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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LIM: 달리는 무릎

이유리 지음
열림원

2023년 11월 14일 출간

종이책 : 2023년 10월 30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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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 979117040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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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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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 LIM 첫 번째
이유리 소설 × 정아리 일러스트

‘ILLUST LIM’은 지금 여기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의 단편소설 한 편을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으로 새롭게 엮어낸다. 첫 번째 「달리는 무릎」은 이유리 소설가와 정아리 일러스트레이터가 함께 선보인다. 문학웹진 LIM에 연재한 작품에 새로운 일러스트 여덟 컷을 더해, 사철 누드 제본으로 그 섬세한 결을 살렸다.

새벽마다 불안을 견디지 못해 천변을 달리던 ‘나(희수)’는 어느 날 크게 넘어져 무릎뼈가 보일 만큼 다치고 만다. 급한 대로 꿰매놓은 흉터 안쪽에서 별안간 들리는 목소리. “나는 너를 기다렸어.” 공동체에서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 산산이 쪼개지고 정처 없이 달리던 존재들이 만나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열려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이들의 찬연한 “지구 탈출 프로젝트”(민가경, 『림: 초 단위의 동물』 작품 해설 중에서)가 펼쳐진다.

림LIM 젊은 작가 단편집 2 (2023년 가을) 『림: 초 단위의 동물』 수록 단편 중 하나다.
이 책은 목차가 없습니다.

p.183
달리기를 시작한 지 세 달쯤 되던 어느 날 새벽, 나는 되게 넘어졌다.
p.187
나는 너를 기다렸어.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렸다. 기다렸어. 너희의 시간으로 사십억 년이 넘도록 여기에서 단지 너만을 기다렸어. 도무지 누군지 왜 기다렸다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그 절박함만은 그대로 와닿아서 나도 울창한 나무들 사이를 헤매며 마주 외쳤다. 누구세요. 어디 계세요. 누구신데 그렇게 저를 찾으세요. 저를 아무도 안 찾은 지 좀 됐는데. 마지막 말을 하고 나서야 그러고 보니 그랬지, 생각하는데 서서히 세상이 흔들렸다. 목소리의 주인이 땅속을 뚫고 내게로 오고 있었다. 갈게, 지금 갈게.
p.190
“전쟁?”
아니, 말했잖아. 투표.
목소리가 대꾸했다. 괜히 머쓱해진 나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우리는 투표를 했다. 모든 생물체의 의견을 하나로 모았지. 모인 의견은 명확했어. 공동체에 가장 도움이 되지 않는 이를 선별해서, 그들에게 육체를 빼앗아 공간을 확보하기로 한 거야. 이윽고 우리는 빅뱅을 일으켰고 나를 포함해 선별된 자들은 거기서 산산이 부서졌다.
p.193
나를 돌아가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렸지. 그렇지만 한편으론 알 수 없었어. 거길 돌아가서 뭘 하겠다는 것인지, 이미 한 번 배제당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그런데 이제 네 얘기를 들으니 알겠다. 나는 돌아가서 내 눈으로 보겠어. 시스템이 옳았는지 아닌지를. 그리고 옳지 않았다면, 싸우겠다.
p.197
그날은 어영부영 집에 머무르며 새 아르바이트 자리나 끼적끼적 알아보다 날이 어두워졌다. 식비도 아낄 겸 일찌감치 잠자리에 눕고서야 생각했다. 그게 어쩌면 웃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고. 아주 오래오래 살면 인간과 다른 웃음 포인트를 갖게 되는 걸까. 정말 그렇다면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나는 웅크리고 누운 채로 손을 뻗어 무릎을 만지작거렸다. 매끈하고 동그란 가운데 난 상처는 까칠했지만 만져도 아프지 않았고 오히려 잠이 솔솔 오는 것 같았다.
p.201
나는 대신 다른 것들을 생각했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지만 하지 않으면 정말로 굶어 죽을 거라는, 하지만 이 것조차 영원히 할 수 없다는 그런 사실들을. 그러다가 불편한 자세로 잠이 들었고 서너 시간을 자고 나면 무릎이 나를 깨웠다.
일어나. 달리러 가자.
p.202-203
하늘에는 다섯 개의 달이 떠 있었고 흐릿한 은빛 필름 같은 생물들이 거리에 북적였다. 지구가 아닌 이곳을 나는 아련하고 그리운 마음으로 걸었다. 둘러볼수록 쾌적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조화롭고 각자의 자리에서 쓸모 있었다.
그런 꿈을 꾸다 깨었을 때 나는 묻곤 했다.
거기 있어요?
외계인은 틀림없이 대답했다.
있어.
그러면 나는 안심하고 다시 잠들었다.

기다렸어.
너희의 시간으로 사십억 년이 넘도록
여기에서 단지 너만을 기다렸어.

ILLUST LIM 첫 번째
이유리 소설 × 정아리 일러스트

‘ILLUST LIM’은 지금 여기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주목받는 젊은 소설가의 단편소설 한 편을 일러스트레이터의 작품으로 새롭게 엮어낸다. 첫 번째 「달리는 무릎」은 이유리 소설가와 정아리 일러스트레이터가 함께 선보인다. 문학웹진 LIM에 연재한 작품에 새로운 일러스트 여덟 컷을 더해, 사철 누드 제본으로 그 섬세한 결을 살렸다.

새벽마다 불안을 견디지 못해 천변을 달리던 ‘나(희수)’는 어느 날 크게 넘어져 무릎뼈가 보일 만큼 다치고 만다. 급한 대로 꿰매놓은 흉터 안쪽에서 별안간 들리는 목소리. “나는 너를 기다렸어.” 공동체에서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해 산산이 쪼개지고 정처 없이 달리던 존재들이 만나는 순간. “온몸의 감각이 열려 있지 않았다면 듣지 못했을” 이들의 “지구 탈출 프로젝트”(민가경, 『림: 초 단위의 동물』 작품 해설 중에서)가 펼쳐진다.

달린다는 것은 뭐랄까,
몇 초 전의 나를 끊임없이 뒤에 두고 오는 일 같았다.

여러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먹고사는 ‘나(희수)’는 녹초가 된 몸으로 매일 “집을 박차고 나가 길 끝에 해답이 놓여 있기라도 할 것처럼 내달리곤”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사십억 년이 넘도록” ‘나’만을 기다려온 존재와 어느 날 조우하게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빅뱅이 일어난 순간 무한대에 가까운 조각으로 흩뿌려졌다는 ‘외계인’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의 무릎 속에서 도움을 요청한다. 알아서 운동 에너지를 흡수할 테니 ‘나’는 “지금처럼 달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 다만 속도를 붙여나가며. 조금씩 몇 초 전의 자신으로부터 내뻗어가며.
어슴푸레한 새벽을 영롱하게 비추는 일러스트는 이들의 이야기를 또 다른 감각으로 전한다. 페이지 위에 수놓아진 찬연한 흔적들은 ‘나’와 무릎 속 ‘외계인’이 함께 시작하는 여정을 우리 곁으로 펼쳐 보인다. “나는 돌아가서 내 눈으로 보겠어. 시스템이 옳았는지 아닌지를. 그리고 옳지 않았다면, 싸우겠다.” 온 방 안과 마음 깊숙한 곳을 우렁우렁 울리는 목소리가 한 권의 얇고 아름다운 책으로, 겹겹이 엮인 초대장으로 도착했다.

“서로의 상념을 침묵으로 위로하는 그것.
꿈에서 깼을 때 아직 나와 함께 있는 존재에 안심하는 그것.”

「달리는 무릎」은 ‘림LIM 젊은 작가 단편집’ 2 (2023년 가을) 『림: 초 단위의 동물』 수록 단편 중 하나다. “벌어지는 상처 사이로 유입된”(민가경, 『림: 초 단위의 동물』 작품 해설 중에서) 뜻밖의 만남은 서로의 용기가 된다. “절뚝이는 몸, 그리고 ‘쓸모’라는 거름망에 여과된 존재가 만나 새로운 연결망을” 이루며 이곳과 그곳을 넘나드는 이들의 달리기는 소설을 읽는 당신에게 동행을 요청한다. 상상해본 적 없이도 눈앞에 그려지는 어느 아득한 세계에서. “고향별로 돌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진작에 모였단 걸 알면서도 한 계절을 함께 채우고자 무릎에 잠시 더 머물러보는” 바로 그 마음으로. 오늘을 잇는 달리기를 시작한다.

작가정보

저자(글) 이유리

잘 달리지 못하지만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 2020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브로콜리 펀치』 『모든 것들의 세계』, 연작소설 『좋은 곳에서 만나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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