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2024년 02월 05일 출간
국내도서 : 2024년 01월 1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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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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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성취가 모든 것을 대변하다시피 하는 우리 시대의 삶의 조건은 그야말로 ‘괴로운 밤’과 다를 것이 없다. 무수한 욕망들이 충돌하는 재난 같은 일상을, 우리는 그저 춤을 추듯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일까. 수록된 소설 한 편 한 편을 읽다 보면, 우리 삶의 고단함과 그 속에서 욕망에 허덕이는 군상의 민낯들을 마주하게 되고, 또 그럼에도 그런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서의 상호이해와 사랑의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는 지금 겪고 있을지 모르고, 또 우리 주변에서 자주 마주할 수 있는 상황들이 문학적이고 감각적인 이야기로 재구성되어 공감과 연민과 분노와 슬픔을 자아낸다. 한 편을 읽기 시작하면, 제각기 다른 소재를 다루지만 결국 우리 시대의 초상으로 연결되는 열두 편의 소설을 단숨에 읽게 만드는 흡인력이 강하다. 코로나 시대의 사회적 거리 두기나 재난지원금 문제, 요동치는 부동산 시세와 같은 동시대적 현실을 생생하게 그리는 동시에, 고전 설화를 비롯한 다분야의 정보를 차용해 이야기의 결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서 작가의 필력이 여실히 드러난다. 수록된 작품들의 여운이 긴 이유이기도 하다.
이름이 똑같은 대학 동기와 연인이 되었으나 경제적 무능 때문에 버림받은 남자가 그녀의 죽음을 통보받고 찾아간 장례식에서 고단하고 씁쓸한 삶의 조건을 되새기는 표제작(「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에서는 ‘만파식적’과 ‘처용가’라는 고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코로나 재난지원금으로 어머니의 선물을 사려 하는 실직자의 고달픔(「선물」), 학폭·왕따의 굴레와 법 제도 및 적용의 모순(「네버 엔딩 스토리」), 부동산에 대한 욕망과 가상화폐 투자 끝에 다다른 씁쓸한 현실(「숨바꼭질」), 전염병과 전쟁에 대한 우화(「눈먼 자들의 우주」), 유력 정치인의 부동산 정책 관련 발언 문제로 대동단결해 시위에 나섰지만 서서히 분열하며 드러나는 저마다의 욕망(「동상이몽」), 콜센터 안내원의 취약한 근로조건(「안부」), 자기 욕망 때문에 기꺼이 서로를 질시하고 진실을 호도하는 일상의 모습(「동호회」) 등 지금 우리 시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직접적이고 절박한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마치 우리가 주인공과 같은 곤경에 처한 것처럼 숨이 가빠오기도 한다.
그런 처절하고 너절한 현실 속에도 희망은 있다. 중고거래 사기를 당했지만, 같은 사이트에서 만난 사람과 교감을 나누며 살아갈 힘을 찾는 이야기(「징검다리」), 사고 후 인공지능이 되어버린 존재의 인간성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희생과 사랑(「시간을 되돌리면」), 단군 설화를 차용해 그려낸, 세월에 바래지 않고 단단한 닻이 되어주는 사랑의 가치(「사랑의 유통기한」), 고단하고 힘든 삶 속에서 위로가 되어주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기억(「첫사랑」)을 담은 작품에서 우리는 괴로운 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춤을 추는 것밖에 없는 삶의 조건 속에서 길어 올리는 작은 희망을 마주하게 된다. 그 감동이 만만치 않다.
지금 우리 시대와 삶의 조건을 가장 적확하게 다룬 단편들을 고르라면 바로 이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이다. 저마다의 욕망을 부추기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그 장단에 맞춰 춤을 추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욕망의 민낯을 직시하고,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과 배려를 통해 작은 징검다리 하나를 놓는 일도 어쩌면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고,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는 담담히 일러준다.
선물
징검다리
네버 엔딩 스토리
숨바꼭질
시간을 되돌리면
눈먼 자들의 우주
사랑의 유통기한
동상이몽
안부
동호회
첫사랑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삼 년 만의 재회다. 나는 향을 사르며 영정 사진 속 지수의 얼굴을 바라봤다. 지수는 가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지수의 입술 사이로 치아가 살짝 보였다. 지수가 그토록 싫어했던 덧니는 결혼 후 교정한 듯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치아 교정의 영향으로 미묘하게 달라진 지수의 턱선을 눈으로 훑으며, 나는 지수가 이미 오래전에 나를 떠난 여자임을 실감했다. 나는 상주의 자격으로 서 있는 지수의 남편과 맞절하고, 그에게 의례적인 위로의 말을 건네며 일어섰다. 그런데 그가 뜻밖의 말로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당신을 압니다.” -24쪽 「괴로운 밤, 우린 춤을 추네」
나는 스무 살이 된 딸과 마주 앉아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는 모습을 잠시 상상해봤다. 그 자리에서 딸은 내게 무엇을 질문할까. 나는 딸에게 무슨 답을 해줄 수 있을까. 무슨 질문이든 간에 딸에겐 주저하지 말고 행복을 선택해야 한다는 답을 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네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항상 널 믿고 응원한다고. 주눅 들지 말고 네가 가고 싶은 길을 가라고.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나 지금이라고. 내가 너의 징검다리가 돼주겠다고. -74쪽 「징검다리」
“나도 지금까지 너 뒤치다꺼리하다 보니 반은 법조인이야. 형사 끝나면 다 끝날 것 같아? 민사로 가겠지. 너 때문에 입은 손해를 다 배상하라면서 말이야. 형사와 민사가 별개의 소송이란 건 너도 잘 알지? 뉴스를 찾아보니까 그놈이 찍은 광고가 다 내려갔다더라. 그게 끝일까? 광고주에게 위약금을 물어줘야 할 거야. 위약금은 보통 출연료의 두세 배라더라. 과연 그놈이 가만히 있을까? 만약 민사에서 지면 그거 다 네가 뒤집어써야 해. 내가 그놈이라면 너를 포함해 자기한테 악플을 단 모든 사람을 고소해서 합의금을 뜯어낼 거야. 내지 않고 버티다 보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되고 계좌도 압류될 거야. 경찰은 너 잡겠다고 전국에 수배령을 내릴 테고. 그러면 이 땅에서 사람 구실을 전혀 할 수 없게 되겠지. 삼면이 바다인데 어디로 도망갈래? 그러다가 마지막에 한강 물 온도 재는 거야. 그런 미래, 감당할 수 있겠어?”
-92쪽 「네버 엔딩 스토리」
나는 나와 비슷한 또래인 B가 이런 아파트를 신혼집으로 살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B는 내 놀란 얼굴을 보고 손사래를 쳤다.
“안방과 화장실만 우리 거고 나머지는 은행 거예요. 부모님 도움도 좀 받았고요.”
“얼마에 사셨어요?”
B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을 피했다.
“뭘 또 그런 걸 물어보세요. 쑥스럽게. 인터넷 뒤지면 다 나와요. 그리고 여기는 근처에 있는 다른 아파트 단지보다 학군이 별로여서 저렴한 편이에요.”
저렴한 편이라고? 도대체 어느 정도가 저렴한 편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B가 안줏거리를 준비하러 주방으로 간 사이에 휴대전화로 이 집의 시세를 검색해봤다. 이 집과 같은 평형 매물의 최근 실거래가 중 최저가는 4억 8,500만 원이었다. B의 신혼집은 내가 연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십 년 가까이 모아야 겨우 살 수 있는 집이었다. -124쪽 「숨바꼭질」
“제안을 받아들이신 거죠?”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고작 한 시간도 흐르지 않은 사이에 제게 벌어진 일이 너무 버라이어티해서. 제 흔적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우는 일이 이렇게 빨리 결정할 일인가요?”
“287번째 범우 씨에게는 잠깐일지 몰라도, 저와 저를 스쳐간 286명의 범우 씨는 오늘 이 순간을 위해 긴 시간을 기다리며 준비했어요.”
“제가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요?”
경선이 연필꽂이에서 문구용 커터를 위협하듯 꺼내 보였다.
“이미 수도 없이 죽였는데 한 번을 더 못 죽일까. 저는 범우 씨가 전장에서 살인귀가 되는 모습은 차마 못 보겠어요. 그 전에 제가 죽여드릴게요. 확실하게.”
-166쪽 「시간을 되돌리면」
그랬던 태산신도시가 개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자 두 배 넘게 시세가 뛰어올라 명품신도시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양의 일산, 성남의 분당과 판교, 수원과 용인의 광교, 화성의 동탄처럼 태산이라는 동 이름도 브랜드가 됐다. 태산신도시 입주민은 자신을 고진 사람이 아닌 태산 사람이라고 칭했다. 다른 동 주민은 이를 고깝게 바라보면서도 태산신도시 개발의 프리미엄이 자기가 사는 동네에도 미치기를 바랐다. 이 같은 변화에 김인형이 태산동을 바라보는 감정도 복잡해졌다. -253~254쪽 「동상이몽」
민원인과 통화하는 동안에도 나는 경희 언니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쓰러진 동료 직원을 바로 옆에 두고도 일을 멈출 수 없는 처지가 기가 막혀 눈물이 터져 나왔고 목소리는 뭉개졌다. 민원인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다며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경희 언니는 잠시 후 도착한 구조대원의 발 빠른 심폐소생술 덕분에 목숨을 건졌지만, 그날 이후 콜센터에 다시 출근하지 못했다. 이 사건은 SNS를 통해 폭로돼 사회적 공분을 일으켰다. 폭로자는 뜻밖에도 누구보다 열악한 근로환경을 잘 견뎌왔던 윤하였다. -282쪽 「안부」
나는 조문객들에게 음식을 나르며 첫 키스의 추억을 떠올렸다. 스무 살 여름에 아무도 없는 대학교 박물관 구석에서 첫사랑과 몰래 나누었던 수줍은 첫 키스에서 나는 달콤한 연유의 향기를 맡았다. 어머니의 일기장 속 오빠와 사다코가 멀어져간 자리에도 그 달콤한 연유의 향기가 은은하게 남아 있었다. -319쪽 「첫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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