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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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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은 작가가 쓴 소설 중에서 분량이 가장 많을 뿐만 아니라 근래 한국에서 출간된 소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짧고 빠른 것을 선호하는 데에는 감정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도 짧고 빠른 것을 선호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 태도에도 모종의 위선과 기만이 섞여 있지는 않을까? 이렇듯 촘촘하게 감정의 변이 과정을 그리는 선택은 사랑을 탄생에서 죽음까지 직면해 보겠다는 작가적 도전과 그보다 더 강한 인간적 호기심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광인』은 세 남녀의 사랑과 우정, 질투와 욕망을 위스키와 음악, 그리고 돈이라는 세계 속에서 새로운 언어와 긴장감으로 그려낸다. 누군가는 연애소설로, 누군가는 심리소설로, 혹자는 예술가 소설로, 혹자는 범죄소설로도 읽을 수 있는 이 소설은 그 모든 소설이면서 하나의 분류로 특정할 수 없는 무정형이다. 사랑과 광기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하며 때로는 술의 세계로 때로는 음악의 세계로, 때로는 돈과 자본의 세계로 비유되는 사랑과 우정, 연애와 결혼의 서사는 익숙한 로맨스 구도 속에서 내 것이기에 오히려 낯선 어두운 갈등들을 차례차례 등장시킨다.
“나는 웃으면서 다음 잔을 마셨다. 알싸한 맛이 톡톡 터지는 위스키였다. 하지만 그냥 맵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아릿한 자극 속에 앵두알처럼 터지는 상큼한 향이 화사하게 입안을 환기시켰고 그 밑에서 치고 들어오는 건 달고나처럼 눌어붙은 진한 설탕 맛이었다. 나무 향은 은은하면서도 결이 고왔다.” (89쪽)
“사랑은 다 똑 같은 사랑이지. 다들 사랑할 땐 영원할 것 같지만, 알지.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걸. 사랑할 수 있는 때도 사랑할 수 있는 대상도 늘 있는 게 아닌 걸. 사랑은 끝나면, 그냥 끝나. 뭔가가 죽어 버리는 것처럼. 다시 한다고 해도 예전같이, 그 열기와 진동으로 사랑할 수는 없지. 깨진 그릇 이어 붙인 것처럼 자국이 늘 남고 그건 사라지지 않아. 못 본 척할 수 있을 뿐, 언젠가 다시 충격을 받으면 균열은 늘 거기에서 시작해.” (122쪽)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의 말대로 그때는 몰랐다. 어렸기 때문에 모르는 건 많고 아는 건 적었지만, 생각은 늘 반대였다. 다 안다고, 내가 아는 걸 사람들은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상은 사람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르는 것이었는데. 뭔가를 안다는 건 나만 안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아는 것보다 조금 더 안다는 뜻에 불과한데도.” (128쪽)
“보통 그리움이나 외로움, 우울함 같은 걸로 번역하는데 생각해 보면 그게 다 갈망 때문이잖아. 목마른 사람처럼 원하고 바라는 거. 그걸 하지 않는 게 사랑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항구에서 손 흔들며 웃는 것 같은 마지막 부분도 나한텐 그런 느낌이고.” (145쪽)
“나는 결혼을 믿지 않았다. 내가 겪은 것으로서도, 주변에서 보는 것으로서도, 또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서도.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결혼한 사람들조차 마모당하고 잃어버리는 것이 사랑이었다. 사랑은 결국 헤어짐으로 끝난다. 게다가 시작부터 원거리 연애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같은 건 하고 싶지도 않을 만큼 경험이 충분했다.” (185쪽)
“지금은, 화분 같다는 생각을 해. 키우고 기르는 거, 상처도 입히고 잘못도 하지만 계속, 같이 가는 거지. 최선을 다하면서. 우리 다 실수하고 잘못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뭘 몰라서, 서툴어서. 우리도 화분 속 화초처럼 아직 크는 중이니까.” (265쪽)
“자꾸 기대하게 되니까. 특별해서 사랑하는 것도, 사랑한다고 특별할 것도 없는데 자꾸 내 기대를 그 특별함에 걸게 되니까. 나는 해원도 나도 서로 다른 한 사람일 뿐이라고, 제각각 다른 화분들처럼 그렇게 다르다고 생각하고 싶어. 누군가를 특별하게 해 주는 사랑마저도 실은 누구나 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하지는 않다고. 사랑도 이 관계도, 이런 시간도 단지 내가 원한 것뿐이라고, 기대하지도 기대지도 않고 그렇게.” (272쪽)
“아름다운 건 살아 있고, 사라지는 것들이야. 그래서 우리는 그걸 만들지. 만들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으니까, 오직 사라지기만 할 테니까. 만든다는 건 사라진다는 걸 받아들인다는 뜻이기도 해. 거기에 만든다는 것의 아름다움이 있는 거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만든다는 것만큼 살아 있다는 걸, 사랑한다는 걸 증거하는 건 없으니까.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무용하다고, 쓸모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의 쓸모와 무용함을 일깨워 주니까. 우린 아름다운 걸 좋아해. 아름다운 걸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아름다운 걸 만들 수밖에 없지.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 그게 우리의 능력이야. 다른 어떤 생물에게도 없는, 오직 신만을 닮은 우리의 능력.” (280쪽)
■ ‘셋’이라는 비극
음악 하는 남자 준연, 위스키 만드는 여자 하진, 그리고 사랑에 빠진 남자 해원. 플루트 교습소에서 선생과 학생으로 만난 준연과 해원은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솔로라는 공통점 외에도 음악과 위스키에 대한 취향을 공유하며 금세 각별한 사이가 된다. 그러나 준연의 친구이자 첫 눈에 해원의 마음으로 들어온 하진이 등장하며 둘 사이에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해원은 위스키 사업을 준비하는 하진을 적극적으로 돕고 하진 역시 그런 해원에게 호감을 느끼며 둘의 관계가 깊어지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해 갈수록 하진과 준연의 관계에 관한 해원의 불안감도 깊어진다. 두 사람의 우정이 우정만으로는 보이지 않아서다. 그저 우정이라고만 보아넘길 수 없는 두 사람 하진과 준연, 사랑하지만 사랑만으로는 타오르는 불안을 잠재울 수 없는 두 사람 하진과 해원. 어느새 삼각형 속에 들어와 버린 세 사람의 감정은 방향을 알 수 없는 불길처럼 타들어 가기 시작한다.
■ 술과 음악과 돈
소설의 배경에는 하진의 작업장인 위스키 양조장과 준연의 작업장인 플루트 교습소가 있다. 두 곳은 모두 두 사람의 생계가 걸려 있는 일터인 동시에 두 사람이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꿈의 장소이기도 하다. 위스키와 음악에 대한 이혁진 작가의 해박한 지식은 여러 인물들에게 골고루 분사되어 있다. 위스키에 조예가 깊은 아버지로 인해 어릴 적부터 위스키의 세계를 탐닉했던 해원은 맛을 감별하고 표현하는 데 천재적인 능력을 보인다. 음악을 하기 위해 유학을 갔지만 정작 음악이 아닌 위스키의 매력에 빠져온 하진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양조장을 물려받아 한국의 독자적인 위스키를 만들고자 한다. 술의 세계가 갖고 있는 풍미를 극대화하는 건 준연이 속한 예술의 세계다. 생활과 음악 사이에서 적절히 타협하듯, 그러나 결코 예술을 포기할 수 없는 준연은 땅에 발붙이고 있는 이들과 달리 자기만의 허공에서 삶을 불안하게 이어 나간다. 한편 흔들리는 우정과 사랑 앞에서 해원은 자신이 가진 돈을 무기로 쓰고자 한다.
■ 타인을 사랑하기엔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그들은 모두 사랑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며 산다는 이 단순한 문장을 있는 그대로 살아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는 어떤 사람에게도 좋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듯 변해 가고,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뜨거웠던 한 영혼은 예술과 생활, 부모와 예술, 사랑과 예술…… 모든 것들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못한 채 방황한다. 이들의 사랑은 타인을 내 안으로 들이며 시작되지만, 타인보다는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들의 사랑은 커 나가지 못한다. 내가 원하는 사랑, 내가 원하는 이별, 내가 원하는 관계…… 불안은 공포가 되고 분노는 망상이 되고 사랑은 광기가 될 때, 그들이 사랑한 건 무엇이었을까? 애초에 그들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내가 완성하려는 사랑”이란 대사가 창백하고 서늘하게 우리 가슴을 베고 지나간다. 사랑은 어떻게 ‘완성’되는 것일까? 완성이란 개념이야말로 사랑을 광기로 만드는 ‘버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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