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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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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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열아홉의 문헌학도 앙주와 책은커녕 단어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열여섯의 고등학생 피, 두 주인공은 과외 교사와 제자로 만나 함께 고전 문학을 읽어 나간다. 계급도, 관심사도, 같은 책에 대한 감상도 너무나 다른 그들을 이어 주는 것은 자기 안에 혹은 숨 막히는 집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는 감각이다. 노통브는 앙주와 피가 저마다 사는 법을 알아내고자 분투하는 과정을 경쾌한 리듬으로 처절하게 그려 낸다.
「소리 없이 우아하게 하늘을 나는 그 고래들은 너무나 아름다워요. 예외적으로, 인간이 시적인 뭔가를 발명한 거죠!」
- 75면
「아빠 말로는 내가 현실에 대한 의식이 전혀 없대요.」
「넌 어떻게 생각해?」
「아빠가 말하는 현실이라는 게 뭔지, 그것부터 알아야겠죠.」
아들이나 아버지나 현실감 결핍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점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나에게는 그레구아르 루세르의 결핍이 훨씬 심각해 보였다. 돈을 어마어마하게 버니까 실재 세계에 더 가깝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 75~76면
「20세기 이래로, 이전 세대가 이후 세대에게 물려주는 유산이란 바로 죽음이에요. 심지어 그건 즉각적인 죽음도 아니에요. 오히려 상처 입은 바퀴벌레가 짓밟혀 죽기 전에 질질 끌고 다니는 오랜 불안 같은 거죠.」
- 95~96면
「나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줘요. 나에게는 그게 꼭 필요하니까.」
- 155면
우리는 트램펄린을 타러 갔고, 피는 아이처럼 깔깔대며 점프했다. 그는 먹은 것을 토할 정도가 되어서야 뛰기를 멈췄다.
「좋아. 놀이공원에 와서 속을 게워 내지 않으면 정말 재미있게 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내가 그를 축하했다.
(……)
「당신은, 당신은 토하지 않나요?」
나는 승객들을 공중에 띄워 놓고 빙글빙글 돌리는 놀이 기구를 올려다보았다.
「나한테 5분만 줘.」 내가 말했다.
나는 다음번 차례에 놀이 기구에 올라탔다. 놀이 기구에서 내린 나는 후닥닥 피 근처로 달려가 토했고, 피는 손뼉을 쳐댔다. 뿌듯했다.
- 158면
「내게는 삶이 없어요. 진실은 바로 그거예요. 난 그게 유전적인 게 아닌가 하는 두려운 생각이 들어요. 아빠, 엄마를 관찰해 보면 그들에게도 삶이 없거든요. 우리 반 애들에게도……. 솔직히 말해, 내 주변에서 삶이 있는 사람은 당신이 유일해요. 가르쳐 줘요.」
- 171면
「뭔가에 도달하려고 기를 쓰고 노력해 봐. 죽기 전에 살란 말이야. 움직여!」
- 173면
피는 실재하는 사람일까? 그랬다, 하지만 겨우 그랬다. 피는 아직은 실재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2년이 지나면 그는 자기 부모처럼 변할 것이고, 실재 세계를 떠나 가짜 존재 중 하나, 상상을 초월하는 자본을 다루는 딜러, 가상 공간 속 도자기 수집가가 될 것이다. 그 소년은 자신이 겪고 있는 비극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가 나에게 되풀이하는 사랑 고백은, 실재 세계를 향해 제발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고 간청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 177면
내가 그에게 끼친 영향은 그를 위대한 문학의 독자로 변모시킨 데 있었다. 위대한 문학은 무해성(無害性)의 학교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셰익스피어, 이들만 예로 들어도, 그들은 뛰어난 젊은이에게 그런 쓰레기들을 제거해 버리라고 명령했을 것이다. 난 그에게 무기를 제공하지는 않았지만, 범행의 문학적 기반을 가져다주긴 했다.
- 186면
젊음은 하나의 재능이지만, 그것을 획득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나는 마침내 젊은이가 되었다.
- 187면
잔인한 유머의 대가 아멜리 노통브
문학을 무기 삼아 펼쳐 내는 산뜻한 잔혹 드라마
잔인함과 유머를 완벽하게 혼합해 독보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낸 아멜리 노통브. 데뷔 이래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하나의 작품을 발표해 온 그의 스물아홉 번째 소설 『비행선』이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비행선』은 프랑스에서만 25만 부가 판매되며 베스트셀러에 오른 작품으로, 문학과 젊음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잔혹하고도 산뜻한 드라마를 펼쳐 보인다.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열아홉의 문헌학도 앙주와 책은커녕 단어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열여섯의 고등학생 피, 두 주인공은 과외 교사와 제자로 만나 함께 고전 문학을 읽어 나간다. 계급도, 관심사도, 같은 책에 대한 감상도 너무나 다른 그들을 이어 주는 것은 자기 안에 혹은 숨 막히는 집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사는 것을 두려워하는 감각이다. 노통브는 앙주와 피가 저마다 사는 법을 알아내고자 분투하는 과정을 경쾌한 리듬으로 처절하게 그려 낸다.
자기 안에 갇혀 젊음마저 잊은 열아홉 앙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집에 갇힌 열여섯 피
사는 법을 알아내려는 두 사람의 미약한 몸부림
「나에게 사는 법을 가르쳐 줘요. 나에게는 그게 꼭 필요하니까.」(155면)
앙주는 고향을 떠나 브뤼셀에서 독립생활을 꾸려 가는 열아홉 대학생이자 열정적인 문헌학도다.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학교에서 겉돌며 저녁이면 도시의 거리를 홀로 정처 없이 걸어다닌다. 〈내 삶에도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누구에게라도 직접 다가갈 만큼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 노통브가 여러 인터뷰에서 밝힌바 앙주는 작가 자신의 열아홉 시절을 담아낸 분신이다. 〈내가 젊어지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열아홉에는 끔찍할 만큼 진지했고, 거의 살아 있지 않았다.〉(『르 푸앵』, 2020. 9. 10.) 열아홉 앙주는 사는 법을 몰라 헤매며 다만 〈내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는 게 좋〉다고 중얼거린다.
거의 살아 있지 않은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대학 입시를 앞둔 열여섯 고등학생 피, 무기를 좋아하고 책을 단 한 권도 읽어 내지 못한다.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과외 교사 자리를 구하던 앙주는 피를 만나 책 읽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피는 자기소개를 해보라는 말에 자기 이름만 겨우 밝히고 아버지 이름과 직업을 이야기할 만큼 아버지에게 얽매여 있다. 부유층임을 유일한 정체성으로 삼는 아버지 그레구아르는 과외 수업뿐 아니라 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데, 자신이 〈현실〉이라고 여기는 무언가에서 피가 벗어나 버릴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는 이미 아버지가 정의한 편협한 의미에서의 현실에서 비껴나 있고, 읽기라는 행위와 앙주와의 관계 맺기를 통해 필연적으로 거기서 달아난다. 헤매거나 달아나는 것은 사는 법을 알아내려는 앙주와 피의 미약한 몸부림이다. 그들의 서툴고 절박한 동작을 노통브는 애정 어린 시선으로 생생히 포착해 낸다.
〈비결은 없어. 그냥 펼쳐서 읽으면 돼.〉
읽는 것 혹은 사는 것이 두렵더라도
젊음은 하나의 재능이지만, 그것을 획득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여러 해가 지난 후에 나는 마침내 젊은이가 되었다.(187면)
앙주와 피는 함께 자란다. 단어 하나 제대로 읽지 못하던 피는 스탕달의 『적과 흑』을 시작으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카프카의 『변신』, 라 파예트 부인의 『클레브 공작 부인』, 라디게의 『육체의 악마』를 읽어 나가는 동안 점차 자기만의 문학 취향을 형성하며 독자가 되어 간다. 그리고 『비행선』의 세계에서 독자가 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삶의 욕망을 찾고 무해성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무기를 벼린다는 뜻이므로. 피가 찾은 욕망이란 가상 공간에서 막대한 자본을 다루며 〈삶 없이〉 살아가는 부모의 세계로부터 단절되고 싶다는 것,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가짜 존재가 되어 버린 자신을 발견하는 대신 실재 세계에서 구체적인 인간으로 살아 움직이고 싶다는 것이다. 피에게 문학은 그러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무기가 되어 준다. 노통브에 따르면 문학은 폭력을 통해 자신을 해방하는 예술이다.(『르 푸앵』, 2020. 9. 10.)
어느 수업 시간에 앙주는 피에게 소리친다. 〈죽기 전에 살란 말이야. 움직여!〉 그것은 청소년기의 끝자락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다 자란 어른인 척하는 앙주가 스스로에게 외치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갇힌 존재인 피를 꺼내 주려는 시도를 통해 자기 자신을 바깥으로 이끄는 데도 성공한다. 방에 가만히 누워 전차 소리를 듣는 대신 직접 전차에 오르고, 맥주나 샴페인을 벌컥벌컥 마시고, 놀이 기구를 타고는 길바닥에 토한다. 결국 더 외로워지거나 후회로 끝날지언정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는다. 언젠가 〈책은 어떻게 읽어야 하죠?〉 물은 피에게 앙주가 말했듯 독서는 남이 해줄 수 없는 것이고, 삶도 마찬가지다. 〈비결은 없어. 그냥 펼쳐서 읽으면 돼.〉 읽는 것 혹은 사는 것이 두렵더라도. 그 대답 혹은 수행적 예언은 앙주와 피, 두 독자의 이야기를 거치며 실현된 후 다음 독자에게 가닿길 기다린다.
작가정보
잔인함과 유머가 탁월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현대 프랑스 문학계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벨기에 출신의 작가. 본명은 파비엔 클레르 노통브로, 1967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으며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중국, 미국,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스물다섯 살에 발표한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2)이 〈천재의 탄생〉이라는 비평계의 찬사를 받으며 단번에 10만 부가 판매되는 성공을 거뒀고, 이후 노통브의 작품은 발표될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는 『두려움과 떨림』(1999)으로 프랑스 학술원 소설 대상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그 외에도 르네팔레상, 알랭푸르니에상, 자크샤르돈상, 르노도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해마다 하나의 작품을 발표해 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5년 벨기에 왕국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현재 브뤼셀과 파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가는 중이다.
한국외국어대학교와 동 대학원 프랑스어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릴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출강한다. 『측천무후』로 제2회 한국 출판문화 대상 번역상을, 『베스트셀러의 역사』로 한국 출판 평론 학술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아멜리 노통브의 『갈증』, 『너의 심장을 쳐라』, 『추남, 미녀』, 『느빌 백작의 범죄』, 『샴페인 친구』, 『푸른 수염』, 『머큐리』, 에드몽 로스탕의 『시라노』,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 델핀 쿨랭의 『웰컴, 삼바』,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지옥 만세』, 조르주 심농의 『라 프로비당스호의 마부』, 『교차로의 밤』, 『선원의 약속』, 『창가의 그림자』, 『베르주라크의 광인』, 『제1호 수문』 등이 있다.
작가의 말
피가 앙주에게 묻는다. 〈독서는 어떻게 해야 하죠?〉 앙주의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비결은 없어. 그냥 펼쳐서 읽으면 돼.〉 〈읽어 봤을 테니 그냥 내용을 이야기해 주면 되잖아요.〉 〈독서는 남이 해줄 수 없는 거야.〉 삶도 독서와 다르지 않다. 직접 살면서 배우는 것이다. 젊음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 시간을 들여 획득해야 하는 재능이다. 피의 표현에 따르면, 〈쓸데없는〉, 다시 말해 다른 것으로 환산되지 않는 활동을 하면서, 오로지 사는 즐거움을 위해 살면서 획득하는 것이다. -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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