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적 인간
2023년 11월 17일 출간
국내도서 : 2023년 11월 06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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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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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가 주목하고 귀를 곤두세우고 있다. 러시아는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과연 무슨 말을 할 것인가. 그 일거수일투족이 일으키는 파동은 순식간에 전 세계 구석구석까지 뻗어나가며 곳곳에 파란을 일으킨다. 세계사의 중심에 선 오늘날의 러시아는 그 괴물 같은 모습을 스멀스멀 드러내고 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이 괴물 주변으로 무수한 사람이 모여 시끌벅적 미친 듯이 떠들어대는 모습은 마치 스타로브긴을 둘러싼 ‘악령’의 세계가 그대로 현실이 되어 출현한 것만 같다.”
이것은 1953년에 초판이 출간된 이 책의 첫 단락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일본에서 스테디셀러로 읽혀온 『러시아적 인간』은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독자들의 주의를 끌었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은 하나의 세계적 현상이었다. 저자는 한 세기 전에 이미 오늘날의 사상적 문제를 제기했던 러시아 문학이 일반적인 문학사와는 다른 관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고 본다. 현상적인 격변 너머에 있는 영혼의 러시아, 이념이나 추상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러시아를 파고들어 ‘러시아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 바로 이 책이 쓰인 이유다.
세계문학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작품이 러시아에서는 19세기 푸시킨에 이르러 처음 등장했다. 그때까지 4류, 5류를 벗어난 작가를 배출한 적이 없는 이 나라의 문학은 모두 19세기의 도약을 위한 발판이거나 영양분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푸시킨이 평지돌출한 후 체호프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에서는 한 세기 내내 거인들이 탄생했다.
무엇이 러시아인들을 움직이게 하는가? 이것은 러시아적인 것의 본질을 찾고자 19세기 작가들을 읽으면서 저자가 놓지 않은 단 하나의 질문이다. 러시아 문인들이 품고 있는 묵시적·종말적·절망적 세계관과 부활·신세계·구원을 희구하는 마음…… 양쪽으로 요동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비극의 역사. 그것이 왜 러시아에서 일어나는가를 인간미 넘치는 문체로 하나하나 예를 들며 이야기한다. 즉 독자들은 문학을 통해 러시아를 분석적으로 읽을 수 있고, 이로써 인간을 바라보는 깊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아랍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등 30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언어 천재’라 불린 학자다. 그리스 철학, 스콜라 철학, 러시아 문학, 언어학, 이슬람학, 힌두교, 불교, 도교, 노장사상, 주자학 등을 연구한 통섭의 철학자로도 잘 알려졌다.
총 1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4장에서 이민족에게 오랫동안 지배받은 러시아인의 정신사 형성의 흐름을 부감한다. 5장부터는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효시라고 평가받는 푸시킨부터 대미를 장식하는 체호프까지 총 11명의 작가론을 전개한다. 총론과 각론을 통해 ‘러시아적 인간’의 윤곽을 드러내는 짜임새 있는 구조다.
제1장 영원한 러시아
제2장 러시아의 십자가
제3장 모스크바의 밤
제4장 환영의 도시
제5장 푸시킨
제6장 레르몬토프
제7장 고골
제8장 벨린스키
제9장 튜체프
제10장 곤차로프
제11장 투르게네프
제12장 톨스토이
제13장 도스토옙스키
제14장 체호프
후기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
러시아인과 러시아의 자연, 러시아의 흑토는 피로 맺어져 있다. 이것이 없다면 러시아인은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서구적 문화에 대한 러시아인의 끈질긴 반역은 여기서 비롯된다. 문화의 필요성을 몇 배로 민감하게 느끼고 문화를 열망하는 한편 이를 증오하고 반역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태도는 러시아 특유의 것이다. 이와 같은 국가에서 사람들은 서구 문화나 휴머니즘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다._19쪽
러시아인에게 조화를 향한 동경은 일종의 병적이며 광적일 만큼 격렬한 정열이다. 하지만 러시아 정신의 부조화가 독특한 부조화의 일종이었듯이, 그것이 추구하는 조화 역시 단순한 조화가 아니다. 러시아인은 스스로 그 특수성을 의식하고 이를 ‘러시아적 해조諧調’라 이름 붙였다.
이 러시아적 해조를 의식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사람은 시인 푸시킨이었다. 그로 인해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적인 문학으로서의 러시아 문학이 시작되었다. 궁극의 해조, 마지막 조화를 탐구하는 일이 푸시킨 이후의 19세기 문학계에 있어서 가장 큰 과제였다. 러시아 문학 전체는 이 근원적인 테마를 중심에 두고 주위를 에워싸듯 전개되었다._30~31쪽
푸시킨 이전의 고문학 중에서 거의 유일한 문예작품인 『이고리 군기』가 러시아 민족의 참담한 패배 감정을 서술한 사시史詩라는 사실도 마치 민족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렇듯 러시아 문학은 패배에 대한 찬미에서 비롯되었다. 다른 민족들은 고대 문학을 장식하는 서사시에서 각자 민족적 영웅의 용맹함을 칭송하고 이민족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노래했던 반면, 러시아에서는 자신의 패배를 노래했던 것이다. 따라서 관점에 따라 19세기 문학의 주인공 대부분이 ‘패배의 인물’이었다고 봐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사실 오네긴, 페초린, 오블로모프 등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들과 체호프, 가르신의 주인공들뿐만 아니라 혁명기에 이르는 19세기 문학은 수없이 많은 패자와 실의에 빠진 사람들로 차곡차곡 채워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19세기에 갑자기 생긴 우발적 현상이 아니라 그 배후에는 수백 년에 걸친 기나긴 역사가 있었다. 바로 이 역사의 시초가 된 것이 13세기 초 타타르인의 침공이었다._48~49쪽
하지만 이 음울한 면모는 페테르부르크의 단면에 불과하다. 페테르부르크에는 이와 전혀 다른 밝은 측면이 있었으나 도스토옙스키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푸시킨은 그러한 양쪽 측면을 전부 인지했다. 오직 푸시킨만이 ‘러시아적인 존재’의 모든 것을 보편적 정신으로 관조했다._84쪽
푸시킨은 세계문학을 향한 러시아의 과감하고 화려한 도전이었다. 이제껏 세계적인 견지에서 봤을 때 4류, 5류 이상의 작가를 배출한 적이 없는 러시아 문학계에서 그의 등장 이후로 일류 작가들이 연속으로 배출되었다는 사실만 봐도 우리는 이를 단순한 우연의 일치라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러시아인은 종종 푸시킨을 불꽃이나 별똥별에 비유하곤 하는데, 사실 그가 러시아의 정신적 밤하늘을 눈부시게 비춘 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별똥별이 묘한 빛의 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지평선 너머로 사라짐과 동시에, 마치 이것이 신호탄이 되어 무언가 마법의 입김이라도 불어넣은 것처럼, 이제껏 암흑 속에 잠들어 있던 러시아 문학계가 활기를 띠며 술렁이기 시작했다._104쪽
고골에게는 구성적인 정신력이란 게 전혀 없었다. 소설이나 희극의 소재라면 남에게 받지 않고도 남아돌 정도로 지니고 있었지만, 이러한 재료의 과잉을 도대체 어찌 풀어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이는 전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 모순되고 뒤죽박죽인 소재들을 하나의 주제로 묶으면서 자연스럽게 완성된 작품으로 만들어나가려면 투철한 지성적 구상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측면에 있어서 고골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다. 그는 천재였지만 상당히 한쪽으로 치우친 천재였다. 스스로도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어딘가 엇박자가 나면서 균형이나 평형을 전혀 유지할 수 없었다._169~170쪽
‘위험인물’인 벨린스키는 1848년 37세 한창인 나이에 비참한 죽음을 맞았으나 그의 정신은 그 시대에서 압도적인 승리의 개가를 올렸다. 동시대는 물론 향후 세대에 있어서도 그의 승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벨린스키적 정신의 승리란, 요컨대 ‘산문’정신의 승리에 다름 아니었다. 순수하게 일의적으로 예술적 미를 추구하던 시가는 문학의 왕자에서 쫓겨났으며 이제 소설가나 시인 등의 문학자는 무엇보다 먼저 시민이어야 했다. 따라서 당시 작가들은 그들이 속한 사회와 시대 상황을 직시해야 했으며, 현실에 초연한 듯 ‘작은 새의 지저귐’ 운운하며 자기만족에 안주해서는 안 되었다. 그 역시 시대적 관심에 귀를 기울이며 역사적 현실에 자신의 문학을 녹여내야 했다._207쪽
푸시킨의 시와 더불어 사라진 서정적 조화의 빛은 잠시 사람들 사이에서 모습을 감췄다가 어느 날 문득 생각이라도 난 듯 투르게네프의 영혼을 통해 다시 점화되었다. 하지만 푸시킨의 보석과 같은 견고하게 결정화된 서정시의 형태가 아닌 대하 소설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푸시킨적 서정성이야말로 투르게네프 문학의 본질적 정신이자 최대 매력 포인트였으며 이는 투르게네프를 세계문학에서 부동의 위치를 보장해주었다. 투르게네프는 부조화의 나라인 러시아에서, 심지어 모든 것이 모순되고 상극인 형상으로 광분하던 19세기를 살면서도, 홀로 온화하게 서정적 망상에 취할 수 있었던 예술의 나라의 은자였다._247~248쪽
하지만 이 위대한 자연적 인간에게는 ‘사색’ 중독이라는 무섭고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그의 특기인 ‘사색’이 시작되는 순간 그는 소심하고 불쌍한 남자가 되어버린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행복해하던 남자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병적인 공포심이 그를 사로잡고 참을 수 없는 죄의식이 그를 책망한다. ‘자신의 앞에 더 이상 파멸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는 전율한다._309쪽
체호프는 다르다. 그는 위대한 19세기 문학의 정통 계승자이자 마지막 대표자였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규모는 작을지라도 그의 예술은 ‘진짜 보석’이었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보다 더 순수한 예술이었다. 모든 측면에서 월등한 19세기 문학을 편력하다가 마지막에 체호프에 다다랐을 때 우리는 무언가 ‘예술의 나라’로 돌아간 듯한 고요함과 안정감에 안도하게 된다._366쪽
전 시대를 발판 삼은 100년 문학의 정수
19세기 러시아 문학 거장들의 면모를 크로키해보자. 안으로는 세계로 통하는 섬세하고 평온한 부드러움을 띠고, 밖으로는 소용돌이치는 격정과 열정을 내뿜는 작가이자 러시아 문학의 원천인 푸시킨. 푸시킨이 결투를 벌여 죽었을 때 그 죽음을 홀로 애도했으나, 시인으로서는 격정적이면서도 냉담한 면모를 보여 미움받은 레르몬토프. 순러시아적 토착 문학을 썼고, 사람 좋다는 평을 얻은 고골.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선조 격이며 누구도 뒤따라올 수 없는 문예비평 안목으로 후세 작가들을 찾아낸 벨린스키. 시대의 주류가 산문으로 옮겨갈 때 세계 존재의 어두운 근원을 들여다보는 시를 써 도드라진 튜체프. 러시아적 잉여 인간인 오블로모프를 창조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곤차로프. 그 자신은 사회비평을 목표로 한 듯하지만 정작 미학적이고도 아름다운 서정적 문장으로 두각을 나타내며 푸시킨을 계승한 투르게네프. 걸핏하면 불끈 성을 내지만 영원한 세계를 봤고, 그 종교적 구원의 이야기를 흥분과 감격의 문장으로 담아낸 거인 도스토옙스키. 본질은 오직 자아만을 추구해나간 에고이스트이나, 작품에 자아의 모든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거장 톨스토이. 푸시킨을 닮은 명징한 예지의 문체로 도스토옙스키처럼 인간과 그 구원의 가능성을 찾은 체호프…….
더욱이 이 책은 문학적 분석에 그치지 않고 문학에서 역사와 이들 정신의 심연까지 길어올린다는 것이 특징이다. 저자는 러시아인 고유의 정신을 다음과 같이 보고 있다. 첫째, 어둡고 음울하며 광대하고 혼돈스러운 자연을 정신적 고향으로 여기며 깊은 애착을 갖고 있다. 둘째, 타타르에게 유린당하고 학대받은 300년 세월의 깊은 각인으로 여전히 자신들은 “괴롭힘당한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셋째, 따라서 학살당한 인간 예수에게 체감적 공감을 한다. 괴롭힘당한 자신들의 신앙이야말로 정통이고, 그래서 러시아인들은 세계를 구원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을 시대 축에 겹쳐놓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우선 타타르 이전의 러시아 정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타타르의 잔학한 지배 아래 처음으로 ‘러시아 정신’(학대받은 사람들의 일그러진 정신)이 형성됐다. 타타르를 무력으로 몰아낸 모스크바 공국을 바탕으로 ‘순러시아적 세계’가 성립됨으로써 피지배층에게는 잔학한 난동을 부렸으나 교회와 결탁해 “세계를 구원한다”는 기만적인 꿈을 심어줬다. 서쪽 창구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세계적 보편성에 뜻을 둔 표트르 대제도 이 ‘메시아주의적’ 세계 구원의 사명감을 계승했고, 이는 훗날 러시아 혁명 정권에까지 이어졌다.
거대한 지하실에서도 환희는 피어난다
19세기 러시아 문학에서는 “종일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의 내음이 느껴진다”는 것이 저자의 표현이다.
저자가 그리는 ‘러시아적 인간’이란 어떤 부류인가. 서유럽의 지성적인 문화인들과 비교하면 좀더 뚜렷이 부각되는데, 특히 자연과 맺는 관계가 다르다. 과거 수 세기 동안 서유럽의 문화인에게 있어 원초적인 자연으로부터의 유리는 자기 상실을 의미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를 인간의 자기 확립으로 여겼다. 비합리적인 자연의 카오스를 하나씩 정복하면서 빛과 이성의 코스모스로 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분이라 생각한 것이다. 러시아인들은 정반대다. 그들에게 원초적 자연성으로부터의 이탈은 곧 자기 상실이자 인간 실격을 뜻한다. 러시아인과 러시아의 자연 그리고 흑토는 피로 맺어져 있다. 이것이 없다면 러시아인은 아무것도 아니다. 서구 문화에 대한 러시아인의 끈질긴 반역은 여기서 비롯된다. 문화의 필요성을 몇 배로 민감하게 느끼고 문화를 열망하면서 동시에 이를 증오하고 반역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월등한 무사태평, 자유에 대한 갈망, 극심한 원한…… 물론 작가들은 작품에서 종종 조화로운 러시아를 그리려고 시도했고, 푸시킨도 그중 한 명이었다. 온화한 빛으로 가득한 평온한 실내에서 문밖의 소란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창문과 문은 전부 굳게 닫혀 있다. 이는 순수한 내면성의 적막이다. 하지만 바깥에서 무서운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밖으로는 소용돌이치는 폭풍의 포효, 안으로는 영원한 정적과 아름다운 빛. 이는 단순한 모순이 아니라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본질적 구조를 이루는 부분이다. 끓어오르는 정열로 몸도 마음도 남김없이 불태워버리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의 영혼 중심부에는 이러한 정적 지대가 존재했고, 그것이 바로 러시아적 인간의 내면이다. 그리고 이 불안하고도 불온한 조화는 늘 악령적 힘에 의해 위협받았다.
새로운 작가들의 등장으로 이러한 흐름은 바뀌어간다. 1840년대를 경계로 일반 독자의 요구는 변해 더 이상 시적인 것에 도취되지 않고 일상의 사실적인 것들을 추구해나갔다. 즉 소설의 시대가 도래한 것인데, 니콜라이 고골이 그 선두에 서 있었다. 이전의 푸시킨이 영웅적 자각을 지녔다면, 고골에게는 그런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지상의 버러지’라 여겼지만 언젠가 맑은 지하수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자신의 마음속 토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이들 일군의 러시아 작가는 신의 얼굴에 절교장을 던지며 골수까지 무신론적인 자아를 발견해나갔다. 벨린스키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고, 도스토옙스키는 소설 속 인물 이반을 창조할 때 벨린스키를 모델로 삼았다.
러시아의 무신론은 신에 대한 선천적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저자는 프랑스 실존주의의 특수한 세계 감각이나 사상적 문제가 매우 러시아적인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고 본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서유럽에서 시작된 현대의 여러 문제는 러시아에서 일찍이 19세기부터 사활을 건 문제로 제기했던 것들이다.
이 책은 체호프에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처음 마주했던 푸시킨의 모습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모든 쓸데없는 말을 배제하고 남은 단순함, 내적인 흥분이 고양될수록 외적으로 더 냉정하고 침착해지는 문체, 깊은 감동을 안에 감춘 채 눈곱만큼도 보여주지 않는 억제의 예술. 이러한 것은 푸시킨 외에 그 누구도 지니지 못한 시적 특질이었다. 게다가 체호프는 이 훌륭한 시를 산문 형식을 통해 궁극의 한계까지 끌어올렸는데, 이 역시 조용하지만 생생하게 혁명에 대한 예감을 지니고 있었다.
작가정보
井筒俊彦(1914~1993)
아랍어, 페르시아어,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러시아어, 그리스어 등 30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언어 천재’라 불린 언어학자다. 그리스 철학, 스콜라 철학, 러시아 문학, 언어학, 이슬람학, 힌두교, 불교, 도교, 노장사상, 주자학 등 여러 분야에서 강의 및 저술활동을 하며 동서양 모든 철학을 횡단 연구하는 통섭의 철학자로 잘 알려졌으며, 번역가로도 활동했다. 게이오대학, 캐나다 맥길대학, 이란 왕립철학아카데미 교수를 지냈고, 스위스 에라노스 회의에서 노장사상과 선·유교 등 동양철학을 강연했다.
1949년부터 시작한 연속 강의 ‘언어학 개론’을 바탕으로 영어권에서 1956년 『언어와 주술』을 출간했고, 이 책으로 로만 야콥슨의 추천을 받아 록펠러재단 펠로로서 중근동과 유럽, 미국에서 연구생활을 했다. 1959년 코란의 윤리적 용어 구조를 밝힌 『의미의 구조』를 영미권에서 펴냈고, 일본에서 처음으로 『코란』 원전을 완역해 출간했다. 『코란에서의 신과 인간』 『이슬람 신학에서의 믿음의 구조』 『수피즘과 노장사상』 등 대부분의 저작이 영어로 발표돼 일본뿐 아니라 영미권과 유럽에서도 세계적 석학으로 평가받았다.
귀국해 독자적인 철학을 일본어로 저술하기 시작했고, 『의식과 본질』 『의미의 깊이』 『코스모스와 안티코스모스』 『초월의 언어』 등이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다.
『신비철학』으로 후쿠자와 유키치상·게이오대 기주쿠상을, 『이슬람 문화』로 마이니치출판문화상을, 『의식과 본질』로 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상했고, 그 외에 아사히상과 팔레비 국제상을 받았다.
에라노스 회의 회원이자 일본학사원 회원을 지냈다.
게이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고려대 중일어문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 『어른의 조건』 『도쿄 최후의 날』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 『인구가 줄어들면 경제가 망할까』 『인간의 영혼은 고양이를 닮았다』 『페퍼로드』 『내 주위에는 왜 욱하는 사람들이 많은 걸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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