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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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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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현대문학』 2023년 여름 특집호(7월호, 8월호)에 게재했던 소설들을 한데 모은 이 책에는 행복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의 감정을 더욱 깊이 느끼는 현대인들의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자연 소멸에 가까울 정도로 급감하는 출산율,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 국민 소득에 반비례하는 행복 지수 등, 우리 사회의 불안 요소들을 씨앗 삼아 현시대 한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두려움과 부조리하고도 기이한 삶의 광경들을 그려내고 있다. 어떤 영화보다도 공포스러운 것은 바로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일이라는 데 공감하는 독자들이라면 깊이 반길 책이다.
김성중 도깨비불 35
김엄지 가사 53
김혜진 율곡 69
김희선 흑설탕의 마지막 용도에 관하여 87
박연준 그들은 내게 속하고 나는 그들에게 속하고 111
송 섬 남들이 못 보는 것 133
안 윤 또, 159
우다영 재미 181
위수정 멜론 199
이유리 제가 도와드릴게요 225
조진주 포클랜드의 개 243
최제훈 혈액, 순환 263
편혜영 금의 기분 291
황현진 소문이 전설이 될 때까지 309
이렇게 많은 제물을 불태웠는데 왜 집값은 그대로일까? _김동식, 「집값 하락장」
탯줄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나를 먹고 마시고 싸고 누워 있게 하는 것.
요즘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 _위수정, 「멜론」
그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내가 모자라서 당한 건가, 바보라서. _안윤, 「또,」
없는 사람인 것처럼 살다 보면,
정말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_김엄지, 「가사」
치아의 검은 구멍이 보이는 듯했다.
거기에 꿈틀거리는 벌레가 있을 것이다. _편혜영, 「금의 기분」
이곳은 소문의 땅이다.
비밀이 없다. _황현진, 「소문이 전설이 될 때까지」
포털 사이트에 자살을 검색했다.
마침 죽기 딱 좋은 출근길이었으니까. _이유리, 「제가 도와드릴게요」
“죽지 마.”
유령의 온기 없는 손이 내 등을 가만히 두드려주었다. _송섬, 「남들이 못 보는 것」
라희는 궁금했다.
대체 그 많은 재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_우다영, 「재미」
그 틈새에 대해 생각해.
너와의 사이에 있는 아주 미세한, 하지만
절대 메울 수 없는 틈새에 대해. _최제훈, 「혈액, 순환」
당신이라면 어떨 것 같아요?
제정신일 수 있겠어요? _김희선, 「흑설탕의 마지막 용도에 관하여」
나는 기다렸어.
너는 무서워하면서도 알고 싶어 하잖아. _김성중, 「도깨비불」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 닥쳐올지도 모르는 불행의 씨앗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던 거지요. _박연준, 「그들은 내게 속하고 나는 그들에게 속하고」
비로소 돌아왔다는 실감이 난다.
불안과 긴장, 적의와 몰이해가 들끓는 일상으로,
다정함과 너그러움을 매 순간 너무 쉽게 망각하게 하는 이 도시로. _김혜진, 「율곡」
세상의 모든 약한 것들이 부디 경계심을 늦추지 않기를 바랐다.
항상 송곳니를 날카롭게 갈아두기를.
절대로 제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기를. _조진주, 「포클랜드의 개」
“우리에게 가장 큰 공포란 지금 이 도시를 살아가는 일”
- 지금 당신의 마음속에 자리한 바로 그 두려움에 대하여
김동식, 박연준, 안윤 작가의 작품은 주거공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포담이다. 집값을 높이기 위해 기행을 벌이는 입주민들의 비윤리적인 모습, 전세 사기로 인한 강제 퇴거를 겪고 삶의 벼랑 끝으로 밀려난 서민의 모습, 층간 소음으로 촉발된 이웃과의 갈등을 겪으며 점차 변해가는 인물의 내면 등이 서늘하게 그려져 있다. 일상의 공간이자 재화의 가치를 지닌 재산으로 인식되는 ‘집’을 둘러싼 욕망은 이기심으로 곧잘 변질되며, 그러한 이기심은 어느덧 한국 사회에서 크나큰 공포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음을 세 작품은 보여주고 있다.
김혜진, 김엄지, 우다영, 이유리 작가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도 같은 매일매일의 일상에 주목했다.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사노동, 매 순간 타인과 부대끼며 소음을 견뎌야 하는 대도시의 풍경과 음산한 유령도시가 되어버린 시골 마을의 풍경,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텅 비어버린 마음, 열심히 살려고 부단히 애쓸수록 왜인지 모든 걸 그만두고 싶어지는 직장인의 애환 등을 다룬 네 편의 작품이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이미 현대인의 일상은 모종의 어둠에 잠식돼 있음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공허나 불안, 소외 등의 문제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현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무엇보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가 이러한 현재에 익숙해져버렸다는 사실이라고, 이 소설들은 말하는 듯하다.
위수정, 황현진 작가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생명과 그 생명을 잉태하는 도구로 타자화되는 여성의 몸에 대해 다뤘다. “탯줄로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나를 먹고 마시고 싸고 누워 있게 하는 것. 요즘의 나는 내가 아니었다.”(218쪽) 임신으로 인한 신체의 급격한 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두려움과 공포의 사건이 될 수 있다. 하물며 무조건적 모성을 강요받으며 독립적인 한 개인으로서의 주체성과 존엄성을 점차 상실해나간다면, 그보다 더 두려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소설은 반문한다.
편혜영, 김희선, 조진주 작가는 살인 행각을 통해 인간의 추악한 면모를 그렸다. 신경증이나 병적인 집착을 앓는 인물을 가감 없이 묘사하면서 악행을 저지르게 된 원인을 추적한다. 엽기적인 살인을 벌이는 인물들과 사냥을 취미로 일삼던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여성의 시선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폭력’에 대한 원초적 공포가 ‘익명성’이라는 현시대의 특성과 맞물릴 때 거대한 괴물과도 같은 두려움이 태어난다는 점이다.
김성중, 최제훈, 송섬 작가는 초현실적 존재를 접목시켜 인간 소외의 두려움을 그려냈다. 역사 속 한 줄로도 기록되지 못한 민초들의 죽음을 ‘도깨비불’과 연관시키는가 하면, 삶에 지친 나머지 소리 없이 스러져간 인물들의 목소리를 ‘유령’의 입을 통해 들려준다. 타인과 나 사이에는 영영 메울 수 없는 틈이 있으며 거기에서 비극은 시작된다는 것을 SF적 상상력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15인의 작가들이 바라본, 존재의 불안에 있어 핵심적 요소인 ‘공포’란 결코 멀리 있지도 비일상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늘 도사리고 있으며 그렇기에 반드시 직시해야 할 무엇이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든 견뎌내고 버텨내야 하는 그 무엇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약한 것들”(261쪽)이 마주한 현실은 과연 어떠한 모습인가. 그 적나라한 답들이 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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