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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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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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구상해왔다고 알려지며 무성한 소문 속에서 기대를 모았던 이 작품들의 정체가 최초로 공개된 것은 2015년, 그의 데뷔작 『과수원지기』 출간 5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서였다. 작업중인 작품에 대해 거의 밝힌 적이 없던 매카시의 신작 제목 ‘패신저’와 몇몇 구절이 공개된 것도 놀라웠지만 평생 노출을 극도로 꺼리며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해왔던 그가 작품의 등장인물을 직접 소개했다는 사실은 독자들을 흥분으로 몰아넣었고, 그로부터 7년 뒤 공개된 연작 형식의 두 장편소설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온 기대를 완벽히 충족시키는 대작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해 인류 최초의 핵폭탄을 만드는 데 일조한 과학자 아버지를 둔 남매가 각각의 주인공인 두 작품은 작가가 커다란 관심을 기울여온 수학과 과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신과 인간, 역사에 대해 다시 한번 가장 철저한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가 평생 천착해온 주제의식을 총망라하면서도 새로운 획을 긋는 이 작품들은 “이미 걸출한 작품 목록에 더해지는 훌륭한 신작이자 살아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로 손꼽히는 매카시의 정신이 어느 때보다 예리하다는 증거”(NPR) 등의 극찬과 함께 출간 즉시 열렬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60년에 걸친 작가로서의 여정에 묵직한 마침표를 찍었다.
옮긴이의 말
삶이라.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그건 모든 사람을 위한 게 아니지. 11쪽
그는 신의 선(善)은 이상한 곳에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눈을 감지 마라. 142쪽
새벽에 악한 연꽃처럼 피어나는 그 버섯 형상의 유령 속에, 견고한 것들이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으로 녹아내리는 광경 속에 천년 동안 시의 입을 다물게 할 진실이 서 있었다. 거대한 방광 같았다, 그들은 말하곤 했다. 어떤 바다 생물 같았다. 가까운 지평선에서 약간씩 흔들거렸다. 그러다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소리. 그들은 새벽하늘에서 새들이 불이 붙고 소리 없이 폭발하여 불타는 파티 선물처럼 땅을 향해 긴 호를 그리며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224~225쪽
슬픔은 삶의 재료야. 슬픔이 없는 삶은 아예 삶이 아니지. 하지만 후회는 감옥이야. 네가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너의 일부가 더는 찾을 수도 그렇다고 절대 잊을 수도 없는 어떤 교차로에 영원히 꽂혀 있는 거야. 267쪽
어떤 사회에서든 권태가 가장 일반적 특징이 되고부터 비로소 진짜 문제가 시작돼. 권태는 마음이 고요한 사람들까지도 그들이 상상해본 적 없는 길로 몰아갈 거야. 272쪽
세상에는 선이 있다고 믿어야 해. 네가 손으로 한 일이 그 선을 네 인생에 들여올 거라는 것까지 믿으라고 하고 싶어. 그 믿음이 틀릴 수도 있지만 그걸 믿지 않으면 너는 인생이란 걸 갖지 못할 거야. 인생이라 부를 수는 있겠지. 하지만 그건 인생이 아닐 거야. 333쪽
사람들은 자기가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을 더 후회할 것 같은데. 누구에게나 하지 못한 일이 있겠지. 뭐가 다가오는지는 보지 못하니까, 보비. 설사 볼 수 있다 해도 그때조차 올바른 선택이 보장되는 건 아니지. 346쪽
나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 그녀는 썼다. 죽음이 언제 누구에게든 해를 준 적이 있어? 352쪽
마지막으로 그냥 혼자 앉아 있어본 게 언제야. 세상이 어두워지는 걸 지켜보면서. 밝아지는 걸 지켜보면서. 네 인생을 생각하면서. 네가 어디 있었고 어디로 가는지. 그 어느 것에라도 어떤 이유가 있는지. 436쪽
그 모든 헌신에도 불구하고 슬픔의 섬세하고 달콤한 가장자리가 옅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각각의 기억은 앞선 기억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며 그렇게 이어지다 마침내…… 뭘까? 기억의 주인도 비애도 서로 구별되지 않는 하나가 되어 쇠잔해지다 결국 이 비참한 응고제는 삽으로 판 땅속으로 들어가고 빗물이 새로운 비극들을 위해 돌들을 씻어낸다. 490쪽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아무리 상상해봐도 그걸 정확하게 알 가능성은 크지 않겠죠. 안 그렇습니까? 548쪽
사람들은 자신이 초래한 고난을 피하려고 이상한 짓들을 하기 마련이죠. 세상은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587쪽
고난은 인간 조건의 일부이고 견뎌야 해. 하지만 불행은 선택이야. 659쪽
여기 이야기가 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동안 우주에 홀로 서 있는 모든 인간 가운데 마지막 인간. 하나의 슬픔으로 모든 것을 슬퍼하는 인간. 한때 그의 영혼이었던 것이 소진되고 남은 애처로운 찌꺼기에서는 이 마지막날들을 안내해줄 신 비슷한 존재라도 만들 재료는 전혀 찾지 못할 것이다. 693쪽
추락한 비행기. 아홉 구의 시체. 사라진 승객 한 명.
잃어버린 존재를 안고 불가해한 세상을 떠도는 여행자.
『패신저』는 웨스턴 남매의 오빠 보비가 이끌어가는 이야기로, 여동생 얼리샤가 죽고 약 10년이 지난 1980년을 배경으로 한다. 과거 촉망받는 물리학도였던 보비는 얼리샤를 마음에 묻은 채 바닷속에 잠긴 화물이나 각종 유실물을 탐사하고 건져내는 인양 잠수부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새벽 그는 동료 잠수부와 함께 바닷속으로 추락한 비행기를 조사하게 되는데, 일곱 명의 승객과 조종사와 부조종사의 시체가 함께 발견된 비행기 내부에는 수상하게도 조종사의 운항 가방과 블랙박스가 사라지고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비의 집에 정장을 입은 요원 두 명이 찾아오고, 보비가 없는 사이 이미 집을 수색한 두 남자는 비행기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승객 한 명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보비는 비행기 추락 사건에 모종의 음모가 얽혀 있다는 느낌을 받고, 함께 잠수를 했던 동료이자 친구 오일러가 베네수엘라에 일하러 갔다가 사망하면서 사건에 대한 의혹은 더욱 짙어진다.
추락한 비행기와 거기에 얽힌 미스터리가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면 작품에 살을 붙이고 풍성함을 더하는 것은 주인공 보비 웨스턴이 등장인물들과 나누는 대화다. 코맥 매카시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녹스빌과 작가가 된 뒤 거주한 적 있는 뉴올리언스 프렌치쿼터의 레스토랑과 술집들을 배경으로 동료 잠수부, 동네 친구들, 사설탐정 등과 나누는 대화는 다채롭고 광범위한 화제를 넘나든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자동차경주 선수로 활동하다 현재는 잠수부로 일하는 보비의 인생과 관심사를 반영한 이야기부터 20세기 중후반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놓았고 남매의 아버지가 개발에 일조한 원자폭탄에 관한 이야기까지, 작가가 평생 관심을 기울이고 파고든 주제가 반영된 이 대화들은 독자로 하여금 죽음과 삶, 신과 우주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만든다.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를 연결하는
그리움과 상실감, 그리고 고통스러운 슬픔
간밤에 눈이 가볍게 내려 얼어붙은 머리카락은 황금색 수정 같았고 두 눈은 차갑게 얼어붙어 돌처럼 단단했다. 노란 장화 한 짝은 벗겨져 몸 아래 눈밭에 서 있었다. 던져놓은 코트는 눈에 살짝 덮여 형태를 그대로 드러냈고 그녀는 하얀 원피스만 입은 채 겨울나무의 헐벗은 잿빛 기둥들 사이에서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약간 틀어 손바닥을 드러낸 모습으로 매달려 있었다. 어떤 성당 조각상들처럼 자신의 역사를 생각해달라고 청하는 자세였다. 세상의 깊은 토대를, 세상이 그녀의 피조물들의 슬픔 속에서 존재를 얻게 되는 그곳을 생각해달라는 자세. 본문에서
『패신저』는 보비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설이지만, 이 소설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은 다름 아닌 『스텔라 마리스』를 이끌어가는 여동생 얼리샤의 죽음이다. 춥고 황량한 어느 크리스마스 날, 스무 살의 나이에 눈 덮인 숲으로 들어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얼리샤는 보비의 남은 삶에 지울 수 없는 상실감과 고통스러운 슬픔을 남긴다.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그애를 죽게 했다는 보비의 자책과 후회는 깊어져만 가고, 보비는 “내 인생에서 너를 제외하면 모든 게 사라졌다”고 읊조리면서 스스로 이해조차 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다.
얼리샤의 존재는 『패신저』에서 또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드러난다. 총 열 개의 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마지막 장을 제외한 아홉 개의 장에 특별한 도입부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조현병 진단을 받은 얼리샤가 열두 살 때부터 장기간 겪어온 환각에 대한 것이다. ‘키드’라 불리는 존재와 그가 이끄는 무리는 얼리샤의 삶에 아무때고 등장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고, 이 장면들은 『스텔라 마리스』에서 얼리샤가 의사와 나눈 대화와 연결되며 두 소설을 눈부시게 아름다운 방식으로 순환시키면서 하나로 엮어낸다.
인생이란 수수께끼야. 그거 알고 있었어?
그게 내가 정말로 알고 있는 유일한 사실인지도 모르지.
보비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어둠을 뚫고 움직이며 그 안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탐사하고 인양하는 일로 먹고살지만 실은 심해에 대한 공포를 품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것과 언제든 맞닥뜨릴 수 있는 캄캄한 물밑은 보비에게 알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견뎌내야 한다는 면에서 마치 인생과도 같이 느껴진다. 좋은 작가란 “삶과 죽음의 주제를 다루는 작가”라고 말한 바 있는 매카시는 『패신저』에서 죽음은 물론이고 삶과 이 세상에 대한 문장을 여러 번 쓰고 있는데, 그 핵심은 결국 “세상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절대 알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다. “인생이 어떻게 될지 아무리 상상해봐도 그걸 정확하게 알 가능성은 크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뿐 아니라 심지어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할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
이 책을 옮긴 정영목 교수가 옮긴이의 말에서 쓴 것처럼,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가 공유하는 기반이자 작품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현대 물리학은 “우리가 이전에 알던 세계의 확실성을 무너뜨리는 이론들을 생산하는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확실하든 확실하지 않든 그 세계 전체를 물리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폭탄도 생산했”다. 그 불확실성과 불가해함 속에서 보비는 어두컴컴한 물속을 가르고 나아가듯 홀로, 오로지 홀로 살아간다. 때때로 두려워하고 종종 자책하며 늘 슬퍼하면서.
여기 이야기가 있다. 주위가 어두워지는 동안 우주에 홀로 서 있는 모든 인간 가운데 마지막 인간. 하나의 슬픔으로 모든 것을 슬퍼하는 인간. 한때 그의 영혼이었던 것이 소진되고 남은 애처로운 찌꺼기에서는 이 마지막날들을 안내해줄 신 비슷한 존재라도 만들 재료는 전혀 찾지 못할 것이다. 본문에서
작가정보
Cormac McCarthy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서부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며, 윌리엄 포크너와 허먼 멜빌,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정신을 계승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개성적인 인물 묘사, 시적인 문체, 대담한 상상력으로 유명하다. 저명한 문학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코맥 매카시를 필립 로스, 토머스 핀천, 돈 드릴로와 함께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꼽은 바 있다.
1965년 첫 소설 『과수원지기』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바깥의 어둠』 『서트리』 등의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져갔다. 매카시에게 본격적으로 문학적 명성을 안겨준 작품은 1985년 작 『핏빛 자오선』이다. 이 작품은 〈타임〉 지에서 뽑은 ‘100대 영문소설’로도 선정되었다. 서부를 모태로 한 국경 삼부작 『모두 다 예쁜 말들』 『국경을 넘어』 『평원의 도시들』을 발표하며 서부 장르소설을 고급문학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은 매카시는 이후 『로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을 출간하며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평단과 언론으로부터 코맥 매카시 최고의 작품이라고 평가받은 『로드』는 2007년 퓰리처상, 2006년 제임스 테이트 블랙 메모리얼 상을 수상했으며, 미국에서만 350만 부 이상 판매되는 성공을 거두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2006년 극 형식의 소설 『선셋 리미티드』를 발표했으며, 2009년에는 “지속적인 작업과 한결같은 성취로 미국 문학계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에게 수여되는 펜/솔벨로상을 받았다. 2022년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물리학자 아버지를 둔 남매의 이야기를 다룬 연작 형식의 장편소설 『패신저』와 『스텔라 마리스』를 출간했다. 2023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번역가로 활동하며 현재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로 재직중이다. 지은 책으로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옮긴 책으로 『로드』 『선셋 리미티드』 『신의 아이』 『패신저』 『스텔라 마리스』 『제5도살장』 『바르도의 링컨』 『호밀밭의 파수꾼』 『에브리맨』 『울분』 『포트노이의 불평』 『미국의 목가』 『굿바이, 콜럼버스』 『새버스의 극장』 『아버지의 유산』 『사실들』 『왜 쓰는가』 등이 있다. 『로드』로 제3회 유영번역상을, 『유럽문화사』로 제53회 한국출판 문화상(번역 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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