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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말린 날들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
서보경 지음
반비

2023년 12월 21일 출간

종이책 : 2023년 11월 24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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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16.94MB)
ISBN 9791192908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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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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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통과 사랑의 감염력에 의지해 이 이야기들을 내놓는다.”

먼저 휘말린 사람들이 들려주는
감염과 바이러스가 품은 희망과 미래의 이야기

‘감염’은 이제 낡은 화두가 된 것 같다. 팬데믹에서 엔데믹까지를 경험하며 한국 사회는 그간 다루지 못한 담론을 많이 얻었다. 재난은 어떻게 불평등하게 배분되는가, 왜 ‘돌봄 사회’로 전환해야 하는가부터 출발해 질병과 장애에 관한 담론도 확장되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가 정말로 감염이라는 화두를 온전히 소화한 걸까? 엔데믹으로의 전환, 일상으로의 복귀 속에 우리가 제대로 다루지 못한, 눙치고 지나온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팬데믹 초기, 확진자에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사생활의 동선이 전국민에게 공개되던 당시의 공포는 분명 질병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도 ‘몇 번 환자’가 되어 동선이 공개된다면 비난당하고 공동체로부터 격리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여전히 감염은 개인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로 여겨지고, 감염병에 걸린 사람 개개인은 질병 그 자체보다 낙인과 싸워야 한다.
『휘말린 날들』은 어쩌면 가장 그러한 낙인이 공고하게 찍혀온 HIV/AIDS를 바탕 삼아 이 같은 문제들을 다시 돌아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다. 의료인류학자이자 HIV/AIDS 인권운동 활동가인 서보경은 ‘앞줄에 선 사람들’, ‘먼저 휘말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HIV 감염인 당사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혹은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염이라는 사건을 한발 앞서 겪은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불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숨겨진 상실과 함께 나누지 못한 애도의 기억, 그리고 어떻게 다른 세상을 열어갈 것인가에 대한 대담한 통찰이 깃들 이 이야기들을 문화기술지의 형식, 분야를 넘나드는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 스스로 마주하고 겪어온 경험들을 경유해 길어낸다. 그럼으로써 감염이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일’임을, 그리고 우리의 존재 조건임을 논파한다.
자신 역시 “앞줄에 선 사람들에게 휘말리면서 직업으로서 인류학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서보경의 글쓰기는 인류학적 글쓰기의 전범임과 더불어 나아가 인류학의 외연을 넓히는 글쓰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마음을 붙든 ‘표정과 목소리와 몸짓’을 놓치지 않고 그 의미를 찾아나가기 위해 여러 번 생각하고, 질문하고, 다가가는 동시에, 감염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문법, 어조, 비유를 섬세하게 고찰한다. 이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글쓰기, 감염인들의 숨겨져야 했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어온 이야기꾼의 기록 속에서 독자들 역시 온 몸과 마음으로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나는 아직 감염하지 않았다’는 증명이 방역 지침을 성실히 이행한 좋은 시민이라는 유일한 증거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나는 먼저 감염했을 뿐이다.’라는 선언은 방어적 웅크림과는 전혀 다른 몸의 자세를 요구한다. 더 이상 감염한 것을 죄스럽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않겠다는, 수치심을 강요당하지 않겠다는 자긍의 선언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지금을 직시하고 다음을 예비하겠다는 용기가 여기에 있다.(16쪽)

앞줄의 사람들은 바삐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외려 뒷줄의 사람들에게 전해줄 말이 있는 이들이다. 해줄 이야기가 있다는 마음에는 두려움에 휩싸여 끝없이 달아나려는 탈주의 욕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용기가 있다. 전할 이야기가 있을 때, 앞줄은 버려진 사람들의 자리가 아니라 먼저 겪은 사람들의 자리, 다음 사람이 홀로 고통받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사람들의 자리이다. 경계선이 결정하는 운명을 바꾸고, 함께 있을 장소를 찾는 사람들의 자리이다.(17쪽)

HIV에 관한 이야기에는 온갖 차이를 가로질러 각기 다른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서로 연결하는 힘이 있다. 이 이야기들은 숨겨지고 숨어들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고난과 슬픔을 들려주는 동시에 더 이상 숨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이제 숨지 말고, 홀로 사라지지 말고, 함께 있자고 청하는 사람들의 용기와 기쁨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염은 서로 다른 것들이 마주 닿아 번지는 일이며, 그에 관한 이야기들 역시 자아의 좁은 틀을 벗어나서 타자에게 나아가는 감염력이 있다.(32쪽)

이때 흥미롭게도 감염원의 첫 발견에 관한 이야기는 흔히 미스터리 형식으로 재창조된다. 코로나19 범유행의 여파로 감염에 대한 각종 출판물과 기사가 쏟아져 나왔는데, 삽화로 돋보기를 든 탐정이 종종 등장했다. 추리 소설 같은 형식의 이야기에서 발견은 곧 발각이다. 범인은 자취를 감추고, 증거를 숨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벌이지만 결국 체포된다. 탐정과 범인의 형상으로 탐구하는 과학자와 탐구의 대상인 병원체의 관계를 그릴 때, 그 사이에 놓인 감염한 사람은 어느새 비밀과 의심, 은신과 추적, 죄와 벌에 대한 도덕적 드라마 속으로 깊이 끌려 들어간다. 에이즈의 역사에서는 종종 발견이 발각으로 여겨졌고, 환자는 죄인으로 몰렸다. 이로 인해 어떤 처음은 다행스러운 소식으로 다가왔지만, 어떤 처음은 두려운 선고가 되기도 했다.(42쪽)

에이즈는 특정 위험 집단의 병이 아니다. 에이즈는 ‘누군가’의 병이 아니다. 에이즈는 HIV 감염 이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 모두에게 생겨나는 병이다. 만약 누군가 HIV에 감염했다면,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HIV라는, 양성 단일가닥 RNA 유전체가 증식 과정에서 이중가닥 DNA로 변형되는 레트로바이러스의 한 종류가 감염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생물종이기 때문이다. 성서와 신화 속의 악마나 괴물이 아니라, 비둘기나 고양이, 꿀벌이나 소나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감염병의 유행에서 ‘처음’의 자리에 서게 된 ‘특별한’ 사람들은 모두 이걸 말하고 있다. 왜 이 질병이 지금 여기서 이렇게 발현하고 있는지를 이해하고 그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한다면, 감염한 사람 너머를 보라고 말이다.(75~76쪽)

송원섭 씨에게 눈앞에 보이는 욕창의 고통은 자명한 것이었고, 벌어진 상처가 아무는 건 마땅히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처남인 창엽 씨의 긴 입원 생활 동안 그가 더 좋아질 거라고 기대하는 의료진은 많지 않았다. HIV 감염인이더라도 뇌경색으로 쓰러졌으니 이걸 좀 더 치료해볼 수 있지는 않을지, 원섭 씨는 기대를 걸고 신경외과 의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의사는 환자가 “더 이상 치료할 것도, 좋아질 것도” 없는 상태라며 “지금 수준은 애완견으로, 개로 보시면” 된다고 단언했다고 한다. 신경외과 전문의에게 HIV 감염인인 이창엽의 손상된 뇌 기능은 회복될 가능성이 없었으니, 가족에게 헛된 기대를 주지 않는 것이 더 중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섭 씨에게 창엽 씨는 단 한 번도 말 못 하는 짐승이 아니었다. (...) 종합병원과 요양병원을 오가는 사이, 그래도 “주는 대로 꼬박꼬박 잘 받아먹던” 창엽 씨는 기도 흡인에 따른 폐렴이 이어지자 콧줄로만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게 되었고, 소변줄로 배설을 해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긴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죽음에 거의 다다른 상태로 여겨졌을지 몰라도, 창엽 씨를 돌본 사람들에게는 결코 여일한 날들이 아니었다. “꽃 피는 봄날”처럼 좋은 날도 있었고, 열이 나서 힘들어하거나 다리가 갑자기 퉁퉁 부은 게 눈에 보여 걱정을 그칠 수 없는 날도 있었다. 이처럼 몸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원섭 씨가 있었기에, 창엽 씨는 말 그대로 살아남았다. 원섭 씨 역시 남들에게 처남의 상태를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고, 자식들에게도 비밀로 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창엽은 “그냥 안쓰러워서 보고 만져주고” 싶은 이(person)이지, 부끄러워 치워버려야 하는 것(thing)은 아니었다.(194~196쪽)

그는 이창엽 씨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들, 그의 등에 생긴 욕창의 모양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숨 쉬기를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등을 알아차리고, 여기에 하나하나 대응해가고자 했다. 의사
서문: 앞줄에서 알려드립니다

1 첫 사람의 자리에서
2 걸려들었다
3 가운뎃점으로 삶과 죽음이 뭉쳐질 때
4 차별에 맞서는 서로의 책임
5 불명예 섹스를 계속하기
6 휘말림의 감촉
7 HIV와 에이즈의 미래

감사의 말

참고 문헌

더 많은 사람들이 HIV에 휘말리기를
: 서로에게 물들며 다시 쓰는 건강과 돌봄의 개념

왜 우리는 지금 HIV와 에이즈를 다뤄야 하는가? HIV를 둘러싼 문제들은 감염인들만이 마주한 특수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몸, 정상성, 질병과 건강, 개인과 공동체, 과학과 인문학, 자연과 문화 등에 관한 보편적인 문제의식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HIV와 감염이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오래 묵은 것이지만 낡은 것은 아니다.” 책은 역사, 의료적 현실, 법의 문제를 넘나들며 바이러스를 둘러싼 사회적 배제가 어떻게 단순한 의학적 위기를 넘어선 박탈과 위험을 만들어내는지를 밝힌다. 예를 들어 이미 의학적으로는 충분히 관리 가능해진 질병이, 가족으로부터의 배제나 입원 거부와 같은 차별을 통해 어떤 극도의 위기로 격화되는지, HIV 감염인에게 특수한 조치를 취하는 게 아니라 위험으로부터 모두를 보호하도록 고안된 원칙이 의료 현장에서 다양한 사회적 이유로 작동하지 않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등을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례들을 중심을 살펴본다.
서보경은 감염을 ‘휘말림’으로 이해하자고 제안함으로써 바로 이 지점을 설득력 있게 파고든다. 통상 사용되는 ‘감염되다’라는 표현 대신 ‘감염하다’라는 중동태로 사고하면서 두 가지 이분법을 넘어서 생각할 수 있게 된다. 하나는 감염과 면역을 침입과 자기방어의 논리로 단순화하지 않고 생물사회적 현상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염을 설명하는 가해와 피해, 능동과 수동/피동의 구도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처럼 감염에 대한 새로운 언어를 고안하는 것은 더 나은 과학적 앎을 위해, 즉 감염이라는 생명의 작용을 더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고, 현재의 부정의를 해결해가기 위해 필수적인 작업이다.
책이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갱신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저자가 길어 올린 이야기들은 무엇보다도 감염인과 그 주변 사람들, 활동가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내고 있는 새로운 돌봄과 상호부조의 가능성이다. 서로에게 물들고 마주 닿아 번지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아의 좁은 틀을 벗어나 서로 기꺼이 ‘감염하려’ 하는 이들의 움직임은 너와 나를 구분 짓고, 몸의 경계를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는 태도로는 달성할 수 없는 '건강'이 가 닿아야 하는 미래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 책을 읽고 “비로소 내가 수없이 발음해온 ‘퀴어’, ‘연대’, ‘책임’, ‘자긍심’의 의미를 완전히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라는 문학평론가 오혜진의 말처럼, 『휘말린 날들』은 퀴어 정치와 현재의 불평등, 부정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연결하는 동시에 비장애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는 돌파구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바이러스의 생물사회적 속성, 생물학적ㆍ사회적ㆍ문화적ㆍ정치적 변천 과정을 이해할 때, 우리가 알고 있던 ‘연대’, ‘공동체’, ‘친족’ 등의 개념이 새로 쓰이고, 바이러스와 함께하는, 배제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는 미래가 가능해질 것이다.

이 책은 HIV를 다중 쟁점 정치의 구심점으로 살펴보는 동시에, 그 다중성을 다루기 위해서는 각기 다른 종류의 지식과 이론, 개념과 태도가 서로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감염병은 의과학과 공중 보건의 사안이자, 바로 그렇기에 인류학과 역사학, 철학과 퀴어 이론의 개입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 여기서 사회과학적이라고 분류될 계열의 지식은 단지 자연과학적이라고 분류될 지식에 대한 비평이나 해설에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의 삶 속에서 HIV와 에이즈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의과학과 인류학이, 생물학과 퀴어 이론이 서로를 깊이 파고드는 친연성을 구축해야 한다.(23~24쪽)

감염은 내가 아닌 것에 물들면서, 휘말리면서 시작된다. 감염을 오염으로 여기게 하는 낙인의 표식은 자아와 타자,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공고히 유지하려는 시도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경계의 기준선이 이미 흐트러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여기에 중요한 가능성이 있다. 존재를 옥죄는 낙인의 어둡고 갑갑한 힘은 한번 발휘되면 절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살갗에 새겨진 문신의 생생한 색이 이미 달라질 것을 약속하듯이, 낙인의 표식은 아직 다른 무언가로 변화하지 않은 잠재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앞줄에 선 사람에게 부여된 낙인은 결코 지울 수 없는 흉이 아니다. 아직 다른 무언가가 되지 않은 것이자 새롭게 도래할 그 무언가를 가리킨다.(25쪽)

이 휘말림의 전 과정은 축복도 저주도 아니다. 생명이라는 존재 형식의 생동성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HIV에 휘말리기를 바란다. 감염이 야기하는 난제를 삶에서 직면하기 바란다. 이는 HIV에 더 많은 사람들이 노출되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아니다. 순수성이 강요하는 본질주의, 몸의 불멸성에 대한 거짓된 환상, 통제와 박멸의 욕망이 아니라 열림과 취약성 그리고 상호 연루의 책임성 속에서 몸의 온전함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청하고자 한다.(26)

휘말린 상태는 ‘하다’와 ‘당하다’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싸움을 거는 것과 싸움에 휘말리는 것은 다르다. 내가 싸움을 시작하거나 싸울 의지를 가진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싸움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싸움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사랑에 혹은 분노에 휘말리는 것 역시 비슷하다. 그 감정을 내가 택한 것도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지만, 결국 이 강렬한 감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즉 ‘휘말린’ 상태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모든 걸 선택하여 야기한 상황도 아니고, 무엇을 하도록 혹은 느끼도록 직접적으로 강요당한 상황도 아니다.(28쪽)

이들의 생애 주기는 유랑할 수밖에 없는 청장년기를 지나, 병치레와 감금의 시간을 거쳐, 혈혈무의의 중년기에 도달했다. 인터뷰 연구 당시 이들의 가장 큰 걱정은 건강이 아니라 가난이었다. 이한철 씨에게는 소규모 종교 단체의 한시적인 구호 사업이, 이민호 씨에게는 기초생활수급비가 단출한 살림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주고 있었다. HIV 감염 이후 후유증으로 뇌병변 장애 판정을 받기도 한 한철 씨는 난시가 더 심해져서 앞을 잘 보기 어려운 상태였고, 민호 씨는 간간이 하는 아르바이트 말고는 서울에서 직장을 구할 수가 없었다. 이들이 처한 빈곤과 고독, 극도의 불안정성은 생애 전 과정을 통해 축적된 것이자 경로화된 것이었다. 계급에 기반한 박탈과 성적 차이에 기반한 차별이 얽혀 들어갈 때, 여기에 질병에 대한 낙인과 손상 입은 신체에 대한 시설화의 폭력이 혼합될 때, 강제되는 생의 형식이다.(181쪽)

친족에 대한 방대한 인류학적 연구들은 사회마다 각기 다른 친족 구조를 관통하는 보편적 공통성이 있다면 그것은 혈연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게 되는, 그래서 서로의 존재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상호성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친족으로 인간은 서로의 삶 속에서 살고, 서로의 죽음 속에서 죽는다. 삶과 죽음을 공유하는 것이 친족 관계의 핵심이라고 할 때, 퀴어 존재가 경험하는 가장 큰 폭력은 이 공통의 영역에서 삶과 죽음을 맞을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심각한 손상을 경험한 HIV 감염인의 몸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은 듯이 여겨지는 것은 실상 그들의 생명력이 다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일부를 공유하는 타자들이 그의 삶과 죽음에 연루되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191~192쪽)

HIV를 비롯한 여타의 바이러스와 미생물은, 또한 인간은 이질적인 다른 존재의 세계를 받아들여 스스로의 존재를 확장한다. 감염한다. 감염은 전달과 증식의 방식이며, 이어짐의 방법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미래가 생겨날 것이라는 징표와도 같다. 감염한다면, 그렇다면 달라질 것이고, 그리하여 과거와는 다른, 지금과는 같을 수 없는 미래가 생겨난다.(407쪽)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건강한 삶”은 대체 어떤 종류의 삶일까? 죽지는 않는다는 말일까? WHO는 건강을 “한 사람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라고 정의한다. 최소한의 건강이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안녕이 최소화된 상태라면, 그걸 과연 건강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한국에서 이 최소한의 건강을 보장하는 제도는 오직 입원과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만 의료비를 지원하고 있다. 즉 HIV 감염 같은 만성질환 치료를 위한 약제비는 원칙적으로 배제되어 있다. 만성질환 치료는 ‘최소한의 건강’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416~417쪽)

결국 나 역시 그렇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키오니가 둘째를 데리고 퇴원하던 날,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무엇도 확실치 않지만, 아이는 세상에 당도했다.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에이즈 운동의 활동가들과 공공 병원의 의료인들이 이 과정을 도왔다. 크게 부족한 제도이지만 한국의 유일한 인도적 의료 지원 제도가 이 새로운 삶의 시작이 안전하게 이뤄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도의 부족함은 키오니가 한국에서 일군 사회적 관계망이 메웠다.(422~423쪽)

작가정보

저자(글) 서보경

인류학자. 대전에서 태어나 속리산 깊은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한국에서 제일 이름이 특이한 고등학교를 다녔다. 서울, 캔버라, 치앙마이, 베를린에서 공부하고 일했으며, 현재는 연세대학교 문화인류학과에 다닌다.
이주여성의 출산과 출생 등록 경험에 관한 연구로 미국의료인류학회에서 수여하는 루돌프피르호상을,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돌봄의 미시정치에 대한 논문으로 미국문화인류학회의 컬처럴호라이즌스상을 받았으며, HIV 인권운동과 사회과학 연구방법론의 결합 방식에 관한 논문으로 비판사회학회·김진균학술상을 받았다. 감염병의 이동성에 대한 국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생명과 정치 사이의 관계를 인류학의 기반 위에서 새롭게 해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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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휘말린 날들
    HIV, 감염 그리고 질병과 함께 미래 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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