽
‘뼈에는 색깔도, 거짓도 없다’
교차하는 두 시선을 따라 드러나는
민간인 학살의 은폐된 진실
“나는 앉아 있었다. 얼마 동안 앉아 있었냐면, (중략) 63만 4560시간 이상 앉아 있었던 셈이다.”(15쪽) 이 책은 쪼그려 앉은 채로 발굴된 유골, A4-5의 건조한 독백으로 시작한다. 혹시 함께 나온 유품을 살피면 이 유골들의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삐삐선과 탄피 사이로 ‘중’ 자가 새겨진 단추들이 여럿 나온다. 중학생도 있었다는 뜻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왜 산속에 줄줄이 끌려와 죽었는가.
그리고 이어지는 글 〈사람을 할 결심〉은 사뭇 대조적인 분위기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랑이 꽃피는 계절이었다. 싱싱한 초록의 나뭇잎들이 연도에 도열해 축하 박수를 쳐주는 기분이었다.”(21쪽)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앞둔 청년의 열망이 꿈틀거리다 못해 요동친다. 그의 부푼 마음처럼, 문장 곳곳이 생명력과 사랑으로 가득 차오른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 인류학자 선주의 이야기다.
이처럼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한 두 이야기는 언뜻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인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는 두 서사는 오로지 ‘뼈의 증언’을 따라 조금씩 거리를 좁혀간다. 그렇게 서로 다른 이야기의 궤를 그리며 아이러니하게 ‘민간인 대학살’이라는 한국 현대사 속 끔찍한 수수께끼를 풀어나간다.
구체적으로, 충남 아산 성재산 기슭에서 발굴된 유해 A4-5의 독백으로 시작한 아산의 이야기는, 민간인 학살사건과 관계된 다양한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진행된다. 1부에서, A4-5 그리고 그와 함께 발굴된 ‘A5-4’. 이보다 앞선 1995년에 인근에서 비슷한 정체불명의 유골을 발견했던 건축 현장 담당자 인욱, 성재산으로부터 1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지역 새지기의 유골 ‘새지기2-1’과 ‘새지기2-2’는 공통적으로 발굴 당시의 현장감과 유골 상태로부터 알 수 있는 학살사건의 진상들을 들려준다. 이어 1부의 글 〈소리 없는 도망〉 〈사색 없이 사형, 사형〉의 화자이자 한국전쟁기 당시 판사였던 ‘병진’과 〈나는 프락치가 됐다〉의 화자 ‘용길’이 부역자 재판 전후의 맥락을 이야기하며 민간인 학살사건의 정치·사회적 맥락이 조금씩 짜맞춰진다. 더불어 아산의 설화산에서 머리카락에 꽂힌 채 발굴된 은비녀들, 현장에서 세상을 떠난 ‘주화’, 유가족 ‘장호’의 이야기는 민간인 학살이 부역자 개인을 처단하는 이데올로기의 폭력을 넘어, 세대를 이어 일가족 전체를 집요하게 말살시키는 집단적 학살에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1부에서 서서히 밝혀지는 민간인 학살사건의 진실은 2부로 넘어가, 유가족·생존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의 시선을 거치며 더 구체화되고 다면적으로 서술된다.
한편, 결혼과 유학을 앞두고 열의로 가득 찼던 선주의 이야기는, 1부의 글 〈끈기의 합기도 소년〉 〈슬기슬기 손 선생〉 〈모란, 폐결핵, 사투〉로 이어지며 유년기·청년기의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끈질기고 호기심이 강한 선주의 성정을 보여준다. 〈버클리의 두 얼굴〉은 본격적으로 선주가 한국의 대학원 석사과정을 거쳐 미국 버클리대학 박사과정에서 체질인류학을 공부하며 인류학자로서 각양각색의 뼈들을 접하는 이야기로의 전환점이 된다. 〈뼈들에 압도당하다〉의 점말 동굴 동물 뼈, 〈아치섬에서 온 손님〉의 인골, 〈인류의 조상, 루시〉 〈흥수아이에 대한 추리〉의 학술적 가치가 높은 인골, 〈장 선생 뼈의 증언〉의 의문사한 장 선생 머리뼈 등을 다루며 선주는 점차 뼈에 남은 흔적·마모되고 손상된 정도·뼈의 크기와 길이 등의 정보를 살펴 진실을 도출해내는 ‘본 헌터’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2부에서는, 국가 폭력과 집단 죽음의 현장으로 흘러간 선주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선주를 분주하게 만들었던 것은 다름 아닌 ‘진실을 알고 싶다’는 학문적 호기심이었다. 선주의 눈에, 뼈에는 색깔도, 거짓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돋보였던 집요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선주의 이야기는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 현장·일본의 강제징용자 유해 발굴 현장과 전국 방방곡곡의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 발굴 현장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한평생 뼈의 증언을 좇아온 선주는, 어쩌면 필연적으로 A4-5와 마주하게 된다.
선주는 늘 생각했다. ‘나는 아치섬 인골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거다. 아치섬 인골이 없었다면….’ 그때 사람 뼈에 욕심을 갖고 경계를 넘어서는, 어쩌면 무리한 호기심의 광폭 질주가 선주의 오늘을 만들었다. 선주는 가끔 아치섬 인골 논문에 박힌 명백한 오류를 되새기기도 했다. 어금니에 홈처럼 난 선을 잘못 해석한 것이다. 논문을 쓸 땐 모래롤 양치질을 했다고 생각했다. 버클리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면서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치섬 인골은 6세 전에 고열을 앓았던 거다. 영양 상태가 안 좋아 남은 흔적이었다. _103쪽.
“도대체 얼마나 많이 죽이고 죽었다는 말인가”
침통함을 넘어, 한국 사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죽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집을 차지했다. (중략) 인문 위원장을 지냈다 하여, 인민위원회를 위해 밥을 해줬다 하여, 아들이 좌익 운동을 한다고 소문이 났다 하여, 인민군 점령기에 완장을 차고 양반을 모욕했다 하여 죽임을 당하고 재산을 빼앗겼다. 죽거나 쫓겨난 사람 집에 가해자 쪽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 _80~81쪽.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은 ‘부역자 처벌’이라는 명분하에 국가가 암묵적으로 승인한 사형(私刑)이었다는 점에서 그 양상이 매우 독특하다. 민간인 학살은 일차적으로 군·경찰의 지시와 집행으로 이루어졌다. 공식적인 작전과 공식 명령계통으로 하달되어 조직적으로 ‘빨갱이’를 색출하고 부역자를 처형하는 식이었다. 그러다 전쟁의 혼란을 틈타 사적 복수와 욕망이 개입되기 시작했다. 국가는 이를 암묵적으로 용인하고, 군·경은 방임하거나 외려 갈등을 부추겼다.
“인민군 점령기에 완장을 차고 양반을 모욕했다 하여”(80~81쪽), “동네 목숨 줄을 쥐고 있는 향토방위대 부위원장 김 씨의 눈 밖에 완전히 나버려서”(189쪽), “얼마나 잘 먹었으면 이렇게 두드려 패도 안 죽는지”(80쪽) 질투가 나서, 잔존하던 “지주-소작 계급간 갈등”(366쪽)이 경찰의 부추김으로 불붙어서 사람들이 죽고, 죽고, 죽었다. 개인적 원한을 풀고, 집과 재산을 빼앗기 위한 집단 학살이 시작되니 부역 혐의를 받은 청년·남성뿐 아니라 갓난쟁이부터 아녀자, 노쇠한 부모까지 일가족 전원이 ‘처형’ 대상이었다. 사적인 복수를 위해 거짓 고발과 낙인, 극악무도한 색출과 매카시즘이 복합적으로 뒤엉켜 끔찍한 학살사건으로 귀결됐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죽음의 수많은 이유 중 하나에 불과했다.
특히,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아산의 민간인 학살사건은 1950년 9·28 수복 이후 국면과 1951년 1·4 후퇴 국면에서 두드러지게 발생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들의 희생자로 77명의 최종 신원을 확인했는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작성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연령 미상 32명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희생자 연령은 10세 미만으로, 총 14명이었다. 최소 800여 명이 아산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A4-5가 65만 시간의 기다림 끝에 땅 밖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역사학자 심용환은 이 책을 추천하며 이렇게 말한다. “한국 사회의 존엄을 지키고자 만들어진 책. 침통함을 넘어 새로운 길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한다.” 한국전쟁은 때로 오늘날 우리와 관련 없는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한국전쟁기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고통은 아직도 뚜렷하게 남아 있으며 피해 규모는 여전히 집계 중에 있다. 은폐된 폭력의 역사를 마주하고 집단적 차원에서 피해자의 이야기를 복원할 때, 그렇게 조각나고 파묻힌 것들을 다시 이어붙일 때, 한국 사회는 침통함을 넘어 비로소 그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증언도 잊히지 않는다. 갓난아기를 업고 일행과 함께 끌려가던 젊은 엄마가 어둠을 틈타 옆 콩밭에 잽싸게 숨었다. 갓난아이가 울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아기조차 울지 않더라고 했다. 정적, 갓난아이조차 입을 닫게 만든 그 정적은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웠을까.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공포다. (중략) 그러나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_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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