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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사랑 이야기

거장의 클래식 2
찬쉐 지음 | 심지연 옮김
글항아리

2023년 12월 08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12월 08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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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ePUB (43.07MB)
ISBN 979116909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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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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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다른 종류의 내면에 있다”

현재 중국 문학에서 가장 창의적인 작가
밀도가 높으며 놀라울 정도로 이정표가 없다
삶과 죽음, 깨어 있는 것과 잠자는 것 사이의 경계가 사라진다
비밀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찾는 사람들의 입체적인 이야기
1장 뉴추이란과 웨이보
2장 웨이보와 미스 쓰 사이에 있었던 일
3장 룽쓰샹 여사의 내적 탐구
4장 웨이보의 아내 샤오위안
5장 골동품점의 감정사
6장 의사의 세계관
7장 감옥에 있는 웨이보
8장 경찰관 샤오허의 짝사랑
9장 감정 교육
10장 차오현에서
11장 용감한 아쓰

“사실 나랑 저 친구들도 조신한 스타일이긴 해요. 근데 우린 그런 말은 별로 달갑지 않더라고.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우리가 늦게 깨달은 거긴 하지만요.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오라는 데도 없고.”
“나도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데.”
추이란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버렸다.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린 게 아쉽네요.”
“그쪽이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요. 웨이보가 빠져드는 여자는 죄다 조신한 스타일이라는 거. 웨이보는 그쪽이 조신하다는 말을 굳이 하더라고요. 근데 난 그 말 안 믿어. 조신한 여자가 무슨 허구한 날 이런 데를 다니느냔 말이지.”
룽쓰샹이 끊임없이 곁눈질하며 말했다. 무언가 떠올리기 싫은 기억을 억누르려는 것처럼. 추이란은 룽쓰샹이 참 못난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말 많은 여자는 입을 열기만 하면 묘한 매력이 뿜어져 나왔다._17~18쪽

“왜 난 여태 그 사람이 그런 폭력적인 남자인 줄도 몰랐을까?”
“사람 잘못 본 거 아니야.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건데 그 사람이 변한 거지. 종종 있는 일이야.”_91쪽

“‘제보자’다. 난 저런 게 좋아. 저러고 있는 게 바로 세계 종말 아니야? 봐, 저 사람 일어났어. 아이고, 또 쭈그려 앉네. 저 사람 옆에 아카시아가 있다. 키스해줘, 아니, 여기다 해줘. 아, 진짜 좋아. 나 저 노인 사랑하는데, 믿어져?”_98쪽

아쓰의 직감으로 어머니는 결코 좌절하지 않는, 절대 타락하거나 엇나갈 리 없는 여자였다. 아쓰는 혼잣말을 했다.
‘돼지우리에 살면 또 뭐가 어때서? 마음만 깨끗하면 되는 거 아닌가?’_108쪽

세 사람은 술기운에 차츰 한 사람으로 변해갔다. 서로가 서로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이들은 조롱박 비닐하우스 앞뜰에서 같이 자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_126쪽

“어떤 때는 나도 아예 감옥에 들어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한다네. 그럼 더 잘 사유할 수 있을 테니까. 내 생각 어떤가?”
“괜찮은 생각인데요? 난 왜 여태껏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내가 이렇게 편협하다니까. 우리 아버지는 똑똑하신데, 난 아버지를 하나도 안 닮았답니다.”_139쪽

“난 이렇게 도로에서 어슬렁대는 걸 가장 좋아한다네…… 화장도 지우지 않고 다니는 거지. 귀신처럼 보이게 말이야. 이러고 돌아다니면 죽은 남편이 보이기도 한다오.”_142쪽

“집이 있어서 정말 좋겠다. 나한테 그런 건 천국이 있다는 말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인데. 난 이미 늦었다는 말이야. 망령들과 약속이 있어서 매일 밤 오래된 무덤에 들어가서 자야 한다고. 근데 자네는…… 모든 기회가 다 자네 거잖아.”_146쪽

“누가 그러는데 그 여자 정신이 나갔대.”
“그럼 또 뭐 어때서? 우리도 정신이 온전한 건 아니잖아.”_154쪽

“여기 앉아서 자기 가족이 살았던 모습을 상상해보니까 내가 전에 방직공장에서 했던 생활이 문득 떠오른다. 그 큰 들통 속에서는 지구 중심에서 전해지는 우르릉 소리가 들렸거든.”
룽쓰샹이 한참 이야기하고 있을 때, 밖에서 웬 짐승이 방문을 움켜쥐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들어오는 건지 모르는 것 같았다. 짐승은 몸집이 산양만 했지만 산양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방으로 들어오더니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짐승은 고집이 세 보였다.
“사람을 해치지 않을까?”
룽쓰샹이 조그만 목소리로 라오융에게 물었다.
“무슨 말이야, 우리 아버지인데.”_174쪽

샤오위안은 자기 마음의 끝없는 심연이 된 닥터 류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닥터 류가 잊히지 않았다. 코뿔소 뿔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 해도 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가 마음속 심연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_198~199쪽

“시골에 있을 때 사람들이 저더러 아무 가치도 없는 목숨이라고 했어요. 귀신 소굴로 떨어질 거라면서.”
아량이 말했다.
“맞는 말이네. 겁은 안 나니?”
“설레어요. 저는 그런 삶이 좋거든요.”_230쪽

“당연히 사랑 때문이죠. 오빠, 저는 밤마다 마을 사람들과 같이 모여요. 작은 클럽이 있거든요. 온통 코스모스로 뒤덮인 곳이어서 쥐들이 왔다갔다하는 곳이에요. 우리는 모두 여덟 명인데, 같이 노래도 불러요. 옛날 노래들이요. 사실 고향에 있을 때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어요. 날 우물 안으로 밀어버리고 싶어했다고 어젯밤에 털어놓은 여자애도 있을 정도로요. 걔가 상세하게 자기 계략을 설명해주더라고요. 어째서인지 모두 아름다운 음모라고 생각했어요. 오빠, 자요?”_256~257쪽

연락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연락, 그리고 식물끼리의 연락이. 그런 연결이 매 순간 일어나고 있다고, 꼭 바람이 하는 일 같다고, 닥터 류는 생각했다. 당시에 닥터 류는 진료소 입구에 서서 세 사람을 맞이했다. 세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진료소로 들어왔다. 밖에서는 제법 많은 아이가 바람을 맞으며 소리를 질렀다. 닥터 류의 마음속에서도 많은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_282쪽

위씨 노인은 대도시에서 온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히 ‘내면’에서 온 사람일 터였다.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그 세 사람처럼. 노인은 남쪽 대도시에서 왔다고 했지만 자신이 ‘내면’에서 온 사실을 감추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내면’은 어떤 곳일까? 닥터 류는 알 수 없었다. 청목향 같은 약초와 관계있는 듯했다.

“저기 봐봐, 아편 판매상의 여자가 집 지키는 개처럼 버티고 있어.”
남자가 말했다.
“저게 바로 사랑이야. 아무것도 바라는 것 없이, 이것저것 재지 않고 다 내어주는 것.”
“저 여자는 쓰레기야. 조만간 맞아 죽을 거야.”
여자가 상기된 어조로 반박했다.
“그러는 넌? 너는 쓰레기 아니야? 아, 넌 독이 든 박쥐지.”
남자가 갑자기 하수관 위로 풀썩 쓰러졌다. 아쓰는 순간 번뜩이는 칼날을 봤다. 여자가 한 짓이었다._456쪽

수수께끼 같고 종잡을 수 없는 세계, 새로운 세기의 사랑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는 찬쉐의 대표작이 출간됐다. 보르헤스, 칼비노에 견주어지며 자신만의 신화적 세계로 주목받고 있는 『신세기 사랑 이야기』다. 추이란, 웨이보, 미스터 유, 샤오위안, 미스 쓰, 아쓰, 닥터 류…… 이들 등장인물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욕망을 품고 있다.
룽쓰샹과 그 동료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면서 솜 부스러기를 너무 많이 흡입해 직업을 바꿔 온천여관의 성 접대부가 되고 싶어한다. 자기 욕망도 충족시킬 겸 조금 편하게 살고자 하는데 나이가 많은 게 걸림돌이다. 하지만 계략을 잘 짰더니 살아남을 방법이 있었다. 게다가 힘 좋은 여성들의 진면목을 남자들은 알아봐준다.
예쁘장하게 생긴 계량기 공장의 창고 관리인 추이란은 축 처진 마음을 추스르러 온천탕에 왔다가 이들 여성과 마주친다. 게다가 역겹게 생긴 미스터 유까지 나타나 추파를 던진다.
추이란이 달갑잖게 여기는 비호감 인물 미스터 유는 골동품 감정가인데,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는 누구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깊이를 드러낸다. 독자들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 역겹게 생긴 건 단점일까? “그건 단점이라고 볼 수 없지. 누구나 다 남을 역겹게 하는 부분은 있으니까.”
온천을 들락거리는 남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표면을 다룬다. 욕망은 쉽게 변해 이들은 파트너를 바꾸곤 한다. 그런데 그 표면은 지하 동굴까지 파고들 만한 심연을 감추고 있다. 찬쉐 소설의 장면 전환은 장소 간의 이동이라기보다는 꿈과 현실 사이의 이동, 사람들의 심연과 심연 사이의 건너뛰기다. 또한 넷째 숙부처럼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인물이 등장해 고향을 찾는 이들에게 실마리를 남긴다.
실험적이고도 환상적인 구조로 짜인 『신세기 사랑 이야기』는 끊임없이 연결되는 이야기의 구조 속에서 몇몇 단어를 눈에 띄게 흩뿌려놓았다. ‘내면에서 온 사람’이 그중 하나다. 성 접대를 하는 여성이나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남성들은 표면을 부유하는 삶을 살 것 같지만, 실은 표면이 곧 내면이고, 이들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이 “내면에서 온 사람”임을 알아차릴 만큼 꿰뚫는 시선을 갖고 있다.
제목에도 나오듯, 소설 속 인물 모두 세속과 저세상의 사랑으로 얽힌 관계다. 하지만 그들은 욕망에 ‘갇혀’ 있지 않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나면 사랑은 그쪽으로 흘러가고, 떠나보내는 이는 자기 파트너가 참사랑을 찾아 떠났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빼앗아간 동성에게도 더없는 친밀감을 느낀다. 사랑은 고여 있지 않고 흘러갔다 제자리로 돌아온다.
찬쉐의 소설은 ‘종잡을 수 없는 전개다’ ‘변화무쌍하다’ ‘수수께끼 같다’는 평을 받곤 한다. 이를테면 아쓰라는 젊고 매력적인 여자를 이웃 노인이 망원경으로 몰래 엿본다. 그러자 아쓰는 자기 애인한테 말한다. “난 저런 게 좋아. 저러고 있는 게 바로 세계 종말 아니야? 저 사람 옆에 아카시아가 있다. 키스해줘, 아니, 여기다 해줘. 아, 진짜 좋아. 나 저 노인 사랑하는데, 믿어져?” 성애적인 것에 작가는 환한 빛을 비춘다.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앞서 말한 추이란의 애인은 웨이보인데, 웨이보는 접대부 룽쓰샹과도 관계를 맺은 적이 있다. 룽쓰샹은 남자들한테 “조신한 여자”라는 얘기를 듣곤 했다. 이런 평가는 정작 룽쓰샹에겐 불만이어서 온천탕에서 만난 추이란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조신한 여자던데. 우린 그런 말이 별로 달갑지 않더라고.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러자 추이란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고 만다. “나도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데.” 작가는 이들 인물이 모두 실용적으로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드러내 보인다.

“집이 있다는 건 천국이 있다는 말만큼이나 불가능한데”

추이란은 그동안 쌓인 휴가를 한 번에 몰아서 어느 날 고향을 방문했다. 시골 동쪽에 사는 친척 오빠는 자녀들을 분가시키고 아내와 단둘이 200평 면적의 논농사를 지으며 닭과 오리도 기르는 조용한 삶을 살고 있었다. 마을에 도착해 추이란은 ‘오빠’ 하고 큰 소리로 불렀다. 곧 오빠 부부가 나왔는데 키는 난쟁이 같고 피부는 석탄처럼 까만 데다 뭔가에 정신이 팔린 듯 보였다. 게다가 밤중에는 나무 위나 논두렁에 앉아 있었다. 올케언니는 더했다. 곤충 울음소리를 내는데 마치 매미 같았다. 추이란의 따가운 시선을 느낀 오빠는 말한다. “우리가 왜 나무에 앉아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거 다 알아. 땅이 울부짖는 소리에서 멀리 떨어지고 싶었어. 침착하게 뭔가를 결정할 수 있도록 말이야.” 추이란은 문득 친척 오빠 부부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거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오빠는 중요한 징검다리다. 이후 전개에서 드러나듯 추이란과 그 애인 웨이보 사이를 오가는 역할을 맡게 된다.
웨이보의 아내인 샤오위안 역시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학교 선생인 그녀를 좋아하는 제자들은 그녀를 쥐와 식물의 세계로 이끌고, 주변 인물들은 그녀가 ‘내면에서 온 사람’임을 알아차린다. 늘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는 샤오위안이 내뱉는 한마디는 어쩌면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듯하다. “여행이 좋아요. 여행은 한 군데만 고집하는 것과 같으니까. 고향에서도 한곳을 정해 머물면 오히려 떠돌이가 된 느낌이 들죠.”
소설 속 인물들은 집을 가진 사람조차 고향을 찾아 떠돈다. 가령 미스터 유는 이런 말을 한다. “집이 있어서 정말 좋겠다. 나한테 그런 건 천국이 있다는 말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인데.” 이 말을 들은 웨이보는 오히려 미스터 유의 뒷모습을 응시하면서 그가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이 전개되며 점점 드러나듯, 미스터 유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변화무쌍하다. 이 인물들은 모두 상대방의 심연을 불현듯 알아차린다. 비록 자기 자신은 “죽도 밥도 아니”고, 정신이 온전하지도 않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은 스스로의 가치는 보지 못하나 상대방 혹은 내 애인을 빼앗아간 사람에게서는 빛나는 가치를 발견한다. 가령 미스터 유는 “저는 무용지물, 빈껍데기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오페라 가수 부부를 존경한다. 사실 가수 부부 중 남편은 고지식해서 아무거나 주워먹으려고 쓰레기통을 뒤지고 다니는 유령이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이곳저곳에서 등장하며 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꿈의 환각 작용과도 같다. 현실과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경험을 주인공들 누구나 한다. “난 이렇게 도로에서 어슬렁대는 걸 가장 좋아한다네…… 화장도 지우지 않고 다니는 거지. 귀신처럼 보이게 말이야. 이러고 돌아다니면 죽은 남편이 보이기도 한다오.” 그 환각은 작품 전체에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는다.

식물, 지하 동굴 그리고 향기의 세계

추이란의 소설은 감각적이다. 특히 시각과 후각 면에서. 작가는 몇몇 인물의 시각을 박탈한다. 웨이보는 자신의 고향이 정확히 어디 있고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그건 어릴 적 아버지가 매년 아들을 고향에 데려가면서 눈을 안대로 가린 후 맹인인 척하게 했기 때문이다. 어린 웨이보는 고향에 가고 싶어 얌전하게 눈을 가린 채 꿈쩍 않고 기차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여정에 들어서는데, 나중에 수감되면서 감옥이 바로 고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웨이보의 아내 샤오위안은 어느 날 출장 가려고 동북지방행 기차를 탔다. 그때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맹인이 자신을 ‘귀뚜라미’라고 부르라 했다. 둘이 대화를 나누던 중 샤오위안은 귀뚜라미 오빠가 평생 한곳에 붙박여 있었을까봐 염려되어 말한다. “고생 많았어요, 귀뚜라미 오빠. 부뚜막에 계셨다죠? 나 같았으면 잡목숲의 은둔자나 방랑자가 되고 싶었을 텐데.” 이런 샤오위안의 발언은 자세히 뜯어보면 아이러니를 품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녀는 “여행은 한 군데만 고집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했으니까.
이 책은 향기와도 관련 있다. 추이란은 전 애인 웨이보가 감옥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대성통곡하면서 웨이보가 고귀한 인품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뭐라고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어쩌면 쑥향과 관련 있지 않을까”라고 말하면서. 고향을 찾는 다른 사람들도 온종일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다니면서 자기가 태어난 마을 입구의 실마리를 얻으려 애쓴다.
소설에서 골동품 감정가 미스터 유와 그가 일하고 있는 가게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입구 같다. 옛 유물들을 다루는 이들은 종적인 시간대를 넘나들며 늘 불면증을 달고 산다. 그런 미스터 유가 감정하는 화병은 중요한 세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우리 시골에 있는 화병은 비둘기도 집어넣을 수 있어요. 화병이 작아 보이기는 해도 안쪽은 굉장히 넓거든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닥터 류라는 인물은 여자에게 집착하지만 독신주의자다. 직업은 양의사인데 어느덧 약초와 식물의 세계로 빠져들어 여자만큼 식물 없이는 못 산다. 그는 어느 날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샤오위안과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독자를 땅의 진동 속, 식물의 세계로 이끄는 매개체다.
후반부로 갈수록 주인공들이 자주 입에 올리는 말은 ‘역사’다. 특히 방직공장 출신의 성 접대부들이 실은 ‘살아 있는 역사’이기에 찬쉐는 이들이 기록되어야 할 인물임을 암시하는데, 그 기록의 권한을 남성 실직자인 공장 수위 홍씨에게 부여한다. 이렇듯 이 책에서 보잘것없이 나타났던 모든 남성은 가장 깊은 존재일 뿐 아니라 다른 세계와 이어주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여성들은 이미 친구가 되어 있고 모두 연결되어 있다.

작가정보

저자(글) 찬쉐

본명 덩샤오화鄧小華. 1953년 후난성 창사시에서 태어났다. 필명 찬쉐는 ‘겨울 끝에 남아 있는 더러운 눈’ 혹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는 순수한 눈’이라는 뜻이다. 20세기 중엽 이래 가장 창조적인 중국 작가로 거론되고 있다.
병약한 아이였던 찬쉐는 1957년 지역 신문사에서 근무하던 부모가 반공 단체를 이끌었다는 이유로 노동교화소로 끌려간 뒤 할머니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찬쉐의 할머니는 ‘히스테릭하면서도 이야기를 잘하고 한밤중에 귀신을 쫓던 인물’로, 이러한 유년기의 경험은 찬쉐가 문학세계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초등학교까지만 졸업한 찬쉐는 공방 직원, 재단사, 맨발의 의사, 대리 교사 등으로 일했다. 글쓰기는 문학과 철학을 독학하는 가운데 시작되었다. 1985년 1월 단편소설 「더러운 물 위의 비눗방울」을 발표하고 1987년 장편소설 『황니가』를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는다. 이후 『오향거리』 『마지막 연인』 『맨발 의사』 등을 발표하며 초현실적인 문체와 서사로 ’중국의 카프카’라는 찬사를 받았다. 단테, 보르헤스, 카프카 등의 작품과 중국의 전통 무속 신앙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했으며, 현대 문학계에서 가장 혁신적이고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문학평론가로서도 활동해 『영혼의 성』 등 여섯 권의 문학평론집을 펴냈고, 미국과 일본 문단에서는 평론가로서 여러 상을 수상했다.
찬쉐는 해외에서 가장 많이 번역된 중국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미국, 스페인, 독일, 일본 문단에서 크게 인정받고, 하버드대학 등 미국과 일본 대학에서 교과서로 채택됐을 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소설 선집에 여러 차례 수록되었다. 예일대학 출판부에서 출간된 『마지막 연인』은 미국도서상 최우수 번역상을 수상(중국 작가 최초로 수상)했다. 장편 『신세기 사랑 이야기』는 미국도서상 최우수 번역상과 인터내셔널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 매해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찬쉐는 노이슈타트 국제문학상 후보에도 오른 바 있다.

이화여대 중문과와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중과를 졸업했고 베이징사범대학에서 수학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상류 아이』 『글 속에 살아 숨 쉬다: 문학가의 노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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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세기 사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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