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 물 온도는 적당하세요
2024년 02월 08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10월 2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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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SBN 9788970776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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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손님 물 온도는 적당하세요 19
연인의 여섯 번째 전시회 22
금요일 아침 국수 25
설레는 아내와 여행 29
가정주부로 살아가기 34
두 사람 38
별 헤는 밤 42
오찬 밥상 46
내일 말고 오늘 50
깻잎 한 장의 행복 53
제 2 부 할아버지의 막걸리
기다림은 아픔이었다 61
58년생 운전기사의 하루 66
공 여사 내일도 오늘같이 73
엄마와 어머니 79
목련은 그리움이다 85
추억 쌓기 88
엄마야 누나야 92
작은 거인 97
장모와 사위의 병원 나들이 104
할아버지의 막걸리 108
제 3 부 집 나간 붕어 한 마리
홍당무가 된 엄지발가락 117
내 꿈 셋 122
불청객 127
나의 꿈 국어 선생님 132
차렷보다 짝 발 135
축제와 도시락 140
부치지 못한 편지 146
정년 퇴임 151
영어야 떠나거라 154
집 나간 붕어 한 마리 158
제 4 부 은퇴 365일 행복을 만나다
서울이여 안녕 165
은퇴 2개월 배움은 즐겁다 169
꿈속에서 28일간 남미 여행 173
당구야 놀자 친구야 놀자 178
걸음마 베짱이 184
세 번째 대학생 187
시니어 넉가래 부대 190
아들과 첫 나들이 194
사계절 베짱이 206
렌즈에 못 담은 추억 209
염불보다 잿밥 212
유월 베짱이의 하루 216
처인구와 처진구 221
철부지 60대의 아우성 226
은퇴 365일 행복을 만나다 231
제 5 부 책 한 권의 인연
선풍기의 동안거 211
라파엘 광장의 작은 천사 245
일월의 봄 249
이월 예찬 252
안경은 애물단지 257
여섯 병아리의 합창 261
용인문화원과 마이산 508계단 266
이발소의 부활을 기대한다 271
나의 터미네이터 276
예순네 번째 가을 280
두 명의 주례와 P 학예사 282
야생화 농장과 정 팀장 287
모나리자와 P 도슨트 292
헬조선과 한국예찬 298
책 한 권의 인연 301
“손님, 샴푸 시작하겠습니다. 물 온도는 적당하세요?”
“예, 아주 좋습니다.”
“머리 감는 중에 불편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어제 안방 세면실에서 아내의 머리를 감겨주며 나눴던 대화다.
3년 전, 집사람은 50대 중반에 늦깎이 석사과정을 시작하면서 코피를 자주 흘렸다. 피는 쉽게 멈추지 않고 양도 많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얼마 전부터 증세가 심해져서 동네 병원 몇 곳을 전전하다가 급기야 큰 병원을 찾았다. ‘비강 내 양성 종양’이었고 수술과 향후 추가적인 조직검사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방심하는 사이 불청객은 몇 년 동안 주인 몰래 똬리를 틀고 몸집을 야금야금 키워왔나 보다.
수술 후 퇴원하는 날, 담당 전공의는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질서 정연하게 당부했다.
당분간 코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무리하지 말 것, 무거운 물건은 들지 말 것, 최소 3주간은 코도 풀지 말 것 등’ 지키기 쉽지 않은 주문을 쏟아 냈다.
아내는 ‘범생이’가 되어 의사의 지시사항을 빠짐없이 따랐다. 얼굴도 제대로 씻지 않았는데 머리를 감았을까?
3주간의 모범적인 칩거를 무사히 마치고 조직검사 결과 보러 병원 가기 전날, 아내는 내게 머리를 감겨 달라고 했다. 수술한 코 부위에 물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전공의의 당부를 마지막까지 따르기 위해서다.
아내는 세면실 안에 옮겨 놓은 식탁 의자에 앉아, 얼굴을 천장으로 향한 채 목을 뒤로 젖히고 나의 손길을 기다린다. 좁은 욕실에서 두 사람의 호흡이 섞이고, 아내의 얼굴을 내 얼굴보다 더 가까이에서 본다. 세월이 남긴 흔적이 잔주름으로 남아 밭이랑처럼 선명하다. 결혼 36년, 나만 늙고 힘들었던 게 아니었나 보다. 온몸이 아려온다.
“이쪽 아니 저쪽, 저쪽. 좀 더 빡빡.”
“아유~ 시원해, 아~ 상쾌해.”
머리를 감는 동안 아내는 폭포수 같은 감탄사를 소프라노 톤으로 쏟아 낸다.
서툰 솜씨지만 머리 감기기는 무사히 끝났다.
아내는 능란한 솜씨로 젖은 머리를 매만지며 “여보, 고마워.”하고 배시시 웃는다. 결혼하던 스물다섯 살 때 청아한 미소를 다시 본다.
연인의 여섯 번째 전시회
아마추어 화가에게 개인전은 신명 나면서도 부담스러운 일이다. 전시장소 섭외, 작품 선정 및 배치, 리플릿 제작과 같은 문제를 도맡아 진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아마추어 화가들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나의 연인도 그렇다.
3월에 예정된 전시회를 앞두고 1월 초 악재가 발생했다. 연인은 몇 년 전부터 코피를 흘리더니 최근에는 피의 양도 많아지고 횟수까지 잦아졌다. 결국 수술대에 몸을 뉘고 말았다. 수술 결과는 다행히 좋았고 걱정했던 조직검사 결과도 나쁘지 않았다.
‘두 달 앞으로 다가온 전시회를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은 나 혼자만의 기우였다.
아마추어 화가의 자존심이 때로는 기성 작가보다 더 단단했다. 계획된 전시회는 수술 정도의 시련으로 포기되지 않았다.
나의 연인은 이십 대에 하지 못한 그림 공부를 오십 대 중반에 끝냈다. 석사학위 논문을 쓰면서 코피를 자주 흘렸다. 흰 휴지를 콧속 깊이 막고 밤을 새우던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안쓰럽다. 그림에 대한 도전은 끝이 없다. 최근에는 버려진 알약을 소재로 새로운 도전을 한다. ‘환갑이 맞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하긴 내 애인은 몸매도, 생각도 여전히 스물다섯 살 공주다.
화사한 꽃이 봄의 왈츠를 추기 시작하는 3월, 한 달의 전시 기회를 내어 준 치유갤러리에 감사할 뿐이다.
‘또 다른 나를 찾아…….’는 연인의 여섯 번째 개인 전시회 주제다. 무수히 많은 자아 중 진정한 ‘나 다움‘을 찾아가는 과정을 화폭에 풀어 놓았다. 40여 작품이 오가는 환자에게 치유를 기원하듯 미소로 인사한다. 그림은 돌담에 내려앉은 햇살처럼 따사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이롭기도 하다. 창문을 타고 넘어온 봄기운이 전시 공간 구석구석까지 아지랑이로 퍼진다. 노랑 파랑 흰색 회색 금색이 모든 이[齒]의 치유를 기원한다. 캔버스와 ‘갤러리 치유[齒You]’가 웃고, 환우와 병원이 마주 보고 웃는다. 코비드에 신음하는 봄이 아니라 치유(治癒)의 봄이 차고 넘친다.
92세, 연인의 아버지가 헌팅 캡 hunting cap으로 멋을 잔뜩 부리며 셋째 딸의 여섯 번째 전시회 장소로 행차한다. 89세 어머니가 비니 beanie 모자 쓰고 아장아장 납신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내외가 의장대를 열병하는 장면과 다를 바 없다. 병사를 대신하여 셋째 딸, 내 연인의 그림이 호위무사 노릇을 한다. 너털웃음과 함박웃음에 두 분의 눈이 감긴다. 백수白壽는 떼어 놓은 당상이다.
부모에게 최고의 효도 선물은 자식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연인의 다음 전시회가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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