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부드러워, 마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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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이 상품이 속한 분야
3월의 물은 마데이라
미나리욕欲을 위한 것들
만수르 빌딩의 바텐더
하이네켄은 집어치워라
뚜또 베네? 람브루스코!
3시와 5시 사이의 술
그리스식 와인은 이렇습니다
너무 많이 마시는 남자
낮의 술과 밤의 술
골든 리트리버와 그때 그 술집
정말 솔티한 이야기
술집 무오스크바
여름
술 파는 약국을 이해하다
나만의 블룸스데이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란 이런 것
베를린의 미친 스태미나
먼지를 남겨서 미안
샘에 맥주를 담그다
초절기교의 소맥리에
샴페인은 이제 그만
진 리키를 마시는 시간
인도의 창백한 맥주
옥수수 껍질을 벗기다가
헤밍웨이 다이키리
가을
라디오와 술
카프리 vs 카프리
음바페와 생제르맹
렉터 박사가 마시는 술
옥토버페스트와 레더호젠
아무나 마실 수 없는 술
막대한 예스처럼 내리는
사랑에 대하여
오렌지 와인
교양 없는 마티니
야구단의 아와모리
아침에 마시는 맥주
아몬티야도
겨울
꿀과 물과 시간
겨울밤의 무알코올 맥주
남극에 두고 온 위스키
굴과 샤블리
봄날의 호랑이를 내게 줘
하이볼이라는 흥분
베네치아에서 온 남자
시간의 냄새가 담긴 스모크
셀프 의전을 위한 계획
내가 원하는 술집
술 마실 때 듣는 음악
기쁠 때도 슬플 때도 네그로니
참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홍어를 주문했다. 미나리를 먹겠다고, 소주를 먹겠다고 말이다. 홍어무침을 만드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꽤나 많은 잔칫집에 따라다녔다. 요즘 말로 하면 ‘프로 참석러’라고 해야 할까. 내가 초대받은 적은 없으나 할머니를 따라서 갔었다. 친척 어른의 생신, 집들이, 승진 축하연, 회갑연, 고희연, 산수연, 결혼식 등등. 못 보던 사람들과 못 보던 음식들로 가득 찬 분위기를 나는 제법 즐겼다.
당시의 내가 잔칫상에 등장하길 기대했던 음식이 홍어무침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다. 은밀한 기대였다. 절여서 식감이 달라진 무와 오이, 알싸한 도라지 사이에 숨어 있던 홍어의 맛은 그때까지 내가 겪어 보지 못한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소주였다. 홍어무침은 밥 반찬보다는 소주 안주로 적합한 음식이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홍어무침에 소주를 먹는 어른들, “크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드는 어른들을 구경하며 내가 소주를 먹게 되려면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할지 헤아려 보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_ 19~20쪽(미나리욕欲을 위한 것들)
식전주의 시간이다. 밥을 먹기 전에 마시는 술. 안주와 함께 먹지 않는 술. 술만으로 온전한 술. 이게 식전주다. 3시와 5시 사이는 식전주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간에 마시는 식전주를 꽤나 좋아한다. 술은 다 각각의 매력이 있고,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지루할 때도 피곤할 때도 좋지만, 식전주의 시간에 마시는 술도 좋다. 주로 맥주이지만 가끔은 아페리티프를 마신다. (...) 마음이 막 들뜬다. 이 술을 다 마시고 나서 어떤 술을 본격적으로 마실지, 또 어떤 음식과 먹을지 생각하게 된다. 식전주를 마시지 않아도 오늘의 안주와 오늘의 술에 대해 생각하지만 식전주를 마시면 좀 더 열렬해진다고나 할까. 없던 열정도 솟아나는 걸 느끼며 식전주의 위력에 놀란다. 가볍고, 청량하고, 산뜻한 이 술에 이런 힘이 있었나 싶다. _ 41~42쪽(3시와 5시 사이의 술)
한동안 금주를 했다. ‘한동안’이라는 말을 적었으니 절주라고 해야겠지만. 다시 술을 마시기로 한 것은 다자이 오사무 때문이다. 그의 기일에 술 한잔하지 않을 수 없어서. 어제였던 6월 19일은 그를 기리는 날이었다. 그의 시체가 발견된 날이자 그가 태어난 날. 이 세상에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 날. 앵두기였다. 다자이 오사무를 기리는 이들은 이날을 앵두기로 부른다고 한다.
그가 죽기 한 달 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 「앵두」이고, 마침 6월 19일 무렵이 앵두철이기도 해서라고 들었다. 앵두기에는 무엇을 하나? 앵두를 먹나? 아님 술을 마시나? 어떤 술을 마시지? 그는 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의 술 먹는 자세를 높이 사는 사람이므로 앵두로 술을 담가 그의 기일에 마시고 싶었다. 술에 대한 책도 쓰시고 술도 담그시는 분께 앵두주를 담그는 법까지 알아 두었다. 이럴 때 나는 꽤 적극적으로 바뀐다. 문제는 앵두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 _ 99~100쪽(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란 이런 것)
맞다. 술과 굴은 정신에 이바지하는 음식이었다. 내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채우는 게 아니라 영혼을 들어 올리는 음식 말이다. 우리가 땅에 붙어 있는 존재라는 물리적 지엄함을 배반하면서. 음식을 먹고 그런 기분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게 굴의 그 광물적인 맛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굴에 착 달라붙던 샤블리 때문이기도 하고.
굴에 샤블리가 왜 이렇게 어울리는지 그때는 몰랐다. 샤블리가 지역 이름이며 그 땅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샤블리라고 부른다는 것과, 그곳이 고대의 굴 화석으로 뒤덮인 서늘한 땅이라는 것을. 굴과 마시는 샤블 리가 그렇게나 충일했던 것은 그저 9월의 파리 공기와 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샤블리는 굴을 먹고 자란 술이었다. 샤블리를 마신다는 건 굴을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_ 262쪽(굴과 샤블리)
산토리에서 나온 가쿠빈으로 하이볼에 입문, 조니 워커와 글렌리벳 하이볼을 좋아하던 나는 라가불린으로도 하이볼을 만든다는 걸 알고 좀 놀란 적이 있다. 스모키한 맛보다는 달달한 맛의 위스키가 하이볼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또 라가불린은 하이볼을 만들기에는 넘치는 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셔 보니 아니었다. 라가불린으로 만든 하이볼은 조니 워커 레드나 글렌피딕 12년산으로 만든 하이볼에는 없는 다른 게 있었다. 라가불린 맛. 라가불린 하이볼에서는 라가불린 맛이 났던 것이다. _ 275쪽(하이볼이라는 흥분)
마음이 즐겁게 쓴 글이다. 나의 밤을 나누고픈 사람에게 종알대는 느낌으로 썼다. 그래서 말을 좀 했다. 평소의 나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발성을 하는 일이 귀찮게 느껴질 때도 많다. 뭘 구차하게 이런 걸 다 말로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시시한 말을 할 바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마시는 게 좋다. 말하는 걸 좋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타고 전해지는 말을 듣고 있으면 역시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고요에는 말보다 훨씬 풍부한 것들이 깃들어 있어서, 고요보다 못할 말이라면 그냥 입속에 두는 게 좋다고도 생각해 왔다. _ 315쪽(에필로그)
마시고 싶어서 마신다, 재밌어서 마신다,
굳이 참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감정이 무르익는다. 나는 술을 마시고 고조된 감정을 이야기에 넣는다. 맨정신일 때 내가 쓴 이야기는 멍청하기 짝이 없다.” 술꾼으로 유명했던 스콧 피츠제럴드가 생전에 한 말이다. 알코올홀릭답게 그의 소설 속에도 술 이야기가 가득하다. 실제로 『위대한 개츠비』는 음주가무가 난무하는 사치스러운 파티에 참석했던 경험에 영감을 얻어 쓰인 소설이고, 『밤은 부드러워』 역시 본격적으로 술 마시는 사람들이 나오는 소설이다. 이번 책의 제목이 『밤은 부드러워, 마셔』가 된 것은 술과 술 마시는 시간을 사랑하는 작가 한은형이 떠올릴 수 있는, 어쩌면 가장 자연스러운 연상 작용의 결과로 보인다.
오후 3시와 5시 사이의 술, 홍어무침과 소주,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 도로시 파커의 진, 교양 없는 마티니, 하이볼이라는 흥분, 밤의 술 위스키와 코냑, 굴과 샤블리 등 단어만 들어도 침샘이 자극되고 잔을 들어 손목을 꺾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들이 한껏 펼쳐진다. 작가는 책을 읽다가, 영화를 보다가, 음악을 듣다가 혹은 날씨가 좋아서 술을 찾게 된다. 술을 마실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작가 한은형은 대체로 마시고 싶어서 마신다. 그리고 참지 않는다. 술을 마셔서 건강을 해치는 것보다 술을 참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가 건강에 더 해롭다고 믿기 때문이다. 재미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겠다는 그는 술로써 그 재미를 찾으려 앵두를 구하러 다닌다든가(앵두주를 담그려고!) 부산의 무역상에 전화해 보는 일도(오키나와 술인 아와모리를 구하려고!) 마다치 않는다.
밤을 나누고픈 이들에게 종알대는 솔직 담백한 글
“나의 밤을 나누고픈 사람에게 종알대는 느낌으로” 이 글들을 썼다고 고백하는 작가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술에 관한 모든 일화와 그만의 생각을 솔직하게 들려준다. 하루는 옥수수 껍질을 벗기다가 옥수수로 만든 증류주인 버번위스키 생각이 간절해진다. 하지만 집에 있는 위스키인 메이커스 마크 특유의 맛에 잘 적응이 되지 않아 하이볼로 만들어 마시다가 술에 물이나 음료, 얼음을 타는 걸 범죄라 여기는 위스키 근본주의자들에게 대해 생각한다. “평양냉면에 식초나 겨자 타는 걸 죄악시하는 분들과 위스키에 다른 것을 타는 걸 반대하는 분들이 만나면 말이 잘 통할까?” 어쨌거나 평양냉면에도 겨자와 식초를 타고, 위스키에도 이것저것 섞어 마시는 작가는 하이볼을 한 잔 맛있게 말아 오븐에 구운 옥수수와 함께 행복한 한때를 보낸다.
가리는 것 없이 모든 술에 호기심이 동하는 작가에게 각각의 술을 어떻게 다가올까. 와인은 말을 줄이게 하고 감각을 깨우는 술이다. 생각을 하게 하고, 느끼게 하고, 쓰게 하고, 읽게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술 같지 않은 술이다. 칵테일은 묘미를 선물하는 술이다. 좋은 것끼리 섞는다고 늘 좋은 결과가 보장되지도 않고, 오히려 그다지 좋지 않은 것끼리 섞을지라도 놀라운 결과를 보게 된다는 점에서 칵테일은 뜻밖의 재미를 가져다준다. 샴페인은 작가에게 술이라기보다 일종의 의식에 가깝다. 그러한 의식에는 스스로에게 하는 의전이 필수다. 계획과 환대, 그리고 끓어오름이 있을 때 샴페인은 펑! 하고 터진다.
귀여운 삽화와 함께 읽는 작은 일탈의 경험
평소 귀엽고 유머러스한 그림들을 그려 온 윤예지 작가가 이번 책을 위해 15점의 삽화를 그려 주었다. 앵두가 된 다자이 오사무, 음바페와 생제르맹 리큐어, 표지를 장식하기도 한 굴 소믈리에와 굴 손님을 보다 보면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 “술잔에 가득 부어진 술이 마음에 찰랑이는 밤 (…) 우리 뒤에는 은빛 어둠이 휘장처럼 드리워져 있고” “밤과 부드러움, 그리고 마시라는 청유”(「에필로그」 중에서)가 잔뜩 배어 있는 작가의 글을 하나씩 읽어 나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도 작가의 작은 일탈에 동참하게 된다. 밤은 어김없이 오고, 언제든 채울 수 있는 각자의 술잔이 앞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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