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들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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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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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타이완의 젊은 거장 천쓰홍의 장편 소설 『귀신들의 땅』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한 일가족을 중심으로 타이완의 아픈 현대사를 담아낸 걸작 『귀신들의 땅』은 타이완에서 가장 큰 양대 문학상인 ‘금장상 문학도서부문상’과 ‘금전상 연도백만대상’을 수상했으며, 12개 언어로 출간되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1 첫 번째 타운 하우스 11
2 바닥 틈새로 비집고 들어가다 21
3 비닐봉지 없는 얼굴 32
4 천씨 성의 여성 호적원 37
5 양타오 나무 위의 막내 51
6 좋은 운명을 타고난 셋째 딸 64
7 귀신의 말 76
8 낮이 없는 백악관 85
9 간장 공장 담장 위의 향장 98
10 고마워, 파리 109
11 이리 와, 이리 오라고 124
12 네이후 장화 동향회 138
13 콩기름 매미 150
14 가벼운 배는 이미 만 겹의 산을 지났다 158
15 유서 172
2부 톈홍이 돌아오다
16 용싱 수영장 179
17 집으로 돌아가는구나 193
18 불을 찾다 203
19 어두운 밤은 죽었다 217
20 1984년의 맥도날드 감자튀김 229
21 뱀탕 242
22 온몸에 베를린의 가을이 달라붙다 252
23 이오니아식 기둥 265
24 더 많은 짝 잃은 장갑들을 찾아서 273
25 원대한 꿈, 용징의 빛 285
26 산속에 있지도 않고 바람 속에 있지도 않고 294
27 청자오마 영화관 307
28 하마는 아주 위험하다고요 320
29 전부 야생 백조들이야 334
30 피부 속의 붉은 꽃을 파내다 344
3부 울지 마
31 손금의 미궁에 빠지다 355
32 저는 그저 춤 연습을 하러 왔을 뿐이에요 362
33 이 죽일 놈의 비는 가는 바늘이라 376
34 남자랑 하겠다는 것이었다 383
35 일본 비타민 391
36 다섯 자매의 입을 꿰매 버리다 404
37 지붕 위에는 뱀과 용, 봉황과 호랑이가 있었다 418
38 성결함과 불결함이 그의 몸에서 서로 만나다 429
39 이웃집 고양이를 안고 바다로 수영하러 가다 438
40 가장 좋은 건 파리까지 들리는 거였지 448
41 U-995 455
42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462
43 백악관 방습 상자 안의 유서 두 통 471
44 경찰이 동성애 범죄 커플을 체포하다 475
45 바람이 시작되는 곳은 어디일까 481
작가의 말 491
옮긴이의 말 499
귀신들의 땅은 황량했다. 그렇다면, 귀신은 정말로 있는 걸까.
시골 들판에는 도깨비들이 무수하고, 그들 대부분은 사람들의 입속에 살고 있었다. 한 줄로 늘어선 이 타운 하우스 앞에는 무성한 대나무 숲이 있다. 사람들은 그곳에 여자 귀신이 날아다니니까 절대로 가까이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대나무 숲 여자 귀신은 일제 강점기에 강간당한 여자로, 정절을 훼손당했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쫓겨나 대나무 숲에서 목을 맸다고 했다. 이때부터 귀신이 되어 오직 젊은 남자들만 유혹한다고 했다.(16쪽)
그녀는 몸을 뒤집어 차가운 바닥에 엎드린 채 바닥 틈새에 눈을 댔다. 오늘은 중원절이라 귀문이 열린 지 이미 보름은 지났으니 혼귀들이 마구 돌아다닐 것이다. 그녀는 바닥 틈새로 지옥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틈새는 그녀의 재봉틀 바로 옆에 있었다. 삶의 의욕이 솟을 때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럴 때마다 틈새가 조금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더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틈새가 갈수록 더 넓어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을 그 틈새로 밀어 넣으면 아무도 찾지 못할 것 같았다. (22쪽)
그녀는 가족 전체에서 유일하게 엄마의 중원절 보도(普渡) 제배(祭拜) 의식을 전승받은 딸이었다. 어려서부터 엄마를 따라 제배에 참여했기 때문에 그녀는 크고 작은 명절과 경사에 수반되는 각종 금기와 의식 절차 및 방법을 훤히 알았다. 커다란 접이식 원탁을 펼쳐 놓고 닭과 돼지, 오리, 탕면, 마른 음식 등을 잘 배열한 다음, 원탁이 바깥쪽을 향하게 하여 집 밖에 내놓았다. 원탁 앞에는 깨끗한 물이 한 대야 놓이고, 물속에는 작은 수건이 하나 가라앉아 있어야 한다. 지나가던 귀신들이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원탁에 차려진 잔칫상을 실컷 누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음식마다 선향(線香) 세 개가 꽂혔다. 결핍의 해일수록 원탁의 음식은 더 푸짐했다. 지전도 태워서 길 가던 귀신들과 혼귀들이 침울해하지 않게 했다. (26쪽)
나는 그 아이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들 그 아이가 다섯 자매 가운데 가장 예뻤다고 말했던 걸 기억한다.
내가 아찬과 결혼하던 해에 중매쟁이 할멈이 그녀가 마을에서 가장 예쁜 여자라고 말했다.
가장 예쁜 딸은 아찬을 가장 많이 닮았다. 눈이 크고 가슴도 크고 눈썹이 진하고 피부가 희었다. 두 여자는 서로 가장 닮았지만 서로 가장 미워했다.
어린 딸을 죽인 살인자는 내 마누라였다.
다행히 나는 딸의 얼굴을 잊어버렸다. 이는 마누라의 얼굴을 잊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35~36쪽)
그녀는 상대방이 시각 장애인인 줄 알고 곧장 사과했다. 그러자 상대방은 더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
“뭐라고요? 내가 장님인 줄 알아요? 내가 방금 말했잖아요. 나는 맹인 안내견 조련사란 말이에요. 내가 장님이면 어떻게 개들을 조련할 수 있겠어요? 개들은 나와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밖에 둘 수가 없어요. 당신들이 맹인 안내견에 우호적이지 않다고 투서할 테니까 그런 줄 알아요.”
인간이 포효하는 바람에 개들은 사무소 안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아이가 계속 울었지만 그녀는 달리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어 다시 복사기가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너무 많은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몇 시간 뒤에 ‘천씨 성의 여성 호적원(戶籍員)’을 찾는 전화가 끊임없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그녀의 번호로 연결되자마자 심한 욕설이 쏟아졌다. 기자들도 몰려와 ‘천씨 성의 여성 호적원’을 찾으며 마이크로 그녀를 조준했다.
“맹인 안내견을 배척하시는 이유가 뭔가요?”(45쪽)
술래를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그는 잠이 들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 내려다보니 빨간색이 보였다.
웃통을 드러낸 검은 피부의 남자가 빨간 반바지 차림으로 양타오 나무 아래서 책을 읽고 있었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에게 말했다.
“아산(阿山)의 막내로구나?”
그의 시야에서 빨간 반바지가 끊임없이 확대되더니 점차 그의 생각 전체를 장악해 버렸다. 그는 빨간 반바지만 보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놀랄 것 없어. 여기는 아주 안전해. 애들은 널 절대로 못 찾을 거야.”
사랑하는 T, 그때, 나는 그 자리에서 양타오 나무 아래 앉아 있는 빨간 반바지의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어. (63쪽)
나는 귀신이다.
귀신인 내가 귀신에 대해 얘기하는 건 아주 적절한 일 아닐까?
나는 죽었다. 하지만 여전히 ‘존재’한다.
기억은 나의 존재이자 순환의 매개다. 나의 기억과 타인들의 기억을 통해 나는 존재한다. 이곳에 존재하고 현장에 존재하고 여기에 존재하고 저기에 존재한다. 나는 기억에 의지하고 기억에 기생한다. 기억이 있는 곳, 말할 이야기가 있는 곳이 바로 내가 있는 현장이자 구전의 역사다.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과 구강과 혀끝에 존재한다. (76쪽)
수많은 광고지와 선거 포스터가 나붙어 원래의 그림을 일부 가리고 있었다. 그는 모든 광고를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각종 점쳐 드립니다. 중고차 매매. 자동차 대출. 소파 수리. 공장 직판. 구아버 도매. 이혼 전문. 간통 현장을 잡아 드립니다. 파트너 소개 전문. 수술 없이 풍만한 가슴을 선물해 드립니다. 물탱크 수리. 정화조 청소. 빚 받아 드립니다. 대서 및 투자. 베트남 신부. 예수 믿고 영생 얻으세요……. 이 밖에 수많은 국회 및 지방 의회 의원과 기관 대표, 현장 등의 선거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오래된 포스터는 바닥에 떨어지고 그 자리에 새 포스터가 나붙었다.
이런 광고지가 바로 그의 고향이었다. 무속과 지하 금융, 조직 폭력, 중매, 정치 참여, 뇌물 등 인생의 온갖 의심스러운 증상들이 전부 이 담장에 있었다. 모든 광고 밑에는 전화번호와 수신자 이름이 명기되어 있었다. 이런 전화로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6쪽)
추풍나무 앞에서는 누군가 신에게 감사의 절을 올리고 있었다.
이웃에 사는 뱀 잡는 아저씨였다. 뱀 잡는 아저씨는 큰돈을 들여 나무 밑에 옥외 무대를 설치했다. 세 자매로 구성된 스트립쇼 무용단이 무대 위에서 나무를 향해 몸을 움직이면서 걸치고 있던 반짝거리는 옷을 벗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벗었다. 말이 ‘세 자매’지 사실은 할머니와 엄마, 손녀 삼 대의 여자들이었다. 스트립쇼가 대대로 전승된 것이다. 시골의 작은 지역에서는 장례나 혼례가 있을 때마다 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무대 위의 머리가 가장 작은 여자는 그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반 친구였다. 그녀는 무대 아래 있는 그를 보고는 옷을 벗으면서 소리쳤다.
“천톈홍, 너 오늘 수학 숙제 다 했어? 다 했으면 나 좀 보여 줘. 베껴서 내게! 정말 어렵더라. 나는 절대로 못 풀겠어!” (159쪽)
■ 옛 기억은 귀신을 부른다.
그들은 우리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다.
타이완 중부의 외딴 시골 마을 용징(永靖). 이제는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조용한 이 마을에 한 남자가 귀향한다. 독일에서 동성 애인을 죽이고 교도소에서 형을 산 뒤에 귀국한 천씨 집안의 일곱째이자 막내아들 톈홍이다. 아홉 식구를 먹여 살리는 데 평생을 바친 조용한 성격의 아버지.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이지만 괄괄한 성격에 입심이 드세고, 타이완의 온갖 미신과 제례 풍습에 밝은 어머니. 그리고 오직 아들을 보기 위해 태어난 다섯 명의 딸과 드디어 그 아래로 태어난 형. 이들이 톈홍의 가족인 천씨 집안 사람들이다.
1980년대, 온갖 미신이 살아 숨 쉬던 용징에 개발 붐이 불면서, 낡은 삼합원 가옥에 살던 천씨 집안은 새로 지은 타운 하우스에 입주한다. 오래된 숲을 밀어버리고 지은 타운 하우스 근처에는 일본군에게 강간당해 죽은 여자 귀신이 남자를 홀린다는 대나무숲이 있고, 짐승이 죽으면 내다 버리는 썩어가는 개천이 있고, 온갖 신과 귀신을 모시는 묘당과 양타오 과일향이 가득한 과수원이 있다. 어린 톈홍과 다섯 누나는 고도의 경제 성장을 누리기 시작한 타이완의 발전상과는 별개로 힘들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며 이곳에서 성장한다.
첫째 누나 수메이는 중학교를 겨우 마친 뒤에 어머니의 등쌀에서 벗어나고자 방직 공장에 취직한다. 그녀는 거기서 지게차를 몰던 남자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갖고 결혼한다. 근면했던 남편은 노름에 빠져 수메이가 모은 돈을 다 날린 뒤, 난초 화원을 차리지만 이 또한 신통치 않았으며, 마지막으로는 노후를 보내겠다며 작은 산을 사들이지만 타이완을 덮친 지진으로 인해 이 산마저 무너진다. 재봉틀로 가내수공업을 하며 끼니를 잇는 수메이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이 죽기 전에 남편이 죽는 꼴을 반드시 두 눈으로 보는 것이다.
둘째 수리는 공무원 시험에 가까스로 합격해 타이베이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지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녀의 일상 못지않게 따분하고 지루한 위인인 남편, 그리고 매일 마주치는 ‘진상’ 민원인들. 어느 날 그녀는 맹인 안내견을 데리고 동사무소에 들어온 민원인과 시비에 휘말리고, 그 장면이 인터넷에 유포되어 각종 비난에 시달리게 된다.
셋째 수칭은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받는 딸이자 공부를 잘해 타이베이 대학에 입학한 가장 자랑스러운 딸이지만, 정작 자신에겐 특출난 점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넷째 언니의 남편인 갑부집 남자를 통해 뉴스 앵커를 소개받아 결혼에 이르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호화로운 환경에서 살게 되지만, 사실 그녀의 남편은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위선적이고 위험한 남자다.
넷째 쑤제는 아버지와 함께 사업하다가 거부가 된 왕씨 집안 큰아들과 결혼한다. 사실 그 혼처는 자매 중 가장 미인이었던 다섯째로 정해져 있었으나, 쑤제는 동생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여 용징에서 가장 큰 저택인 ‘백악관’의 여주인이 된다. 하지만 다섯째가 의문의 죽음을 맞은 뒤, 쑤제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방 안에 틀어박힌 채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다.
톈훙이 독일에서 애인인 T를 죽인 뒤에 용징으로 돌아온 시기는 중원절이다. 귀문(鬼門)이 열려서 온갖 귀신들이 출몰하는 이 무더운 계절. 옛집인 타운 하우스에는 이제 큰누나 수메이만이 남아 있다. 톈훙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둘째와 셋째 누나도 이곳을 찾아오기로 한다. 하지만 이 집엔 또 다른 손님들도 있다. 소설 속에서 내레이션을 통해 등장하는 두 명의 귀신이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죽은 자와 산 자가 한데 모이는 중원절 제사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 성소수자 작가들이 이뤄낸 타이완 ‘동지(同志) 문학’의 걸작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하면 흔히 일본을 떠올리게 되지만, 역사의 궤도와 그로 인해 민중이 겪은 고초를 이야기할 때 한국과 더 흡사한 나라는 타이완이다. 원주민들이 살았던 시절에는 청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명나라 장수 정성공 일파에 의해 점령당했고, 근대에 들어서는 50년간 일본에게 식민 통치를 당했다. 일본이 물러간 이후엔 국공내전에서 패한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이 타이완을 점거했고, 이들은 반국민당 운동을 벌인 시민 28,000여 명을 학살했다(이 ‘2·28 사건’의 과정은 타이완의 영화감독 허우샤오시엔의 걸작 영화 〈비정성시〉에 잘 묘사돼 있다).
장제스 일가와 국민당의 일당 독재는 무려 1987년까지의 기나긴 계엄령 속에 이어지다가 민진당이 탄생하면서 막을 내렸는데, 이때까지도 타이완에서는 갖가지 이유로 백색 테러가 자행되어 많은 사람이 실종되거나 투옥되었다.
『귀신들의 땅』은 천씨 집안의 내력을 좇으며 이 같은 타이완의 슬픈 역사적 배경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작가 천쓰홍은 소설 속 톈홍과 흡사한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농가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게이로 살아가면서 타이완 정부가 동성애를 비롯한 갖가지 구실로 많은 사람을 탄압하고 체포하는 광경을 목격했다. 소설 속에서 ‘밍르’ 서점의 두 주인과 또 다른 인물이 경찰에 체포되는 사건이 이 같은 역사적 배경을 드러낸다. 주인공 톈훙과 그의 독일인 연인 T의 사랑은 신나치가 설치는 독일을 배경으로 비극적으로 전개된다. 오늘날의 타이완 문학계에서는 성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동지(同志) 문학’이라는 말이 존재할 정도로 많은 성소수자 작가들이 활약하며 인권을 위해 활동하고 있는데, 작가 천쓰홍 역시 이들 중 하나다.
한국과의 친연성은 역사적 배경에 그치지 않는다. 소설의 문체와 정서, 결 역시 매우 가깝게 느껴진다. 가족을 중심으로 하여 서로에 대한 진한 애정과 증오가 공존하고, 그 과정에 웃음과 눈물이 스며 있는 점 역시 읽는 이의 피부에 직접적으로 와닿는다. 한국과 다를 바 없는 뿌리 깊은 남아선호 사상으로 인해 원치 않은 아이들로 태어난 다섯 자매가 겪는 온갖 애환은 남동생의 시선 속에 슬프고 따뜻하게 묘사된다. 가장 가까운 적이면서도 끝끝내 서로를 포용할 수밖에 없는 한 가족의 슬픔과 한을 그려낸 작가의 솜씨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귀신이며, 우리 곁에 있는 당신 또한 귀신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우리가 그 귀신들을 사랑하고 용서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타이완의 이국적 풍속과 풍경도 아홉 남매의 이야기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온갖 신들을 모시는 묘당과 법사가 있고, 조상과 귀신을 대접하는 엄격한 습속이 있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군침 도는 음식들이 등장하며, 그 가운데 시골 마을 고유의 기이한 풍습이 만화경처럼 펼쳐져 시끌벅적하고 흥겨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누가 누굴 죽였고, 그 죽음의 사연 뒤에 숨은 진정한 의미가 파헤쳐지는 과정은 한 편의 걸작 범죄 소설로도 손색이 없다.
귀신들의 땅, 오로지 고통과 상처만 존재했던 이 기이하고 불길한 땅을 떠도는 한 서린 목소리들을 작가 천쓰홍은 강령술로 소환하듯 불러내 하나하나 위로하여 제자리로 돌려보낸다. 이 젊은 작가에게 타이완의 양대 문학상을 수여한 이유는, 바로 이처럼 귀기 어린 역사와 개인의 교차점을 포착해 놀라운 완결성으로 그려낸 그 재능에 있을 것이다.
작가정보
陳思宏
타이완 소설가이자 영화배우, 번역가. 현재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다. 1976년 타이완 융징향(永靖鄕)에서 한 농가의 아홉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푸런(輔仁) 대학 영문과와 국립 타이완대학 연극학과를 졸업했다.
독자와 평론가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현재 타이완 문단의 중심에 떠오른 작가로, 임영상(林榮三) 단편소설상과 구거(九歌) 출판사 연도소설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귀신들의 땅』으로 타이완 최고의 양대 문학상으로 꼽히는 금장상(金鼎獎) 문학부문상과 금전상(金典賞) 연도백만대상을 수상했다. 산문집 『반역의 베를린』 『베를린은 계속 반역중이다』 『아홉 번째 몸』과 소설 『손톱에 꽃이 피는 세대』 『영화귀도(營火鬼道)』 『태도』 『변신의 플로리다』 『알러지를 제거하는 세 가지 방법』 등을 출간했다. 『귀신들의 땅』은 12개 언어로 출간되었고, 《뉴욕타임스》 《라이브러리 저널》 《르몽드》 《마이니치신문》 등에서 격찬받았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타이완 문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학 연구공동체인 한성문화연구소(漢聲文化硏究所)를 운영하면서 중국 문학 및 인문저작 번역과 문학 교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중국 문화번역 관련 사이트인 CCTSS 고문, 《인민문학》한국어판 총감 등의 직책을 맡고 있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고전의 배후』,『방관시대의 사람들』,『마르케스의 서재에서』등 140여 권의 중국 도서를 우리말로 옮겼다. 2016년 중국 신문광전총국에서 수여하는 ‘중화도서특수공헌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
2018년 7월, 베를린에서 이 책을 쓰기 시작해 2019년 4월에 완성했다. 나는 끊임없이 용징의 기억을 파고 들어갔다. 줄곧 그곳에서 도망치고 싶었으나, 오히려 계속 그곳을 글로 쓰고 있었다. 다 쓰고 나면 울음이 터질 줄 알았는데 마지막 한 문장을 쓴 뒤, 울기 좋아하는 울보 귀신인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종잡을 수 없었다. 고개를 숙여 몸을 살폈다. 피부와 뼈와 살이 시야에서 천천히 흐려지더니 점차 투명해졌다.
내가 정말로 귀신으로 변할까 두려워서 얼른 원고를 편집자에게 보낸 다음, 침대에 올라가서 잤다.
아주 편안하게 잘 잤다.
이런 시각이면 귀신이 나타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용징이 슬그머니 베를린의 내 방으로 들어와 내 옆에 함께 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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