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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

삶과 예술 사이 장애연극의 시간
김슬기 , 김지수 지음
가망서사

2023년 12월 08일 출간

종이책 : 2022년 11월 1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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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상품 정보
파일 정보 ePUB (15.89MB)
ISBN 979119797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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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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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은 연극 연구자이자 드라마투르그인 저자(김슬기)가 15년차 장애인 극단 애인 대표이자 1세대 장애연극인 ‘지수 씨’(김지수)의 생애를 듣고 기록한 책이다.
‘여성’이자 ‘장애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한 사람이 극단 대표, 연출가, 작가, 배우로서 펼쳐 보여온 무대에는 삶을 통해 배운 것들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극단 애인의 연극은 장애 당사자들이 정규 교육 바깥에서, 장애운동의 흐름 속에서 익힌 철학과 실천의 결과물이다.
극단 애인이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할 때, 그 하염없는 기다림의 시간에는 장애 당사자들이 부딪혀온 겹겹의 경계들이 쌓여있다. 단원들이 쓴 희곡에는 다양한 몸을 표현할 자유, 자기결정권과 실패할 권리의 딜레마, 누구도 취약한 상태로 내버려두지 않는 세계를 향한 꿈이 담겨 있다.
저자는 긴 구술생애 인터뷰 작업을 통해 장애연극에 대해 새롭게 질문한다. 기존의 예술의 잣대를 넘어서는 장애연극만의 언어와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이는 단순히 무대를 해석하는 데 유효한 질문이 아니다. 다양한 몸의 자유로운 표현과 자기결정은 안전한 상호작용 속에서만 가능하다.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 사회적 조건은 무엇인지를 묻는 쪽으로 질문은 점점 나아간다.
이 책은 장애연극의 이야기인 동시에, 다름과 실패를 마주하며 새로운 세계를 열 용기를 내게 된 두 여성간 단단한 우정의 이야기다.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장애예술과 장애서사 논의에 관한 사려 깊은 제안이기도 하다.
프롤로그

1막 명백히 농담이 될 수 없는
농담
실루엣
약속 장소
막간극_알록달록 한 땀 한 땀

2막 부술 수 있는 경계 앞에서
용기
듣기
더 깊이 듣기
막간극_고도를 기다리며

3막 조금 다른 세계가 열릴 것만 같은
응시
교섭
관계 맺기
막간극_복작복작 수선리

4막 생전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표현
서사
막간극_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

5막 너무나 강력한 힘으로 사로잡는
시간

주체
막간극_전쟁터 산책

6막 누구도 일러준 적 없는 그 세계로
나이 듦
놓아버림
어수선한 연결

에필로그
추천의 말

p.13
지수 씨와의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나는 이보다 좀 더 근원적인 앎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수 씨가 불러낸 그 무수한 순간들과 수많은 등장인물 사이에서 나는 배웠다. 서로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모두는 모두에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슬프게도, 그리고 기쁘게도, 그 흔적들은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포개어지며, 견고하게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간다.
그 부활과 재생의 서사를 함께 써 내려가는 일, 바로 여기에 누군가를 만나고 알아간다는 것의 특별함이 있지 않을까. 부지불식간에 하지만 기꺼이, 이 놀라운 사건에 휘말리기. 그럼으로써 다른 존재를 나와 동떨어진 개체로 구분 짓는 게 아니라, 서로의 삶을 공동 저술하는 동료로 두텁게 포옹하기. 그렇게 나는 지수 씨의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다리 삼아 그의 삶으로 자연스레 미끄러져 들어왔다. (‘프롤로그’ 중)

p.14
지수 씨와 나는 장애연극의 창작자와 연구자로 만났다. 일상에서는 서로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 물론 대부분은 ‘샘’이나 ‘쌤’이라는 호칭을 쓰지만 - 관계의 무게를 인식하려 노력하는 사이다. 이 책을 시작할 당시만 하더라도 나는, 이제 막 장애연극을 배워가고 있는 내가 과연 지수 씨의 이야기를 쓸 자격이 있을까, 하고 오래 머뭇거렸다. 그리고 지금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나는 얼마나 자격이 있는지를.
질문을 다시 쓰게 한 것은 지수 씨와 함께 보낸 시간들이었다. 나는 그와 더불어 질문을 만들고, 응답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함께 살아가기를 연습했다. 이 책에서 그를 “지수 씨”라고 부르게 된 것도 그 덕분이다. 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김지수 선생님이 아니라, 한동네에 살고, 함께 지하철을 타며,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동료 시민 지수 씨. 그래서인지 이 책을 쓰는 동안 나는, 그를 더 가까이 살피고 조금은 허물없이 대하게 됐다. (‘프롤로그’ 중)

p36~37
나는 지수 씨가 겪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같이 분노하거나 때론 통쾌해했지만, 사실 그가 말한 것처럼, 지수 씨는 그저 억압받는 소수자도 아니고 언제나 맹렬하게 저항하는 투사만도 아니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지수 씨의 삶. 일상의 숱한 피로를 통과해가며 단련되었을 그의 섬세한 감수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사회를 바꾸어 왔을 그 실천들.
지수 씨의 삶을 실천이라고 표현하는 나는, 이미 그것만으로 내가 그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실감한다. 고작 경사로라는 물리적 장치의 설치 여부로 그의 자유도를 가늠해버리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함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지난 몇 년 사이 나는, 소수자와 투사 사이의 그 삶을, 연극하는 김지수를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약속 장소’ 중)

p.47
지수 씨의 말을 듣는데 어쩐지 마음이 놓였다. 마음을 놓는 내가 조금은 뻔뻔하게 느껴져서 낯이 뜨겁기도 했다. 사실, 진짜 뜨거운 건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었을 것이다. 더듬거리며 용서를 구한 나에게 그가 돌려준 것은 더 큰 이해였다. 다른 존재를 인식하고 공감하려는 사려 깊은 그의 말들은 그야말로 어떤 감응의 순간을 열어주었다. 나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지수 씨와 함께라면 좀 더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로에게 책임을 다하면서도 상대를 취약한 상태로 남겨두지 않는 관계에 대해 생각했다. 지수 씨는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내게 저런 응답을 해주었던 걸까.
그날 나는, 감히 이 책을 시작해볼 용기를 얻었다. 내가 보고 들은 지수 씨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해서 더 많은 감응의 순간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용기’ 중)

p.69
“처음 구술하면서도 제가 어린 시절 얘기할 때 울었던 것 같은데요. 가족들… 얘기하면 별로 서운하거나 이런 건 없지만, 어린 시절이라고 얘기하면, 음…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인 것 같아요. 최근에 어떤 워크숍을 하면서 어린 시절에 자기가 했던 걸 생각해보면서 움직이는 시간이 있었는데, 아… 그게 그렇게 힘들더라고요. 생각해보니까… 매일 혼자 있었던 시간이 너무 많았어서… 저희가 〈고도를 기다리며〉 할 때도 그 작품의 의미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제 인생에 있어서 기다린다는 게, 되게… 그런 시간을 많이 보낸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 눈을 뜨면 장사 나간 엄마를 기다리고 학교 간 언니를 기다리고 농장 일 하러 간 아버지를 기다리고. 와봤자 별것도 없는데. 생각해보니까 맨날 방에서 혼자 라디오 듣고.
지금도 그렇게 성격이 좋은 건 아니지만(웃음), 집에만 있다가 사회생활을 했으니까 사회도 잘 모르고, 아마 되게 소심하고 까칠하고 그랬겠죠. 지금보다 더. 요즘 생각해보니까, 음… 어린 시절의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는데 분명히. 그렇다고 해서 어린 시절에 묶여서 살진 말아야지, 늘 그런 생각을 했었고.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 때문에 뭐, 지금, 사람들과 지내면서 어떤 게, 나도 모르게 발현되는 순간들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에 얽매이면서 삶을 살지는 말아야지… 아마 그런 생각 때문에 어쨌든 제 마음속을 잘 들여다보고 그러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던 것 같은데요. 요즘 이렇게 뒤돌아보니까, 그래도 어린 시절에 제가 겪었던 것들이 내면에 아주 많이 남아있구나, 그런 생각이 되게 들었어요.” (‘막간극_고도를 기다리며’ 중)

p.75~76
극단을 창단하기로 결심한 지수 씨는 장애인 국토 종단 여행을 떠났다. ‘정말로’ 연기 잘하는 배우들을 찾기 위해서!
“제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무대를 좋아하는 것보다 연습하는 지난한 시간을 견디는 게 되게 중요했거든요. 그걸 하려면 인내심이 있어야 하는 거죠. 국토 종단을 시작한 날하고 끝나는 날 청계광장에서 다 같이 모이는데, 몇 개 조로 뿔뿔이 흩어져서 다른 도시를 걷다가 만났으니 얼마나 기쁘겠어요. 근데 처음 만났던 날과 마지막 만났던 날의 모습이 같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음, 이 친구들 정도면 괜찮겠다. 그래서 일단 왔어요. 그땐 말도 안 하고. 그냥 연락처만 알고 왔죠.”
지수 씨에게는 연습하는 지난한 시간을 함께 견딜 사람들이 필요했다. 그저 연기를 잘하는 이를 찾고 싶었다면 오디션을 봐서 배우를 선발하는, 보다 확실하고 안전한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단지 연극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모을 생각이었다면, 단원 모집 공고를 내거나 친분이 있는 주변 사람들을 수소문하는 편이 훨씬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수 씨는 장애를 가진 배우가 무대에서 관객을 만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지수 씨는 아마도 그 의미를 더 넓고 깊게, 더 오래 같이 탐색해나갈 동료들을 만나고 싶었을 것이다. (‘응시’ 중)

p.88~89
“자기결정권, 음… 자립생활계나 장애인들이 많이 하는 말은 실패할 권리인데요. 실패를 하든지 성공을 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든지. 어쨌든 직접 해봐야 아는 거잖아요. 근데 장애인들한테 그렇게 하면 잘 될 거야, 안 될 거야, 이럴 수도 있어, 어쩔 거야, 보통 이렇게 얘기하거든요. 조언이기도 하고 좋은 말인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런 이야기를 주변에서 많이 듣는 사람들이 훨씬 더 자기 선택이나 결정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안 되면 어떡하지, 그래서 의존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자기 선택권이 약해지는 거고. 책임질 일도 피하게 되는 거고. (…)
자기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결국 말하자면 자기 신뢰거든요. 나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 실패를 해도 되고 성공을 해도 되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 그렇구나, 할 수 있는 건데요. 저 같은 경우는 십 대 때 아주 의식적으로 내가 해야지, 그런 생각을 좀 많이 했던 것 같고. 자립생활운동을 시작하면서 이게 자기결정권이라는 거구나, 알게 됐죠. 옛날에는 자기결정권을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많이 놓여 있었다면, 자립생활하고 나서는 그럴 기회가 많아졌고. 이제는 기회가 많은 게 아니라, 내가 선택과 결정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왔죠.”
지수 씨의 이야기는 자기결정권이라는 것이 결국, 그 결정을 내리는 나와 다른 사람들 간 연결과 상호의존을 전제로 한 것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라는 것, 애정과 유대감 속에 비로소 자신을 신뢰하게 되고 실패할 권리를 말할 수 있다는 것. (‘관계 맺기’ 중)

p.129~130
당연하지만 나는 장애 당사자들이 경험하는 세상을 다 알지 못한다. 다만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제껏 가져본 적 없는 장애연극이 있다는 것 정도다. 그러나 나는, 당장의 현실에 좌절하기보다는, 마침내 만들어질 ‘장애서사’에 대해 상상한다. ‘여성서사’를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여성 창작자들이 고군분투해왔는지, 그리고 그 이야기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어가고 있는지 생각하면서.
장애를 가진 이들이 공적인 영역에 등장하지 못한 역사는 너무나 길고, 그만큼 그 삶의 이야기는 주변화되어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 의해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져 왔다. 따라서 장애를 가진 당사자들이 글을 쓰고, 연출을 하고, 창작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를 가시화하는 것을 넘어, 새로운 서사의 관습을 만들어내는 일이 될 수 있다. 무언가를 선망하여 그에 편입되고 싶어 하는 개인들의 극복 스토리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그러한 질서와 규범의 정당성을 심문하고 무너뜨리는 그런 작업 말이다. (‘서사’ 중)

p.151
그렇게 해서 나는, 이제는 정말로, 자기 몸과 말의 전문가인 장애연극인들에게 온전히 기대어야 할 때가 왔다는 걸 마침내 받아들이게 되었다. 연구자로서 내 방식을 내려놓아야 할 차례였다. 지금, 여기를 구성하는 장애연극의 미학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장애연극인들이 주도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리서치가 필요했다.
그 이후 나는 극단 애인의 배우들이 직접 설계한 리서치를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곧이어 내가 알고 있던 개념과 이론들이 무용해지는 순간을 경험했다. 고유성과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것, 동등한 상호배움을 실천한다는 것, 익숙한 것을 허물고 낯선 세계를 탐색한다는 것. 나는 그 모든 것들의 가치를 진심으로 믿었지만, 그저 마음으로 믿는다고 해서 그것을 체화하거나 구현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함께 시도하고, 낭패를 맛보고, 그러면서도 다시 시도해보기 위해 서로를 의지하는 일, 그 지난한 사건들을 견디고 다른 질문들을 주고받으며 그로부터 새로운 동력을 발견하는 일, 바로 그 모든 과정에 장애연극의 미학이 있었다. (‘곁’ 중)

p.197~198
그날 지수 씨는 복권방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소소한 즐거움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언젠가 복권방 이야기로 희곡을 쓰고 싶다고 했다. 미래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막연함과 불확실함조차도 사람들과 더불어 끌어안을 것이다. 장애와 젠더, 계급, 연령, 그 모든 경계와 범주를 가로질러 다양한 이들이 함께 만들어갈 ‘존재론적 안무’. 나는 그 새로운 세상 속에 지수 씨가 마음껏 자기 춤을 추는 모습을 상상한다.
지금 지수 씨는 그 어느 때보다 역동적인 변화의 한가운데에 있다. 한차례 어지러운 적응의 시간이 지나고, 이제 그는 다시 한번 자신에게 찾아온 삶을 뜻대로 살아내려 한다. 내년엔 휠체어를 달려 ‘7번 국도’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사람들을 알고 싶어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오래도록 꿈꿔왔던 여행이었다. 어디에 머물든, 어디로 떠나든, 사람들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 지수 씨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부디 그 모든 만남의 꼬리 어딘가에, 어수선한 해방의 연결이 싹트고 있길. 서로를 의지해 자립하고, 모두의 고유성 안에서 공존할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꿈틀거리고 있길. (‘어수선한 연결’ 중)

<b>“농담, 응시, 연결. 이 평범한 단어들이 한 사람의 생애를 관통하며 기묘한 힘을 발휘하는 장면들이 잔뜩 담겨 있다.” -오혜진(문학평론가)

1세대 여성 장애연극인과 비장애인 연구자가 만나
감응과 응답의 힘으로 다시 쓴 예술과 삶의 질문들 </b>

“구술생애사 인터뷰를 거듭하면서, 나는 좀 더 근원적인 앎에 도달할 수 있었다. 지수 씨가 불러낸 그 무수한 순간들과 수많은 등장인물 사이에서 나는 배웠다. 서로를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모두는 모두에게 흔적을 남긴다는 것을. 슬프게도, 그리고 기쁘게도, 그 흔적들은 끊임없이 되살아나고 포개어지며, 견고하게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간다.” (‘프롤로그’ 중)

저자는 극단 애인의 단원들이 출연한 공연의 드라마트루그 작업을 맡으며 처음으로 김지수 대표를 만났다. 그의 1인극 무대에 대한 질문들은 생의 이야기로 돌아왔고, 저자는 그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해보고 싶었다.
3년간 진행한 10여 차례의 구술생애 인터뷰와 참여관찰 등을 토대로 쓰인 이 책에서는 지수 씨의 생의 시간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시간의 축이 만나고 가로지른다. 1972년생인 그는 소아마비 마지막 세대로 척추 장애를 갖게 되었다. 집에서 자립한 후 장애운동의 흐름 속에서 연극을 하게 된 그에게 정체성과 삶, 예술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장애인이 무대에 선다는 것, 관객과 사회의 응시를 받아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극단 애인의 단원들은 오디션이 아닌 ‘장애인 국토 종단 여행’을 통해 만났다. 그저 무대를 좋아하거나 연기를 잘하는 이가 아니라 지난한 시간을 함께 견딜 동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지수 씨의 이야기는 저자의 마음을 복잡하게 만든다. 오랫동안 연극을 공부하고 현장에 있었음에도 자신이 여전히 장애연극을 읽어낼 수 있는 관점을 가지지 못했음을 새삼, 구체적으로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연극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책이 쓰인 기간 동안 한국에서 장애예술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지만, 그것이 곧 논의의 성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장애연극에 대한 반응은 장애를 가진 몸을 무대에서 보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장애인에도 불구하고” 같은 평가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했다.
이는 여전히 장애인이라는 존재 자체를 낯설어하는 한국 사회의 한계를 방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쉽게 많이 말해지는 장애예술이란 무엇인가. 그저 장애 당사자가 참여하고, 장애와 관련한 이야기를 다루고, 장애인 관객과 감응하면 되는 것일까?

<b>“비장애인 저자는 장애 당사자계(?) 농담에 진땀 흘리다가 점점 같이 웃는 사람이 되어왔다.” -홍혜은(페미니스트 기획자·저술가)

장애 당사자의 생을 가로지르는 예술과 사회의 시간
다름과 실패를 마주하며 삶을 두텁게 포용한 대화들</b>

“함께 시도하고, 낭패를 맛보고, 그러면서도 다시 시도해보기 위해 서로를 의지하는 일, 그 지난한 사건들을 견디고 다른 질문들을 주고받으며 그로부터 새로운 동력을 발견하는 일, 바로 그 모든 과정에 장애연극의 미학이 있었다.” (‘곁’ 중)

저자는 장애학을 공부하면서 질문을 파고든다. 반스와 머서, 셰익스피어는 ‘장애예술’을 “장애 및 투쟁의 경험에 대한 공유된 문화적 의미와 집합적 표현”으로 정의한다. 장애연극인에게 장애 정체성을 갖고, 사회적 제약과 경계들이 가득한 일상을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내는 과정은, 장애예술의 미학을 찾아가는 과정과 뗄 수 없다.
저자는 지수 씨와 애인 단원들이 해온 몸의 표현과 자기결정의 과정으로 연극을 경험하고, 그 삶의 관점에서 예술성을 이해하게 된다. 장애연극인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훈련하기 위해 직접 고안한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상호배움과 호혜라는 사회적 과정 속에서 미학적 개념을 다시 정의하게 된다.
“과연 지수 씨의 이야기를 쓸 자격이 있을까” 라는 머뭇거림은 “세계를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나는 얼마나 자격이 있을까”라는 윤리적 고민으로 확장되었다. 응답할 수 있는 힘을 기르고, 함께 살아가기를 연습했다. 이 책에서 김지수 대표를 ‘지수 씨’로 지칭하는 것도 그런 의미다. ‘지수 씨’는 김지수라는 개인이기보다 한동네에 살고, 함께 지하철을 타고, 같은 식당에서 밥을 먹는 동료 시민이다.

<b>“대화는 이 책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오래도록 함께 나이를 먹으며, 함께 연극할 수 있기를.” -이연주(연극 연출가)

장애연극의 관점으로 한국 사회를 다시 본다는 것
다양성과 포용, 사회적 돌봄에 대한 성찰과 과제들</b>

시간이 흐르며, 둘은 한국 사회에서 나란히 나이 들어가는 여성이라는 관계로 둘은 새롭게 만난다. 계속 함께 연극하기 위한 고민은 나이 듦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결국 장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장애란 지수 씨의 말대로 “무엇을 시도하는데 내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는, 어떤 조건에서 어려움에 처하게 되는” 사회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노화의 과정에서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다.
저자는 자신보다 조금 앞서 장애를 갖고 살아간 여성으로서의 지수 씨에게 묻는다.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사회에서, 나이 듦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돌보고 공존하는 노후는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지. 정답은 없지만, 약한 존재들간 다정하고 강인한 연결을 꿈꿔온 장애연극을 통해 얻은 힘과 상상으로 다음을 기약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이제 막 다양성과 포용, 사회적 돌봄에 대해 막 고민을 시작한 한국 사회에서, 20년 장애연극사 속 장애 당사자들의 경험과 성찰은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회적 조건과 환경을 개선해나가는 과제가 남는다. 저자는 대중문화에서부터 다양성과 포용의 가치가 재현되도록 주연 캐릭터의 장애와 젠더 등의 요건을 규정하고 직원 고용 및 교육 제도를 설계한 영국 BBC의 ‘360° 다양성 헌장’ 사례를 들며, 구체적인 논의의 필요성을 제안하기도 한다.
장애연극에서 차곡차곡 쌓아 올려진 질문들이 무대 밖을 향할 때, 그것은 세상을 바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작가정보

저자(글) 김슬기

공연예술 연구자, 드라마투르그.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한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하고 일상과 연극, 연극과 사회가 만나는 방식을 고민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전문사 연극원 연극학과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문화매개 전공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 등을 거쳐 현재는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in》의 편집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자(글) 김지수

말 김지수

연출가, 극작가, 배우, 휠체어를 탄 ‘연극하는 김지수’이며 극단 애인 대표. 여러 사람들의 작업이 하나의 무대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좋아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꼭 하나 배우고 싶은 꿈이 있다.
2003년부터 장애인 극단에서 연극을 했다. 배우가 행복한 극단을 만들고 싶어서 2007년에 애인을 창단했다. 〈고도를 기다리며〉,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 〈한달이〉 등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장애예술인 문화예술 활동 지원위원회 위원, 서울연극센터 웹진 《연극in》 편집위원 등을 지냈고, 장애인 동료상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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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
    농담, 응시, 어수선한 연결
    삶과 예술 사이 장애연극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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